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IME] 편집위원 느루
열며
의식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일까, 언어가 의식을 지배하는 것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나는 지금 말을 하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어는 우리가 숨 쉬듯 자연스레, 의식적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통해 드나든다. 우리의 무의식을 잠식하는 언어는 이제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언어는 권력의 상징이며, 누군가에게 언어는 생존의 도구다. 언어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언어는 문자 수수께끼처럼 기호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각각 분리된 기호는 모호하거나 진부할 뿐이며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나 말하는 사람에게나, 언어는 이미 형성된 의미들을 암호화하거나 해독하는 기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이미 형성된 의미들을 언어적인 제스처의 교차점 - 언어적인 제스처가 하나의 공통된 합의점으로 보여주는 교차점에 배치함으로써 그것들을 지표로서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 모리스 메를로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중
이 글에서는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표현들이 그려내고 있는 사회적 함의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수많은 공론장에서 발화되는 언어 표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것이 어떤 점에서 우리의 의식을 잠식해 나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은유
단순하고 직관적인 어휘와 글들로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쉽다. 여러 사실관계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축을 찾아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시(라고 쓰고 투척이라고 읽고 싶다만)하는 것 또한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인과관계를 포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표적인 예시가 은유다. 은유를 통해 무언가를 설명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진리를 은폐할 가능성을 수반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은유에 중독된다. ‘A는 B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말 우리 뇌를 편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뇌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 은유밖에 없을까? 정말?
사이다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 혹은 연예인 중에서 남들이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하는 통쾌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내는 사람들에게 이 수식어가 자주 붙는 것 같다. 왜 우리의 부모님들은 사이다 먹지 말라고 했을까. 몸에 나쁘기 때문에, 계속 마시면 충치가 생기니까. 이런 면에서 사이다는 분명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사이다를 찾는 이유는, 그 특유의 청량감과 단맛이 주는 짜릿함 때문일 것이다. 사이다의 이런 측면은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사이다’라는 언어는 대체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탄산음료 ‘사이다’의 긍정적인 면모를 닮았다. ‘사이다’는 또한 사회적인 맥락에서 냉소주의라는 어감을 담고 있다. 악한 행위를 벌인 어떤 사람 혹은 집단에 ‘필터링 없이’ 반박 혹은 보복성 행위를 벌인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사이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어휘의 원관념으로부터 기인한 은유는 어떤 하나의 특징만을 지닌 채로 새로운 의미로 파생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사이다’가 그 단적인 예시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발화되는 ‘사이다’는 원관념인 탄산음료 ‘사이다’의 긍정적인 속성을 그대로 사회적 맥락으로 옮긴 어휘에 가깝다. 즉, 사회적 맥락에서의 ‘사이다’는 원관념인 탄산음료 ‘사이다’의 부정적인 속성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고구마’라는 어휘도 사이다의 반대말 격으로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이다는 원관념의 긍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왔듯이, ‘고구마’는 원관념의 부정적인 면만을 일컫는다는 사실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은유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은유하고자 하는 대상의 수많은 특징이 은폐되며, 따라서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지점만 남는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에서 또한 앞서 이야기한 은유가 가질 수 있는 ‘은폐와 강조’의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First, the metaphor highlights certain features while suppressing others. Second, the metaphor does not merely entail other concepts, … but it entails very specific aspects of these concepts.”
- George Lakoff, Mark Johnson. ‘Metaphors We Live By’
분명 은유는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은유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는 감히 저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이해력을 더 게으르게, 더 편협하게 만들 수 있는 은유의 남발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사회학자 스티브 브루스는 이러한 은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재 유행하는 수많은 시대정신 은유는 너무 포괄적이고 근거를 찾기에는 뿌리가 너무 얕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런 이론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한데, 그 넓은 적용 범위는 피상적이며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은폐한다. 약간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거의 모든 것을 유동하는 현대로 설명할 수 있다.”
- 스티브 브루스, ‘사회학’ 중
나 또한 한때는 은유를 통해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정말 직관적이고 인상적인 묘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유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리를 은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은유는 ‘중독성’과 ‘편리성’이라는 특성을 모두 가진 강력한 양날의 검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은유로 그려낼 수 있다는 명제는 단언컨대 거짓이다. 은유가 ‘어려운 사실관계’를 직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은유는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많은 사실관계를 은폐한다. 감각의 한 측면을 왜곡시킴과 동시에 다른 한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특정 견해에 치우친 시각을 가지기 쉽게 만든다. 이런 은유의 특징이 가장 극적으로 작동하는 곳이 바로 정치인의 언어다. 정치인의 언어에서 은유는 사라져야 한다. 정치인이 은유를 통해 시민들에게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안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맥락을 설명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상황을 끌고 갈 목적으로 정치인에 의해 동원되는 은유를 배격해야 한다. 특히 정치인의 발화가 지칭하는 객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은유를 동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정치인들의 언어는 그 자체로 어떤 한 면을 부각함과 동시에 다른 한 면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은유의 객체가 실존하는 집단 혹은 사람이라면, 정치인의 언어에서 등장하는 은유는 그들의 목소리를 토막 내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비판적이지 않은 언론은 앵무새처럼 정치인의 언어를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 그렇게 은유는 시민의 사고회로를 잠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른바 제도권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은유 또한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들은 아무 때나 은유를 동원해가면서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외치지만 표현의 자유가 가질 수 있는 부작용은 애써 모른 체하는 것 같다. 모든 정치인이 ‘화합’을 외치지만 그들의 언어에서 화합의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은유로 토막 낸 맥락과 이해관계를 ‘유권자 결집’에 사용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정치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표를 노리고 은유를 동원하는 그들의 행태를 더 이상 옹호해서는 안 된다.
공정, 형해화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저서 ‘덕의 상실’에서 사회과학에서 일반화가 가지는 체계적 예측 불가능성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중 몇 가지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반화의 위험성과 맞닿아 있다. 첫째는 사회과학에서의 일반화에 “보편적 수량화의 가능성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당성 영역의 변형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개별 행위자의 특정한 미래 행위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이 사회세계 내에서의 예측 불가능성의 다른 요소를 개인적으로 산출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사회적 삶의 게임이론적 성격”이다. 그는 예측 가능한 사회과학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n명의 사람이 행하는 어떤 놀이의 형식적 구조를 택해 몇몇 경험적 상황에서의 이 참여자들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전적으로 합리적인 참여자가 어떤 제휴 관계와 협동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그리고 아마 유토피아적인 목표로서,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은 참여자들에 대한 압력과 이에 따른 그들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다.”
–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중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사회에서는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몇 가지 게임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실제 삶의 상황에서 우리는 게임이론에 대해 다루고 있는 교과서의 사례와는 다르게 “정해진 숫자의 참여자를 부여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실제 사회에서는 “확정되고 헤아릴 수 있는 수의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매킨타이어는 “복합적인 모든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방적이고 미규정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풀어 쓰자면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적 삶 속에서의 여러 상황에서 변수들을 일일이 통제하고 계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한 ‘포르투나’라는 관념으로 대표되는 인간 삶에서의 ‘행운’의 요소를 제거하고 계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사회과학에서 일반화는 한계를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주관성의 계량화는 일반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정치권력의 등장 혹은 재생산을 위해서는 그 세력만의 ‘캐치프레이즈’가 필요하다. 대체로 그 캐치프레이즈는 시대의 열망을 담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열망은 공정과 상식인 듯하다. 시대의 열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사건을 둘러싼 뒷말이 이러쿵저러쿵 나올 것이다. 그런 뒷말들이 모여서 하나의 여론이 된다. 여론은 ‘여론조사’ 혹은 ‘사회조사’의 형태로 명문화되어 비로소 그 형체를 갖는다. 형체를 가진 여론은 꽤 강력하다. 정치인들이 여론을 읽고 그에 부합하는 입법과 발언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어떤 여론조사를 읽고 어떤 보고를 받아 입법하는지, 일련의 메커니즘을 소시민인 내가 일일이 파악하고 넘겨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있다. 정치인들은 여론조사를 통해 계량된 여론을 바탕으로 ‘아하! 이게 위대하신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구나’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일반화라는 접근법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는 일반화라는 마약을 끊기 어렵다. 일반화가 우리 뇌를 잠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뇌가 ‘일반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일반화하기 이전에 수많은 사실관계를 꿰뚫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개성을 고려하면서 변수가 많은 방정식을 풀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일반화가 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화는 양날의 검이다. 특히 일반화의 대상 혹은 집단이 ‘내가 겪거나 속해보지 못한 곳’일수록 더욱 위험하다. 일반화를 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좁은 우물에 가둠으로써 복잡한 사실관계를 이해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화가 드리운 공정의 그림자
매킨타이어의 이론은 공정에 관한 담론을 정치권이 수용하고 일반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하는 데에 유용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은 ‘요즘 MZ세대들은…’ ‘요즘 이대남(20대 남성)들은…’ 어쩌고 하면서 ‘공정과 상식’이 마치 젊은 층의 시대정신인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사실 공정과 상식은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다. 딱히 ‘지금 이 시대’라고 강조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전 정부가 무너뜨린 ‘공정과 상식’을 되찾는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든 이유는 그저 온라인을 주름잡는 20대들의 목소리를 투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쩌다가 20대의 시대정신이 ‘공정’이 되었을까? 트리거는 ‘인국공’이었다. 네이버 트렌드에서 ‘공정’을 검색해보면 2016년 1월부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023년 1월까지, 공정이라는 단어가 검색된 빈도 데이터를 분석해준다. 그 결과 2020년 9월경에 ‘공정’이라는 키워드가 해당 기간 중 가장 많이 검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20년 9월을 휩쓸었던 이슈는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이었다. 정규직 직원들은 힘들게 시험을 통과해서 정직원이 되었는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이들을 ‘정규직’으로 만드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공론화가 될 수 있었다.
과연 인국공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는 ‘공정’이라는 담론을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시킬 수 있었는가. 인국공 사태로 촉발된 ‘공정 담론’의 주안점은 ‘절차적 공정’에 있다. 돈과 명예 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공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절차적 공정’은 ‘공정’이라는 가치가 가지는 여러 핵심적 의미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문을 남긴다. 과연 그저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만 제공한다고 ‘절차적 공정’을 달성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된다고 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많은 쟁점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절차적 공정’의 문제로 승화해낸 정치권과 언론은 분명 반성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현실적으로 지원하고 합격할 수 있는 청년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가? 인국공 사태에 세대 담론을 적용해서 ‘절차적 공정’을 강조함으로써 ‘동등한 기회의 보장만으로 공정한 출발선을 얻을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소외된 것이 아닌가? 비수도권에서 태어나 지역의 사립대를 졸업해서 지역 기업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청년들의 서사들이 모두 ‘절차적 공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 과연 ‘정치’의 역할일까? 이런 문제의식에 관해서 사회학자 양승훈 씨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수저 계급론을 보면 우리 사회가 모두 서울 아파트를 사서 외제차를 타고 살고 싶은 사람들로 환원되곤 한다. 수저 계급론은 특정한 청년들의 열패감을 대변한다. 그런데 지방에 살고 있는 절반의 사람들, 다수를 이루는 지방대생들은 갑자기 바라지도 않던 서울 아파트를 가질 수 없는 '흙수저 벼락거지'가 되고 만다. 대기업 시험이나 고시 공부, 공기업 시험 준비를 하면서 서울 아파트 입성을 노리는 일련의 RPG 게임 퀘스트와 미션을 수행하는 청년들만 세대론적 서술 속에서 청년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 밖에도 청년이 있다. 용접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장에 가는 청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지역에서 일을 하려는 청년 모두는 사라진다.”
–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얼룩소 칼럼 “지방대생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된 담론이 못 되는 이유: 세대론 / 노동담론 / 지방소멸론 비판” 중
세상에는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삶의 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론과 민의는 그런 삶의 결들을 모두 반영할 수는 없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데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론을 해석하고 이를 하나의 메시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그림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정’ 담론이 가져온 ‘절차적 공정’의 딜레마와 ‘공론장에 진출할 수 없는 지방 청년들의 삶’은 분명히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인서울 대학교를 졸업해 대기업에 취업하고 강남에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성공방정식을 만들어내는 데에 지금의 정치세력이 가져온 ‘절차적 공정’ 담론은 분명 큰 기여를 했다. 정치권과 언론에 분명히 책임이 있다.
소수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과대 대표될 이유도 없으며, 다수의 사람이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될 명분도 없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가 좋은 직장을 가질 수는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여론을 모든 시민들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적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 여론의 시작점이 온라인 공간이라면, 이를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취급하는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립
사람에게 기계적 중립을 강요하는 것은 가혹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중립은 가능할 수 있다. 그 중립을 규정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상에 따라, 맥락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스탠스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은 대화의 맥락과 발언자의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 아무리 발화자가 자신의 주장은 ‘중립적’이라고 주장할지언정, 듣는 이가 생각했을 때 그 발언은 ‘중립’이라고 볼 수 없는, ‘중립 호소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며칠 뒤 일어났던, 별로 되새기고 싶지도 않은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은 나로 하여금 ‘언어를 선점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고 존속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행정안전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의 브리핑 중 발언을 보자.
“박 정책관은 “피해자, 희생자 이런 표현은 재난 관련해서는 용어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는 그런 일종의 내규가 있다”며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희생자라는 표현을 쓰면 책임을 지게 되고 사망자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 책임을 안 지고 이런 것은 아니지 않았냐”며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그런 일종의 내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무려 행정안전부 관계자가 ‘표현을 바꿈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에서 찝찝한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사고’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은 정부가 제 발 저린 꼴에 불과하지 않은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도 않았고, 그저 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느냐고 질문했는데 대변인의 입에서 책임소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언어의 사용’이 가지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중립은 단순히 어휘의 선택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요건이 아니다. 발화의 맥락과 화자의 배경 등 수많은 요소가 듣는 이에 의해 고려되며, 이 모든 변수를 통제하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중립을 지켰다’고 납득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중립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때로는 듣는 이에게 굉장히 공허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혹자는 ‘완전한 중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무조건 사과부터 하라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정확한 지적이다. ‘중립적임을 호소하는 발언’은 이미 담화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음을 방증하는 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중립적이다!’ 를 호소하기 이전에 사람들이 발화자를 ‘중립적인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
정치인의 구체적인 발언이나 사례를 제시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레토릭이 어떤 사건들에서 동원되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싶을 만큼 의아하다. 어떤 사실은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투영될 수 있다. 하지만 말하는 이를 둘러싼 배경이 듣는 이로 하여금 ‘정치적 맥락’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상대방에게 ‘당신,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높은 확률로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정치적 견해 혹은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치적 견해’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정치적 성향을 표집하고 계량하는 시도는 결국 주관성의 수치화에 불과하다. 객관적일 수 없는 ‘정치적 견해’를 레토릭에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사건을 ‘주관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레토릭은 매우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레토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건의 본질을 진단하지 못한 채 자신 혹은 자신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의 방어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자신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을 결집하고 상대방을 타자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그 자체로 윤리적 혹은 법적 문제를 낳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점에 있다. ‘저 사람,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아니야?’라고 묻는 순간 사건을 둘러싼 맥락은 ‘정치적 활용’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이 진상조사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도 ‘저 사람들 또 이 사건을 정치로 끌고 들어가려 하네 쯧쯧’의 맥락으로 흘러가 버린다.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이다. 감정과 주관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분열된다. 사건이 한 번 ‘정치가 불러일으킨 감정적 논쟁’으로 휩쓸리면 법적 수단과 객관적 분석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결과를 보고 가설을 수정하려는 연구자처럼 이들은 모든 분석 결과를 정치적으로 해석해버린다. 그렇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대책 수립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목표들이 흐려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고 떠들고 다니는 정치 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블랙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사회과학에서 어떤 사건은 자연과학에서처럼 두 물질을 섞는다고 ‘펑’ 터지지 않는다. 그 메커니즘이 쉽게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사건에 개입된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 그것을 단순히 ‘검찰 수사’ 혹은 ‘경찰 조사’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굉장히 섣부른 시도일 수 있다. 사건이 가지는 사회적 파급력이 클수록 사건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제도적 쟁점들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대한 사건의 진상은 대체로 ‘구조’와 함께한다. A로 인해 B라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인과적 선언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조사가 동원된다. 이는 사건의 이면에 ‘구조’가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그것이 제도적 구조든 사회경제적 구조든 간에, 개인이 쉽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거시적인 틀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구조’를 파헤칠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하자는 목소리가 모든 사건에서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허점이 있다. 수사는 ‘법적 책임소재’를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수사를 받을 사람들은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당장 검경이 들이닥쳐도 이를 빠져나갈 법적 구멍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수사로는 찾기 힘든 ‘구조적 그림자’를 은폐하는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법적으로 책임지기’를 피하고자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조를 발견하고 고치려는 시도는 사라지게 된다. ‘재난 인식론과 재난조사의 정치: 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 논문의 저자 박상은 씨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단에 있을수록 구조에 따를 수밖에 없고,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구조를 만들 수 있거든요. 행동과 결과가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법적 처벌에만 매달리면, 오히려 말단에만 책임을 묻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 현 정부 입장이 바로 수사가 조사라는 것인데요, 제가 가장 참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 지난 8년은 재난조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 시간이었어요. 이제 와서 ‘경찰수사로 원인 파악은 다 끝났다’는 입장은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겁니다.”
- 주간경향. 2023년 2월 13일. “법적 처벌보다 ‘구조적 원인’ 집중해야” 중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꼬여있는 실타래를 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법적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면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외면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윗사람보다는 아랫사람이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레토릭이 가미된다면 사건 조사는 어쩌면 구조의 고도화와 재생산이라는 부작용 말고는 아무런 것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높은 자리는 그만큼 높은 책임을 요구하는 자리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적 책임만을 묻기 위한 수사는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를 겨냥하게 만들게 되며, 이런 ‘구조’를 또다시 만들어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결코 ‘사건 종결’이자 ‘정답’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시혜는 위계를 만든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이른바 온라인 냉소주의자들이 아무렇게나 툭툭 내뱉고 다니는 문장이 있다. 마치 이렇게 말하면 자신이 ‘호의를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우월한 사람인 줄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복지 재원을 투입하는 것을 ‘배려’라는 레토릭으로 퉁쳐버린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인가. 김초엽, 김원영의 에세이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작가는 “시혜는 위계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시혜적 시선에서 기인한 정책 또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위계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언뜻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습득했던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드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할 때 우리가 가지는 연민의 시선과 그에 기인한 행위들이 ‘배려’라는 단어로 포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얼마 전 정치철학자 박이대승 씨의 글을 보다가 생각해 볼만 한 지점을 발견했다. 글의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배려’ 따위의 용어로 포장되는 행위들은 사실 국가와 시민이 당연히 행해야 할 의무인데, 이런 의무를 마치 “큰 선심 쓰듯이”, 혹은 “불우이웃 돕기 하듯이” 행한다는 점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인의 상식선에서 ‘모든 국민은 존엄하고 기본권을 누리는 존재’라는 본질적인 사고는 ‘사회적 약자도 정상인들의 배려와 도움 속에 살아갈 수 있다’라는 껍데기로 꽁꽁 싸여 있다. 그렇기에 ‘배려와 시혜적 시선’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쉽게 깨닫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 굳이 ‘배려’로 규정된 우리들의 선의를 부정하려 드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선의에 기반한 동정심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겠다. 하지만 동정심에 기반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시혜적 시선에서 비롯한 관계의 수직적 설정을 방조한다. 선천적, 후천적 약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지원을 ‘동정심에 기인한 배려’와 ‘시혜적 시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이는 훗날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시혜적 시선은 반드시 수직적 관계의 설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평평한 곳에서 물은 사방으로 흐른다. 하지만 기울어진 곳에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아래에서 위로 물이 흐를 수는 없지 않은가. 배려와 시혜적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배려와 시혜적 시선은 ‘기울어진 관계’를 만들고, 이런 인식에 기반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도움은 방향성을 잊은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약자’라는 명사로 집단을 타자화하고 ‘강자’와 ‘약자’를 구분한다. 이런 수직적 관계의 설정은 정책의 진전과 여론 수렴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엉성한 제도와 구조에 대한 비판’이 아닌 ‘개인에 대한 비판’이다. 복지급여를 부정수급하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국가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법으로 처벌하면 된다. 일부 시민들이 이들에게 행하는 ‘약자 코스프레’니 ‘떼쓰면 다 들어준다니’ 같은 허수아비 때리기는 복지 수요자의 위축과 계층 간 갈등 심화라는 부산물만 만들어낸다. 입법과 행정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개선하면 될 일이지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문제는 이런 시도가 여론을 등에 업을 때다. 여론이라는 괴물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것은 국민뿐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떼법’을 혐오하는 이들이 또 다른 차원에서의 ‘떼법’을 등에 업고 상대를 물어뜯는 악순환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약자 코스프레’라는 프레이밍을 시도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떼법’과는 거리가 먼,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믿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을 법과 원칙대로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구보다 ‘떼법’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절대 ‘떼법’이 아니라고 부인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 보인다. 시혜적 시선이 낳은 위계관계에 기대어 분노 표출의 대상을 국가와 제도가 아닌 사인 혹은 약자로 규정하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다면, 그 누구도 ‘떼법’이라는 레토릭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허술한 형법의 그물망과 행정의 틈새를 비판하지는 않고 우르르 몰려가는 사적 자치를 통해 저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당사자에게만 비난을 퍼붓는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이런 경향성은 정치적 의사 표현을 강하게 내비치는 지지층일수록 더욱 짙게 나타난다. 민주 사회에서 의사를 관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이 ‘익명에 숨어서 행하는 사인에 대한 맹목적 비판과 사적 자치의 허용’을 포괄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폭력은 꼭 개인 사이의 층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폭력은 지배하지만 내면화되지는 않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은 내부를 내부의 질서와 의미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외부에 내맡긴다. 폭력은 외부를 통해 내부가 내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외부는 다른 질서와 의미의 시스템인 동시에 질서 그 자체에 반하여 작용하는 힘을 이루기도 한다. 내부가 외부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수립하여 외부를 내면화하지 못하면 외부의 침입은 결국 내부의 파괴를 초래한다. 폭력은 중개나 화해를 허용하지 않는 파열이다.”
–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중
분명히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배려’라는 용어에서 기인한 시혜적 시선을 거두자는 것이지 소수자와 약자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성과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지원마저 박탈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당연히’ 국가로부터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아래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대상은 제도와 정치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완을 요구하는 것이 순리다. 특정 계층, 특정 집단 전체가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헐뜯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약자 코스프레’라는 레토릭은 상수를 건드리지 못한 채 변수만 건드리려고 하는 비겁한 시도다.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지지자들의 혐오 표현을 묵인하고 조장하면서 ‘내 언어는 혐오가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정치인을 경계하고, 익명의 힘을 빌려 당사자 면전에서 입 밖으로 꺼내지조차 못할 말들을 키보드라는 칼날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이들을 심판할 수 있는 수단은 선거이지 사적 자치가 아니다.
닫으며
사회적 맥락을 가진 언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언어 비판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비판에 동원되는 언어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언어 속에서 중심까지 잃을 필요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내는 몇 개의 축 중에서 언어는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론장에서의 언어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사회의 구조와 이해관계를 해석하는 중요한 도구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어에 대한 우리들의 주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눈을 반짝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에게 여기 은유와 환상이 이만큼 숨어 있다고 알려 주고, 당신의 정체성이 웬 스와미나 편협한 이데올로기로부터가 아니라 당신이 받은 영향과 경험, 그리고 당신을 구성하는 언어의 넓은 집합체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그 직감을 놓지 말아야 한다.”
- 어맨다 몬텔, ‘컬티시; 광신의 언어학’ 중
참고문헌
단행본
김초엽, 김원영. (2021). “사이보그가 되다”. 파주: 사계절
모리스 메를로 퐁티. (2020).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서울: 책세상. 김화자 옮김
스티브 브루스. (2019). “사회학”. 파주: 교유당. 강동혁 옮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2021). “덕의 상실”. 서울: 문예출판사. 이진우 옮김
어맨다 몬텔. (2023). “컬티시: 광신의 언어학”. 파주: Arte. 이민경, 김다봄 옮김
한병철. (2020). “폭력의 위상학”. 파주: 김영사. 김태환 옮김
George Lakoff and Mark Johnson. (2003). “Metaphors we live b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논문
박상은. (2021). “왜 세월호 참사 조사는 종결되지 못하는가? - 재난의 책임 배분 딜레마와 세월호 침몰 원인 논쟁.” 과학기술연구, 21(2), 5-49.
기사
이데일리. 2022년 11월 2일. “정부 ‘이태원 참사’ 대신 ‘사고’... 지명 포함된 부정적 영향 고려”. 양희동 기자
주간경향. 2023년 2월 13일. “법적 처벌보다 ‘구조적 원인’ 집중해야”. 송윤경 기자
기타
박이대승 페이스북
얼룩소 칼럼. 2023년 1월 19일. “지방대생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된 담론이 못 되는 이유: 세대론 / 노동담론 / 지방소멸론 비판”.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https://alook.so/posts/q1tpO9d’.
편집위원 느루 (hushpond@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