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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4호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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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Apr 16. 2021

되풀이되는 고통 속, 언젠가 영지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편집위원 빙봉

 

                                                                                                                                                                

  ‘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늘 연달아 괴로웠고 무엇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행복, 그 무언가를 위해 온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유년의 서글픔은 청소년의 아픔을 거쳐 청년의 자괴에 다다랐다. 그건 때론 나 때문이기도, 나 아닌 다른 것 때문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둘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을 분간하기가 어려워서 쥐고 있는 전부를 손아귀에서 놓아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죽었다. 함께 살아간다면 꽤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스러지는 것을 휴대폰 화면으로 목격할 때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죽고 싶진 않지만 살고 싶지도 않다고 말이다. 무엇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참혹해지는 이 세상에 내가 왜 발 디디며 살아야 하느냐고, 곰곰이 따져볼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거대한 폭력의 굴레를 두 눈으로 목격할 때도 그러했다. 나도 언젠가 저 쳇바퀴에 얻어맞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나를 짓누를 때, 그런데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을 때 온몸에 힘이 빠졌다.      



  살아야 하는 이유보다,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더 많아졌을 때쯤 영화 <벌새>를 보았다. 자의는 아니었다. 영화에 문외한인 나는 좋은 영화를 찾아내는 안목도, 찾아보는 근성도 없었다. 그저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고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타인의 평가를 귀동냥하여 느릿느릿 영화 제목을 검색창에 타이핑했다. 2018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 최초로 <벌새>를 공개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 중학생 은희는 방앗간을 하는 부모님 그리고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온 가족이 자신들의 문제와 싸우고 있을 동안, 은희는 오지 않을 사랑을 찾아 섬처럼 떠다닌다. 이런 은희의 삶에, 그녀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어른이 찾아온다.”     








  이 짧고 간결한 소개에 부득불 설명을 덧붙인다면 ‘유일한 어른’은 대학을 다니며 은희의 한문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김영지 선생님일 테다.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며 툭하면 은희를 구타하는 오빠와 그런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는 부모님,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우선이라 은희에게 늘 거짓말을 시키는 언니,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은희를 그저 엑스트라 정도로 치부하는 학교 선생님들과 달리 영지는 은희의 말을 찬찬히 듣는다. 은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묻고 부끄러워하는 은희에게 나도 그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영지는 은희에게 유일한 ‘어른’의 존재가 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당혹스러웠다. 가학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몇 번이고 끊어 보았다. 영화가 내비치는 전체 풍경을 응시하기 망설여졌다. 하는 일마다 좌절되고, 이유 없는 짜증이 가득하지만 또 어떠한 이유에선 그 짜증이 당연한 열다섯 살의 은희를 보았다. “너는 너만 생각한다”는 친구의 날 선 말에 “내가 그래?”하고 으쓱하다가도 이내 불안한 얼굴로 ‘이런 저도 빛날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 그 청소년은 나를 닮아 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자라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칭찬받다가도 얻어맞는 그 어린 여자아이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저 아이도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거라고.

  그 당시, 나는 우연히 박민정의 단편집, <바비의 분위기>를 읽던 와중이었다. <벌새>에서 은희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곤란했듯이, <바비의 분위기>는 첫 장부터 고역이었다. 현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소리치다가도 그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완결되어버리고 마는 박민정의 글쓰기는 오묘한 위로와 피로를 선물했다.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세계를 감각하고 있다는 위안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 대한 나의 절망을 한층 심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책 뒤편의 소개 글에 쓰인 것처럼 “불투명해서 더 정밀하고, 따뜻해서 더 아픈” 이 글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를 읽어내게끔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얼굴을 <벌새> 속 은희, 그리고 박민정의 글 <모르그 디오라마>와 <바비의 분위기>에 덧씌울 작정이다. 그들의 면면을 훑으면서 그것들로부터 나를 찬찬히 읽어보고 싶었다.   


        

  지난하게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 <모르그 디오라마>      


  <모르그 디오라마> 속 ‘나’는 아주 어렸을 적 잠깐 죽었다 살아 돌아온 적이 있다. 혈액형 검사를 두고 친자인지를 의심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길이었다. “나는 UFO라기보다는, 정확히는 UFO에 다녀왔다고 봐야지. 날지 않았으니까, 거기는.”하고 말하면 또래 아이들은 경탄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거기가 어디였는지, 왜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묻지만 ‘나’는 결코 적절한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그저 “팟. 하얀 플래시가 터졌고 그때 나는 죽었어.”하고 답할 뿐이다. 잠깐 죽었을 때 나는 눈이 멀었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어른이 된 ‘나’는 대학 수업에서 우연히 죽은 소녀의 시체를 둘러싸고 구경했다던 모르그 디오라마를 공부한다. 그건 수척한 얼굴을 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 교수의 연구 분야였다. “신원 미상의 시체를 공개하여 유족을 찾는 일이 목적이었으나, 결국 파리 시내의 가장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었던 모르그 디오라마”(18p)에 대해 공부했던 학자. 스펙터클의 폭력에 대해 연구했다던 그 교수는 FBI의 사직감식반에서 일했다고 한다.     

  “FBI 이후 내 삶의 질은 다섯 단계쯤 낮아졌죠. 그 사진들이 잊히지 않으니까요.”(18p)     


  졸업 후, ‘나’ 는 “그 회사 아직도 있어?” 따위 소리를 듣는, 퇴락일로를 걷는 검색 엔진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점점 규모를 줄여가던 회사는 결국 국내 웹툰 회사와 통합한다. “저질 성인물 웹툰”을 업로드하고 “유사 성매매 광고물”이 팝업으로 뜨는 회사였다.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것을 만지는 사람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니.”(15p)     

  어느 날, ‘나’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 회사의 영상 아카이빙 사이트로 불법 스너프 영상들이 대거 공유되는 것을 목격한다. “저질 성인물 웹툰” 작가들도 ‘예의상’ 덧댔던 모자이크가 영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 개 모두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 세 건은 정황상 강간이었다. ‘나’는 동영상 아카이빙 서비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영상 전부를 돌려봐야 했다. ‘인도코끼리-12, 인도코끼리-M14, ….’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암호가 즐비한 스너프물을 말이다.      

  업로드한 자를 추적해 경찰과 함께 만나보니 키가 작고 온순한 얼굴을 한 중학생 소년이었다. “국산 아니면 볼 필요가 없”고 “전부 가짜”기 때문에 “그래도 진짜”인 것 중 “마음에 드는 것들만” 추려 올렸다고 했다. 경찰은 그런 소년을 비웃으며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들 물건이나 취급”한다고 말한다. 어른들 물건? “나는 초 단위로 범죄 영상을 멈추며 어디까지 성기가 드러나는지 확인해야” 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선명한 여성의 얼굴과 카메라를 등진 남성이 나누는 다정한 대화, 그리고 여성의 벌거벗은 몸을 기록한다.      

‘나’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낸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담센터를 찾아가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 일지’를 써야 한다는 상담프로그램에 나는 일지를 제출하지 못한다. 찬찬히 ‘나’의 PTSD를 되짚는 상담사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연다. 고작 얼마 전 “누구 하나 성범죄 피해자 아닌 사람 있을까?” 되뇌는 동기 앞에서 “나는 아닌데?”하고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          

 

  ‘나’의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교복을 입은 앳된 중학생 소년이 ‘나’를 유인해 교복으로 눈을 가리고 옷을 벗겨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나는 <모르그 디오라마>의 마지막 문장,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를 읽자마자 책을 덮고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단편 속 주인공을 나와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 몇 살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때 나보다 여섯에서 열 살이 많은 남성 청소년들에게 발가벗겨져 구경 당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어려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옷을 벗고 보여주면 장난감을 양보해주겠다던 그 애들의 말에 웃으며 자발적으로 올라가 옷을 벗고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을 동네 언니가 옆에서 그들을 말리고 있을 때 나는 웃으며 생각했다. ‘저 언니는 우리가 이렇게 즐겁게 놀고 있는데 왜 울고 있지?’ 그 애들은 장난감은 물론이고 돈을 줬다. 네 살이 안 되었을 내가 돈을 가지고 있는 걸 의아하게 생각한 엄마아빠에 의해 모든 것이 종결됐다. 동전을 마트 쓰레기통에 버리며 “00아, 이건 나쁜 돈이야. 절대 받으면 안 되는 돈이야.”라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생각난다. 은색 철제 쓰레기통의 뚜껑은 빙글빙글 돌았다.


  가끔 나는 이 기억들이 내게 벗겨낼 수 없는 약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떨 땐 말끔히 잊고 지내기도 한다. 누굴 용서하지도, 동정하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나는 오도카니 앉아 같은 기억 변두리를 맴돈다. 하지만 이 생각들은 결국 한 가지 궁금증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어렸던 남자아이들이 어떻게 유아였던 여자아이의 몸을 구경하고 돈을 주었을까. 아주 어린 여자아이의 포동포동하고 ‘아기 같은’ 몸을 보다가도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그래, 누군가는 이런 몸을 보고 돈을 주었더랬지. 나체의 나는 어떤 포즈를 취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2020년, 국민일보에서 보도한 n번방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죽고 싶진 않지만 살고 싶지도 않다는 감각은 늘 두루뭉술하게  내 몸과 마음 언저리를 떠돌았지만 그렇게까지 생생한 감각은 n번방 사건이 처음이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몸을, 유린당하는 신체를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유통하고 판매하는 사람들. 나 역시 모르그 디오라마의 ‘나’처럼 죽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의 상흔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박사방’을 검거했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을 검찰과 경찰을 생각하면 혀를 차고 싶어진다. 그것뿐인 줄 아세요? 아직도 수많은 텔레그램 방에서 어린 여자애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킬킬거릴 사람들이 있다고요. 아직도 너무 많은 이들이 생각만 해도 온몸이 서늘해지는 일들을 겪는다. 영웅담처럼 느껴지다가도 취기가 올랐을 때 떠올리기라도 하면 금방 눈물이 고이는 그런 기억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더 심각하지 않아서 ‘다행’인 일들 말이다. 폭력의 역사는 빙글빙글 돈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오히려 끔찍하게 변해가면서. 나의 기억이 말해질 수 없고, 그뿐이라 다행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했다. 피해자가 되고 싶진 않다고 하더라도, 다행이라고는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았다.      

  <벌새>에서 은희 역시 자신의 삶을 ‘다행’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놓지도 않는다. 영화 내내 은희가 경험하는 폭력도 우리의 것처럼 명확하면서도 은근해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저렇게 공부 못하는 애는 나중에 파출부나 할 거라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음성, 외고를 준비하는 오빠를 눈에 띄게 싸고도는 엄마아빠,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가 이내 냉철한 얼굴을 하는 엑스 여동생 유리의 갈팡질팡한 태도, 자신을 곤혹스러운 상황에 밀어 넣고 히히대는 친구인 지숙의 얼굴은 자꾸 은희의 마음을 할퀸다. 순진무구한 피해자됨에서 자격 박탈인 은희는 그럼에도 무언가에 도돌이표처럼 얻어맞는다.      


 

  “가끔 그런 생각 한다. 내가 자살을 하는 거야. 오빠 새끼가 괴롭혀서 힘들다고 유서 남기고…. 근데, 그러면 내가 김대훈 새끼가 죄책감 느끼는 걸 못 보잖아. 그래서 죽고 나서 한 하루만 유령으로 있는 거야. 그 새끼 막 울고 아빠한테 혼나. 그럼 난 그걸 천장에서 다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엄마, 아빠 다 울고…. 그러면 막 상상만 해도 후련해.”

  “…….”

  “…….”

  “다들 미안해하긴 할까?”          


  늘 그렇듯 오빠에게 얻어맞고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고 지숙에게 말하는 은희의 음성은 그 되풀이되는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은희는 자신이 늘 손위 남자 형제에 의해 얻어맞는 일상이 우발적이고 단편적인 일화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걸 안다. 은희에게 도돌이표처럼 이어질 것이 분명한 오빠의 구타는 자신의 자살로만 보복될 수 있다. 두 소녀는 자신의 자살이 그저 오빠의 눈물, 아빠의 다그침, 부모님의 슬픔 정도로 귀결되는 것에 만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미안해하긴 할까?”라고 묻는 지숙의 음성 이후 오가는 두 청소년의 시선에는 그것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잔뜩 서려 있다. 자살을 논하는 지숙과 은희는 결국 자살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또다시 오빠에게 맞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극도의 통쾌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저 ‘하지 말라’고 오빠의 폭력을 저지하는 부모의 음성이겠지만 그것조차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결국, 은희는 오빠에게 반항하여 심하게 얻어맞고 “고막이 찢어”지지만 엄마의 걱정하는 얼굴이 두려워 “곧 나을 거”라고 말한다. 엄마의 안심하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곧 나을 거”라고, 예상이 아닌 결심을 하고 있는 은희는, 애석하게도 곧 낫지 않을 것 같다. 곧 낫더라도 그 상흔은 은연중에 되풀이될 것 같다.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폭력을 드러내는 이 역설은 ‘다 그런 거지 뭐’하는 권태에 젖어있다가 이내 벌떡 일어나 “왜 살아야 하지?”를 고민하게 하는 은근하고 무자비한 이 폭력의 세계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도 분간할 수 없는 - <바비의 분위기>     


  <바비의 분위기>에서 부모의 지지와 애정을 받지 못한 사촌오빠는 나약한 몸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묵살한다. 그저 사촌오빠는 그 폭력의 현장 속에서 움츠려 울고만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애인이 있는 여성을 오랜 시간 짝사랑하다 이내 상사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런 사촌오빠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유미는 그를 위로한다. 오빠는 엉엉 울며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보란 듯이 학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그녀’와 그 약혼자에 대해 털어놓는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들을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          


  오빠, 정신 차려. (…) 그녀는 오빠에게 보란 듯이 살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고.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었지만 유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아버지 말대로, 작은 아버지 말대로 내가 병신새끼라서 그런 거겠지. 그렇지?      

  오빠는 울먹였다. (…)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거야. 오빠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유미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8p)          


  매우 괴로워하던 사촌오빠는 어쩐 일인지 이내 그 사랑을 단념한다. 아니, 단념한 척을 하고 “서른 살이 다 되어서까지”(113p) 식음을 전폐하며 편지를 써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린다. 이후 로봇공학자로서 성공한 사촌오빠는 과거의 짝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에 어리숙한’ 자신과 ‘그 사랑이 과분했던’ 여성을 들먹이지만, 유미는 안다. 사촌오빠가 “그녀의 PC통신 아이디를 해킹하여 그녀의 사적 기록을 훔쳐보고 졸업을 목전에 둔 그녀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114p) 수재만 다닌다던 그 공학과에서 그녀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은 그녀의 남은 학교생활을 망가뜨렸다. 나아가 사촌오빠는 이내 여자의 얼굴을 한 로봇을 만든다. 그리고 그 로봇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얼굴을 닮았다고 묘사하며 그 여성의 PC통신 ID에서 따와 ‘바비’라고 로봇을 호명한다.      

  성형 수술을 받은 한 여성의 낯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비유하는 사촌오빠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적어도 <바비의 분위기>의 화자인 ‘유미’에게는 그렇다. 아버지에게  취미 생활을 모조리 부정당하고 존재마저 부정당하며 살아온 사촌오빠가 로봇공학자가 되어 사랑했던 여성의 ‘혐오스러운’ 얼굴을 재현하는 것은 유미를 자꾸 당혹스럽게 한다. 어린 시절 분명 자신의 친구이자 동정을 느끼게 했던 나약한 가족 구성원인 그 남성은 어느 순간 자신이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렸다. 유미는 어느 날 언쟁 중 이런 말을 한다. “인터넷의 혐오 발언이나 정치적 보수화 현상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어요. 해석학적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주체의 이미지는 이제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유저들은 이제 사이보그와도 같아요. 새로운 매체라는 기술의 종속변수로서 움직이고 있다고요.” 유미가 말한 ‘유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나는 왠지 그가 사촌오빠를 떠올리며 이런 말을 했을 것만 같다. 혐오 발화를 재생산해내는 사촌오빠는 단순히 매체의 이용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탄생시킨 종속 변인이자 매체가 그렇게 작동하게끔 하는 독립변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한 디지털 범죄도 그러했다. 범죄 그 자체 혹은 이를 은연중에 묵인하고 부추기는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자꾸만 등장하여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사람들은 종속 변인이자 독립변인으로 존재했다. 나는 아주 잔혹한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의 이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을 찔끔 공부한 이의 관성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여튼 나는 그들의 잔혹함 이면에 대체 무엇이 숨어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놔둔 걸까 생각했다. 제각기 너무나도 다른 개인의 세계, 그중에서도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그들의 세계를 가늠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를 진단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개인의 행위자성과 사회 구조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사회과학도로서 분석적일지도 모르는 이 사고방식은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들끓는 원망을 누구에게 분출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내 나는 이런 글을 쓴다.           


요절한, 괴로웠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가

그건 대체 누굴 위한 사죄인가,

무엇보다 무릎 꿇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이내 단념한다

엉엉 울면서          


무작정 가해자를 탓하지 말라는 나의 전언 앞에서 또 다른 나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탓하지 못하는 나는 모든 게 다 귀찮아졌고 그냥 눈을 감고 싶어졌다. 자꾸 내 앞에 당도하는 문제들을 저 멀리로 밀어내고 싶다가도 그런 내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은 흐려지고 자꾸 나는 아득한 그 속에서 눈을 게슴츠레 뜬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핑계가 나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변하는 세상 속에 어찌 됐든 발맞추어 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자꾸 도태되고 아둔해지는 것 같아 나는 <벌새>에서 은희가 영지에게 보낸 편지 속 문장을 되뇐다.    

 

“선생님,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은희를 괴롭히는 이들 역시 이따금 나약함을 드러낸다. 은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을 넘어서 짜증까지 나게 했던 친구 지숙도 실은 “너네 오빤 주로 어떻게 때리냐”고 물으며 은희와 오빠에게 구타당하는 일상을 공유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은희에게 곧잘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묵인하는 아빠와 오빠 역시 은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일상적으로 은희를 패는 오빠는 멋쩍은 얼굴로 “가서 용돈 써. 이상한 기념품 사지 말고.” 하며 은희에게 용돈을 건넨다. 아빠는 엄마와 싸우던 중 피를 흘리기도 하고, 은희의 수술 부작용을 듣고 눈물을 터뜨리기도 한다. 은희는 이들의 나약함과 그 이면을 파헤치기보다 그들의 다정을 웃으며 받아든다. 오빠가 준 용돈에 웃고 아빠의 애정 어린 말에 감동하기도, 지숙의 처지에 공감하기도 하며 그 사랑을 위태롭게 받아든다. 은희는 자신을 피해자 자리에 놓으려 애쓰지 않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이 어떤 피해에 또다시 놓여있는지 파악하기를 포기한다. 그럴 여력도, 그럴 생각도 없다. 영화 내내 은희는 “나만 생각하”다가 문득 영지에게 묻기도 한다. 이런 나도 빛날 수 있냐고 말이다. 은희의 세상 속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흐려지는 가운데, 은희 역시 자기 혐오의 굴레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영지를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서 다시 일어난다. 그때 일어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같은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과거의 사건은 지금의 사건과 긴밀하게 호흡하지만, 그것이 명료한 인과관계로 손쉽게 환원되지는 않는다.”     

 <바비의 분위기> 뒤편에 실린 추천의 말은 이렇게 책의 포문을 열고 있다. <모르그 디오라마>와 <바비의 분위기>에서처럼 끔찍한 사건들은 자꾸 반복되고 그 속에서 악인과 선인의 경계는 흐려진다. 나는 끊임없이 얻어맞음에도 피해자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피해자가 되길 거부하면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걸 위로하기라도 하듯 책은 선언한다. “오늘의 폭력은 해결하지 못한 어제의 반복이며 내일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것이다.”     

새로운 언어? 그 모호한, 모호해서 암울해지는 단어 앞에서 나는 왜인지 한 사람을 떠올린다. 바로 <벌새>의 영지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어두운 밤, 영지는 은희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고작 열다섯 살인 여자아이 앞에서 불이 붙은 담배를 쥐고 말이다. 누군가는 ‘퍽 감성적’라고 비웃을지 모르는 말을 듣고 은희는 영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리고 은희에게는 그 만남이, 연결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영지는 대학을 다니는 한문학원 선생임에도 은희는 영지를 깊이 신뢰하고 그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영지의 집 앞을 서성인다.      

  <벌새>에서 “차라리 자살하고 싶”은 은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서늘한 낯을 하고 길을 걷는 이유는 그가 삶을 포기할 별다른 의지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믿는다. 영지가 은희를 살게 했다고. 듬성듬성 난 풀이 전부였던 메마른 은희의 삶에 묘목을 심어준 사람은 바로 영지라고 말이다. 은희가 다시는 영지를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사실은 영원할 거라고. 영화 말미, “여기에 다 있어요”하고 중얼거리며 옅은 미소를 띠는 은희의 얼굴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은희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어딘가가 파열되기도 하면서 “곧 나을 거”라고 확언하는 사람이 되겠지만 영지와의 시간들이 “여기에 다 있”기 때문에 은희는 자신을 때려오는 것들에 반격하기도,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담배를 피우기도 할 것 같다.      


  영지를 생각하면 몇 해 전이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 당시 내 곁을 소란스럽게 지키던 나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괴로운 생각들이 스미지도 못하게 하던, 말이 많던 나의 사람들 말이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차분히 말하던 영지와 늦은 밤, 조그만 나의 방에서 혼자 침잠하던 나를 끌어내 뭐라도 말하게 했던 이들은 매우 다른 생김새를 지녔지만, 이들 모두는 왜인지 비슷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을 때 그 무기력 속에 침잠하기보다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보라고 말하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곱씹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영지는 왜인지 나의 일에 나보다 더 화내다가도 이내 나가떨어져 다 때려치우자고 호기롭게 선언하는 나의 친구들을 닮았다.      

  난 이제 살아야만 하는 명분들을 좇는 게 지겹다고 느낀다. 답을 내릴 수 없어 철학자들이 몇 세기간 주절거렸던 그 문제에 내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쉬이 답할 수 없는 이유들을 좇으며 암울 속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누군가의 영지가 되기 위해 살기로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영지‘들’을 만나기 위해 살고 싶다. 오빠에게 맞은 상처를 보고 “증거가 되”는 진단서를 끊어주겠다고 말하는 의사 같은 이들은 분명 인생에 도움이 되겠지만, 때로는 그 상처를 보고 곧바로 “누가 때리면 맞지 말고 맞서라”고 말해주는 이 역시 존재해야 한다. 어린 ‘나’ 앞에서 흡연하면서 꿈꾸듯 말을 잇는 사람들. 민중가요를 부르며 자신의 팔을 흔드는 사람들. 얻어맞으면 그대로 때려주라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필요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 때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지만, 나는 대신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영지의 이 편지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신호이기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이 말들을 건네주었을 때 곧바로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하기 위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하는 이 세상이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살기로 한다.




편집위원 빙봉(joliebin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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