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8호 12화

[공동기획]복수 複數의 여성들, 국가와 가부장제의 교차

[FINAL CALL] 편집위원 심술

by 연희관 공일오비

첫 번째 이야기: 메데이아, 아이를 죽이는 어머니


에우리피데스 비극 『메데이아』(강대진 역; 2022)는, 유능하고 이지적인 마녀 메데이아가 아버지이자 콜키스의 왕인 아이에테스에게서, 쫓겨난 이울코스의 왕자 이아손에게로, 다시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에게로 이행하는 여정을 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메데이아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아손의 원정을 도왔다. 이아손을 선택하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나고 자란 오이코스에서 탈주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이아손의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는 형식으로 독자적인 오이코스의 안주인이 되어 장래에, 폴리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자 한 것이다.

메데이아의 여정은 여성으로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분투였다. 메데이아의 이러한 욕망은, 자신이 나고자란 폴리스에 안착할 수 없어 새로운 기반을 마련해야 했던 이아손의 필요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코린토스에 새롭게 정착한 그 순간부터, 이아손의 욕망은 메데이아와 분기한다. 코린토스에서 이방인이나 다름 없는 이울코스의 왕자 이아손은 강력하고 안정적인 오이코스를 구성하는 데서 나아가 코린토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는다. 이아손의 배신으로 애써 구축해온 공동체 내에서의 모든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한 메데이아의 분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아손과 낳은 자식들을 살해하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메데이아는 왜, 이아손의 원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도 배신당해야 했나. 이아손은 왜 메데이아를 배신했나. 메데이아는 왜 자기 혈육이기도 한 아이들을 제 손으로 살해했나. 콜키스에서 코린토스, 아테나이로 이어지는 메데이아의 여정은 왜 계속되어야 했나. 이지적이고 유능한 메데이아는 자신의 힘으로 아이들과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지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아이들이 불행하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메데이아를 어미로 만났기 때문일까?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는,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정치·경제적 지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코린토스에 당도할 수 있었던 이아손은, 다른 폴리스 출신 메데이아를 버리고, 자신이 자리 잡고자 하는 코린토스 왕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을 통해 코린토스라는 폴리스에서 내국인-성인-남성 가부장의 위치를 공고히 확보하고자 했다. 메데이아와 정식으로 혼인하여 이방인 부부로서 독자적이지만 취약한 오이코스의 주인이 되기보다 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코린토스의 우두머리에 있는 크레온의 오이코스에 편입되고자 한 것이다. 메데이아는 여성으로서 공동체 내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있어 아버지나 남편으로 대변되는 오이코스의 가부장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코린토스 내의 가부장이자 정치적 존재로서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이아손과, 가정 내 존재를 경유하여 공동체 내에서 입지를 마련하고자 했던 메데이아의 욕망이 만나고 분기하는 과정을 두텁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경제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기능했던 오이코스와 정치공동체로서의 폴리스가 맞물려 작동했던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라는 종은 사회 속에서 삶을 이어 가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인간을 ‘폴리스 생활을 하는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불렀다. 간혹 ‘정치적 동물’이라고 번역될 때도 있지만, 본뜻은 우리가 공동체라는 집단적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었고 그가 생각한 공동체란 농업 배후지까지를 포함하는 폴리스, 곧 도시를 의미했다. 사회란 인간 본성의 표출일 뿐 아니라 더 넓은 자연 세계의 논리가 표현된 것이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것은 보통의 가족이나 그 어떤 가정경제가 아니라, 한 가족이 하나의 가정경제를 점유한 상태였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반쯤 요새화된 거대한 저택들로서, 우두머리인 지주가 노예와 가신, 기술자, 밭, 과수원, 가축들을 거느리고 사는 모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저택의 목적은 ‘자급자족(autarkia)’이며, 이를 위해서는 예산 편성과 검약의 원리를 적용하여 반드시 그 자원들을 알뜰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이코노미아’의 본질이었다. (크리스 한, 키스 하트; 2016) [1]


고대 그리스는, 공적 영역인 폴리스와 사적 영역인 오이코스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자신의 오이코스를 구축하고, 공적 영역에서 발화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내국인-성인-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은 오이코스와 폴리스라는 공동체에서 주변화된 존재였으며, 특히 외국인과 노예는 오이코스와 폴리스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존재였다.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는 프락시스, 즉 말과 행동이었다. 다만, 단순히 필요를 충족하기만 하는 행위는 폴리스의 운용 원리로서의 프락시스에서 배제되었다. 폴리스에서의 삶은 정치적 삶을 의미했고, 정치적 삶이란, 담론장에서 의미를 갖는, 오직 말과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결정해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 비극에서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은 모두 오이코스와 폴리스 내로 포섭된 삶을 살아간다. 오이디푸스, 오레스테스 등의 남성 주인공들은 오이코스의 주인이자, 폴리스에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이자, 그 자신만으로도 공동체 내에 안착해 있는 존재이다.


이아손: 오, 아이들아, 너희는 얼마나 나쁜 어미를 만났던 것이냐!
메데이아: 오 얘들아, 너희는 아비의 질병 때문에 파멸하였구나!
이아손: 하지만 내 오른손이 그들을 죽인 건 아니지.
메데이아: 하지만 그대의 오만과 새로 맺은 결혼이 그랬소.
이아손: 너는 결혼을, 그 때문에 아이들을 죽일 정도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냐?
메데이아: 그대는 이것이 여자에게 작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가? [2]


여성 주인공의 경우는 어떠한가. 고대 그리스의 정치·경제적 지형 속에서 여성 주인공의 욕망과 그가 마주한 제약을 읽어내는 일은, 『메데이아』의 서사 공간에서 친족애로 맺어진 모자 관계가, 어째서 죽고 죽이는 적대 관계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위계와 폴리스 안팎으로 구분된 고대 그리스 사회는 젠더화된 삶의 방식을 구성해 내었다. 이에 따라 비극의 주인공들은 ‘말과 행동’을 통해 오이코스를 소유하거나—남성—,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고자—여성—했고, 종국에는 폴리스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소유하거나, 그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의 상류층 여성들은 오이코스의 주인으로서 전면에 나서거나, 폴리스에서 직접적인 발화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혼인을 통해 남성을 선택하여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기를 도모했다. 아버지 아이에테스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살해한 메데이아가, 모든 걸 걸고 선택한 이아손에게 배신당하자, 이아손과 낳은 아이들을 살해하고 아이게우스에게로 떠나는 여정은, 그가 마주한—독자적으로는 정치 경제 공동체 내로 포섭될 수 없는—제약과, 강력한 오이코스 내로 포섭되어, 종국에는 폴리스의 우두머리의 지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파괴되는 ‘복녀’


고대 그리스의 정치·경제적 지형이 메데이아의 삶과 그 삶이 위치한 맥락을 자아내고 있다면,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적 지형은 식민지기 조선 촌부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자아내었다. 식민지기 조선 촌부의 삶은 “어린 나이에 팔리듯 혼인을 한 후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한”(소영현; 2016) 혹은 “인간이라기보다 아내라는 직무에 복무하며 노동하는 기계로 살았던 비가시의”(소영현; 2016), 따위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 연구자 소영현은 식민지기 본부살해 여성들을 둘러싼 대중 담론과 법정 텍스트, 신문 기사 등을 다시 읽음으로써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여성 범주를 구성하는 과정과, 여성 범죄가 재현되는 맥락이 동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1920~1930년대 당대 조선 촌부의 삶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 지형을 기반으로 보았을 때, 여성의 친밀성 범죄가 재현되는 맥락에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생식하는 몸으로서 가시화되고, 그 바깥의 영역이 비가시화되어 “결과적으로 여성 범죄가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과 거의 겹치거나 다르지 않은 자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소영현; 2022)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려진 식민지기 조선 촌부의 삶
‘여성’으로서 재현된 본부살해 여성의 삶

여성범죄에 얽힌 성 정치적 맥락에 대한 논문 두 편을 읽고, 논문에서 제안하는 바에 따라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김동인; 1925)를 펼쳐 들었다. 『감자』는 순박한 시골 여인 복녀가, 혼인을 계기로 점점 비참한 처지에 내몰리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었다”[3]라는 문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적 지형 안에서 복녀가 가진 생득적 지위를 설명한다. 그러나 복녀의 정치·경제적 지위는 혼인과 함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복녀는 열다섯 살에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영감에게 팔십 원에 팔려 결혼한다. 설상가상, 그녀의 남편은 생활력이 없다. 복녀를 산 팔십 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던 것이다. 복녀 내외는 별수 없이 3~4년 복녀 아버지의 신세를 지다가, 결국 복녀 아버지의 눈 밖에 나고 결국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업은 거러지요, 부업으로는 도적질과 (자기네끼리의) 매음, 그 밖에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죄악”인 칠성문 밖 빈민굴에 자리를 잡게 된다.[4]


송충이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복녀는, 왕서방과 성관계를 맺고 송충이를 하루 종일 잡아도 받을 수 없는 돈을 받게 된다. 왕서방을 알게 된 후부터 복녀 내외의 살림살이가 나아져 가던 차에 왕서방이 새신부와 살림을 차린다는 소문이 돈다. 생계 수단을 잃게 된 복녀는 왕서방과 새신부의 신방에 낫을 들고 난입한다. 혼인 이후 이리저리 내몰리던 복녀가, 성실함을 잊고, 정직함을 잃고, 급기야는 자신을 배불려 주던 왕서방의 새장가 소식에 살의를 느끼기에 이른 것이다. 잃고, 잃고, 잃어가던 복녀는 종국에 목숨을 잃는다. 복녀의 죽음을 덮는 대가로 왕서방과 복녀 남편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끝날 때까지 복녀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는다.

복녀의 삶은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 오간 80전으로 파괴되었고, 복녀의 몸은 왕서방과 남편 사이에 오간 십원 짜리 지폐 석 장에 공동묘지로 갈 수 있었다.


‘여성 범주’의 구성, ‘여성 범죄’라는 통치


중첩되는 여성 ‘범주’와 여성 ‘범죄’에 대한 통찰은, 낙태죄가 발휘하던 역사적 효과와 위헌결정에도 불구하고 입법부작위로 인해 지속되고 있는 낙태의 비법화 非法化를 읽어내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 269조(낙태)⓵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 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⓵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국가법령정보시스템; 2023.03.01열람)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⓵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국가법령정보시스템; 2023.03.01열람)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2019)[5]. 이에 따르면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임신한 여성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몸을 임신상태로 유지하여 출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영역을 자율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에 터 잡고 있”는 “전인적 결정”이다[5]. 임신기간 전체에 대한 모든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국가가 “형법적 제재 및 이에 따른 형벌의 위하력으로 임신한 여성에게 모자보건법이 정한 일정한 예외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임신의 유지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부담 및 출산과정에 내재한 신체 내지 생명에 대한 위험을 모두 받아들이고, 출산의 결과로서 모자관계를 형성할 것을 강제”함을 의미한다.[6]


형법 제 269조 헌법 불합치
낙태죄와 국가의 재생산 통치

이때, 낙태죄는 형법 제269조, 제270조와 모자보건법 관련 조항이 맺는 관계로부터 구성된다. 형법 제269조에서는 임신기간 전체에 걸친 모든 낙태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이에 대한 위법성 조각사유를 열거하고 있다. 현행 모자보건법 상 형법 제269조 제1항의 위법성 조각사유는, 사회적·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낙태갈등 상황을 포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협소하다. 헌재는 현행 모자보건법이 밝히고 있는 위법성 조각 사유가 포괄하지 못하는바, 즉 “학업이나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에 대한 우려,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경우, 자녀가 이미 있어서 더 이상의 자녀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 부부가 모든 소득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어느 일방이 양육을 위하여 휴직하기 어려운 경우, 상대 남성과 교제를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상대 남성이 출산을 반대하고 낙태를 종용하거나 명시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경우, 다른 여성과 혼인 중인 상대 남성과의 사이에 아이를 임신한 경우, 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경우, 아이를 임신한 후 상대 남성과 헤어진 경우, 결혼하지 않은 미성년자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과 같이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7]를 열거하고 있다. 또한 이렇듯 열거된 이유들이 삶의 면면에서 낙태갈등상황을 마주한 여성의 모든 고민을 담을 수 없음 또한 인정하고 있다. 결국, 형법 제269조 제1항이 임신기간 전체에 걸친 모든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모자보건법 관련조항이 형법 제269조에 대한 위법성 조각사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필요 이상으로 침해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사법작용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권리를 갈등관계로 왜곡해


헌재는 2010헌바402결정의 판례를 들어 낙태죄 조항이 모체와 태아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서 왜곡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이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그 방향을 달리하지 않고 일치”하는데, “국가가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지할 경우, 태아의 생명권은 보호되는 반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완전히 박탈되”며, “국가가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할 경우,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보호되는 반면 태아의 생명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국가의 입법조치를 매개로 하여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관계에 놓이는 방식으로 왜곡된다는 것이다.[8]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의 대결 구도는, 남성 파트너, 가족, 국가가 낙태죄를 수단으로 하여 여성의 섹슈얼리티, 자기운명결정권과 재생산권을 통제하는 지점”[9]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봐야 할 문제이다. 이는 낙태죄 관련 법조항들로 대표되는 국가의 공권력이 재생산이라는 맥락에 얽혀 있는 다양한 법익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익을 취사선택할 뿐만 아니라, 협력관계 혹은 조화로운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할 법익을, 갈등하고 대립하는 관계에 놓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대한민국이 성립한 이래로 계속되어온 국가의 재생산정책과 결합하여 볼 때 더욱 문제적이다. 한국 정부의 첫 재생산 정책은 단연 출산억제정책이었다. 1960년대 정부는 “우리집 부강은 가족계획으로부터”,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기혼 여성에게 피임 실천의 책임을 할당했다.[10] 한국 농촌 여성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피임시술 또한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닿아있다. 국가의 적극적인 출산억제 정책과, 남아선호사상의 얽힘 아래에서 여성들은 피임과 음성적인 낙태를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 1990년대에 새로운 인구문제 중 하나로 떠올랐던 성비불균형 현상은 국가의 통제와, 이에 따른 선택과 음성적 낙태, 전략적 피임의 결과였다. 다시 말해, 헌재 결정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구 억제정책을 시행하던 시기에는 국가가 낙태를 묵인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국가의 인구정책 여하에 따라 자기낙태죄 조항의 실제 가동 여부가 좌우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1] 자기낙태죄 조항의 실효성을 상기할 때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부각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가의 재생산 통치가 중대한 국면 전환을 맞는다. 즉, 국가 주도 재생산 통치의 방향이 출산억제에서 출산장려로 전환된 것이다. 다자녀 가구에 대한 정책적 혜택, 여성의 이른 결혼과 출산에 대한 장려, 혼인한 부부에 대한 난임(불임)시술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양극단에 있는 듯한 국가의 출산억제, 출산장려 정책은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여기서 다양한 재생산 통치의 수단을 통해 바람직한 가족의 형태, 국가의 존립에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인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의 이해관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태죄의 존재와, 위헌 결정과 폐지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입법 부작위 상황은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도구로서 규율하는 동시에 그 바깥의 여성의 삶을 비가시화하는 효과를 지속하고 있다.


[1] 크리스 한, 키스 하트 공저, 홍기빈 역, 『경제인류학 특강』, 삼천리, 2016, 41-42쪽

[2] 에우리피데스 저, 강대진 역, 『메데이아』, 민음사, 2022, 1361-1367행, 94-95쪽

[3] [ebook] 김동인, 『감자』, 성현사, 북큐브네트웍스 공급, 2009

[4] [ebook] 김동인, 같은 책

[5]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420쪽

[6]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419쪽

[7]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429쪽

[8]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422쪽

[9]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백영경 외 씀, 『베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 정치』, 후마니타스, 2016, 102쪽

[10] 장수정, 「여성의 몸과 주체를 둘러싼 정책적 담론의 형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4집 2호』, 37-70쪽, 2005, 55쪽

[11]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424쪽



참고문헌

심술, 「복수 複數의 여성들, 국가와 가부장제의 교차」

단행본

에우리피데스 저, 강대진 역, 『메데이아』, 민음사, 2022

크리스 한, 키스 하트 공저, 홍기빈 역, 『경제인류학 특강』, 삼천리, 2016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백영경 외 씀, 『베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 정치』, 후마니타스, 2016

전자책

김동인, 『감자』, 성현사, 북큐브네트웍스 공급, 2009

학술지 논문

소영현(So, Young-Hyun). 「식민지기 조선 촌부의 비/가시화; 친밀성 범죄와 여성범죄에 관한 메타적 성찰」 『동방학지』, 175권, pp1-24, 2016

소영현, 「여성범죄의 성정치—식민지기 성학과 성지식 그리고 여성범죄」, 『대중서사연구』 vol 28, no 2, 통권 61호 pp 187-223, 2022

장수정, 「여성의 몸과 주체를 둘러싼 정책적 담론의 형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4집 2호』, 37-70쪽, 2005

DB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2019.4.11.2017헌바127)』, 재판관 유남석 외

국가법령정보시스템, 형법, 2023.3.1 열람

국가법령정보시스템, 모자보건법, 2023.3.1. 열람


편집위원 심술(seosi12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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