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IN] 편집위원 퓨
장클로드 펠티에, 마누엘 에스피노사, 피에로 모리니, 리즈 노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 아르킴볼디를 연구하는 학식 있는 비평가이자 그의 열광적인 팬이다. 서로 다른 국적, 배경, 성격을 지닌 비평가들의 우정과 사랑, 관계의 역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아르킴볼디가 멕시코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네 사람은 베일에 싸인 아르킴볼디의 흔적을 좇아 산타테레사에 발을 들인다.
할 말이 없다. 공일오비에 글을 싣기 시작한 지 네 학기째, 기획안을 쓰기 위해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줄곧 했던 생각은 그뿐이었다. 내가 무언가에 관해 떳떳하게 글을 쓴다고 느끼는 순간은 전문성을 갖추었을 때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둘 중 하나인데, 그때 나는 전문성은커녕 내가 그동안 보고 듣고 읽고 공부해온 것들이 모두 교양과 취향을 욕망하는 범위에 한정되어왔던 것 같다는 회의감에 허덕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습관 때문에 ‘나의 깊은 이야기’를 갖는 데에도 정확히 실패했다고 느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떤 시기에 나를 강렬히 사로잡는 생각이나 대상 같은 것들은 늘 있기 마련이고, 친구의 제안으로 한창 독립서점 라블레에서 진행하는 볼라뇨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던 내가 그즈음 빠져 있었던 것은 『2666』이다. 그러니까 그게 정말로 나의 이야기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일차원적으로 나에게 가장 가까웠던 토픽은 칠레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미완성 유작이자 5부의 거대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 『2666』, 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번 시작해보자.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
『2666』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 문장은 소설의 제사(題詞)이자 모험을 떠난 여행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보들레르의 시 「여행」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볼라뇨는 「문학+병=병」이라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이 구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시구로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 근대인의 병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명확한 진단이 있을까요. 그 권태를 벗어나는 데, 그 죽음의 상태를 탈출하는 데 우리 손에 주어진 유일한 것, 그렇다고 그다지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그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다시 말해, 악이란 말입니다.” (145)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권태가 근대인의 병이라는 진단은 어렴풋이 이해가 갔던 것 같다. 적어도 거의 모든 일들이 뻔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린 시기의 나에게 이런 표현이 퍽 진실처럼 느껴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 오히려 북클럽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놀랐던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공포’라는 키워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닌가? 권태를 벗어나는 데 공포가 그렇게 중요한가? 어떻게 공포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어? 안 그래도 쓰는 일에 자신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제는 읽기 능력에 대한 자괴감마저 함께 느껴야 했고, 그 이후로 내게 『2666』이라는 메가소설을 읽는 경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볼라뇨가 인용했던 제사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긴 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 원고는 그 여정의 기록이다.
또 다른 아르킴볼디 연구자이자 번역자인 아말피타노는 오랜 세월 유럽에서 학술활동을 계속하다 은퇴가 가까워지자 딸 로사와 함께 멕시코 소노라 주로 이주한다. 두려움을 모르는 아내 롤라는 진작 자유를 향해 떠났고, 아말피타노는 산타테레사라는 도시와 소중한 딸 로사에 대한 영문 모를 불안감과 공포심에 휩싸여 있다.
1부의 주인공 펠티에와 에스피노사는 어느 날 독일의 호텔 방에서 함께 일본 공포영화를 관람한다. 영화 초반, 10대 여자아이 둘이 등장해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베에서 방학을 보내던 어떤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챙겨보기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녹화하려다 실수로 빈 채널에 맞추어 녹화기를 작동시켰고, 테이프를 재생했을 때 나온 것은 TV 프로그램이나 빈 화면이 아니라 얼굴이 하얀 여자가 나타나 그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의 영상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남자아이는 일주일 후 마당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아이는 죽을 정도로 겁에 질렸으며,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해주던 아이는 말하는 내내 배꼽을 잡고 웃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북클럽에서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이 내용은 영화 「링」의 한 대목으로, 실제로 얼마나 들어맞는 줄거리인지, 볼라뇨의 묘사가 얼마나 생생한 건지 궁금해 잠시간 「링」을 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인간이 원인이 아닌 공포, 말하자면 초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이거나 믿을 수 없는 요소가 요만큼이라도 포함된 공포영화는 절대 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게 공포란 그저 관심과도 삶과도 멀리 동떨어진 채 내가 보지 않는 영화를 이루는 소재에 불과했고 단 한 번도 그런 사실이 아쉽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삶과 공포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무색하게 미국과 캐나다의 동서부를 오가며 방학을 통째로 여행에 쏟은 올겨울에는 부쩍 겁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짐작컨대 그 시작은 몬트리올이다. 여행 초기 방문한 몬트리올에서의 첫 번째 밤은 내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때 느꼈던 불길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곳에 도착한 날 저녁엔 비가 조금 오고 있었고 안개도 자욱했다. 호텔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맥길 대학 캠퍼스를 구경하러 엄마와 길을 나설 때부터 어쩐지 등 뒤가 서늘하다는 느낌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캠퍼스 사진을 찍던 중 우연히 높은 빌딩들이 있는 쪽 하늘을 보았는데 11시와 1시 방향에 각각 요상스런 초록 불빛과 하얀 불빛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비 오는 도시 한복판에서 하늘에 뜬 그 하찮고 거북하고 납작한 타원 불빛들이 오로라인지 아닌지를 두고 한참 언쟁을 벌였고, 구글링까지 한 끝에 그건 그저 건물에서 뿜어낸 빛이 하늘에 반사된 것이라는 내 주장이 맞았다는 게 밝혀졌으나 원인을 알게 된 이후에도 불빛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불쾌함과 서늘함,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몬트리올에서의 이상한 경험에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게 공포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공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철저한 낯섦과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언제 도래할지 모를 무엇에 대한 선명한 불확실성, 그리고 그 불길함이 영원히 끝나지 않고 뱅뱅 맴도는 징조에 불과하리라는 허무감이 뒤섞인… 『2666』 2부의 어느 부분에서는 도시의 공포에 사로잡힌 아말피타노가 잠을 설치는 동안 산타테레사 변두리에서 발견된 10대 여자아이의 시체와 도시 전체를 휘도는 바람에 관한 짧은 묘사가 나오는데, 나는 몬트리올 공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에서야 처음엔 흐르듯 넘겼던 이 대목을, 산타테레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거센 바람의 감각과 아말피타노의 불면을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터무니없는 농담이지만 그때 내가 필요로 했어야 했던 것 혹은 여행 내내 낑낑 끌고 다니던 거대한 가방들을 샅샅이 뒤져 찾아냈어야 했던 것은 적당히 판판하고 튼튼한 기하학 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없었지만 아말피타노에겐 있었던 것.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산타테레사로 이주할 때 포장해 보낸 책 꾸러미에서 자신이 결코 챙긴 적도 없고 산 적도 본 적도 없는 라파엘 디에스테의 『기하학 유언』을 발견하고, 혼란 속에서 책의 출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급기야 그 책을 뒤뜰 빨랫줄에 걸어두는 기행을 보인다. 이 아이디어는 1919년 4월 프랑스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동생 수잔과 남편 장의 결혼 선물로 “기하학 책을 그들의 아파트 베란다 빨랫줄에 걸어 고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358)는 편지를 보낸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뒤샹이 「불행한 레디메이드」라 명명한 이 작품은 바람과 자연의 영향으로 살아남지 못했고 실제로 남은 것은 부부가 찍어둔 책의 사진 한 장과 수잔이 직접 그리고 「마르셀의 불행한 레디메이드」라는 제목을 붙인 그림뿐이다. 『기하학 유언』을 빨랫줄에 매단 이후 한결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낀 아말피타노는 그때부터 도시의 산들바람에 잘게 흔들리면서도 떨어지거나 날아가지 않고 공중에 표표히 걸려 있는 책을 수시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지나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때때로 환청까지 듣다가도 자기가 느닷없이 허공에 매단 책을 보며 안심하는 사람이라니 어느 모로 봐도 광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이는 듯하지만… 왜인지 나에겐 그가 공포를 발판 삼아 삶 쪽으로 걸어가는 용감한 겁쟁이처럼 보였다. 공포를 거부하고 회피하는 이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 일이 없는 대신 돌진하는 위기를 감지하지도, 그럴듯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한 채 가만히 주저앉아 통째로 죽음의 먹이가 된다. 반면 누구보다 기민하게 공포를 포착할 줄 아는 사람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가까워진다고, 어느 순간부터 2부와 아말피타노를 떠올릴 때면 그런 생각들을 했다. 공포의 오아시스, 공포의… 오아시스… 괜히 읊어보면서.
권투 경기 취재를 위해 멕시코에 방문한 뉴욕 할렘의 흑인 신문사 기자 오스카 페이트는 우연히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 연쇄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멕시코 현지의 여성 기자 과달루페 론칼과 함께 유력한 연쇄 살인 용의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감옥으로 향하는 페이트와, 권투 경기장에서 로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아말피타노의 도움을 받아 미국 국경을 향해 떠나는 페이트의 모습이 교차 제시된다.
공일오비 친구들과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던 날, 나는 가끔 속으로 생각하기만 했던 날씨 이야기를 꺼냈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차원의 문제를 작은 개인의 삶에서 조금이나마 실감한 경험을 나누기 위해 전보다 비가 많이 왔다느니, 확 추워졌다거나 더워졌다느니 하며 날씨와 관련한 감각을 언급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많이 봐왔다. 그런데 나에게 정말로 날씨가 변한 것 같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애매하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원체 뭐든 잘 잊어버리는 데다 매사에 둔하고 무던한 나로서는 정말로 그런 게 느껴지나 싶기 때문이다. 하물며 어제 날씨도 곰곰이 생각해야 기억이 나는데 정말로 오래전보다 추워진 걸 몸이나 머리로 알 수가 있는지… 게다가 시간이 아니라 공간 축으로 넘어왔을 때 문제를 감각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내가 궁금한 건 당장 내가 있는 지역의 날씨뿐이지 저 멀리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의 날씨가 중요할 건 뭐람. 그래서 정말로 캐나다 동부에 있는 동안 한국이 토론토보다 훨씬 춥단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공포는 낯선 것으로부터, 덜컹임으로부터, 연속성과 단절의 교묘한 교차 지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래서 세상이 무서워할 것투성이인데 왜 나는 이렇게 멀쩡하고 편하게 살아 있나 생각해보면 정말로 세상이 무서워할 것들로 빈틈없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작년에도 어제도 오늘도 추웠는데, 작년에도 어제도 오늘도 사람이 죽었는데, 실패도 슬픔도 무기도 폭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권력이나 무책임한 시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국가와 언론도 언제나 끊이지 않고 여기에 있었는데 공포가 들어설 자리가 남기나 할까. 『2666』 1부와 2부에서 곧 도래할 공포를 암시하듯 지나가며 언급되던 산타테레사의 여성 연쇄 살인을 3부에서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하는 인물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뉴욕 할렘의 흑인 신문사에서 출장을 나온 기자 오스카 페이트라는 건 그야말로 운명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전개다. 다시 말하지만 공포는 공포를 아는 이에게, 그리고 그 공포가 권태로운 일상을 찌르고 들어오는 단절의 순간을 느낄 줄 아는 이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니까.
페이트가 본격적인 취재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권투 선수 취재 현장에서 만난 산타테레사 현지 기자 추초 플로레스와의 대화였다.
“몇 명이 체포되었어요. 그리고 몇몇 사건은 해결되었지요.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살인자는 단 한 명만 있고, 그는 결코 체포되지 않을 거라고 하지요. … 여자들이 실종되지요. 공중으로 증발한 것처럼 여기에서 보였는데,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막에서 시체가 나타난답니다.” (535-536)
이 대목을 집중해 읽었을 때 눈에 보이는 조금 이상한 지점은 페이트의 반응이 아니라 추초 플로레스의 태도인데, 어째서인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누구보다 가까울 법도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마치 완전한 외부의 일처럼, 남의 문제처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이민자와 노동자, 빠르게 발전하는 멕시코 국경 지역의 산업도시, 살해된 여성은 대부분 마킬라도라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고, 죽은 사람은 아마도 이백 명 이상, 전설에 따르면… 그러고는 여자들의 시체가 발견되는 과정을 공포영화의 한 장면마냥,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의 손에 의해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정말로 전설의 일부마냥 덤덤히 묘사하는 산타테레사의 기자를 보면 묘한 불쾌감을 감추기 어렵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화를 내려고 해도 그 이상 뭔가를 보탤 수가 없었다. 왜 그 무책임한 도시인의 얼굴이 내가 짓고 있던 표정이랑 비슷할 것 같았는지.
그러니 이제는 솔직하게 권태 이야기를 할 때다. 나는 나의 무덤덤한 상태가 권태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볼라뇨가 보들레르의 시구에서 읽어낸 여행자, 권태의 사막에서 스스로의 민낯을 마주한 인물은 “불타는 이성과 쓰라림과 분노가 넘치는 심장을 지닌” 채 혐오와 절망, 멸시 속에서도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아주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여행자”(144)였지, 피곤한 얼굴을 한 현대인이 아니었다. 권태는 다른 감정이나 미묘한 단절의 역동을 아는 자의 일상에나 붙일 수 있는 표현이고, 공포를 포함해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시대인에게 그런 그럴싸한 단어는 과분한 사치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직 나의 목소리로 설명되지 않은 어떤 영역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더는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이제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없다는 생각, 굳이 정돈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경험하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감정은 게으른 허무주의를 포장하기에 꽤 좋은 핑계였고, 그건 공포의 오아시스를 채 발견하기도 전에 사막 한가운데 주저앉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징징대는 데 불과했던 것이다.
1993년에서 1997년, 멕시코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에서 최소 백 건 이상의 여성 연쇄 살인이 발생한다. 연이어 제시되는 법의학 검시관의 보고서가 개인적 불화에 의한 살해나 우발적 폭력부터 대규모 범죄 및 마약 조직의 연루가 의심되는 문제까지 수많은 사건이 뒤얽힌 모습을 반영하는 가운데, 무능한 도시 경찰들은 컴퓨터 판매업자 클라우스 하스를 유력 연쇄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시체들이 발견되는 속도는 줄지 않는다.
LA에서 보낸 나흘, 하루는 여덟 시 반이 조금 넘은 저녁시간대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엄마가 그런 얘길 했다. 이 낯선 도시의 밤이 무섭지 않냐고. 누군가 마음먹고 총이라도 들고 이 버스를 습격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코웃음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때는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와서 호텔에 무사히 도착하기 전까지 이유 모를 한기에 몸을 떨어야 했다. 다음 날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바로 그날 밤 LA 근교의 몬터레이 파크에서는 총기난사로 열한 명이 죽었다. 몬터레이 파크 인구의 대다수는 아시안계고, 총기난사범도 피해자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몬터레이 파크 총기난사 사건은 2월 말 현재 벌써 팔십여 건을 넘어선 올해의 미국 내 총기난사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이런 사실은 위키피디아에 깔끔하게 표로 정리된 사건 리스트만 찾아도 금세 알 수 있다.
깔끔한 표. 반복되고 연속되는 무언갈 마주하면 그런 덤덤하고 무서운 걸 만들고 싶어지는가 보다. 1993년 1월 처음으로 발견된 소녀의 시체 이야기로 시작하는 『2666』 4부를 펼쳤을 때 나는 엑셀을 켜야 하나 한동안 고민했다. 괜히 싫은 기분에 그러진 않았지만. 아니나다를까 북클럽에서 4부 절반을 다룬 날 진행자 선생님은 진작에 꼼꼼히 표로 정리되어 학술지에 실린 작품 내 사망자 리스트 자료를 보여주셨고, 이런 당연하고 끔찍한 생각을 나만 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조금은 안도했던 것 같다. 그날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볼라뇨가 어디서 이 수많은 시체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정보였는데, 그는 자료 조사 과정에서 친분을 쌓게 된 멕시코 저널리스트 세르히오 곤살레스 로드리게스의 책 『사막의 뼈Huesos en el desierto』에서 사건 내용의 대부분을 가져왔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은 논픽션이다. 『2666』의 큰 축을 담당하는 산타테레사 여성 연쇄 살인사건의 실제 배경이 된 지명은 멕시코 북부의 국경도시 시우다드후아레스로, 1993년부터 2005년에 걸쳐 발견된 400여 명의 시신은 사람들, 특히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이들의 가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정부와 경찰의 지지부진한 대응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명확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개인적 공포는 무궁무진하고 언제든 자극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시적이다. 조금만 익숙해져도 빠르게 희미해지는 공포를 작은 개인이 무언갈 변화시킬 행동의 동력으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하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 우리가 공포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다루는 일에 번번이 실패해왔다는 것이다. 제도가 보호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고,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는 듯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문제들은 발전이나 진보 같이 숭상되는 가치의 찌꺼기로 주변화된다. 나와 나의 이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슬픔과 공포를 구체적인 언어로 의미화하지도 못한 사람들의 여론을 재빨리 가라앉히고 아무에게나 책임을 따져 묻기에 매번 급급했던 어떤 자들의 얼굴을 모두가 제각각의 방법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나. 『2666』 속 경찰들이 연쇄 살인범으로 지목한 클라우스 하스가 실제로 얼마나 개별 범죄들이나 전체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작 사람 한 명 감옥에 가둔다고 도시의 악이 한순간에 소거될 수는 없다는 사실과 이 수사가 공권력의 무능함과 도시 전반의 불안정한 인프라 상태를 숨기는 도구이며 사람들의 공포를 맥락 없이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공포는 불확실성을 맴돌기만 하는 징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구체적인 형상을 갖고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내가 느끼기에 공포의 핵심은 앞으로 무언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그 불안 자체의 현재성, 그것이 바로 이 순간 느끼는 지금의 감각이라는 데 있다. 그렇기에 공포는 쉽게 전염되고 금세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나란히 모여앉은 사람들에게 공포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런 게 아닌가. 그러니 좋은 삶, 현재로서는 그다지 보편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안정적이고 안전한 삶을 일상으로 끌어오려면 공포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똑바로 목격하고 대면하고 입으로 자꾸 말해야 한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바깥의 소리들을 공통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충분히 두려워할 시간과 무서움을 나누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황급히 빼앗는 자들을 노려볼 줄 알아야 한다. 권태 혹은 그 언저리로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사막에서는 물을 찾아야 살아남는다. 오아시스를 잊지 말 것.
잠수를 좋아하는 독일 소년 한스 라이터는 제2차 세계되전이 시작된 후 징집되어 전투에 참여하고, 패전 후 방황하다 글쓰기를 시작한다. 그는 한스 라이터라는 이름 대신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베노 폰 아르킴볼디라는 이름으로 출판업자 부비스의 도움을 받아 연이어 소설을 출간한다. 아르킴볼디는 은둔 작가 생활을 이어가던 중 소설을 읽고 찾아온 여동생 로테 하스와 오랜 세월 만에 재회하게 되며, 몇 년 후 로테의 아들 클라우스 하스가 멕시코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의 땅 산타테레사로 떠난다.
물론 볼라뇨는 그다음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문학+병=병」에서 그는 제사에 활용한 구절을 언급하고 해석한 직후 오직 공포의 오아시스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여행자가 빠져들 무력감을 언급한다. “오아시스에서는 마시고 먹고 상처를 치유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만약 그 오아시스가 공포의 오아시스라면, 오직 공포의 오아시스만 존재한다면”(146)…… 돌고 돌아 반복되는 악을, 사막 한가운데 구원처럼 자리했지만 결코 구원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을 공포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미 「링」에서 두 가지는 나왔다. 첫째, 신나게 공포스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이처럼 깔깔 웃기. 산타테레사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공포라곤 털끝만큼도 몰랐던 유럽의 태평한 비평가들이나 이 도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고도 게으르고 무책임했던 경찰들이, 우연찮게 악의 한가운데 내몰려 스스로 악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미소 짓던 하스가 그랬다. 둘째, 이야기를 들으며 죽을 정도로 겁에 질린 아이처럼 벌벌 떨기. 『기하학 유언』을 빨랫줄에 걸기 전까지의 아말피타노가, 산타테레사의 불길함을 감지하고 후다닥 유럽으로 돌아가버린 비평가 리즈 노턴이 그랬다.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을 오가던 도시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 하나가 남았다. 펠티에는 에스피노사와 「링」을 보았던 어느 오후를 떠올리며 에스피노사가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무서운 이야기를 듣던 여자아이가 놀라서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던 친구에게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입 다물라고 말했다면 아마도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셋째, 주먹으로 때리기, …혹은 계속 쓰기. 볼라뇨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의 저자 세르히오 곤살레스 로드리게스는 실제로 『2666』 4부에서 산타테레사의 문제를 파헤치는 기자로 등장하는데, 4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를 찾아온 한 여성 정치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이것에 관해 쓰고, 계속해서 기사를 쓰기를 바라요. 당신이 쓴 기사를 읽었어요. 아주 훌륭하더군요. 하지만 종종 허공으로 펀치를 날리더군요. 당신이 확실한 대상에게, 그러니까 그림자가 아니라 인간의 살, 난공불락의 살을 강하게 가격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산타테레사로 가서 그곳의 냄새를 제대로 맡길 원해요. 당신이 산타테레사에 달려들어 그곳의 문제에 전념하기를 원해요.” (1191)
마지막으로, 아르킴볼디. 독일군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해 인간의 악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그럼에도 무언갈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다시 공포 한가운데로 길을 떠난 사람. 그의 얼굴은 볼라뇨가 여행과 여행자의 운명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자 했다던 말라르메나 무엇을 찾을지 모르는 길에 들어서고 기꺼이 길을 잃고자 했다던 카프카 같은 작가들의 모습과 닮아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볼라뇨의 얼굴도. 『2666』은 볼라뇨의 미완성 유작이며, 아르킴볼디가 멕시코로 떠나는 장면에서 소설은 돌연 끝나고 작품의 시간선은 다시 아르킴볼디를 따라 산타테레사로 향한 비평가들이 나오는 1부로 돌아간다. 영원히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이야기. 바로 여기서 확실한 믿음 같은 게 따라나오는 기분이다. 1997년의 마지막 날 이후에도 사건들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무딘 일상도 반복될 것이지만… 우리가 믿는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그만큼의 힘을 지니고 끝까지 그것들을 추적하다 마침내는 앞지를 것이다.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참고자료
로베르토 볼라뇨. 『2666』
로베르토 볼라뇨. 『참을 수 없는 가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