[CHEK-IN] 편집위원 곤지
*스포주의*
이 글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거의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어느 날, 이 세계의 절멸이 당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음을 통보받게 된다면? 그 무서운 걸음을 멈출 힘이 다름 아닌 당신에게 잠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면?
1. 개소리군. 무시하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2. 내가 이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니! 온 힘을 다해 세상을 구한다.
2번이 되고 싶은 1번들은 환영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세계고, 무슨 영웅인가. 우린 무려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 일상을 건사하는 대한민국 청년이고, 비상한 초능력 따위는 부여받지 못한 일반인이다. 오전에는 수업을 가야 하고, 오후에는 알바를 가야 하고, 오늘 치 과제를 끝낸 후엔 내일 치 과제가 손을 흔들고 있는 불편한 밤을 보내야 하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서 부지런히 취직하면 또 부지런히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는 일은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니까. 동시에 우리는 그 사치스러운 일을 못내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일상의 과업들 사이로 이따금 세계의 고통을 목격할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을 구하기엔 너무 바쁘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엔 쓸데없이 정의로운, 괴로운 중간 지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만이 구할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그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자각한다면, 당신은 기꺼이 일상의 속도를 늦출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누가, 어떤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구해내는지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당신이, 세계를, 결코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구해낼 비법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당신이
오늘의 주인공 에블린*은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을 달고 산다. 게다가 지금은 수십 년간 운영해온 세탁소가 압류되기 일보 직전, 산처럼 쌓인 영수증 더미가 그의 처지를 말해준다. 이와중에 눈치 없는 남편 웨이몬드는 영수증 더미를 뚫고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오래 떨어져 지내던 아버지는 하필 지금 미국에 오셨다. 에블린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을 연출하려 하지만, 딸 조이는 오늘이야말로 할아버지께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세탁소에 오는 손님들은 끊이질 않는다. 에블린에겐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그런 에블린 앞에 남편과 똑같지만 ‘알파 버스’라는 우주에서 넘어온 ‘알파 웨이몬드’가 등장한다. 알파 웨이몬드는 에블린에게 “모든 우주를 파괴하려는 거대한 악이 다가오고 있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거대한 선은 당신”이라고 통보한다. 이어 세계를 구할 방법으로 ‘버스 점프’[1] 기술을 전수해준다. 이를 통해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에블린과 접촉하고, 그들의 삶에 접속하면서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다양한 능력들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운명처럼 투쟁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 문제를 타개해가는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의 골격을 갖췄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영웅의 면모가 없다. 영웅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과 비대한 공적 자아는커녕, 이 세계의 절멸 따위 “나 바쁘니까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라”는 식이다. 심지어 위기를 타개할 변변한 무기도 없다. 어마어마한 물리적 힘은 없더라도 부와 지능 같은 사회적 무기 하나 정도는 숨겨놓기 마련이건만, 우리는 그저 삶에 찌든 평범한 중년 여성을 마주할 뿐이다. 수많은 실패로 점철된 과거에 휩싸여 있고, 다가올 기회를 놓칠까 전전긍긍해 하는, 그래서 정작 지금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이에게는 무심한, 가여울 정도로 우리를 닮은 이 여성을 말이다.
에블린: 당신들이 찾는 에블린이 나일 리 없어.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알파 웨이몬드: 그러니까. 에블린을 수천 명 봤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없었어. 이루지 못한 목표와 버린 꿈이 너무 많아. 최악의 에블린으로 살고 있는 거야. 당신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한 거야. 다른 인생으로 가는 길은 보통 몇 개 안 돼.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그러나 알파 웨이몬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좋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서는 이 우주의 에블린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다른 우주에는 다른 선택지를 살아가는 새로운 에블린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골목에서 뛰놀던 에블린, 웨이몬드와 결혼하지 않았던 에블린 등 지금의 에블린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그가 또 다른 우주에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극 중 버스 점프 기술은 이러한 확장성과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더 많이 실패하고 포기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존재가 우주 곳곳에 뻗어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버스 점프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삶의 경험치가 높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에블린은 무수히 실패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오히려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너무 못해서, 너무 잘 할 수 있다.
그러니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자신이 너무 못나서 견딜 수 없는 누군가라면, 당신은 누구보다 뛰어난 영웅의 면모를 갖춘 사람이다. 당신은 실패와 좌절이 적은 사람보다 더 많은 우주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더 넓은 세계를 구할 수 있다. 그저 쓸모없는 시간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던 실패의 시간은 사실 나의 우주를 넓혀가는 과정이었으며, 그래서 타인의 세계를 구해내기에 더없이 완벽한 능력을 축적해가는 과정이었다. 아직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면 조금만 더 읽어보자. 당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 점차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타인이라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에블린이 버스 점프를 익히기도 전에, 악당 조부 투파키가 등장한다. 놀랍게도 조부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던 자신의 딸 조이. 알파 버스의 조이(조부 투바키)는 세계의 모든 것을 베이글 위에 올리고 절멸시키고자 한다. 조부는 어떠한 욕망도, 목적도 없이 수많은 우주를 파괴하고 마침내 에블린이 있는 우주에 당도한다.
조이: 모든 꿈과 희망, 개의 모든 품종, 참깨, 양귀비씨, 소금… 세상 모든 걸 베이글 위에 올리면 이렇게 되거든…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 기분 좋지 않아? 다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세계를 무의미의 바다로 빠뜨리려는 조이와, 세계를 구하려는 에블린의 싸움은 시작된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될수록 조이가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 타인과 외부 세계가 아닌 조이 자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에블린은 세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조이의 베이글 속에서 파괴의 공포 대신 걷잡을 수 없는 공허의 깊이를 목격하게 된다. 베이글 안으로 흡수된 모든 것들은 ‘존재’ 자체가 말소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것에 가까웠다. 여기서 의미란, 어떠한 생명체나 물질에 부여되는 감정과 기억, 이들을 매개로 이어진 모든 관계망, 그 관계망에서 창발되는 무수한 가치 모두를 포함한다.
조이: 이 베이글을 왜 만든 줄 알아? 모든 걸 파괴하려고 만든 게 아니야. 날 파괴하려고 만든 거지. 들어가면 드디어 탈출할 수 있을까 하고, 진짜로 죽을 수 있을까 하고.
조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타인과 외부에 대한 의미를 지우는 것을 넘어 점차 모든 세계에서 자신의 의미를 지우려고 발버둥 친다.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하는 우주에서 ‘돌’로 존재하며 무엇과도 관계를 맺지 않고, 무엇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자신 역시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는 진공 상태에 고립되려 한다. 세상은 ‘미립자의 무작위 재배열에 불과’하다는 조이의 자기 파괴적인 공허함에 맞서, 에블린은 조이의 세계에 의미를 만들어가는 투쟁을 벌인다.
이렇듯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에블린의 싸움은 조이 한 사람을 구하는 일로 이어진다. 결국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구하는 일과 같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한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지닌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구하는 일은 외계 생명체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고, 엄청난 신약을 발명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의미를 상실해가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미립자의 무작위한 재배열’로 구성된 그의 세계를 작은 의미의 끈들로 이어주는 일, 마침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결한 영웅의 일일지도 모른다.
다정하게 싸워줘
그러나 세계를 구하는 일은 늘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많은 경우, 세계를 지키고 구하는 일에는 충돌하는 또 다른 세계를 해치고 공격하는 과정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 세계를 구하는 이들은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에블린의 아버지. 알파버스에서 온 에블린의 아버지는 조부가 활동할 수 있는 우주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모든 우주의 조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스 점프를 통해 조이의 몸에 들어온 조부를 공격하면 손녀 조이를 공격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 딸 조이를 죽일 수는 없다는 에블린의 애원에도 아버지는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불가피한 희생이야.”라며 공격을 감행한다. 에블린의 아버지는 조이와, 조이를 지키려는 에블린을 공격함으로써 세계를 지킨다는 대의를 관철한다.
두 번째는 에블린. 그는 세계와 조이 둘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싸운다. 에블린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조이를 파괴하는 아버지의 방식 대신, 조이를 지켜냄으로써 세계도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조이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에블린의 능력을 다운받아 위기를 타파해간다. 에블린은 밀려오는 적들을 찌르고, 베고, 던지고, 박살내기를 반복한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다치지만 서로를 향한 공격은 멈출 줄 모른다. 결국 버스 점프를 과용한 에블린은 점차 정신적 한계에 다다르고, 타인에 대한 공격성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끝내는 자신이 지키고자했던 조이와 웨이몬드마저 공격해버리고 만다.
이 끝없는 싸움을 멈춘 것은 가장 약한 존재인 남편 웨이몬드. 험악한 무기가 날아다니는 싸움의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무기도, 능력도, 버스점프 같은 엄청난 기술도 갖지 않은 웨이몬드가 이렇게 외친다.
웨이몬드: 우리…그만 싸우면 안 될까요?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는 거 알아요. 나도 혼란스러워요.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우리가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그리고 같은 시간 다른 우주, 또 다른 웨이몬드가 말한다.
웨이몬드: 당신은 나를 나약하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의 아버지는 내가 순진하다고 했어. 그리고 당신은 세상은 잔인하고 우린 쳇바퀴 돌듯 살 뿐이라고 했지. 나도 알아. 나도 당신만큼 살았어. 하지만 내가 세상의 좋은 면을 바라보기로 결심한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그건 전략적이고 필요해서야.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모든 것을 통해 알게 된 살아남는 방법이야. 당신은 자신을 투사라고 여기잖아. 나도 그래. 이것이 내가 싸우는 방법이야.
에블린은 상대를 향한 살기 어린 눈빛을 거두고, 양손의 무기를 버린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적들을 폭력 대신 다정함으로 응수한다. 자신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사랑스러운 점들은 언제나 있어요.”라며 포옹을 건네고, 친구의 손길이 필요했던 이에게는 친구가 되어준다. 그 과정에서 에블린을 저격한 총알들은 귀여운 장난감 눈알로 변하고, 수류탄은 향수로 변해간다. 에블린은 상대를 때리는 대신 그의 결핍을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그의 필요에 응답한다. 적들은 어느새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고, 이웃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지막까지 에블린의 손을 뿌리치던 조이도 계속되는 에블린의 두드림에 응답하며, 지난한 싸움은 끝을 맺는다.
수많은 가능성 중 지금, 이곳에, 너와 나
조이: 근데 난 지쳤어.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데 엄마랑 있으면 자꾸 둘 다 다쳐.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살자. 그냥 보내줘.
에블린: 너 살쪘어. 가족 행사가 있어도 전화 한 통 안 해. 아쉬울 때만 찾아오고 문신도 했어. 난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왜 너랑 여기 있겠니? 그래 네 말이 맞아. 말이 안 되지. 어쩌면 네 말대로 그 무언가가 있을지 모르지. 우릴 하찮은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 새로운 무언가. 네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날 찾아다닌 이유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난 여전히 너랑 여기 있고 싶어. 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너와 여기 있고 싶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제목처럼 실로 세상의 모든 것들과, 모든 곳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자의 다양한 우주를 지닌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그 인물들이 종횡무진 오가는 드넓은 시공간이 얽히고설킨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엔 그 무수한 시간과 공간, 수많은 인물 중에 ‘지금’, 하필 ‘이곳’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만이 남는다. 마침내 에블린이 조이를 품에 안았을 때, 조이가 에블린의 품에 안겨 고개를 파묻었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하나밖에 고유한 의미가 되었다. 그 모든 소음들 사이에서, 그 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그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무언가가.
마찬가지로 그 무한한 가능성과 무작위성을 넘어 지금 이곳의 우리를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서로다. 광활한 세계 속에 우리를 유의미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타인의 존재다. 진심으로 나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타인의 존재에서, 그와의 대화 한번과 포옹 한번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피어난다. 의미가 생겨난 생명은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흩어져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이라는 세계를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고 구해내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다정하게 타인을 응시하고,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 당신이 더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을수록 좋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당신이 겪은 실패와 좌절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더 빠르게 포착하고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 씨앗이 될 테니까. 그저 다정하게 마주하면 된다. 그 다정한 대화가 타인의 세계에 유의미한 무언가로 남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싶다. 지난 15호부터 18호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 사랑, 동물권, 종말, 온실, 상실과 애도, 정치, 공간 등 그 주제도 다양하고 산발적이었다. 주제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을 써왔 다고 생각했는데, 되짚어 읽어보니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써온 것 같다. 아마 나는 늘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리가, 다정하고 끈질기게 서로의 세계를 지켜주기를. 우리가 함께 하는 지금, 이곳에서.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버스 점프: 버스 점프 기계를 착용하면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능력을 다운받아 쓸 수 있다. 혹은 다른 우주의 나의 몸으로 들어가 다른 우주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