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CALL] 편집위원 영원
서울로 대학에 가게 되면서 본가는 명절이나 가족 행사가 있어야 때때로 가곤 하는 곳이 되었다. 서울에서 지내는 게 버겁다고 느껴질 때쯤 말없이 내려가 서너 일을 지내다가 온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평생을 살았던 집을 잠시 머물렀다 곧 떠날 사람으로 방문하는 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생경하게만 느껴진다. 그건 아마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자 역으로 향하기 전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전할 때마다 마치 처음 헤어지는 것처럼 동생들이,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속으로 울음과 걱정과 염려 그리고 대견함을 삼킨 채 내게 인사를 고하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특히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의 넘치는 사랑은, 그 마음의 크기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내가 받기에는 과분하다고 늘 생각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를 구체(具體)로 기억하고자 각고의 애정을 쏟으셨던 것에 반해, 나는 그들을 그저 납작하게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제 할머니는 내가 저 먼 타국에서 태어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던 그날의 비행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고, 엘지 할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정년퇴임과 겹친다며 그의 교직 생활의 끝을 이야기하다가 이내 그 해에 있었던 박진감 넘치던 월드컵 이야기로 새시곤 했다.
나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며 나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봤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어린 시절 전쟁을 피해 북에서 남쪽으로 피난 오셨다는 것, 교사가 되면 일단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으니 사범대로 진학하기를 결정했다는 것 – 같은 조각들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편린들 사이에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건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적대, 궁극적으로는 적대를 넘어선 공포였다. 처음 서울로 가기 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붙들고 잘 해낼 것이라는 염려 섞인 응원을 반복해서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응원에는 늘 (“공부 많이 한 대학생들이 하는 좌파 사상에 물들지 말고”) 라는 말이 괄호 속에 생략되어 있었다. 때로는 입 밖으로 발음하시기도 하셨지만, 많은 경우 직접 발화하지 않으셨을 때도 나는 쉬이 그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근데 왜지, 왜일까. 한 번도 제대로 그 이유를 되묻지 못했다.
조금 욕심을 부려서 구불구불하고 기나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고 싶었다. 그들이 지나온 삶의 편린들을 어깨너머로 들었을 뿐이지만, 광복 후 전쟁을 피해 거주지를 계속해서 옮기고, 그 와중에 가족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기에 유년을 보낸 이들이 분단과 독재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이제는 노인이 된 나의 조부모가 살아낸 시간은 너무나도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이 시기를 살아낸 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의 고민과, 보다 개인적으로는 구체로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1943년 음력 3월 24일 이북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셨다. 4살이 되던 해인 1946년, 이북에서 이남으로 넘어오셨다. 어릴 때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북에서 돈을 많이 벌었던 할머니의 가족은 “부자인 사람을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피해 북한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배인 엘레스틱을 타고 어머니의 고향인 영덕 축산으로 왔다. 등에 업힌 채 기억하는 것은, 그저 느낌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나, 함흥의 흥남 부두가 굉장히 “너르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어머니가 할머니를 복대로 감싸 둘러멘 채 3.8 선을 넘었는데 복대 사이사이 끼워진 돈이 갑갑해서 업힌 할머니가 하나씩 빼서 길에다 버렸다는 것.
그렇게 축산에서 2년을 보내고, 이북에서 비단을 팔아 돈을 벌었던 할머니네 가족은 이곳 축산에서도 중국 비단 따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서울에 집을 한 채 샀다. 남산 옆 기라정이라는 곳에.
그렇게 이듬해인 1950년, 7살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오고, 생년이 빨라 7살의 나이로 1950년 3월, 남대문 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6월에 전쟁이 일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는 못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평택으로 피난을 갔고, 전쟁 중에도 자주 서울을 다녀가며 지냈다. 언젠가 서울집에 다시 들렀을 때, 집이 새까맣게 불타있었다. 말 그대로 터만 남기고 모든 게 다.
불에 타지 않는 궤짝에 돈을 넣어다 다시 평택으로 갔다. 길에는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길거리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도대체가 어떻게?) 궤짝 안에 있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돈은 아니고 교환증이었는데, 미군 부대에 저 교환증을 주면 달러화로 바꿔주었다. 그 궤짝은 지금도 거제 할머니 댁 2층 계단 한편에 놓여있다.
9살이 되던 해에야 전쟁이 끝났고 교환증은 모두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커다란 궤짝은 잔뜩 채울 정도로 많았던 교환증이 그저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의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여 그 길로 앓아누우셨고, 끝내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혼자서 딸을 키웠다. 그 시대에 굉장히 독특하고도 특이한 사람. 장사 수완이 좋았고 전라도에서 나는 곡식을 받아다가 남대문 시장에 가서 팔아 돈을 벌었다. 번 돈으로는 어떻게든 딸을 학교에 보냈다. 국민학교만 졸업해도 여자는 공부할 만큼 했다는 이야기를 듣던 시대에 중학교,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갔다. 어머니를 떠나 대구에서 하숙하며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1939년 11월 15일, 영남 합천군 합천읍에서 태어났다. 합천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1학년 중에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5학년 1학기 체육 시간에 장갑차가 학교에 들어오더니 군인들의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말로 전쟁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되었다.
집은 대전 중앙통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짐 보따리를 싸고 어지러이 피난 가는 모습이 머리에 생생하다. 철도청에 다니는 아저씨가 할아버지 집에서 하숙을 했기에,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화물열차를 타고 대구로 피난을 갔다. 승객열차가 아니라 화물열차기 때문에 얼굴이 석탄으로 새카맣게 된 채 대구역에 내렸다.
해인사에 피난 가기 전 숙티 마을에서 지냈는데, 인민군들이 합천을 점령했다고 한다. 농촌의 머슴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증조할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 아버지의 손을 살폈는데 손이 상처 없이 깨끗해서 “공무원 했지?”라고 물었다.
이때의 공무원이란 곧 남측의 사상에 동조한 자를 가리키는 직군으로, 전쟁 과정 중에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죽었다. 다행히 ‘좌향 적인 사고’를 가진 치과 의사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잘 알아서 인민군과 소통이 좀 되었고, 치과의사는 아버지가 포목 장사를 했기 때문에 손이 깨끗한 것이라 둘러대었다.
인민군들이 가지고 있는 장총이 발사되면 흔히 생각하는 “팡”하는 큰 소리가 아니라 “따쿵”하는 작은 소리가 나고, 총을 맞은 사람의 피가 바닥에 흥건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13살에 그런 것들을 듣고 또 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북한이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을 넘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의 기운은 한반도에 이미 상존해 있었다. 꼬박 2년 전인 1948년 5월, 소련의 거부로 남한 단독 선거를 진행한 후 남한에는 유엔으로부터 승인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에는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3.8 선을 경계로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분단이 공식화된 것이다. 이후 북한은 군사력을 증강하며 무력 통일에 대한 욕망을 암암리에 내비쳤고, 그 결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류학자 권헌익은 1950~53년 동안 일어난 한국전쟁에는 “특별한 유형의 사상자”가 있다고 말한다. 적이 행한 것이 아니라, 희생자 자신이 그 국민이었던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정치폭력의 희생자들.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 국가의 안보와 전쟁 노력을 위협한다고 간주된” 자들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전선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2달 뒤 8월에는 전선이 부산의 낙동강까지 밀렸다. 이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9월 29일에는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고, 이 기세를 몰아 10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유엔군의 북진 작전으로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한다. 그러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중공군이 개입해 퇴로가 차단되자, 피난민을 태워 작전상 요충지였던 흥남으로부터 12월 24일 철수한다.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1951년 1월 4일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쪽 피난길에 올랐다.
박완서의 말마따나 “몇 달을 두고 전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대로 세상도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었으니 그때마다 부역했다 고발하고 반동했다 고발해서 생사람 목숨을 빼앗는 일을 미친 듯이 되풀이”했던 시절이었다.[2] 1950년 7월 8일, 남한 전역에 계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계엄이 선포되기 전에도 이미 경찰과 군에서는 잠재적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공정한 재판절차는 고사하고 명목상의 재판이라는 형식도 거치지 않고 즉결 처형을 진행했다.[3]
국민보도연맹사건이 그 대표적 예이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해 1949년 4월 조직된 단체이다. 국가 차원에서 좌익전향자를 가입시킨 후 이들을 “교육”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금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만 좌익 전향자를 규정하는 기준이 자의적이어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강제로 가입된 자들도 있었고, 좌익에게 물자를 제공했거나 주민 간의 사적 원한으로 인한 보복으로 가입된 사람도 있었다. 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단속 및 구금은 전쟁 발발 직후 시작되었고, 전선이 계속 밀리는 등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을 살해했다. 이는 분명한 정치적 집단학살이다.[4]
1950년 9월, 유엔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수복했다. 북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북한군은 점령지에서 민간인의 즉결처분을 비롯하여 수많은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이들의 폭력은 미국, 혹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 부역했다고 여겨지는 “남한 공무원, 우익단체원, 혹은 부농”을 향했고, 이는 곧 잠재적인 위험 세력을 제거하라는 북한 당국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5]
전선이 이동하면서 마을은 때로는 남한 세력과 공모할 수 있다는 의심만으로 북한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공산주의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개인의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나아가 개인이 보복을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마을 내에는 내 가족을 일본에 부역했다고 고발한 옆집 김 씨와 그 옆집 김 씨네 가족이 “빨갱이”라며 경찰에 알린 그 옆집의 이 씨가 같이 살게 되었다.
제주 4.3사건은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한국전쟁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것과 달리 제주 4.3은 제주도에 국한되어 일어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사건의 참담함의 규모를 다시금 인식할 수 있다.
1947년 3월 1일, 3.1 절을 기념하고자 열린 제주도대회에서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였고, 결국 죽었다. 이에 항의하고자 들고 일어선 민중을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은 총을 쐈고,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분노로 들끓기 시작한 제주도민의 마음은 민관 합동 집단 총파업으로 이어졌고, 제주도는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분노는 이듬해 4월 3일, 남로동 제주도당을 위시한 무장봉기에서 극에 달하게 되는데, 이 봉기는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진행되는 5.10 총선거에 반대하기 위함,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군정이 일제강점기의 관료조직을 청산하지 않고 그대로 복귀시킨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6]
5.10 총선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이를 “불온하다”고 여긴 미군정과 남한 정부는 강경 토벌을 명했고, 10월에는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총살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중산간 지대의 주민뿐만 아니라 토벌을 피해 해안까지 내려간 주민들도 폭도라 의심받으면 무조건 죽었다.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남로동 무장대 또한 우익인사와 경찰의 가족을 살해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설령 운이 좋게 목숨을 부지했다 하더라도 가족, 친우, 정인(情人)을 잃은 이들은 평생 메워질 수 없는 빈칸을 짊어진 채 살아갔다.[7]
그런데 나는 요즘 나의 소설 작업 중에도 가끔 그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내 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마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문학행위란 어떻게 보면 한 작가의 가장 성실한 자기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전짓불 아래서 나의 진술을 행하고 있는지 때때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때가 많다. 지금 당신 같은 질문을 받게 될 때가 바로 그렇다……[8]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는 의사 김 박사 왈 진술 공포증에 걸린 박준이라는 사내가 등장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해, 박준의 고향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에는 경찰과 공비가 들이닥쳤고, 마을의 주민들에게 환한 전짓불을 비추며 어느 편이냐고 물었다. 어린 박준의 가족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고, 박준의 어머니는 들이밀어진 전짓불 뒤 존재의 정체를 절박하게 점쳤다. 운이 좋게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지만, 점치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살당했다.
한반도의 두 국가는 전후에도 서로를 주적이라 간주하며 준전시 상태를 유지했기에 예외 상태가 지속되었다.[9] 따라서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세대를 살아낸 이들은 자연스레 “우리 편 혹은 저쪽 편”이라는 식의 사고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요구를 전달받는다.
예컨대 LG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본인의 결백을, 그러니까 친일하지도 않았고 미군정에 부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신 친우의 증언으로 가까스로 증명해 인민군이 들이민 총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거제 할머니가 본인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남쪽으로 내려왔고, 내려온 이유도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돈 있는 놈들”은 살기 어려워서라는 점을 강조하며 당신의 출신이 이념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 했던 것처럼, 어떤 의미에선 이들의 삶에서 어느 편에 속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이 나의 손을 꼭 쥐고 속으로 삼켰던 괄호 안의 말들은 내가 불온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내는 일이 곧 생사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본 자들이 온 맘 다해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이해는 했으나,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불온한 존재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국가가 나서서 마련한 “국가의 안보에 지대한 위협을 끼칠 것”으로 간주하는 인물은 어떻게 이름 붙여지는가. 더군다나 불온한 신체가 되었다는 것이 잠정적 죽음을 의미했던 시절에, 개인의 삶을 담보로 지켜지는 국가 안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채만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언어들은 “사어(死語)”가 되기는커녕 끈질기게 살아남아 특유의 언어적, 정치적 기능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예 중 하나가 불온이다.[10]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처럼, “불온”이라는 단어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준을 근거로 민중을 통치하는 “공포의 언어”로 기능했다. 3.8 선을 경계로 영토가 둘로 나누어진 한반도에서 각 영토 내의 불온한 자를 색출하는 일은 서로 상대를 ‘외부의 적’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내부의 적에 주목하는 일이기도 했다. “현실과 개념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한에서” 스스로 존속을 꾀할 수 있었기에, 국가는 더욱이 불온이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11]
“느그는 80년을 살아야 한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대학을 나 온 다음에 니가 다른 무슨 직장 생활을 하든지, 사회생활을 하든지. 할머니가 살아온 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애. 그건 니가 원하면 할머니가 말해줄 수 있지. 지금까지 말한 게 그런 거니까.”[12]
이 글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더 이상 나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을 때,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글이다. 더 크게는 드리워진 전짓불 앞에서 온전한 가치 판단이 불가했던 시기를 직접 살아내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런데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 사회의 “불온한” 문제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쉬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들의 유년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발화하는 이를 자주 상념에 빠지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또한 긴 세월 살아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이 겪은 일을 각자의 언어로 언어화해 낸 나의 조부는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주기보다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내듯 쉼 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토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을 던지기보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얘기를 가만 듣고,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나열해보고, 비어있는 곳을 다시 묻는 일이었다.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난데없이 이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니라 고유의 맥락을 가진 가계의 일원이니까. 그리고 그 가계의 어느 세대는 분명 이 예외상태를 경험했다. 그러니 알지 못해도, 모른 척하려고 해도 계속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젠가 이 이야기를 들춰봐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를 마주하고, 공적 영역에서 지워진 친족을 다시 불러내어 애도할 수 있음을 알고, 또 세세히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편집위원 영원 (eternalwavve@gmail.com)
[1] 나는 이 글에서 ‘친하다’는 의미의 친(親)할머니와, ‘바깥/타인’이라는 의미의 외(外)할아버지라는 호칭을 피하고자 내가 이들을 실제로 부르는 방식, 각자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칭하고자 한다.
[2] 정소영 역, 권헌익 저, 『전쟁과 가족』, 창비, 2020, 47쪽
[3] 오동석, 「한국전쟁과 계엄법제」 『민주법학』, 제 43호,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10, 52쪽
[4]「국민보도연맹(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301, 2023.2.20.)
[5] 권헌익, 앞의 책, 53쪽
[6]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2003, 174-178쪽
[7] 위의 보고서, 210-215쪽
[8] 이청준, 『소문의 벽』, 열림원, 1998, 116-117쪽
[9] 권헌익 저, 앞의 책, 117쪽
[10] 임유경, 「개념으로서의 ‘불온’」 『개념과 소통』, 제 15호,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2015, 191쪽
[11] 김항, 「분단의 기억, 기억의 정치」 『인문논총』, 제 73권 제 2호,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 364쪽
[12] 거제할머니 발화 중 일부를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