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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호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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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Mar 15. 2024

바꿀 수 있는 것, 그렇지 않은 것

<파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의 후속편 | 편집위원 파란

# 차분함, 용기, 그리고 지혜

 "신이여, 바라옵건대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함, 바꿀 수 있는 일에서의 변화를 만드는 용기,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우연히 책에서 이 문장을 접하고, 지난날의 망설임과 고민의 편린들이 하나의 형상을 맞추어 나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숱하게 나를 괴롭혔던,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원망, 변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감내해야 했던 방황의 순간에서 필요한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풀어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 나는 부모와 나의 관계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느낀 점들에 관한 글, <파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를 썼다. 글의 핵심은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존재가 있음에도, 우울과 두려움이 우리가 가는 길을 막더라도, 오롯이 자신을 지켜내고 삶을 살아낼 것"이었다. 내 지난 삶을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했던 존재는 사회와 가족, 그리고 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었고, 역설적으로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던 존재도 분노와 원망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양날의 검은 날카로워져 끊임없이 마음을 찔렀고, 동시에 세상을 향한 적대감이 되었다. 세상은 너무나도 두렵고 악의로 점철된 곳이었기에, 나는 늘 위축되고, 경직된 모습으로 일관했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과의 사회관계는 삶을 갉아먹는 존재로서 작용하는 것 같았기에, 되도록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않고 나를 지키려 했다. 어설픈 헛웃음과 자학적인 유머 속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속내를 숨겼기에, 사회활동은 언제나 고단한 노동으로 다가왔다.


#바꿀 수 없는 것, 바꾸면 안 되는 것; 

불완전한 서로의 세계로 모든 걸 끌어안고 가자!

 얼마 전 사회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RA로 근무하며, 고등학교 학생들의 설문 조사 검수를 진행했다. 해당 설문에는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항목이 있었다. '부모님과 나는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부모님은 나와 얼마나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지', '부모님과 나는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부모님과 나는 중요한 일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지', '부모님과 나의 친구/선생님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시되었다. 설문의 답변을 확인하며, 나는 '나와 내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끔찍했던 고등학교에서의 기억들, 진로를 상의하며 끊임없이 충돌했던 사례, 그리고 나의 의견이 무시되었던 대화 과정 전반을 돌이켜 보면, 앞에서 제시되었던 질문 중 어느 하나에도 선뜻 긍정적인 응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원망 섞인 목소리로 이런 말들을 엄마에게 던지면, 당신의 대답은 늘 "바꿀 수 없는 것에 너무나도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라는 맥락을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분노했다.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고통도 없었을 텐데, 당신은 나를 아수라 속에 던져버렸음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한단 말인가?”라는 물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숙고할수록, 문제의 원인은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질문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여유 또한 생겼다. 나는 부모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하는가. 나는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나는 부모의 중차대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함께 고민했는가. 선뜻 답할 수 없었다. 결국 서로에게 좋은 가족으로서 기능하지 못했던 과거의 추한 기억을 끄집어내 서로를 비난하는 무의미한 활동의 연쇄를, 나는 자행하고 있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앞으로의 가족 관계에 있으며,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호출하여 서로의 불완전함을 비난하는 것은 우리의 ATP를 헛되이 사용하는 소모적인 일이다. 요컨대 바꿀 수 없는 것에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듯이, 타인 또한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완전한 서로의 세계로 모든 걸 끌어안고 가자"라는 노래 가사가 존재하듯, 인연으로 이어진 너와 나의 관계, 인간이란 범주에 속한 우리들의 관계는 불완전함을 전제하고 있다. 상대의 완벽함을 바란다면, 상처받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국가로 범위를 넓혀서, 불완전함에 대한 담론을 다시 살펴보자. 국가적 차원에서 '오류 없음'을 전제하는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와 독재로 귀결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무결성-영토의 무결성, 사상의 무결성, 정부의 무결성 등-과 하나의 정답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몇몇 전체주의 사회와 독재국가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이를 판결문에 명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치(旗幟)를 내세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와 달라서 정부의 무류성(無謬性)을 믿지 않으며 정부는 개인이나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가 오류를 범한 경우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하는 역사적 경험을 전제로 하여 정부가 국민의 비판을 수렴함으로써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표현의 자유가 헌법상 가장 중요한 기본권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통치권자를 비판함으로써 피치자가 스스로 지배기구에 참가한다고 하는 자치정체(自治政體)의 이념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헌재 1992. 2. 25. 89헌가104, 판례집 4, 64, 93-95 참조).“


 다양성, 그리고 오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임은 이미 명문화(明文化)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편리하게 획일적 가치를 추구하고 소수자를 탄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교황청에서 동성 커플의 축복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철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성 커플의 축복 기도가 이루어진 성당과 신부에 대한 공격이 쇄도한다. 9년 넘게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장애인의 합법적인 대화 요청과 건의에 응하지 않았던 서울시와 서울메트로의 만행에는 침묵하면서, 참다못해 거리로 나온 이들에게는 혐오와 처벌의 준거를 대입한다. ‘카르텔’이란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단어로 규정지어진 연구자들과 학생들은, 예산 삭감과 관련된 의견을 표출하면 얼굴이 틀어막힌 채 사지가 들려 퇴장당한다.

 다양성이란 가치가 너무나도 당연해진 2024년의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다름에 대한 존중이 체화되지 못해 나타나는 부조리가 만연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비주류적 이야기로 치부되는 현실이 부끄럽고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상호 간의 차이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의견 표출과 수용이 가능한 공론장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절대 바꿔선 안 되는 가치일 것이다.


 "Every time someone steps up and says who they are, the world becomes a better, more interesting place." (매번 사람들이 일어나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때마다, 세상은 좀 더 흥미롭고, 더 나은 곳이 된다)-드라마 브루클린 나인-나인에서 흑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이겨내고 서장이 된 레이먼드 홀트의 대사를 발췌함.


#바꿀 수 있는 것, 바꿔야 하는 것; 지속가능성을 상실한 사회와 개발자유주의

 앞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 바꾸면 안 되는 것'을 보았다면, 이제는 우리가 전력을 다해 바꾸어야 할 것들에 대해 논할 차례이다. 바꾸어야 할 것은 도처에 편재해 있다. 왜 우리 사회는 미래를 팔아 현재를 버텨내고 있는가. 왜 죽지 않고서는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불행한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나와 가족의 관계,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구분하고 자문하며, 나 자신으로부터 가족과 사회로 사고의 범위를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 부모는 나의 학업에 깊숙이 -그것이 부모/자식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길 정도로 집요하고 강력하게- 관여해야 했을까? 가족 대신 국가가 교육과 양육 과정 전반을 책임지거나, 가족이 아닌 다른 주체로 교육을 위탁할 수는 없었을까?


 앞선 질문들에 대한 원인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찾았다. 선대로부터 별다른 자산을 물려받지 못해, 오롯이 당신들의 근로소득으로만 가정을 꾸리고 운용해야 했던 우리 부모는, 더 이상 근로소득이 없게 되는 시점이 도래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내심 지니고 있었다. 주택 이외의 자산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들은 미래와 노후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가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노후 대비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오래전 그들이 외환위기 당시의 한국 사회를 목도했을 때 사라진 지 오래다. 헌신짝처럼 임직원들을 해고하던 기업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생계유지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했던 국가의 모습을 사회초년생의 위치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룬 상황에서, 그들이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의 미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자식은 고달픈 인생을 살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녀 양육과 노후 대비 전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전무한 사회 안전망, 오랜 기간 동안 확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의 부재와 같은 요건들이 상호작용하여, 나의 부모로 하여금 대출을 감행해서라도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 거주하고,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자녀를 감시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토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고, 지속 가능성을 상실한, 고통이 만연한 사회의 원인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결혼과 출산, 양육 활동과 같이 사회 구성원을 유지하고 확보하는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을 '사회 재생산 활동'이라고 부른다. 사회 재생산 활동은 인구 증감과 노동력 변화 등의 가시적 결과를 낳는다.

지금, 동아시아 3국의 사회 재생산 체제는 세계경제의 침체로 인해 그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다. 특히 20세기 말의 외환위기와 21세기의 대침체를 겪은 한국의 사회 재생산 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활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서구권 국가와 구별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서구권 국가들은 사회 재생산 체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 국가가 정책을 주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였다. 특히 복지국가로 불리는 북유럽 국가는 전반적인 사회 재생산 체제의 사회적 보장과 관리를 '개인의 기본 권리' 단계에서 보장하여 탈상품화와 탈가족화, 그리고 사회 재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실현했다.


 장경섭은 한국을 지배하는 사회 재생산 체계를 '개발자유주의'라고 명명하였다. 개발자유주의는 국가가 주도하는 질서 하에 자본주의 산업화 및 경제발전이 진행되는 개발주의, 사회정책 및 복지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유주의적 속성을 함께 고려한 개념이다. 해당 개념은 '사회정책의 기획과 설정을 경제 정책과 유사하게 시행한다', '가능한 많은 사회집단을 경제 발전에 동원한다', '노사정간 협의 과정에서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반-노동적 개입을 지속한다', '사회 보장과 공공부조가 필요한 이들에 대한 국가적 부양의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전가한다', '사회서비스 제공의 주체를 국가가 아닌 민간으로 위탁하여 사학 및 병원 재벌의 등장을 촉발한다'와 같은 특징들을 함의한다.

 요약하자면 경제개발과 산업구조 개편과 같은 분야에서는 '국가 주도'의 역할을 강조하고, 공공부조와 사회복지의 측면에서는 '개인 책임'의 역할을 강조하며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 한국 개발자유주의의 핵심이다.

 개발자유주의는 시민에게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부과했다. 경제 호황기에는 경제적 부담을 시민이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개발자유주의적 국가 운영이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이 둔화하며, 사회복지 영역을 개인이 책임지는 것에 무리가 발생했다. 국가는 시민이 가진 사회 재생산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복지와 부조를 확대하기보다는, 학자금대출과 전세금 대출 등의 금융제도를 확대 적용하였다. 금융제도의 확충은 사회 재생산재 생산이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복지와 공공부조에 대한 개인으로의 책임 전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으로 인한 자녀 양육 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높은 이율로부터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은, 개인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국부를 늘리는 경제 정책적 성격을 띠고 있다.


 윤상우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의 정책 기조를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띤 정책이 '발전'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의미이다. 한국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노동 개혁 및 시장구조 개편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기능해 왔으며, 개혁의 방향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하향식으로 전개되었다. 신자유주의 모델의 이론적 원칙은 '국가가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이나, 한국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국가가 시장 작동에 깊숙하게 관여하면서도 '감세 위주의 조세 정책과 노동 유연화, 소극적 복지의 측면'에서만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실제 정치와 행정 부문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는 대처 내각과 레이건 행정부이다. 이들은 시장의 효율적 자원 배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시장 원리의 확대 적용을 주창했다. 공공 서비스와 복지 정책,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민영화를 골자로 한 정책들을 대거 활용한다는 점, 긴축주의 통화정책과 감세 중심 조세정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핵심 특성이 '국가개입의 최소화'임을 도출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전반에서 '국가 개입이 최소화'되지는 않았다. 특히 한국의 경우가 그러한데, 외환위기 이후 구제 금융기관과 전 세계적 압박에 의해 정부 주도하에 금융 시장을 개방했다는 점, 정부가 노동, 공공, 기업, 금융 부문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주체로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국가개입의 최소화가 실현되지 않았음이 자명하다. 한국 정부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기보다는, 그 형태를 발전주의, 개발주의적 형태로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행태는 진보 정부 집권 시기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출자총액제한 폐지, 해외자본 개방 등 대외 개방과 자유화, 규제 완화로 표상되는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보수 정부에서는 민영화, 규제 완화, 감세 정책, 대기업의 출자총액제한 완전 폐지, 금산분리 완화 등 해당 기조를 더욱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신자유주의적 움직임은 이제 시장의 자유화를 위한 '도구'로서 작동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정책 자체가 '국가의 전략이자 핵심 목표'로서 사회 전반에 깊숙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윤상우는 한국에서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고 핵심 이데올로기로 거듭나게 된 계기로, 국가 주도적 정책 시행과 시장 주도적 신자유주의의 기묘한 결합을 꼽았다. 상충하는 가치가 결합하여 나타난 이유는 공통적인 자세와 목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하고, 낙수효과를 맹신하는 자세', '노동권과 복지에 대한 경시', '민주적 정책 이행보다는 엘리트 관료 중심적 경제 운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그 공통 특성으로 뽑았다.


 요약하자면 국가 주도 발전주의와 시장 주도적 신자유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한국 정부의 정책들로 인해 저출산과 노동인권 침해 등의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국가 주도 발전주의, 시장 주도적 신자유주의의 결합과 상호작용은 사회 재생산재의 생산을 어렵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며,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지속 가능성과 관련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요컨대 작금의 한국 사회가 당면한 대다수의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지속 가능한 사회를 원한다면 바꿔야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가치들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더 나이 든 우리에게

 모든 유기체는 '늙어감'이란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인'이 내포한 부정적인 의미를 경계하기에,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노인'이라는 단어 대신 '고령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늙어감은 부정적인 함의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갈수록,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하고, 깨달음은 지혜로 귀결된다. 나이 들어감의 과정은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지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을 선사한다. 2024년의 우리는 2023년의 우리보다 더 늙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름과 건망증 그리고 약해진 체력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이해력과 분별력 그리고 지혜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생각이 자라는 것은 아니겠으나, 흐르는 시간을 버텨내지 않고서 지혜를 얻기는 어렵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분별력 있게 대처할 수는 없다. 머물러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하며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쓰기보다는, 얻어갈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다. 올 한 해도 더욱 늙어감으로써, 당신에게 차분함과 지혜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용기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꿔 나감으로써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참고문헌>

 1)김마리, 신세계, 2023.

 2)장경섭,  ⌜개발국가, 복지국가, 위험가족: 한국의 개발자유주의와 사회재생산 위기⌟, 『한국사회정책』 제 18집 제 3호, 2011, 63~90쪽.

 3)윤상우,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발전주의적 신자유주의화: 국가의 성격변화와 정책대응을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제83호, 2009, 40~68쪽.

 4)위의 논문,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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