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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4호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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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Apr 17. 2021

그 세상에서 우리는: 김초엽과 정세랑의 SF 세계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편집위원 연자

간단한 유전자 편집 기술의 보급, 지구상 거의 모든 종에 관한 유전체 지식과 ‘미니 랩(lab)’의 보편화로 누구나 쉽게 유전자 조작 생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는 인간배아 디자인이 가능해셔 인간 배아 시술이 유행했다. 별도의 인공 자궁에서 ‘의뢰받은’ 아이들을 키웠고, 기계와 로봇으로 신생아들을 양육해 6개월이 되었을 때 의뢰자들의 현관 문 앞에 아이를 안은 보육로봇과 유전자 검증 서류가 함께 도착했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


1. '오늘의 SF'

202N년. 어쩐지 어릴 때 만화영화 속 미래사회 모습과 함께 등장할법한 숫자인데, 어느덧 현재가 되었다. 우주와 외계행성에 대한 비밀이 속속 드러나고, 개인 우주선이 보편화되어 공중을 이리저리 쏘다니고, 밥 대신 알약을 먹는 사회. 혹은, 거대한 우주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살아가는 모습. 어쩌면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수많은 내가 존재하는 세상. 상상 속 202N년과 다르게, 우주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며 이곳의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 밥을 먹는다. SF적 상상이 현실에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어떠한 세계 속에서는 반대로 흘러넘쳤다. 바로 활자와 작가의 상상으로 빚어진 소설의 세계다.     


실제로 최근 2, 3년 동안 한국 SF소설이 유독 많이 출간되고 주목받았다.[1]  2019년 여름에 출간된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20년 한국소설 전체 판매량 2위를 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를 비롯해 김보영, 정세랑, 정소연, 윤이형과 같은 작가들이 각각 발표한 SF소설들 역시 사랑받았다. 서점의 온·오프라인 매대에서 각양각색의 표지의 SF 신작소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품의 영역과 독자층이 확대됨에 따라, 2019년에는 정세랑, 정소연 작가 등이 편집위원이 되어 국내 최초로 한국 SF소설만을 다루는 무크지[2], <오늘의 SF>가 창간되었다. SF는 더이상 소수 마니아의 장르가 아님을 보여주는 소식들이다.




한국에서 최근 SF소설들은 왜 이토록 많이 읽히는 것일까. SF소설의 저변이 확대되는 현재의 흐름의 중심에는 포스트휴머니즘, 에코페미니즘 등 다양한 ‘대안적’ 상상이 결부된 SF소설이 있다. 비판적 포스트휴먼 담론이 내장한 포스트젠더와 페미니스트 시각은 최근 ‘페미니스트-독자 시대’를 맞이한 변동(특히 한국문학 내부에서의 변화)과 관련하여 SF를 활발히 읽어내는 데 활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다시 SF문학 내부의 흐름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SF작가들은 대부분 비(非)남성인데, 이때 창작의 주체가 여성이기에 여성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재현이 이루어지고,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궁무진한 사고실험을 통해 미래에의 희망이 적극적으로 모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3]  그래서일까. 최근의 한국 SF소설의 영역은 여성 작가들과 수많은 여성 독자들에 의해 넓혀지고 있고,[4]  그 가운데에 김초엽과 정세랑이 있다.


김초엽과 정세랑은 각자의 매력이 묻어나는 문체와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러나 동시에 두 작가가 쓰고 있는, 또 쓰고 싶은 소설의 모습은 어쩐지 꽤 맞닿아있다. 자유로운 SF의 세계 속에서 두 작가는 지금까지 전면에 나온 적 없는 주인공들을 통해 섬세한 고민을, 때론 과감한 상상을 글로 풀어낸다. 그런 두 작가의 모든 글이 너무 소중해, 비평을 위한 작품을 추리기란 쉽지 않았다. 탐사대원에게 조사할 별의 위치나 크기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기준들을 차치하고서 갖은 빛깔로 나의 온 신경을 사로잡는 별에 착륙해보고 싶은 헐렁한 마음이랄까. 그렇게 내게 가장 반짝여 보이던 김초엽의 단편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정세랑의 단편소설 <리셋>을 골랐다. 두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아름답고 경이로운 두 작가의 세계를 탐험해보자.


*두 작품의 내용 상당 부분을 포함했으니 스포일러에 주의할 것.
** 일러두기: 본문에 등장하는 “”안의 표현은 작품 속 표현과 문장을 그대로 직접 인용한 것.



2.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 김초엽이 그려낸 ‘함께 맞서고 싶은’ 마음

글의 첫 페이지에 삽입되었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속 세상을 다시 떠올려보자. 다른 SF작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디자인된 사람’이 사는 세상 말이다. 이처럼 유전자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과 같은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유전적 형질로 발현되는 질병과 장애를 ‘조절’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픈 곳이 생겨도 기술을 이용해 쉽게 복구되고, 상흔은 말끔히 사라진다. 인공지능 로봇이 매일 ‘건강’상태를 체크해주고, 온도, 습도, 채광 등을 고려해 변화하는 신체리듬에 적합한 공간을 유지해주는 광경은 이미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그만큼 건강하게 디자인된 삶은 SF세상 속에서 쉽게 구현된다. 이곳에는 상처도, 아픔도, 질병도, 장애도 없을 것 같다. 과학과 기술이 선보이는 ‘밝은 미래’가 바로 이런 모습일까? 김초엽의 작품 제목에 나오는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이 밝은 미래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릴리와 올리브가 마을을 설립한 이래로,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성인식을 거친다. 성인식 당일에는 마을 아이들의 축하 속에서 이동선을 타고 ‘순례’를 떠났고, 순례자들은 시초지에서 순례를 하다 1년 뒤 귀환의 날에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어느 귀환의 날, 마을에 사는 데이지는 자신의 세상에 “균열”이 이는 경험을 한다. 시초지에서 돌아온 남자의 얼굴에서 자신이 마을에서는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감정을 느낀 것이다. 데이지의 질문에 띄엄띄엄 답하며, 그는 ‘시초지에 두고 온 것’ 때문에 슬프다며 울었다. 처음 보는 표정과 울음소리. 그에게서 데이지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함과 절망이 전해졌다.      


그날 이후 데이지는 미묘하게 거슬리던 사실을 떠올렸다. 떠난 사람보다 언제나 돌아오는 사람이 적었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시초지는 어떤 곳일까. 그가 거기에 두고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잔잔하던 데이지의 삶 속에 파동이 일었다. 고민의 실마리를 찾아 각종 기록이 모여있는 도서관에 들어가서야, 마침내 데이지는 올리브가 남긴 기록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21xx년. 올리브는 데이지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시초지, 지구에 왔었다. 마을의 진실과 함께, 올리브는 릴리의 딸로서 엄마의 과거를 알고 싶었다. 시초지의 ‘이타사’라는 도시에 착륙한 올리브는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 이타사에는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이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올리브는 어딘가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거리를 걸을 때도, 릴리의 기록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갔을 때도 사람들은 올리브가 마치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한참 만에 올리브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얼굴에 있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는 것. 그마저도 직접 얼룩에 대해 묻는 노인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동정과 혐오가 섞인 낯선 시선이 얼룩에 머문다는 것은 “마을에서는 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으니까.      


이타사는 화려한 축제가 밤마다 이어지는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도시 외곽은 그렇지 않았다. 중심으로 갈수록 밤도 낮처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외곽으로 갈수록 밤에도 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삶을 가르는 요인은 단 하나였다. 태생 시술을 성공적으로 받은 ‘개조인’인지 아닌지, 그 차이였다. 지구에서 올리브는 ‘얼룩을 가진 비개조인’이 되었다. 올리브는 얼룩이 “대체 무슨 문제”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얼굴에 커다란 얼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처럼 취급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개조인이라고 불렀다. 올리브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비개조인들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능이 낮거나, 외모가 흉측하거나, 키가 작고 왜소하거나, 병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분류에 따르면 올리브도 비개조인이었다.


개조인-비(非)개조인의 구분은 단순히 두 집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를 만들었다. 비개조인들만이 계속해서 노동하는 것을 당연한 질서로 만들었고, 서로 다른 층위에서 살게 하였다. 올리브가 느껴보지 못한 관계였다. 마을에서 올리브의 얼룩은 그가 다르게 인식될 어떠한 정보 값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올리브의 일부였다. 올리브뿐만 아니라 마을에 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특징만으로 배제되지 않았다. 얼룩이 있어 불쌍한 사람이나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올리브는 그저 올리브였다. 마을이 그토록 행복했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

그쯤, 올리브는 델피를 만나게 됐다. 당시 올리브는 릴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시 외곽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술집들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델피는 그중 한 곳의 바텐더였고, 올리브에게 주방 보조 일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생계유지와 조사를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델피와 함께 하며 올리브는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포개어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게 구는 델피가 올리브에게만은 다정한 모습을 보였고, 마을에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델피의 이름을 올리브는 자주 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올리브와 델피는 분명 서로 정말 달랐지만, 지구의 똑같은 부분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이름이 너무 흔한 탓에 정작 릴리에 대한 조사는 진척이 없었는데도, 올리브가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이타사 외곽의 술집에 남아있던 이유는 아마 델피 때문이었다.


한편, 둘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올리브는 영 모으기 어려웠던 릴리의 정보를 우연히 듣게 된다. 델피가 그 릴리를 알고 있던 것이다. 델피는 그에게도 올리브와 같은 얼룩이 있었다며 덧붙였다. 그 단서를 시작으로, 올리브는 델피와 함께 릴리의 기록을 찾아다녔다. 둘이 듬성듬성 모아 이은 기록에 따르면, 릴리가 지구에서 살던 때는 유전과학기술이 발달해 인간배아 디자인 시스템이 개발되던 시기였다. 윗세대로부터 더욱 ‘아름답고’ ‘건강한’ 유전자만 골라 태어나는 시대. 개조인으로의 변화 속에서 올리브 역시 디자인되어 태어난 것이었다.      


릴리는 자신의 유전자로 탄생한 아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올리브는 기록 사이사이에 비어있는 릴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올리브의 얼굴에서 다시 자신과 같은 얼룩을 발견했을 때, 릴리는 자신이 얼룩을 가지고 살아오며 받았던 시선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올리브는 생각했다. 올리브의 얼굴을 마주 보며 숱한 고민을 한 끝에, 결국 그 시선으로부터 올리브와 함께 도망친 것이라고. 시선과 낙인이 없는 세상에서 올리브를 살게 하고픈 마음에 자신의 흔적을 없애고 지구를 떠나 낙원과도 같은 ‘마을’을 만든 것이라고, 올리브는 릴리를 이해했다. 릴리에 대한 조사가 끝나자 올리브는 마을로 돌아왔고, 데이지가 찾은 올리브의 기록도 여기에서 끝났다.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를 나에게,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지구에 남는 이유”

시선을 견디며 비개조인으로 사는 세상을 떠나 다시 차별과 경계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 올리브가 과연 행복했을까, 김초엽은 데이지의 말을 빌어 질문한다. 지구를 등지고 돌아온 마을이 전과 같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느껴졌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음을 거듭하던 데이지는 올리브의 기록 이후의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시 마을을 떠나 지구로 돌아간 올리브의 이야기 말이다.


지구로 다시 내려간 올리브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기록은 아주 적어. 하지만 문지기가 말해주었어. 그녀의 묘비는 보고타에 있는데, 이렇게 쓰여있어. ‘델피의 올리브, 분리주의에 맞서는 삶을 살다. 그녀의 사랑은 여기에 잠들고 결실은 후에 올 것이다.’ 올리브는 델피와 함께 지구에 남았어. 그리고 델피와 분리주의에 저항했지. 그녀의 어머니, 릴리가 지구에 남긴 흔적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고 애썼던 거야.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릴리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대안적 세상으로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돈을 모아 함께 수술을 받고 개조인으로 살아가거나, 혹은 둘만의 온실에 위안 삼고 꿋꿋하게 버티며 사는 것 역시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 SF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통해 문제를 뚝딱 해결하고 지구를 바꿀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올리브는 끝내 다시 “악몽같은 세계”로 돌아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맞서는 방법을 선택한다.


인간이 ‘완벽하게’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포기하지 않고 분리주의에 맞서는 삶은 어떤 것을 외치는 삶이었을까. 소설에는 선택이 등장하고, 구체적인 과정과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다. 올리브가 릴리를 상상했듯, 독자 역시 소설에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구에서의 올리브를 상상하게 된다. 물론, 델피와 올리브는 개조인과 비개조인의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고 그 사이를 가득 메운 혐오와 차별의 시선을 거두고자 했을 테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유전자 개조 기술이나 비개조인에 대한 차별을 넘어 다름에 대한 섬세한 고민을 하지 않는 세상, 그 자체에 맞서 싸우는 모습에 가깝다.    

올리브가 지구로 돌아간 까닭은, 지구에 그가 남긴 델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에게 마을 역시 머물고 싶은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은 아닐까.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시초지나, 절대적인 포용과 긍정으로 차이 자체를 없애는 마을은 모두 다름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올리브와 데이지가 공유하는 질문인 마을의 완전한 평화에 대한 의구심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살고 싶은 사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사랑하는 올리브와 델피처럼, 내가 사랑하는 나와 다른 존재와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말이다. 그리고 김초엽은, 쉽게 해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 고민과 상상의 여백을 붙잡아둔다. 올리브가 델피와 함께 지구를 바꾼 모습을 결말로 제시하지 않고, 데이지가 올리브의 이야기를 읽고 지구에서 어떤 일을 할지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어떤 세상으로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고민과 물음의 연속이 존재할 뿐, 상상은 독자의 몫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타사는 상상 속의 도시이지만 그곳의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다. 폭력과 차별, 억압과 소외가 난무하는 이타사는 현실과 흡사하다. 반대로 오직 환대와 인정만이 가득한 마을의 모습은 생경하다. 마치 환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다. 올리브가 델피와 함께 마을로 돌아올 수도 있었으나 결국 그 많은 선택지 중 지구로 돌아갔다는 결말은 ‘통쾌함’과 거리가 멀다. 김초엽은 상상 속 유토피아로 떠나는 대신 현실과 맞닿은 문제를 진득하게 고민하며 소설을 닫는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마을보다 이타사에 가까우므로, 소설의 결말은 통쾌하진 않더라도 지금의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바로, 다른 존재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타사는 기술을 이용해 장애와 ‘결함을 없앤 존재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신체와 지능, 정신의 ‘정상적인’ 수준이 존재하고 모두가 이 ‘정상성’의 영역 안으로 편입하도록 만들었다. 이타사의 중심부에는 병듦도, 아픔도, 어떠한 자국도 없다. 기술로 전부 삭제됐기 때문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존재는 중심부 밖으로 떠밀어 지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중심부의 사람들은 병들지 않고 취약하지 않은 채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김초엽은 그의 또 다른 책에서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완벽하고 독립적인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5]  

   

SF작품 속 세상이 얼마나 발전됐는지 보여주는 흔한 척도는 ‘기술’과 ‘건강’이다. 간단하게 건강을 유지하는 세상, 빠르게 상처를 치료하는 세상, 더 정밀하게 건강을 체크하는 세상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세상만을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오지 않을 미래를, 오더라도 썩 반갑지 않은 미래를 꿈꾸는 것과 같다. 기술이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를 밀어내고 축소하는 방향이 아니라, 더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떨까? 완전한 기술의 개발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을 없애면 어떨까?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고 기술을 통해 모든 장애를 ‘치료’하는 세상 대신, 어떠한 모습과 상태의 존재들이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를, 김초엽은 그려낸다.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이타사도, 우리의 현실도 모두 단번에 바꾸기는 어려워 보인다. 구조는 때로 너무 거대해서 오히려 실체가 없다고도 느껴지기도 하니, 구조를 바꾸는 과정 중에는 절망과 낙담을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어떤 순례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더 나은 곳에 뿌리내려 살고 싶은 마음에 함께 폭력적 구획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었다. 폭력 앞에서 무력해질수록 나는 델피와 올리브를 자주 떠올린다. 그들이 “악몽같은 세계” 속에서도 고요하고 느긋한 순간을 살아갔기를 생각한다. 올리브는 골몰하고 델피는 분개하다가도, 어느 날의 아침에는 델피가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잠들기 전에는 올리브가 자신이 떠나온 마을의 이야기를 해주며 사는 그런 삶 말이다. 구획에 익숙해진 세상을 바꾸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요동치다가도 가만한 시간을 거치며 계속 외치다 보면, 올리브의 비석에 새겨진 말과 같이, 반드시 “결실은 후에 올 것이다”.     


   


3. <리셋>
: 정세랑이 말하는 ‘풍요로운 미래 사회’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고, 쓰레기 산과 쓰레기 강이 마구 생겨나는 세상이다. 갖가지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생명체들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다. 자연을 포함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밀어내는 폭력적인 모습,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함께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이 덜컥 사라질 때도 있다. ‘아 이 세상은 망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겠어.’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면, 리셋(reset)!      


영양가 없어진 땅을 한차례 가는 것과 같이, 정세랑은 “시궁창으로 가고 있는” 세상이 난데없이 한바탕 솎아져 리셋된 이후를 상상한다. 외계인도 아니고, 바이러스도 아니고, 바로 몸체 길이 200 미터에 달하는 ‘거대 지렁이’들에 의해 말이다. ‘크기만 컸지, 흙을 먹고 분변토를 내뿜는 지렁이가 도대체 어떻게 지구를 솎아내겠어’ 싶겠지만, 이 지렁이들은 플라스틱을 포함해 건물, 가구 등 도시를 이루는 거의 모든 인공물을 먹어버린다. 세계의 모든 “도시가 부드럽게 젖은 검은 흙에 묻혀가”는 어느 미래. <리셋>의 이야기는 리셋 원년부터 띄엄띄엄 쓰인 일기들로 진행된다. 차례대로, 리셋 시점에 한국과 북쪽의 어느 곳에서 각각 쓰여진 일기와, 리셋 2년 후 앤에 의해 쓰여진 일기, 그리고 리셋 74년 후에 쓰여진 일기다.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리셋 원년. 어느 날 지렁이는 편도행 우주선에서 내려와 경주, 울산을 포함한 전세계 모든 도시를 집어삼켰다. 그토록 보존에 신경을 썼던 신라시대때부터의 유적, 왕릉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인류의 관점에서는 큰 재앙일 수밖에 없는데, 당시 한국에서 작성된 일기에는, 작성자가 느낀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 “기이한 종류의 경배감”이 그대로 묻어있다. 하지만, 인류가 마주한 거대한 대격동 속에서 은근히 비슷한 환희를 내비친 사람은 한국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리셋 원년. 4월 11일

(...)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모닥불 가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를 죽이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리셋으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했다. 인적자원을 포함해 사회를 지탱하는 많은 요소들이 리셋과 함께 사라졌지만, 분변토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분노나 지렁이에게 퍼부어지는 저주는 이 시대의 일기장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일기는, 일기의 작성자인 앤이 어느 범국가적 기관 혹은 집단에 “인류의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전문가’로 들어가는 날부터 시작된다. ‘국장’은 “아무리 전문가들이 다 죽었다지만” “십 대 여자애”가 전문가로 들어온 데에 탐탁지 않아 하지만, 앤은 수많은 전문가가 사라진 상황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뛰어난 학자였다. 이는 지렁이를 포함한 빈모강연구학회의 연구자였던 엄마들의 영향이 컸다. 리셋이 일어나던 시점, 앤의 두 엄마들은 거대 지렁이를 추적하며 수집한 정보들을 문서와 영상으로 기록해두었고, 엄마들이 “아는 걸 모두 아는” 앤이 그 뒤를 이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었다.


A.R. 2년 후, 6월 4일     

(...) 환형동물(Annelid)에서 앞부분을 따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남자애였더라면 빈모강(Oligochaeta)에서 따 올리라고 불렀을 거라는 게 잔잔한 의심이다. 의심은 의심이고, 지렁이에 대한 사랑은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도 내게 그대로 옮아붙었다. (...) 엄마들은 내 방 벽에 지렁이들을 귀엽게, 하지만 정확하게 가득 그려줬고 또박또박 학명도 써주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학명을 모조리 외울 수 있게 되었다.


2년간의 경험적 지식과 앤의 엄마들이 남겨둔 귀중한 자료들이 합쳐져 결론이 내려졌다. 지렁이가 어떤 존재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 리셋의 진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탐사대가 꾸려졌다. 자신의 오일머니로 기존 빈모강연구학회를 열렬히 후원했던 빈 바라스 알 타니 왕자와, 또 다른 전문가 라일라 라이, 그리고 앤이 함께였다.

      

리셋의 진실과 더불어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고 떠난 탐사대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암울하고 비장하지 않다. 영웅의 긴박한 마음가짐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는 그 속에서 홀가분함을, 또 누군가는 이상한 위로를 느낀다. 인류가 처한 상황과 그 안에서 느릿하게 관계를 맺어가는 앤과 탐사대원의 모습들은, 작품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등장한 ‘환희’의 기록 덕에 퍽 조화롭다. 헤어질 때는 평소보다 살짝 긴 포옹을 하는, “투덜거리면서도 어찌저찌 돌아가는 팀”. 앤은 그런 순간을 기록해낸다. 앤에게 ‘누가’ 지렁이를 보냈는지 파헤치는 것은, 이미 핵심과제가 아니다.


6월 10일     

“대체 왜 홀가분해 하는거에요?”

“나는 못했지만 누군가는 멈췄어야 했어. 화석연료 산업을, 거기서 파생된 다른 거대 기업들을. 여기저기에 기부와 후원을 하고 또 하면서도 새벽마다 죽고 싶었는데... 너희 엄마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젠 얼마나 깊이 잠드는지. (...) 아니, 아니야. 너는 엄마들을 잃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 “아니에요. 엄마들도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요. 세상이 시궁창으로 가고 있다고요. 엄마들이 끝까지 살지 못한 건 슬프지만 지렁이들이 일부러 죽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지나치게 가까이 간 건 엄마들이었다는 거 알아요.”

“난 네 엄마들을 정말 좋아했어. 탁월한 사람들이었지.”

“그것도 알아요.”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대화였기에 남겨둔다.
6월 21일     

내가 라일라 라이를 엘엘이라 부른 이후로 다른 사람들도 그 애칭을 그대로 받아들여 엘엘은 엘엘이 되었다. (...) 세상이 끝나가도 우리는 친밀함을 소중히 한다.  
6월 25일     

(...) 지렁이를 보면 엄마들을 닮아 흥분했지만, 나의 흥분은 오해받을 여지가 있어 일부러 숨을 골랐다. 세상을 망하게 한 존재들을 애호하면 부적절하니까.


실제로, 지렁이의 배후 세력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모든 말 끝에 느낌표를 붙이는 국장과 달리, 앤은 이 사실에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고 유구한 역사의 흔적들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슬프지만, 일기의 세 주인공은 그저 문명의 상실 앞에서 “잠시 울”뿐이다. 최소한의 문장들을 통해 이들이 ‘예의’를 지킨 이후에는, 유실되고 파묻히는 것들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발전된 문명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상의 공간에서 익숙한 정서일 슬픔, 고통, 허무함과 두려움을 지운만큼 생겨난 여백은, 주인공이 스스로 이해하는 ‘리셋’과 그 안에서 남몰래 느끼는 기쁨과 반가움으로 채워진다. 일기장은 그래도 되는 공간이기에. 과감히 다른 관점과 목소리를 배제한 채 화자의 기억과 감각에 오롯이 의존해 작성된 기록만으로 전개되는 방식은, 독자가 인류 앞에 펼쳐진 소동을 ‘난데없이 발생한 지렁이의 침공’이 아니라 ‘죽이고 버리며 살아온 인류가 초래한 결말’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6월 29일     

“이 자식들 플라스틱을 먹어….”

(...) “우연일 리가 없지. 우리한테 필요했던 일이잖아. 누군가 설계한 거고 아주 기분 나빠.”

나는 엘엘만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엄마들이 나를 제로 웨이스트로 살게 한 것은 점점 심해지는 쓰레기 문제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러한 접근의 연장선 상에서, 정세랑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한 ‘인류 최후의 반격’을 상상하지 않는다. 범국가적 기관이 설립된 것은 일기 속 정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대응을 하지는 못한(않는)다. 유일하게 국장만이 ‘몰락의 원인’과의 전쟁을 생각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는 무능하고 무력하다. 이처럼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기이한 종류의 기쁨”과 은근한 환대의 모습이 포착되는 <리셋>은 새롭다, 이는 문명의 총체적 몰락으로 향하는 아포칼립스 서사(apocalyptic narrative)를 ‘문명과 인간의 소멸, 세계의 파국’의 테마[6]를 통해 엄중하고 비극적으로 그려내는 기존 SF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지점이다. 애초에 “지렁이는 제때 왔”으므로.





“기분 나쁜 풍요로움”

아포칼립스가 완료되어 문명이 몰락한 이후 생존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루는, 일명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post-apocalyptic narrative)[7]로 이어지는 네 번째 일기장 속 이야기에서 정세랑의 신인류는 지구와 다른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간다.      


리셋 원년으로부터 74년 후. 문명과 역사가 부드럽고 축축한 분변토 안으로 집어삼켜진 지도 오래다. “지렁이는 전설로 남아있고”, 리셋 이전까지의 방식이 얼마나 끔찍하고 파멸적이었는지 깨달은 인류는 비로소 그 땅 속에 ‘궤도’를 수정한 사회를 구축한다. 이 사회는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한 폭력이 덜어진 사회다. 가축과 반려동물의 이름으로 “인류를 위해 다른 종을 굴절시키”는 행위는 사라졌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네 번째 주인공 아미가 어느 날의 일기에 조그맣게 덧붙인 말과 같이, “인류가 지하로 들어가고 지상을 다른 종들에게 내어준 건 꽤 괜찮은 분배였던 것 같다”.


A.R. 74년, 8월 6일     

비옥해, 라고 나는 자주 중얼거린다. (...) 지표에서만 식량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고 지하도시에도 하이드로팜이 있지만, 요새 지상농장의 생산량은 확실히 상승세에 있다. 지렁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게 거의 확실해졌으니 농장 영역을 더 넓히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엔 반대하고 싶다. 인류가 지하로 들어가고 지상을 다른 종들에게 내어준 건 꽤 괜찮은 분배였던 것 같다.  

(...) 종차별 금지법이 사람들을 좀 외롭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크게 봐서 옳은 방향이었단 건 모두 인정하고 있다. (..) 사람들은 가축의 개념과 실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리를 죽여 개에게 먹이는 걸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반려동물들이 평화롭게 수명을 다한 후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류가 다른 종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고, 말살했기에 지렁이들이 온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류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다른 종을 굴절시키지 않는다. 울타리 밖의 돼지들을 몰래 바라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소비와 생산의 가치 역시 달라졌다. 이곳에는 ‘재고’의 개념이 없다. 오래된 옷을 고쳐입거나 분해해서 다시 직조하여 입는다. 지렁이가 놓쳐서 어쩔 수 없이 남겨진 페트병을 이용해서 가끔 새로운 옷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발굴과 재사용의 반복일 뿐 더이상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촬영을 위한 세트장을 새로 지을 수 없어 다양한 채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소품을 만들 여유가 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신인류는 적정한 수준의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 ‘섹스’도 하지 않는다. 어떠한가. 암울한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속 한 장면이 연상되는가? 인간의 온기가 없어지고 개성이나 아름다움의 가치가 사라진, 퍼석하고 건조한 사회 말이다. ‘결국 신인류는 제한되고 불행한 삶을 사는구나’ 싶어 안타깝고 서늘한 감정이 스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     


마지막 일기에서도 보이듯, 덜 폭력적인 방식 속에서도 온기와 아름다움은 충만하다. 서로 다른 옷의 실로 다시 짜여진 옷의 알록달록함을 아끼고, 각자 조금씩 옷을 변형해서 입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고유한 개성이 묻어나는 패션은 이 세계에서도 유효하다. “인류 최초로 섹스를 하지 않는 세대”이지만, 광케이블을 통해 만든 ‘쾌감 패턴’이 생겼고, “너를 생각하며 이 패턴을 만들었어”의 낯간지러운 멘트도 만들어졌다. 신인류의 삶이 ‘불행’해 보이는 것은 21세기 인간만의 감상일 뿐. 그들에게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훨씬 즐겁고” 오히려 우리의 문명은 “시들하다”.   

   

그 이유는 리셋 이전의 문명이 폭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지나치게 “인간만을 사랑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은 이들의 관점에서는 “기분 나쁜 풍요로움”으로 비칠 뿐, 없다고 아쉬운 무언가가 아니다. 정세랑이 그려내는 아포칼립스 이후의 미래 사회는, 붕괴의 원인(지렁이)을 없애고 과거의 평화를 되찾거나, 새로운 터전에서 예전의 형태로 돌아가는 ‘회귀’나 ‘복원’의 모습과 사뭇 거리가 멀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는 누군가를 굴복시키지 않고도 맞이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질서로 구성된 진정 자유롭고 모두에게 ‘풍요로운’ 사회이다. 이곳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도,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8월 10일     

(...) 수요를 한참 웃돌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건들을 생산했다니 과거의 풍요로움이란 굉장히 기분 나쁜 풍요로움이었던 것 같다. 이어 작은 동물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는 여러 사람이 토했다. 윤리는 본능적인 비위에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8월 24일   

(...) 리셋 이전의 콘텐츠들은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보기 괴로울 때가 잦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기껏 만든 커다란 케이크를 바로 쓰레기통에 넣거나 하는 모습을 우리는 웃으면서 볼 수 없다. 밀집 사육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간만을 사랑하는 모습은 어딘지 속을 불편하게 한다. 그 모든 재앙을 불러온 과잉 사회의 면면이 괴로워서 주요 줄거리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다.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흔히 SF장르가 ‘남성중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비단 주인공이 남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상황을 명명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서사가 진행되는 방식에 폭력적인 서구 가부장제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 SF는 지구나 행성으로 대표되는 자연을 인간 자신과 다른 층위의 것-정복하여야 하는 대상, 개발되어질 물질-으로 바라본다.[8] 자연이 타자화되고 인간보다 하위의 자리로 위치되는 이러한 방식은 결국 여성이 남성에 의해 타자화되는 가부장제의 위계질서와 닮아있다. 인간/비인간, 남성/여성, 이성/감정, 정신/육체, 문명/자연 등 이분법적으로 나뉜 대립항들이 존재하고, 여성, 비인간, 자연 등 궁극적으로 ‘이성적인 남성 주체’에 들어맞지 않는 타자들은 구조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9]      


<리셋>에서 엿보이는 정세랑의 세계는 크게 세 가지 지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우선 ‘영웅’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이 서사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이다. 문명의 붕괴를 경험한 앞의 두 주인공들과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세 번째 주인공은 공통적으로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있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직감에 웃음이 비죽 새어나오는 장면이나, 거대 지렁이와 마주했을 때 몸 전체에 짜릿한 “흥분”감이 퍼지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세 주인공을 관통하는 일종의 기쁨이 ‘인류 보편적’ 감정이 아님을 알아차리지만, 일기장에서만큼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거의 유일하게 ‘인간중심적’ 사고를 하는 국장의 흔적은 처참하리만큼 기록되지 않는다.      


대부분 SF소설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가 ‘한 발짝 나아가는’, 혹은 최소한 ‘기존 인간의 영역을 보존하는’ 부분이 서사의 클라이맥스로 기능하기에, 대부분 그 과정을 집요하게 그려내고 촘촘하게 서술한다. 그에 반해 <리셋>은 인간의 문명을 집어삼킨 지렁이가 맞이하는 구체적인 최후나 지렁이에 대한 인류의 적극적인 저항이 철저히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지렁이가 사라진 날을 “해방의 날”로 부르고 있지만, 어쩐지 지렁이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는, 21세기 문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리셋 이후의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케이블, 옷 외에는 과거의 흔적을 발굴하거나 문명을 복원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래 도시’를 지금까지의 문명/자연과는 다른 제3의 공간으로 상상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예컨대 기술은 여전히 사용되지만, 인간의 기존 영역을 확장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데에 쓰인 것과 확실히 다른 양상으로 사용된다. 화학약품을 사용한 불꽃놀이 대신 홀로그램 불꽃쇼를 즐기고 섹스 대신 쾌감패턴이 통용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기술은 확장보다는 수렴과 대체를 위해 사용된다. 한계는 있지만 완전히 고립되지 않고, 제한은 있으나 또 아주 단절되지는 않은 사회. 사람에 대한 애정, 즐거움, 패션, 축제와 같은 “리셋 이전의 괜찮은 부분은” 유지되는 이 공간에는 더이상 이분법적 구분, 가부장제의 흔적이 남아있지않다. 이처럼 정세랑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봐 두렵다.” <리셋>을 쓰며, 때로는 쓰지 않는 동안에도, 정세랑은 예측가능한 이 두려움을 곱씹었다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이 끔찍하다고 생각되듯 21세기의 폭력이 얼마나 경멸받을지를 떠올렸고, 지구상에서 그런 인간을 제외한 종들이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풍요로움”을 멈춰야한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했다. 언젠가 그는 문명의 이기에 대한 경계는 SF작가들의 흔한 직업습관과도 같다고 말했지만, 정세랑은 정복이나 회귀가 아니라 제3의 방식과 과정을 상상했다는 점이 새롭다. 정세랑의 세상에서 촉촉한 분변토 안으로 파묻힌 것은 단순히 건물들만이 아니었으니까.   


        

4. 그 세상에서 우리는

이렇게 김초엽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정세랑의 <리셋>의 세상을 함께 돌아다녀 보았다. 물음을 꾹꾹 이어나가는 김초엽과 번뜩이고 발랄한 상상으로 느낌표를 던져주는 정세랑은 모두 한국 SF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우주를 여행하고 로봇이나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는 이야기 자체에서 오는 재미와 더불어, 서사의 배경 속에 녹아든 고민과 상상이 독자들을 SF의 영역 속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환경, 장애, 관계 맺음과 같은 지금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덜 배제되고 긴밀히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한다. 지금껏 SF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진 적 없는 다양한 여성의 얼굴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점도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끝내 도달하는 세계에 폭력과 구분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세상에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특히 김초엽과 정세랑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202N년의 현실은 퍽 씁쓸하고 아프다. 그래서인지 둘로 가르는 섣부른 구분선도, 누군가를 굴절시키고 편입하는 힘의 논리도 없는 SF 세계에서 나는 위로를 받고 맘 편히 낙관했다. 누군가는 SF 작품을 통해, 지금의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하고 구체화할 것이다. 어쩌면 미처 몰랐던 지금의 폭력을 마주하고 사고를 확장해볼 수도 있겠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지금의 우리를 위로하며,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더 괜찮은 미래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지금 한국여성 SF작품이 읽히는 까닭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읽힐 이유가 되지 않을까. 다양한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SF 작품이 더욱 많이 나오기를, 그래서 갖은 빛으로 반짝이는 별 중 어느 곳에 착륙해볼지 각자 행복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  편집위원 연자 (candella96@naver.com)


[1]  2019년에 비해, 2020년 SF소설의 판매량은 약 5.5배 신장하였다. 한국 SF소설의 인기는 한국소설 전체 판매량을 약 30% 늘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출처] “손원평과 김초엽의 힘!...한국 소설 역대 최다 판매”, 한국일보, (2020.09.2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2209380001765 


[2]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출판물. 편집이나 제책의 형태는 잡지와 비슷하지만, 비정기적으로 발간된다는 점은 단행본과 비슷하다. [출처] “무크지”, 표준국어대사전


[3] 연남경, 여성 SF의 시공간과 포스트휴먼적 전망 – 윤이형, 김초엽, 김보영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79호, (2020.09), p.106-110


[4] 이와 같은 흐름은 한국 SF소설만의 동향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SF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이 많아지는 경향과 여성독자들이 유입 증가가 분명한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 한국소설 시장의 전반적인 판매 호조는 여성 독자들이 주도했다. 2019년도와 비교했을 때, 2020년의 여성 독자의 구매 비중은 64.7%에서 69.9%로 상승했으며, 특히 20~40대 여성 비중이 고루 확대되었다. [출처] “손원평과 김초엽의 힘!...한국 소설 역대 최다 판매”, 한국일보, (2020.09.2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2209380001765 


[5] 김원영, 김초엽,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p.40


[6] 문형준, 왜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은 인간을 살려두는가? 인류세 시대 서사로서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안과밖 43권 0호, 영미문학연구회, (2017.11), p.60-62


[7] 위의 글, p.60


[8] 유소영, 에코페미니즘을 통해 본 2000년대 이후 한국 어린이 청소년 SF 연구, (2019.06), p.18


[9] 강은교, 김은주, 한국 SF와 페미니즘의 동시대적 조우: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와 듀나의 <두번째 유모>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9, 한국여성문학학회, (2020),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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