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IME] 편집위원 띵동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동그란 모양을 그리며 찰랑이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다. 돌을 집어 들어서 던지는 일은 휠체어에 누워있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물결이 퍼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연못에 파문이 그려지고 나서 수면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게 물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흐르면 그만일까?
적어도 내 마음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잔잔하고 평온한 내 삶에 대뜸 돌이 되어 날아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이 돌을 투척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였다. 그 책은 한나 아렌트가 정립한, 소위 ‘쫓겨난 자들’이 주류 사회에 대응하고 저항하며 ‘정치’하는 방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단지 부끄러운 지식 상태를 면하고자 읽은 책이 시원하게 내 속을 뒤집어버린 것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책을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렌트의 철학은 거미줄이 되어 나를 성찰과 사유에 묶어두었다. 계속되는 사유의 시간은 꽤 날카로웠고 고통스러웠다.
아렌트가 사회에서 배제되고 추방되며 발언이 가로막히는 이들을 쫓겨난 자(약자)로 정의한 점에서 장애인인 나 또한 쫓겨난 자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병명은 척수성 근위축증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루게릭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러나 스티븐 호킹과는 다르게 선천적인 병이었다. 크게 비관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낙천주의에 가까운 태도를 지녀왔다. 신세를 비관해봤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가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나는 살아가면서 마주한 거의 모든 이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자 했다. 아픈 몸에 정신과 마음마저 얽매여 주위의 좋은 사람들을 놓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해서였다.
손가락 몇 개만 까딱거릴 수 있는 내가 혼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공부였다. 책을 넘기거나 노트 자리를 옮기거나 볼펜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행동들을 제외한다면, 책이나 지문을 읽고 사고하여 문제를 풀고 지식을 쌓는 일들은 오로지 -혹은 비교적- 내 두뇌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공부하고 있었다. 이 몸으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뵙던 주치의 선생님께서 줄곧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잘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모르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아서’ 나를 건사하고 지원해줄 가족과 교육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장애인들이 사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남에게 힘이 돼? 나는, 그냥 내가 잘 살고 싶었던 건데 감히 타인에게 힘이든 뭐든 돼도 괜찮나?
스스로 장애인으로서 자각이 없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차별과 불합리에 맞서는 것은 엄마이고 뒤로 물러선 것은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따금 발화하지 않는 내 모습에 자괴감에 빠지다가도 이내 합리화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나는 장애인으로서 나의 감각이 깨어있다고 여겼다. 나는 차별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으니까. 착각인지 자기최면인지 모를 생각들을 그렇게 해댔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나에게 돌을 던졌다. 나는 여태껏 내가 사회가 부여한 비실재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저항하는 ‘자각된 파리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며 주류 사회에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파브뉴’ 같았다. 발화한 기억보다 발화하지 않았던 기억이 자꾸만 먼저 떠올랐다. 나의 침묵이 어떤 의미였는지 곱씹어보니 괴로움만 커졌다. 나를 두르고 있던 자기합리화가 한 겹 벗겨져서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또 다른 나의 민낯이 드러난 것은 아닐까.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9월이었으니 계절 하나가 지나간 셈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있다. 내가 밟아왔던 모든 길이 각각 침묵인지 발화인지에 대해서 번뇌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쫓겨난 자로서 가진 흔적을 의식하게 되었다. 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도 문장마다 쿠션어를 넣어서 말뜻을 빙빙 돌리고, 불편한 것이 있어도 습관처럼 괜찮다고 웃고 피하는 그런 행동들. 성찰의 시간을 가질수록 나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붙이게 되었고 혼란은 커져만 갔다. 가끔은 내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듯했다. 한나 아렌트의 돌이 나에게로 떨어진 뒤 마음속에서는 파랑이 쉬지 않고 덮치고 뒤집히고 부서졌다. 나에게서 일어난 파란은 자책에 그치지 않았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단순한 개인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의 입을 막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직면하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이 물결을, 나는 기록하기로 한다. 물결에 붙인 이름은 바로 ‘자각’이다. 거듭할수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자각의 감각을 기록해 언젠가는 의연하게 파도를 맞이할 나로 나아가고자 한다. 자각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는 정말로 마주할 때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철학을 형성하고 구축해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로 명명된 이들이 사회로부터 거리낌 없이 추방되고 죽임을 당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꾸준히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했고 개념화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축적된 연구 자료 중 ‘쫓겨난 자들’에 대한 것을 모으고 정리하여 새롭게 펴낸 책이 바로 양창아의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그의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의 발화와 행위를 중심으로 ‘쫓겨난 자들’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쫓겨난 자들을 짓밟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없이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도 쉽게 쫓겨난 자들에게 ‘지워짐’을 선사할 수 있다. 한편 한나 아렌트에게 발화와 행위라는 개념은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조건이 된다. 발화가 정치 행위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곧 사회 구성원의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고, 발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성원끼리 공유할 정치 공간과 영역이 마련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동일한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쫓겨난 자들에게는 이러한 정치 행위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쫓겨난 자들은 단순히 물리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되어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강탈당하며 종래에는 비인간화되고 비실재화된다.
“사회적 동화와 정치적 해방이라는 조건은 달리 말하면 기독교로 개종을 하든, 사적으로 유대교 신앙을 갖고 있든 공적으로는 유대인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이와 같은 조건은 개별 유대인이 특히나 국민국가의 형식이 갖추어지는 과정에서 통합된 인격을 갖지 못하고 분열된 정체성을 지닌 채 살게 만들었다.”[1]
한나 아렌트가 살아가던 시대 이전과 이후 모두 사회에서 밀려나고 추방된 이들이 존재했다. 주류 사회는 특정한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게 했고 이는 단순한 권리 박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구타하고 죽이는 것만이 쫓아내는 것일까? 사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쫓겨난 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이골이 났다. 과거 생제르맹 지역 살롱에서 유대인이나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흥밋거리로 소비되면서 이들은 곧 ‘애호’의 대상이 되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선 긋기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신기한 존재에 머물러야 할 뿐, 사회 구성원으로는 절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나먼 과거 서양의 풍경이지만,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원론적인 평등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자기 삶에서는 조금의 자리도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 착함을 빙자한 순종을 강요하며 그렇지 않는다면 내쫓겠다는 말을 쉽게도 하는 사람들.
“벼락부자(출세자)라는 뜻의 ‘파브뉴’는 유대인을 하층민 또는 천민 파리아로 여기는 사회에 동화되려고 노력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 부류는 소위 ‘상류사회’ 또는 ‘좋은 사회’에 속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사회에서는 유대인 정체성을 ‘낮게’ 그리고 ‘나쁘게’ 보고 배제하므로 낮고 나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숨길 수밖에 없다. 타고난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들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여서라도 ‘출세한 인물social climber’이 되려고 한다. (중략) 파브뉴는 사회의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 사회에서의 동화와 성공을 향한 개인적인 투쟁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2]
“‘파리아’는 잘 알려진 것처럼 ‘불가촉천민’이라고 번역되며, 인도에서 ‘카스트제도에도 못 드는out-caste’ 최하층민을 일컫는 말이다. ‘불가촉untouchable’, 만질 수 없다는 것은 만지면 그 천함 또는 더러움이 닿아 전염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파리아는 사람들이 이들과 접촉하면 손을 씻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천하게 여겨지는 존재를 뜻한다. 이때 이들의 몸에 덧씌워진 ‘더러움’은 ‘정상적인 인간’, 즉 그 사회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간다움’의 규범적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를 고려하면 ‘소수자’나 ‘주변인marginalities’, ‘아웃사이더outsider’로 이해되기도 하는 파리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여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내쫓긴 자outcast’이다. (중략)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기 위해 생산됨과 동시에 은폐된 이 비존재의 자리를 자각함으로써 파리아는 개인으로서 자리를 얻기 위한 헛된 노력에서 벗어나 유대인 전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주장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선 자가 바로 아렌트의 정치 행위 개념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파리아로서 자기를 의식한 자conscious pariah(자각한 파리아)’, 즉 사회가 부여한 비실재의 위치에 저항하고, 쫓겨난 그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 전체의 정치적 위치를 성찰하는 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사회의 낮은 자리를 전유하여, 사회가 차별을 통해 어떤 유혈 사태도 없이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음을 발견하고(WR: 273), 그러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행위를 한다. ‘자각한 파리아’는 사회의 가치 체계에 대항하여 사회가 억압하는 바로 그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3]
쫓겨난 자들이 밀려난 위치에서 어떠한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비인간화된 채 살아가는 ‘파리아’가 있고, 주류 사회에 포함되기 위해 쫓겨난 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고 침묵하며 주류의 폭력을 방조하거나 동조하고 동화되려고 하는 ‘파브뉴’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놓인 부당한 처지에 저항하면서 사회의 응답과 개선을 요구하는 ‘자각된 파리아’가 있다.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는 이 유형들을 각각 조명하고 나서 자각된 파리아의 행위 방식을 다룬다. 이들은 사회에서 쫓겨났다는 상처가 있기에 서로 다른 이들이 지닌 상처를 이해하며 연대한다. 쫓겨난 자들의 발화는 소거되어 사회에 전달되지 않거니와 이들을 드러낼 언어가 없기에 쫓겨난 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담론장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자각된 파리아로서 살아왔다고 자신했던 나는 이 책을 곱씹으면서 내가 파브뉴로서 살아온 듯한 의심스러운 흔적을 적잖이 발견했다. 물론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는 개인의 삶과 언행에서 파리아, 파브뉴, 자각된 파리아가 혼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인간의 삶에서 한 가지의 모습만이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에서 개인에게 파브뉴와 자각된 파리아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본래 결벽적인 성향도 아닌 내가 어떤 순간에는 파브뉴였음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갈등을 회피하는 성격이라 그렇다고 은근히 합리화하고는 해서 그것을 매번 저지해야 했다. 나는 이따금 발화하기를 주저하고 발화하는 순간에도 어려움을 느꼈다. 어떤 말을 하면 공격받을까 봐 두려웠고, 반드시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데 압박감이 들었다. 부당한 일에 마주하여 시정을 촉구할 때 이름과 나이와 얼굴과 같은 나의 일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누군가를 멋대로 지워버린 사회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왜 내가 얼굴을 붉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11월의 어느 날, 수업 내용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이하 전장연 시위)가 등장했다. 교수님께서 시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셨고 몇십 분 동안 그 영상을 시청하는 학생들로 가득 찬 교실에는 침묵인지 정적인지 모를 것들이 깔려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전장연 시위에 대한 찬반과 시위 자체에 대한 여러 의문으로 출발해 장애인 대중교통 이동 시설의 미비와 박탈당한 이동권을 보여주고 전장연 시위 현장과 인터뷰를 다룬다. 그중에서 시위 현장에서 지하철 승객이 시위자에게 매섭게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 호통에 살짝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가 재생되는 시간 내내 그 누구도 어떤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정말 교실 안에 있던 모든 학생이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모습을 의도치 않게 숨을 죽이고 전부 관찰했다. 마스크를 꼈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 보는 기색이 역력한 나를 감추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내심 아쉬우면서도 마주하기 두렵기도 했다. 전장연 시위가 수업에서 다뤄지는 동안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어떤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올까 봐 전전긍긍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수업이 끝나니 소위 ‘현타’가 왔다. 뭐 하러 눈치를 보았는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전장연 시위가 어느 시점 이후로 대중 언론에 다뤄지면서 이야깃거리가 되고는 하였다. 주로 전장연 시위에 대한 찬반이나 시위 때문에 학교에 늦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찬반을 논하는 것이 웃기기는 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아, 그렇구나’라는 말로 일관했다. 그 말은 침묵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동조로 이해될 수 있는 어조 때문에 침묵만도 못 하려나. 나는 확실하고 굳건하게 침묵했다. 마음속으로는 몇백 번이고 전장연 시위는 결코 찬반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지금껏 뒷전으로 밀려 있었던 내용들이지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가 아니라고 차분하게 격앙되게 또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뱉는 말은 다시 원점이었다. 내 앞에서 ‘찬반’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정성 들여 설명할 의욕을 잃었고, 한편으로는 미묘한 혐오를 받아치느라 미움을 사기가 싫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나름의 반항을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더 컸다. 비겁하게 회피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랬다.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을 뒤로하고 또다시 말해버렸다. 아, 그래요.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다른 대학에 가겠다고 큰소리치던 열 살 남짓한 나에게 모교에 오라고 홍보하실 만큼 환자의 교육에 열성적이셨다. 근육병 환자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축하하는 행사를 매년 여실 정도였다. 그런 주치의 선생님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공부를 그럭저럭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호불호가 강하고 흥미를 추구하는 성격을 따라 좋아하는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선생님의 소원대로 우리 대학에 들어왔다. 사회가 흔히 떠올리는 ‘엘리트 코스’에 제법 가까운 길을 걸어온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았을 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회는 아니었다.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나의 단면 중 일부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나를 대했다. 혹자는 나에게 인간승리의 표본이라고 했다. 나도 때때로 자신이 대견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그저 내 삶인데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의아했다. 문득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오늘에 와서야 깨달았다. 장애인이 이렇게 살면 신기하냐고 묻고 싶은 것이었다. 생제르맹 지역 살롱의 유대인・동성애자나 대한민국 사회의 나나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가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시선은 나를 내부자로 여기지 않는다. 저 시선은 나를 겉돌게 할 뿐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엘리트라는 이름표를 달면 적어도 나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할 눈은 더 많아질 것이었고 그것 하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를 보는 눈길이 많아질수록 내가 정당하게 보호받을 가능성도 커진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발언할 만한 상황에서는 입도 떼지 못했다. 이런 내 모습에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오죽하면 단지 주류 세계를 우러러봐서 거기에 동화되고자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각된 파리아는 미움받을까 봐 침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파브뉴가 아닐까? 자각된 파리아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기만이 아니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나?
미어캣은 천적인 맹금류를 경계하려고 두 발로 서서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단 미어캣뿐만 아니라 몸집이 작은 동물은 천적이나 맹수를 피하고자 다른 존재의 기척을 감지하는 데 매우 예민하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힘이 약하기에 싸우기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고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 이러한 원초적인 자연의 원리와 법칙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 꼭 장애가 있거나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위계적・관계적 이유로 누구나 살면서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특히 상대방보다 불리하거나 취약한 위치에 놓일수록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모든 소수자가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 사회가 난해한 것은 회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고도로 발달한 다채로운 관계를 무수히 맺는다.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 형성된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미묘하여 원치 않는 인간관계를 피하거나 단절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소 불편한 관계더라도 생계나 학업 같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것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불편한 관계와 상황과 위치를 견뎌야 한다. 그렇다 보니 상황을 살피고 눈치를 볼 일이 더 많아지게 된다. 현재의 안정을 지키면서 각자의 목적과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단히 애를 쓰고 신경을 쏟는 것이다.
자기 내면에 일어난 파랑을 기록하겠다면서 눈치에 대해 이야기하니 아주 뜬금없는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왜 나는 눈치 빠른 사람이 되었나. 분명히 나는 다른 사람의 반응에 예민한 기질이 아니었다. 스무 살 넘게 먹은 지금까지도 눈치가 없다며 자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고난 둔한 기질만 생각한다면 눈치를 볼 수 있게 된 정도도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 때문일까? 이것도 밥이라면 밥이려나. 집에서도 안 먹어보던 눈칫밥 때문이다.
커다란 침대형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 때문에 나는 원치 않게 동네의 유명인 생활을 해야 했다. 눈에 띄어도 너무 잘 띄는 탓이었다. 셀러브리티는 돈이라도 많지, 나는 내게로 초점을 둔 CCTV만 수없이 갖게 될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휠체어라는 자가용이 생겨서일까? 숨만 쉬어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과장이 아니었다. 존재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인지 외출만 하면 화제가 되었다. 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더 둔했기에 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성장할수록 나를 향한 눈길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노골적인 시선에는 그것을 숨길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시선의 빛깔은 수많은 사람만큼 다양해서 총천연색이었다. 순수한 호기심, 동정, 호의, 불편함, 혐오. 대체로 그런 것들이었다.
<띵동이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날 웃고 다니더라?> 누군가가 나를 두고 그렇게 말했단다. 그 말을 들은 내 지인은 행간에 들어간 꼬인 마음을 읽어내고 크게 화를 냈더랬다. 나는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대뜸 물었다. 그럼 울면서 지내? 웃지 않는다면 힘들어서 그런지 죽상이라며 험담을 들을 것이 뻔했다. 슈퍼스타의 삶은 이런 것이었다. 장애인은 밝게 살지도 못하나. 장애인은 행복도 감정도 검열당하나 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은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다. 길이 넓지 않은 곳이라 휠체어를 들여놓으니 조금은 빠듯하였다. 그래도 사람이 충분히 통행할 만한 공간이 있었고, 우리도 물건만 사고 어서 나올 참이었기에 마냥 서둘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런 애를 왜 여기 데리고 나와?> 어찌나 카랑카랑하게 말하던지 7년이 지난 지금도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이 날 정도였다. 이런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조금의 체면 따위 지킬 생각 없는 혐오는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고 우리는 놀란 나머지 대응하지 못했다. 장애인은 시장에 나오면 안 되나. 장애인은 얼마 못하는 이동마저도 검열당하나 보다.
나는 적당히 성실하고 즐겁게 살아왔다. 크게 욕심나는 것이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욕심부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옴으로써 나름의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었고 나 자신의 몫을 소중히 하는 태도였다. 소수자는 종종 무언가를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한 요구는 능력이나 사상 검증의 탈을 쓰고 혐오를 퍼붓는다. 몇몇 사람들의 뇌리에는 <장애=불능>이라는 공식이 박힌 것인지 몰라도 이들은 장애인에게 능력을 입증해 보이라고 강요한다. 장애는 특정 기능의 결손이나 불능을 뜻할 뿐, 불능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얼마 전에 ‘굴러라 구르님’이라는 유튜버가 이러한 혐오 피해를 밝혔을 때 문득 내가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동네 사람들의 안주나 다과 같은 것이었던 나는 그다지 숨어서 지낼 생각이 없었다. 늘 그랬듯 열심히 학교에 다녔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그곳에서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도움’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머릿속으로 소설을 한 편 써냈다. 학교와 선생님들이 내 뒤를 봐주고 나의 입시와 성적에는 암암리에 부정이 껴있다는 것이었다. 허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힘을 얻었고, 몇몇 이들에게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법과 규정에 명시된 정당한 편의 제공은 ‘편의를 봐준다’라는 오묘한 언어로 변질하였고 누군가의 혐오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예시로 탈바꿈했다. 내 인터뷰가 실린 기사의 댓글 창에는 익명을 방패로 한 혐오가 난무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내가 장애인이라 대학에 진학한 것이라며 수능 성적을 공개하라는 댓글이었다. 지금 되짚어보면 모순이 따로 없었다. 내가 장애인이라 불능할 것이라고 가정해놓고 대학 진학은 남들보다 쉽게 할 수 있다니. 나는 순식간에 무능하면서도 중대사에서 혜택을 가질 만큼 전능한 존재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사는 세계에는 나를 띵동 그 자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꼭 장애인이나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자기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타인의 존재는 큰 힘이 된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가라앉힐 만큼 굳건한 정서적 지지를 받고는 한다. 각박한 현대 사회를 이들 덕분에 견뎌내고 살아낼 수 있으니 이들을 부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동등한 인격과 의지를 가진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회 전반의 인식으로 퍼지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발전 속도에 비해 인식 개선이 늦었고, 또 여전히 늦어지고 있다. 내가 발언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데 비해 나를 향한 폭력은 너무나도 쉽게 구체화하는 것이 현실이다. 며칠 전에는 국가 권력이 장애인의 신체나 다름없는 휠체어를 파손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들었다. 이때 별안간 의문이 든다. 과연 나는 입을 닫은 것일까, 입이 차마 열리지 않은 것일까, 아예 가로막힌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쫓겨난 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치-하나의 국민이자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발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쫓겨난 자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과정은 이들의 목소리를 소거하여 비가시화하고 궁극적으로 비인간화하며 비실재화하는 데 있다. 소통이 절대적인 인간 사회에서 ‘발화’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발화는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정치적 행위로 나아간다. 그런데 쫓겨난 자들은 아무리 발화해도 그 말이 전달되어 타자에게 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타자화된 쫓겨난 자들은 언어의 힘마저 얻지 못하고 완전히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밀려나고 배제된 채로 살아가다 보면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게 된다. 개인이 사회의 차별과 폭력에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모멸과 비존재화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이 상처가 깊어질수록 개인은 자신이 사회 밖으로 밀려나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소수자는 폭력과 억압에 맞서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발화를 시도한다. 앞장서 투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상생활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일반적 의미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지만, 꾸준히 사회에 얼굴을 들이밀려고 한다. 쓸데없이 장애인은 왜 나왔냐고 하면 오기가 생겨 더 자주 외출한다. 이동이 어려움에도 현장 학습에는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매번 참여한다. 장애에 무지하던 사람들도 나를 알고 난 뒤에는 대부분 태도가 변했다. 특히 나와 친했던 한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선입견을 품고 계셨지만, 점차 나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니 슈퍼스타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루머와 악플이 피곤하고 상처가 되어도 세상에 나를 기꺼이 노출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이 나를 만나 변화한다면, 나도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내 나는 이 삶이 나의 ‘발화’라고 정의 내렸다. 나를 외부에 보임으로써 발화하는 것이다. 나의 삶은 곧 퍼포먼스이고 정치라 할 수 있다.
“실버만은 ‘시각의 복수성’에 대한 강조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첫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각이 많을수록 좋다. 어떤 것을 보는 개별적인 관점이 많을수록 그 시각을 통해 세계 속에서 현실이 지닌 여러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확신에 찬 보기’ 또는 ‘진실을 보기’는 통일된 관점으로 세계상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각기 특정한 자리에서 다른 것을 보는 복수의 눈이 모여서 결코 전체를 다 볼 수는 없는 세계를 차차 알아가는 ‘집합적 보기’이다(실버만, 2010: 39). 세계에 대한 확신도 하나의 눈이 도저히 다 볼 수 없는 것을 서로 다른 복수의 눈들이 모여서 봄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보기가 가능하려면 다른 보기들이 존재해야 한다. 시각의 복수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하나의 보기가 지닌 개별성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보는 사물이나 세계는 결코 전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한 한 많은 관점을 고려한다고 해서 전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존재는 결코 온전한 전체상으로 파악될 수 없는 무한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세계 관찰자의 보기가 지닌 특정성과 부분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세계 관찰자 동료들의 각기 다른 보기에 기대지 않고서는 나의 보기가 불가능하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한 것이다.”[4]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가 나에게 일으킨 가장 크고 거센 물결은 나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나 자신을 자각된 파리아라고 여기며 살아온 내가 사실은 파브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골몰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의한다. 나의 어떤 얼굴은 파브뉴이고 또 어떤 얼굴은 자각된 파리아이되,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은 후자라고. 어찌 보면 허무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내가 파브뉴인지 자각된 파리아인지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그것들이 나에게 모두 혼재한다고 애매하게 인정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을 a 혹은 b라고 정의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기를 두고 완벽하게 정의롭거나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찰나에도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져도 똑같은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어제는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오늘은 괴팍하게 대꾸하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만큼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존재인 셈이다. 나 역시 이러한 인간의 특성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정작 이를 간과한 채로 사유하였으니, a 또는 b라는 퇴색된 틀에 갇혀 있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고민만 거듭해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내면에는 다양한 얼굴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나는 끝내 인정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각자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할 수많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이 발화하고 정치하는 ‘나’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되고 싶고 추구하는 자아상을 품고 있을 테고, 그것을 향해 행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깊이 이해하여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다. 나의 자각의 기록 역시 그런 과정 한가운데에 있지 않을까.
[1] 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49쪽(e북기준, 이하 동일).
[2] 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50~51쪽.
[3] 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52, 54쪽.
[4] 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171쪽.
참고문헌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양창아, 이학사, 2019
편집위원 띵동(glowingpinky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