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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4호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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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Apr 18. 2021

퀴어 무비 애니웨이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노랑, 단, 물결, 이응

기획 / 정리 노랑 raryoo613@gmail.com

참여 노랑, , 물결, 이응


*잡다한 영화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퀴어알못에게 의도치 않게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가따블,’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가 퀴어 황무지였던 한국 영화판에 당도해 유교걸들을 두근두근 놀라게 만들었을 때와는 천지개벽한 수준의 다른 시대가 되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훌륭한 레즈 영화가 속출하고 있고, ‘콜바넴,’ <콜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선풍적인 트렌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의 힙스터 미학으로 간택 받아 수많은 이들의 잠금 화면을 채우기도 했다. <벌새(2018)>의 ‘언그지학’(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이 이마를 탁 치게 하는 밈으로 돌아다녔고 1%의 퀴어 코드라도 담긴 한국 영화가 늘었으며 최근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해피투게더(1997)>의 재개봉과 매진 소식이 줄줄이 들려왔다. 이런 시대에, 퀴어 영화에(혹은 그냥 퀴어에 ^^) 진심인 사람들끼리 왁자지껄한 좌담을 열었다. 레전드 퀴어 영화 <헤드윅(2001)>과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경계선(2018)>을 본 채로, 위원들 각자가 애정하는 영화를 하나씩 더 안아들고 모였다. 일종의 미학이나 유행, 혹은 유토피아로서 소비되거나 상상되기 시작한 퀴어성 외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퀴어의 미숙함과 다단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았다.




노랑: 우선 좌담 전체 개괄을 하고 개인 영화 픽을 소개하면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수많은 퀴어 영화, 특히나 심금을 울리는 레즈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단순히 ‘좋은 레즈 영화’나 ‘좋은 게이 영화’가 아닌 ‘퀴어 영화’, ‘퀴어한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 외에도 복잡미묘한 감정과 경험들, 불확실하고 퀴어한 관계맺음에 대해서 두루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해요. 단부터 각자 본 영화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한 줄 평, 그리고 그 영화를 바탕으로 오늘 이야기하기를 기대하는 내용이 뭔지 말해줄래요?


단: 저는 <월플라워(2012)>라는 영화를 골랐는데요,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 중에 “welcome to the island of misfit toys”라는 대사가 있어요. 한국어로는 “고장 난 장난감들의 섬에 온 걸 환영해”라는 식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저는 이 ‘misfit’이라는 키워드가 엄청 중요하다고 느껴요. 여기 나오는 캐릭터 중에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퀴어한 바이브를 가지고 있고, 전형적인 헤테로섹슈얼한 관계맺음에서 멀리 떨어진 방법들로 우정을 쌓고 사랑을 하거든요. 그래서 음…. <월플라워>가 퀴어 영화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주인공들이 만드는 그룹이 되게 퀴어 스페이스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저는 그런 얘기들을 나누려고 이 영화를 갖고 왔어요.







이응: 저는 <톰보이(2011)>를 가져왔어요. 줄거리는, 주인공 소녀가 있는데 영화 내내 어딘가 어색하고 미숙한 모습으로 나와요. 흔히 ‘남성성’과 연결되는 행동들, 이를테면 침 뱉기, 윗옷을 벗고 축구하기 이런 걸 동경하고 따라하고 싶어 하고, 원래 이름인 로레는 숨기고 자신을 ‘남자 이름’으로 패씽되는 미카엘로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리사라는 여자아이랑 사랑과 우정 그 사이 어딘가의 관계에 빠지게 돼요. 감독이 꾸준히 퀴어 영화를 만드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어서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처음 봤을 때는 뚜렷한 평가가 있기보다는 그저 영화 특유의 색감, 여름 냄새 나는 그 느낌이 되게 좋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이 영화가 왜 좋았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저는 이전까지는 퀴어 영화를 봤을 때 뭔가 성인들의 성애로 그려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퀴어 서사가 성인으로 한정되고 어린아이들의 퀴어함은 다뤄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 영화가 그걸 깨주는 것 같아서 되게 좋았습니다.


물결: 저는 <불한당(2017)>을 골랐는데, 사실 왜 골랐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현수와 재호가 맺는 관계가 제가 정체화하기 전에 느꼈던 첫사랑의 감각과 비슷하다고 느꼈거든요. 혹자는 이걸 ‘브로맨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브로맨스는 아니고, 우정 같지만 우정으로 편입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느낌? 그런데 그걸 또 사랑이라고 부르긴 좀 애매한 거죠. 약간 그, (웃음) 전문용어로 ‘애매호모’한 관계가 재밌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우정이라고도 사랑이라고도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관계가 어떻게 보면 가장 규범으로부터 먼 사랑인 거 같고, 그런 사랑이 한국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특히 여성 관객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들여다보기에 흥미로운 영화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노랑: 다 너무 좋네요. 저는 <패왕별희(1993)>를 가져왔는데요. (이응: 저 진짜 좋아해요. 미쳤어.) 저도! 제 최애 영화인데 청나라 말기부터 개화기를 거쳐 중화민국과 마오쩌둥 집권 하의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통과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돼요. 주인공 데이는 사회적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정말 무관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자각과는 무관하게 끝없이 시대성의 영향과 제약을 받는 예술가예요. 데이는 퀴어한 욕망을 가지고 퀴어한 수행도 많이 하는 사람인데, 사실 영화 속 시대는 퀴어적 정체성의 구획이 없는 때잖아요? 그래서 그의 특수한 퀴어성 또한 그 자체로서 명명될 수 있다기보단 자신이 경험한 특정한 관계들, 상실, 고통, 폭력, 구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로서 수행하는 연기 속에서 촘촘하게 직조돼요.


이응: 그 장국영의 눈물 어린 표정이 생각이 나면서…. 외로움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고….


노랑: 맞아요. 장국영이 달빛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눈빛을 하지 싶었어요. <패왕별희>를 처음 보고 나서 며칠간 마음에 감기가 걸려가지고…. (웃음) 이 얘기는 그만하고, <헤드윅>과 <경계선>에 대한 소감을 나눠볼까요? <경계선>은 다들 처음 보셨죠?



<헤드윅>: 인생에 락과 사랑뿐인 헤드윅은 자신의 인생사와 운명적인 반쪽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다. 한편, 구남친 토미는 헤드윅의 삶이 담긴 노래를 뺏어 줄줄이 히트를 치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만다. 분노와 실의에 빠진 헤드윅은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 밴드와 함께 토미의 콘서트를 미행하면서 같은 공연을 펼치며, 듣는 이가 한 명밖에 없을 때도 흔쾌하고 유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계선>: 공항 출입국 세관에서 일하는 티나는 후각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남들과는 다른 외모로 인해 은근하게 소외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과 닮은 보레를 만나 기묘한 끌림을 느끼고, 이전에 몰랐던 자신의 역사와 욕망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기억, 감각, 흉터 남은 몸


물결: 저는…. <경계선>이 딱 끝나자마자 ‘이걸 퀴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거든요. 왜냐면 보통 퀴어 영화라고 했을 때 이원론적인 섹스-젠더의 체계라던가, 이성애규범성을 문제시하는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경계선>은 그보다는 경계나 분할 자체를 광범위하게 질문하는 느낌? 그렇다고 이 영화가 퀴어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퀴어’라는 말이 놓인 어떤 곤란함을 잘 일깨운다고 생각했어요. ‘퀴어 영화’를 퀴어인 존재, 혹은 퀴어 정체성을 다루는 영화만으로 규정했을 때 그건 되게 협소한 규정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규정 이상으로 퀴어한 영화를 이분법에 대한 저항, 위반의 의미로 확장했을 때는 ‘퀴어 영화’의 범주 자체가 흐릿해지는 곤란함 같은 게 있어요. 저에게 <경계선>은 그런 어려움을 안겨주는 영화였어요.


단: 저는 완전 퀴어하게 읽혔던 거 같아요. 상징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바로 떠오르는 건, 보레랑 티나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분노와 쾌락과 그 중간 어딘가를,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게 되게 강렬하게 남았어요.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있잖아요. 자기를 확인하는, 혹은 받아들이게 되는, 조금은 무섭지만 해방적인 순간들? 예를 들면 <월플라워>에서 찰리가 달리는 트럭을 타고 가다가 조심조심 일어서서 바람을 맞으며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장면 같은 것들? 그리고 <경계선>은 특히 그런 순간들 속의 두려움과 혼란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 게, 보레가 티나에게 처음 구더기를 먹어보라고 권유했을 때, 티나가 인간적인 사고로 더럽다고 거절하다가 결국 묘한 이끌림에 구더기를 먹어보고서 모호한 표정을 짓잖아요. 잘 알 수 없고, 왠지 좋은 거 같기도 한데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그런 미묘한 감정들을 잘 표현했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노랑: 맞아, 티나가 두려움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는 장면이 많죠. 근데 보레는 이미 티나를 만나기 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잘 구축한 상태 아니었나요? 이미 그 세계에 눈 뜬 선배가 나에게 대안적 정체성과 욕망의 가능성에 대해 소개하고 일종의 구원 혹은 해방을 제공하는 것도 퀴어의 경험과 닮은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경계선>의 초반부를 볼 때까지만 해도 티나와 보레의 존재가 그냥 정상성에 포섭되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한 은유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 중후반부에 갑자기 보레가 “우리는 트롤이야~”라며 아주 구체적인 종족성을 선고하는 거예요. 왜 굳이 이들을 트롤이라는 이종異種으로 설정해야 했을까 생각해보면, 물결 말대로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전복하기보다는 우리가 편견조차 갖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구획을 만들어서 그걸 넘나드는 과정을 보여주잖아요. 우리는 낯선 존재들과 그들의 생경한 움직임, 고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해석할지 바쁘게 머리를 굴려보는데, 판단을 끝내기도 전에 그들이 정체성을 선언하고 우리가 모르는 위계에 도전하고 내부적으로 갈등하는 것까지 봐버리니까, 조금은 휘둘리며 그 전복의 여정을 따라가게 돼요. 이처럼 타자를 분류할 기준과 언어를 죄다 상실해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저는 티나와 보레가 사회적으로 ‘추하다'고 할 만한 존재들이라는 점도 되게 퀴어하다고 느꼈어요. 레즈비언 영화들 보면 얼마나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요. 과하게 균형감 있고. <아가씨(2016)>부터 해서 <가장 따뜻한 색, 블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우리는 너무 ‘완벽한’ 여자들의 신체적 감정적 뒤섞임을 목격하잖아요. 심지어는 인물들이 첫 키스, 첫 섹스도 너무나 능숙하고 세련되게 해내요. 비규범적인 존재들의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 자체가 규범적이고 비장애중심적인 것 같아요. 또한 그렇게 아름다움에 집착하다 보면 관음과도 떨어뜨려 놓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은데, <경계선>에서는 딱 봤을 때 그다지 우리 사회에서 욕망하지 않을 만한 신체를 가진 주인공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깊이 욕망하고, 누가 설명해주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성적인 교감을 나누는 방식들이 나오잖아요. 영화는 현실의 규범성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다듬어지고 걸러진 이미지가 오가는 세계인데, 그 안에서 추해보이는 것들을 중심에 둔 채로 불편하고 가치 판단도 어려운 욕망 서사를 완성하다니! 그 자체가 퀴어하다고 느꼈어요, 저는. 타자성과 섹슈얼리티를 패티쉬화하지 않으면서도 진솔하게 보여준 것도 큰 성취라고 생각하고. 보편성에 포괄될 수 없는 복잡한 욕망과 그로테스크한 미학을 제시한 이 영화의 태도가 일종의 ‘퀴어링queering’이라고 생각해요.


물결: 진짜 공감하는 게, 저도 노골적인 장면들을 통해 감독이 아름다움에 대한 규범적인 미감을 질문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컨대 티나가 후각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하는데, 핸드폰을 갑자기 가져가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다던가, 해진 셔츠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는다던가, 그런 적나라하게 ‘원초적'인 행위들이 노랑이 말한 것의 연장 선상에서 ‘이상하다’ 혹은 ‘기이하다’고 할 수 있는 감각을 전달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티나랑 보레가 키스를 하는 모든 장면에서 격렬하게 달려들다가 정작 입술끼리 허공에서 부딪치다 마는…. (손짓으로 무언가 표현하려는 물결, 모두 빵 터짐) 뭔지 모르겠는 키스를 자꾸 하잖아요. 그 어색하고 낯선 키스에서 둘의 미묘한 감정이 잘 느껴졌어요. 이들이 느끼는 수상한 친밀성의 감각과 그럼에도 서로를 향한 엄청난 끌림이 잘 드러난 거 같아요.


이응: 저는 이 영화가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너네는 이런 거에 불편함을 느끼잖아. 왜 외면하고 있어?’ 그걸 물어보는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사람들이 뭔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아닌 척을 되게 많이 하잖아요. 내가 그런 기만을 하고 있었다는 걸 이 감독이 눈치 챈 느낌? 감독이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파고들면서 제 기만을 꼬집은 느낌이라 힘들었던 거 같아요. 게다가 인물들도 죄다 되게 입체적이고 선과 악 어디로도 구분할 수 없어서 더 어려운 작품이었어요.


단: 티나랑 보레 말고 다른 ‘정상가족’이 하나 등장하잖아요. 저는 그 사람들과의 대비도 되게 흥미로웠어요. 특히 티나가 길을 가다가, 그 집 남편이 지금 아내 진통 왔다고 빨리 병원에 태워다 달라고 해서 데려다준 다음에, 그들은 병원에 들어가고 티나는 문 앞에서 패닉 상태 비슷한 게 오잖아요. 티나가 정상가족 근처에 살지만 막상 본인은 정상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뻔히 보이는, 그 신의 대비가 재밌었고, 티나가 정상성을 마주하며 불안해하는 마음도 잘 드러났다고 느꼈어요.


노랑: 그 정상가족이 평소에 티나를 아주 따뜻하게 대한다는 점도 모든 걸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들은 줄곧 예의 바르고 착한 이들이라, 티나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보다 더 희미하고 미묘한 종류의 아픔을 선사해요. 대놓고 무례하거나 무지한 언행을 하지는 않지만, 야생동물의 안위를 신경 쓰는 티나를 이상하게 쳐다볼 때도 있고, 몸짓과 눈짓을 통해 그들이 보레에 대해 가진 불안함 내지는 경계심이 묻어나기도 하는데, 이런 장면을 통해 티나가 줄곧 경험했을 은근한 소외가 와닿는 것 같아요. 이처럼 타인들의 긴 시선, 어색한 정적, 그 외에도 촘촘한 규범성의 통제 속에서 티나가 주눅 든 채로 살다가 처음으로 자신과 유사한 존재인 보레를 만난 후에 함께 숲속을 뛰어다니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더 자유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물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아기가 영화 내에서 퀴어성에 대한 중요한 메타포 같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퀴어 이론에서 아이라는 건 재생산 규범의 지속을 통해 이어질 미래에 대한 은유잖아요.[1] 그런데 보레는 인간에 대한 복수로써 인간 아이를 강탈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트롤만의 독특한 재생산 방식을 통해 얻은 아이가 티나에게 도착해요. 이걸 퀴어한 미래의 도래라고 읽을 수 있을까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분명 이/성애적 재생산과 정상성에 대한 중요한 은유라고 생각했어요.


노랑: 맞아요. 한편 티나가 보레라는 대안적인 세계를 그저 긍정하는 데에서 영화가 끝나지 않고, 보레가 복수랍시고 인간에게 저질렀던 악행을 알게 되는데, 자신이 기꺼이 소속될 수 있는 약자 세계 또한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는 순간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잖아요. 규범성과 정상성 전체를 무조건 내 ‘외부’로서 설정한 채 어떤 공격을 가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내재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랑하는 자신에 대해 아프게 톺아보고, 그러면서 여러 세계 사이에서 자신만이 설 위치를 정해야 하는, 하지만 끝끝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티나의 엔딩이 무지 좋았어요.  


<경계선>에 대한 감상을 <헤드윅>과는 어떻게 엮어볼 수 있을까요?


단: 저는 퀴어한 인물과 그 주변 사람들 간의 관계들?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모습들? 이를테면 <경계선>에서는 티나와 같이 사는 남자 애인이 있잖아요. 그 남자는 티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두 사람의 관계가 착취적이에요. 티나가 감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티나의 완강한 거부에도 섹스를 강요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런 와중에 경제적인 책임은 티나가 전부 지고…. <헤드윅>에서도 비슷하게, 루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헤드윅에게 폭력적으로 구는 모습이나, 혹은 토미가 나중에 헤드윅의 어떤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는 순간들이 있고요. 이런 게 겹쳐서 보였어요.


노랑: 맞아…. 저는 몸에 엄청나게 집중하며 봐서인지 두 영화가 바로 연결 지어진 지점이 있었는데, <경계선>에서 티나와 보레 둘 다 엉덩이 쪽에 흉터가 남아있잖아요. 티나는 자신이 왜 그 상처를 가졌는지, 무얼 상실한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는데 보레라는 동족을 만나고서야 그게 꼬리를 잘리고 남은 자국이라는 설명을 듣죠. 그 외에도 티나는 번개를 맞아서 생긴 피부의 색소 침착을 의아해하거나 자신이 성기 부근에 느끼는 불편함의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포함해 자신의 몸이 겪어낸 특수한 상실이나 고통의 역사를 하나도 이해하거나 명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경계선>에서 거듭 등장하는 그 ‘흉터’라는 물리적 상징이 <헤드윅>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등장해요. 헤드윅을 한국에서 흔히 “트랜스젠더 영화”라고 소개하는데, 이 편협한 설명의 이유는 그저 헤드윅이 성기 제거 수술을 받아서일 거예요. 하지만 헤드윅은 미군 루터를 사랑해서 그와의 이주와 자유를 갈망했을 뿐이고, 이성애규범성 내에서 그 남성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거의 반강제로 성전환 수술을 당한 거잖아요. 그리고 그 수술이 실패해서 몸에 영원히 특수한 상처가 남았어요. 그러니까 “angry inch”의 잔해는 헤드윅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납득되는 방식으로 구획하기 위해 사회가 가한 여러 폭력을 증명하는 흉터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헤드윅을 남성도 여성도 아니게 만드는 – 더욱 구획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 결정적 요인이 되고.


두 영화에서 모두 이런 흉터 하나하나가 개인에게 가해진 ‘규범 신체’와 ‘규범 정체성’에 대한 요구와 폭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현장이자, 망각에 맞서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증거인 것이고, 더 크게는 개인의 몸을 분열과 분투, 기억의 중요한 장으로서 주목한 것이 공통점인 것 같아요.


물결: 동의해요. 그리고 저도 헤드윅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르는 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본질주의적인 명명이라고 생각해요.


단: 존 미첼이 일전에 “자신은 헤드윅이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게 생각나네요. “트랜스”라고 했을 때는 어떤 경계를 넘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결국 헤드윅은 폭력적인 연인과 정부, 체제, 이런 외부적 압력들에 의해 선택 없이 그냥 떠밀려 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었어요.[2] 그리고 <경계선>에서도 티나나 보레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두 영화 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저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주어진 운명에 그저 순응해버리는 것도,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것도 아닌?


노랑: 그니까. 내 정체성과 위치성을 깔끔하게 구획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 혼란스럽고 애매한 나를 자꾸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정의 혹은 증명해야 하는 고통 속에 놓이는 상황을 두 영화 모두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주인공 본인들도 새롭고 명쾌한 자기 선언을 얻고 싶어 하는데, 뭔가 한 가지 장벽을 뛰어넘어도, 그리고 약간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도, 끝없이 또 새로운 장벽과 혼란을 마주해서 이게 그 구획에 대한 욕망과 상충하고 말아요. 결국 계속해서 변해가고 끈질기게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두 영화가 공유하는 되게 큰 특성일 뿐 아니라 퀴어링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어요. 이를테면 아까도 언급했듯 <경계선>에서 티나가 보레의 존재로부터 자기 긍정의 위안을 얻고 다른 트롤들과 합류하겠다고 했다가 결국은 트롤 집단과의 거리두기를 선택하잖아요. 아주 큰 다수든, 그보다는 작은 크기와 다른 지향을 가진 다수든, 집단성에 뭉뚱그려져 포섭될 수 없는 자신을 느끼고서 자신만의 아슬아슬한 노선을 고민하는 거죠. 헤드윅도 강박적일 정도로 완전한 자아와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애매한 ‘나다움’을 마주하고.


한편, 두 영화에 모두 과거를 되짚어보는 장면들이 많잖아요. 헤드윅은 자신이 6살 때 쓴 일기를 발견하고, 티나도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자기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뒤늦게 물어보죠. 내 동의 없이 내 역사와 진실을 삭제하고 통제해온 어른들을 원망할 뿐 아니라, 순간의 경험들이 어떻게 빌드업해서 현재의 복잡한 나로 이어지는지, 그런 기억의 재구성 과정이 현재의 정체성, 자기 서사 구축과 분리할 수 없이 발생해요. 이 지점이 특히나 퀴어들에게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물결: 기억과 원망이라고 하니, 저는 ‘고통’, ‘실패’ 이런 것들이 헤드윅 앞에 엄청 켜켜이 쌓여있고, 그게 아주 물질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그니까 헤드윅을 계속 보고 있으면 ‘저 사람 뭔가 과거에 발이 묶여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 상태 자체가 퀴어가 경험하는 불행의 감각을 엄청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그게 또 수술 실패 후 남은 ‘1인치의 살덩이’라는 구체적인 모양과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그 1인치의 살덩이라는 게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동시에 헤드윅한테는 가장 큰 상처이자 실패의 증거인 거잖아요. 수술도 실패를 했고, 토미와의 연애에서도 토미가 그 1인치의 살덩이를 확인하면서 사랑이 완전히 실패해버려요. 그러니 실패한 수술 때문에 또 사랑이 실패하고, 거기 발이 묶여서 토미를 쫓아다니다가 밴드도 잃고, 남편도 잃고 매니저 친구도 잃고 다 잃어버리는….


노랑: 맞아요. <헤드윅>에서 물결이 방금 말한 실패와 자기혐오가 역사랑 엮이는 방식도 독특하지 않아요? 제가 <헤드윅>을 여섯 번인가 봤는데 항상 똑같은 시퀀스를 제일 좋아해요 (울컥 웃음). ‘Wig In a Box’라는 노래가 나오는 시퀀스인데, 헤드윅이 미군 루터를 사랑해서 그 남자와 결혼하고 독일을 뜨기 위해 수술까지 감행했는데, 루터가 결국 자신을 떠나잖아요. 그 사람을 사랑해서 모진 고통을 감내했고, 그 사람이 떠났는데 이미 나는 변해있으니 내가 그동안 겪은 모든 게 무용하게 느껴질 수 있는 순간인데. 그날 또 마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티비에도 ‘동독과 서독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다 무엇이 되는가?’ 하는 혼란의 질문이 흘러나오죠.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을 손쉽고 단호하게 구획했던 문법들이 일순간 해체되거나 나를 억압하던 폭력의 주체가 사라질 때, 우리가 무조건 해방감만 느끼는 게 아니라, ‘그럼 그 구획을 내재하고 그동안 고통받았던 내 경험은 다 뭐가 되지?’ 하고 굉장히 억하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순간에 시작되는 ‘Wig In a Box’ 시퀀스가 헤드윅이 더 깊은 자기혐오나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기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자긍심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너무 좋아요. 해방감 느껴지고.


 단: 어, 맞아 (울컥 웃음).





복잡다단한 성장, ‘애매호모’한 관계


노랑: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이츠학과 토미의 존재는 어떻게 해석하세요?


물결: 토미와의 관계 속에서 이츠학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헤드윅>의 시제 자체가 재밌는데,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잖아요. 현재이긴 한데 과거에 발이 묶여있는 현재고,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이츠학도 헤드윅이 토미와의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그걸 이겨내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이런 애매한 시간성 속에서 영화가 계속 전개되다가 결국에 토미가 헤드윅이 자신에게 처음 들려줬던 노래인 ‘Wicked Little Town’을 헤드윅에게 다시 불러줄 때, 헤드윅은 그제야 자신을 마주한 듯한 눈빛을 하고. 그다음 장면에서 헤드윅이 ‘Midnight Radio’를 부르면서 이츠학을 보내주잖아요. 토미와 헤드윅과 이츠학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얽히는 과거, 현재, 앞으로의 시간들이 재밌게 느껴졌어요.


노랑: 헤드윅이 계속해서 자신은 통제될 수 없고 경계를 교란하는 존재라고 노래하지만, 저는 엔딩 전까지는 헤드윅이 남편 이츠학에게만큼은 상당히 통제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너는 내 남편이니까 ‘남자처럼’ 꾸며야 하고, 나의 어떤 상대역으로서 옆에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를 구속하잖아요. 그러다, 물결이 말한 대로, 토미가 불러준 헤드윅 자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은 허상이며 타인에 의해 채워지지 않아도 나는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메시지를 실감하는 순간, 드디어 자신의 애인도 자유롭게 내버려 둘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가발을,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이츠학에게 넘겨주고서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하잖아요. 자신에 대한 구속을 내려놓는 게 타인의 해방으로까지 이어지는 거죠. 저는 이 두 영화가 ‘퀴어’라는 중요하지만 아주 뭉뚱그려져 있는 카테고리 안을 구성하는 복잡한 존재들을 재정의하기보단 그대로 내버려 두고 끝난다는 거? 그 혼란한 여백이 자유롭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이응: 저도 <헤드윅>을 볼 때마다 헤드윅보다는 이츠학이 더 아픈 손가락 같이 느껴져요. 노랑이 말했던 것처럼 헤드윅이 이츠학한테 너무 일방적이고 충동적으로 구는 게 짜증나는 거예요 (웃음).


단: 이츠학도 되게 퀴어한 캐릭터인 것 같아요. 헤드윅과 이츠학이 굉장히 좋은 친구이고 파트너이자, 비슷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둘이 오히려 되게 비슷한 처지라 헤드윅이 사랑을 빌미로 이전에 자신이 받은 상처와 폭력을 그대로 다시 이츠학에게 반복할 수 있는 게, 그리고 반복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노랑: 섣불리 규정할 순 없지만 이츠학을 드랙퀸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헤드윅이 영화 결론부에서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꾸밈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고 모든 분장과 옷을 벗어 던지고서 자신의 해방을 맞이할 때, 이츠학은 극 중 처음으로 이전의 헤드윅을 닮은 화려한 메이크업과 옷을 갖추고 행복한 표정을 띤 채로 등장하잖아요. 단 말대로 이츠학이 헤드윅을 더욱 양가적이고 다채로운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헤드윅이라는 인물의 서사에서 배제될지 모르는 가능성을 담아내어 세심하게 설정된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이츠학처럼 특정한 꾸밈을 강렬하게 욕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망토와 가면을 둘렀을 때 더욱 진정한 ‘나’가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츠학이 정말 정교하게 디자인된 게,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와 새침한 태도, 다부진 신체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지고, 평소에는 헤비메탈 가수처럼 꾸미면서 동시에 너무 아름답고 유려한 드랙을 욕망한다는 것이 『Mother Camp』라는 고전 퀴어 기술지와 많이 겹쳐 보였어요. 인류학자 에스더 뉴턴은 게이들의 드랙이 단순한 ‘여성 모방’이 아니라, “(여성적 꾸밈을 한) 내 겉모습과 (남성의 몸을 가진) 실제의 나”는 다르지, 라는 역전의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남성의 몸을 가진) 내 겉모습과 (여성적/드랙의 자아를 가진) 실제의 나”도 다르다는, 두 층위의 모순적인 전복 혹은 역전을 동시에 해내고 그 텐션을 결코 해소하지 않음으로써 젠더규범을 비틀어낸다고 주장해요.[3] 이러한 사례가 또 ‘젠더에 실체는 없고 오로지 허상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들의 끝없는 조합과 모방’만이 존재한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과도 이어져요.[4]  


이응: 말이 나온 김에, 저는 이츠학이 <렌트>[5] 오디션을 본다는 게 큰 의미로 와 닿았거든요! 영화상에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츠학이 헤드윅 몰래 지원하는 역할이 뮤지컬 <렌트>의 ‘에인젤’ 역인데, 에인젤은 <헤드윅>에서 보여지는 이츠학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성을 지닌 인물이에요. 이츠학이 헤드윅에게 억눌려 자신이 원하는 퀴어성을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는 인물이라면, 에인젤은 반대로 드랙퀸으로서, 그리고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맘껏 표출하거든요. 그래서 이츠학이 에인젤 역의 가발을 쓰고 헤드윅에게 가서 ‘밴드 탈출’ 선언을 하는 장면에서 더 희열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헤드윅의 폭력에 저항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좌) <헤드윅> 속 에인젤 가발을 쓴 이츠학, (우) 뮤지컬 <렌트> 속 에인젤


노랑: 인간관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각자 본 영화에 대해서도 언급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단: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월플라워>의 주인공이 찰리라는 남자 고등학생인데, 정상 남성성으로부터 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예요. 영화 초반에 고등학교 등교 첫날의 풍경이 나오는데, 풋볼 선수들이 자기 여름 내내 운동해서 근육 키웠던 얘기나 게이를 조롱하는 농담을 나누다가, 그다음에 찰리가 나오는데 찰리는 소심하고 조심스럽고 문학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웃음). 또래와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하고요. 찰리가 이성애자로 나오지만 퀴어한 존재라는 느낌이 많이 들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찰리 주변에 친구들이 생기는데 그 친구들도 다 되게 퀴어해요. 그중에는 게이 캐릭터인 애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데, 다들 관계 맺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고 존중에 기반해 있어요. 얘네가 되게 자주 파티를 한단 말이에요. 근데 그 공간도 고등학교 하이틴 영화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키스와 섹스…. (노랑: 맥락 없는 섹스) 그런 이성애중심적 놀이 문화와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고.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때 시크릿 산타를 하는데, 너무나 섬세하고 서로 취향 맞춤 선물들을 주고받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공간이 찰리한테도 안전한 감각들로 돌아오고요.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이들이 같이 지내는 이 모습이 정말 퀴어하다고 느꼈어요.


그중에서도 패트릭과 샘이라는 주요 친구들이 있어요. 처음 찰리가 친구들을 따라 그 파티에 간 날, 찰리가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들을 경험했는데 – 친구의 자살도 있고, 이모인가 고모인가의 성적 학대도 있었고 – 이런 일들로 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아니까, 패트릭이 파티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찰리를 위해 건배하자고 하면서, “너는 조용하지만 모든 것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너는 월플라워”라고 이야기를 해준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너무…. (감동) 그 또래의 남성들이 흔히 우정을 표현하는 방식들과 너무 달라서, 그런 섬세함이 기억에 남아요.


노랑: 맞아요. <월플라워>가 진짜 잔잔하고 굵직한 내용이 없는데도 묘하게 위안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봤을 때, 단이 말한 세심함이 주류의 단순함과 너무 대비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이 각자에게 맞춤형인 말과 물건과 시간을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는 경험 자체가 너무 소중하고. 한편, <불한당>도 퀴어한 관계맺음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을 영환데 (웃음).



물결: (웃음) <불한당>은 한국적인 맥락에서의 퀴어가 느끼는…. 아니 퀴어보다는 게이에 가깝겠죠? 하여간 게이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각을 엄청 잘 보여준다고 느껴요. 영화에서 현수와 재호가 신뢰와 배신을 오묘하게 주고받으면서도 서로 미묘한 끌림을 느끼는데, 그 감정의 정체를 사실 관객이 완전히 정의내리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쌓이던 텐션이 한번 팡 터지는 순간이 둘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재호가 현수를 벽에 밀치고 몸을 더듬어 내려가는 장면이에요. 그때서야 다들 ‘아, 이거 사랑이었네?’ 하는데, 남성 간의 접촉, 관계맺음의 정도와 강도를 특정하는 규범 속에서는 이해되지 못하고 부유하던 감정들이 물리적으로 확 잡히기 때문인 거죠. 이 영화는 사랑이 지극히 세속적인 감정이라는, 얼핏 당연하지만 ‘숭고한’ 이성애 서사에 의해 손쉽게 잊혀졌던 사실을 물리적인 욕망과 관계를 통해 돌려줘요. 저는 이런 신체적 욕망과 관계가 퀴어 – 괄호 치고 게이 – 들이 사랑에 빠지는 데 있어서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게이들이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거든요. 남성 동성 사회에서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경험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얼굴을 들이미는 사랑의 순간이랄까요.


또 특이한 게 그 애매한 감정이 신체의 접촉을 통해 확 드러나는 순간은 BL과 팬픽에서 여성, 퀴어 독자들이 너무나 많이 묘사해온 그것이란 말이죠. 마치 ‘청게물’[6]에서 주인공끼리 싸우다가 뜬금없이 섹스한 뒤에 사귀는 것처럼…. 괜히 <불한당> 팬들이 그 장면을 소프트 포르노라고 부르는 게 아니에요. <불한당>은 거의 느와르 버전 청게물인 거죠. 그래서 전 너무 신기해요. 변성현 감독이 어떻게 이렇게 여성, 퀴어 관객들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지?


노랑: 감독님 본인의 욕망일 수도.


(한바탕 웃음)


물결: 저도 종종 생각해요. 감독이 퀴어가 아니었을까…. 자꾸 ‘애매호모’를 쓰게 되는데 이게 너무 적절해서 (웃음). 이 ‘애매호모’한 관계들을 우정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뭔가 자꾸 ‘브로맨스’, ‘퀴어 로맨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저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사랑이 정체성에 수렴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사랑이 정체성의 원인이라고 약간은 강박적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잖아요. 이/성애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사랑과 감정의 형태는 매우 다양한 거니까…. 그런 면에서 <불한당>을 ‘퀴어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범주를 동원해도 이 사랑을 적절하게 혹은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것에 충실하고픈?


노랑: <불한당>에서 물결이 느꼈다는 미묘한 관계성, 이름 붙여야 할 필요가 없는 그런 복잡한 감정과 감각에 대해 저도 공감하는데. 저는 <불한당>의 명성을 전혀 모르고 봤어요. 그래서 퀴어성이 의도된 건지 고민하면서 현수와 재호의 온갖 미묘한 긴장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되려 병갑 캐릭터를 보고 이게 찐사랑임을 확신했어요. 병갑이 극 내내 불합리한 선택을 계속하는 거예요. 아니, 누가 봐도 재호가 현수를 위해 자기 팀을 배신하고 죽일 것 같은데 왜 따라가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짝사랑 (웃음). 병갑의 선택들이 재호를 향한 오지랖 넓은 동료애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석하자마자 모든 게 이해돼버리잖아요. 물론 ‘사랑’도 쉽사리 정의할 수 있는 감각은 아니지만, 마초 남성성을 퀴어링하기 위해 사랑의 희생적 클리셰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하고, 명쾌한 명명 없이도 관객들에게 퀴어 렌즈를 끼우는 방식이 너무 재밌고 좋았어요.


단: 맥락은 다르지만 <월플라워>도 비슷한 모호함을 공유해요. 패트릭이 게이인데 (노랑: 배우가 에즈라 밀러예요.) (물결: 아! 오~) 맞아요. 너무 매력적으로 나와요. 아무튼 패트릭에게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그 남자친구는 클로짓 게이고, 남자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모한테 맞아요. 그래서 결국 둘이 헤어지고, 그 후에 패트릭이 찰리를 데리고 데이트 같은 걸 하러 간단 말이에요. 근데 이것이 패트릭이 찰리에 대한 마음이 있어서라는 생각은…. (노랑: 정말 좋아한다기보다는 그 순간의 분위기와 마음….) 어, 맞아요. 그런 느낌으로 같이 피자 먹고 언덕에 가서 이야기하고, 그러다 패트릭이 찰리한테 키스를 하거든요. 그런데 찰리가 거부하지 않고 넘어가요. 사실 찰리의 성적인 트라우마가 작용해서 자신이 동의한 적 없는 패트릭의 행동을 거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장면만 봤을 땐 찰리도 관계 맺는 방식이 고정적이지만은 않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 키스가 사랑과 우정의 어디 중간쯤, 애매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고, 그래서 그게 재밌었어요.


이응: <톰보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요. 리자라는 여자아이가 주인공 미카엘-로레를 남자라고 생각하고 뽀뽀를 해요. 그땐 마음에 따라 뽀뽀했으면서 나중에 로레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충격을 받는단 말이에요. 저는 리자가 처음에 되게 편견 없이 다가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레가 여자라는 걸 알고서 뒤늦게 ‘내가 잘못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너무 불편했어요. 그리고 로레의 엄마가 딸이 남자아이처럼 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애를 혼내더니 갑자기 강제로 원피스를 입혀요. 그 순간에 너무 ‘아 정말 교육이 중요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폭력적이고…. <불한당>이나 <월플라워>에서는 주인공들이 어느 정도 커서 그런지 더 미묘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이 있다면 여기서는 아직 어린아이들이라서 누군가에게 빠르게 통제당하고. 이런 방식으로 자꾸 불쾌한 혐오가 교육되고 반복되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거예요.


저는 그리고 <톰보이>의 결말에 대해 양가적인 마음이 드는 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을 들키면서 다시 겉도는 미카엘을 보면 마음이 안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리사가 드디어 미카엘에게 처음으로 진짜 이름을 물어본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이제부터라도 정말 주인공 로레를 젠더라는 벽을 분리해서 바라보려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단: 그 영화에서 주인공 또래 정도만 돼도 젠더 규범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런 가운데 여동생이 너무 소중하게 다가와요…. (노랑: 아직 규범을 내재하지 않은 나이에요?) 네, 그래서 주인공이 자기를 남자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면, 엄마는 하지 말라고 하고 싫어하는데 동생은 그렇게 잘 불러주거든요. 동생은 너무 자연스럽게 이 경계들을 넘나드는 거예요.


노랑: 아직 경계가 없는 어린이…! 이응과 단이 말한 지점이 정말 중요한 게, 한편으로는 그런 종류의 구획과 폭력이 없다면 그에 저항해서 따로 정체화할 이유도 없는 거잖아요. 마구 뒤섞인 채 존재하는 복잡한 삶을 내가 퀴어하다고 정의하고 스스로 퀴어라고 감각하는 과정에서, 혹은 그런 정의와 감각에 선행하여 반드시 제약과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 계속 어떤 강압적인 분류를 당하는 고통을 느끼고 한쪽으로 떠밀려봐야지만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하고 느끼면서 어느 구획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건지, 이걸 내가 견딜 수 없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나의 모습은 뭔지 찾아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정체감에 있어서는 고통의 서사가 불가피하게 뒤섞이는 것 같기도 해요.


단: 맞아요, 저도 <월플라워>를 보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찰리도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이후의 관계들에서 어려움을 겪고, 패트릭도 자기 정체성 때문에, 그리고 폭력적인 남자친구 때문에 겪는 어떠한 어려움들이 있고, 샘도 어린 시절에 경험한 폭력들로 인해서 건강하지 못한 관계들을 자꾸 맺거든요. 그런데 셋 모두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이해하고 찾아가요. 관계맺음 속에서 늘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맞닥뜨리고, 최대한 규범적인 사랑을 따라 해보려고 애쓰지만 실패하고…. 그렇게 혼란과 외로움을 겪으면서 자기 정체성을 인지하고 확립해가는 과정이 <월플라워>에 잘 드러난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그런 지점들을 공유하기 때문에 찰리, 패트릭, 샘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노랑: 아동·청소년이 ‘정상적인 성인’으로 자라나게 하려고 수많은 폭력이 가해지죠. <패왕별희>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폭력 연대기’로 봐도 무방할 정도예요. 초반에 주인공 데이의 어머니가 아들을 키울 여건이 안돼서 극단에 넘기려는데, 극단 측에선 데이가 ‘육손이,’ 그러니까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이유로 그를 받아주지 않아요. 엄마는 절박한 나머지 아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극단에 들여보내 버리고요. 이게 캐릭터의 특성과 엮여 거세의 메타포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다양한 층위의 폭력이 변주되며 등장해요. 데이는 극단에 들어가자마자 ‘패왕별희’라는 극의 ‘우희’ 역할을 맡아요. 초패왕이 사랑하던 아내, 그러니까 여자 역할을 맡은 거죠. 우희 역이 부르는 노래의 핵심적인 소절이 “나는 본디 계집아이로, 사내아이도 아닌데”인데, 애가 그걸 못하는 거예요. 자꾸만 “나는 본디 사내아이로, 계집아이도 아닌데”로 잘못 불러요. 평소 연습할 때도 그 한 줄 때문에 온갖 학대를 당하고, 한 번은 같은 실수 때문에 자신이 가장 믿던 친구가 데이의 입 안에 도구를 쑤셔 넣고 형용하기 힘든 폭력을 행하고 말아요. 그게 어른들로부터의 보호를 위한 폭력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는데. 그 후 피를 흘리는 데이가 처음으로 완벽한 표정과 톤으로 그 대사를 올바르게 읊으면서 곧바로 성인이 되는 장면으로 넘어가요. 어린 시절의 혼란과 저항을 묵살당하며 성인이 된 데이는 극과 삶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뒤섞인 ‘완벽한’ 배우가 되어있고요. 정상성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이것도 어떠한 주어진 프레임 안에 누군가가 올바르게 가두어지기까지 끝없는 신체적, 언어적 억압이 거듭된 거잖아요. 사회가 개인에게 물리적 학대를 가하면서 기존의 권력과 위계를 체화시키는 방식이 매우 잘 드러나서, <헤드윅>과도 많이 겹쳐 보이는 작품이에요. 이렇게 퀴어성을 다른 몸의 경험이나 정체성과도 엮어보는 작업이 불가피하고 또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모두가 데이처럼 압도적인 고통을 살아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린 시절 데이의 친구 한 명은 맞는 게 너무 무서워서 결국 자살을 하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데이는 때때로 그 친구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해요. 폭력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그 고통과 억압 기제가 영원히 내 삶과 내 일부로 녹아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게다가 폭력을 모두 견뎌내며 자란 데이는 꽤나 보수적인 어른일 뿐 아니라 경극밖에 몰라요. 그래서 자신의 상대역인 초패왕과 초패왕을 연기하는 배우 샬로에게 엄청난 사랑, 우정, 동료애 이 모든 걸 느끼면서 집착하듯이 좋아해요. 그런데 이 친구는 현실과 극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이응: 결혼해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리고…. (물결: 안 돼!) 그렇게 결혼한 주샨이라는 인물이 제가 봤을 때는 데이가 샬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도 재밌어요. 그럼 데이가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상황인 거잖아요. 그런데 데이를 배척하지 않고 계속 보듬고 데려가는 방식이 너무 좋아요. 주샨이 데이를 자주 구원하죠.  


단: 아, 노랑이 말한 대사를 들으니까 <패왕별희>를 너무 보고 싶네요.


물결: 진짜 궁금해졌어.


노랑: 영화 속에서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폭력들은 일제 침공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적인 폭력과도 맞물려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경험의 중첩과 뒤얽힘이 나의 고유함을 구성한다는 것? 분절되지 않은 그 총합으로서만 개인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전달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데이는 고독할 수밖에 없고, 자기가 경극에 진심이니까 자신만큼 경극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든 좋아해요. 그래서 일제 군인들이 중국을 침략하고 국민당이 집권했다가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정권이 쉴 새 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정치적 진영과 관계없이 데이는 그저 예술적으로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인물들과 친밀하게 지내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그 관계맺음 자체가 자기를 반역자로 만드는 처지에 놓여요. 다양한 층위의 폭력들이 마구 엮여있고, 내용이 다를지언정 그 단선적인 문법은 모두 비슷하다는 걸 잘 표현했어요. 이 영화가 성별, 국가와 이념, 이런 수많은 이분법 사이에서 우리가 구획되지 못하는 복잡한 존재로 살아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헤드윅>과 비슷하지만, 헤드윅은 어쨌든 자신의 삶을 정교하게 톺아볼 여건이 되는 반면, 데이는 거대한 시대의 혼란에 압도당해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하고 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지금의 퀴어


노랑: 그런데 데이가 샬로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게이라고 규정하긴 어려워요. 자기가 맡은 우희라는 인물에 굉장히 이입해서, 그 극과 수행이 자신의 현실 자아나 현실의 욕망과 계속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고, 데이의 ‘여성스러운’ 우아함 혹은 ‘우희스러움’은 그 누구도 괴이하게 해석하지 않는, 하나의 전문성이자 완벽성의 영역이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새삼 옛날에 ‘퀴어’라는 분류는 없었지만 분명 현재와는 다른 맥락의 퀴어한 감각과 경험이 많았을 것이란 게 느껴졌어요. 우리가 근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극심한 젠더규범의 통제로 인해 그런 다양성을 소실했다가 다시 발굴하려고 하니까 퀴어가 마치 새것 같고 어려움이 수반된다는 점, 그리고 현재 퀴어가 정체성으로만 사유되기 때문에 지워지는 복잡미묘한 퀴어함도 있겠다는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영화인 것 같아요.


물결: 저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1970년대에 ‘바지씨’라는 명칭이 있었잖아요.[7] 그런데 그 여성 성소수자들이 사실은 ‘레즈비언 부치’나 ‘트랜스젠더 남성’ 이런 분류에 명확하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8] 오늘날 ‘퀴어’라고 했을 때 LGBTQIA만 반복적으로 언급하게 되는데, 사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목록들이 있다는 거? (노랑: 스펙트럼처럼) 네, 그런 게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응: 현대로 오면서 무언가를 규정 지으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옛날은 보수적이고 지금은 비교적 개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되돌아보면 한국의 여성국극도 그렇고 계속 퀴어한 실천들이 있었는데 현대로 오면서 오히려 구획이 명확해진 느낌?


노랑: 혹시 이희문이라는 가수 알아요? (모두: 끄덕끄덕) 전에 ‘씽씽’이라는 밴드로 활동하다가 해체했는데, 씽씽의 보컬 멤버들이 전부 민요 전공자였어요. 씽씽밴드는 거의 드랙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헤어 스타일링과 화장을 한 채로 공연했는데, 자기들은 옛날 소리꾼들이 다양한 인물 혹은 영혼을 매개하는 젠더플루이드한 퍼포머였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본인들도 그 퀴어함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했거든요. (물결: 맞아, 씽씽이 진짜 멋있었는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현재에는 현재의 재해석과 논의를 해보는 방법밖에는 없겠죠.



물결: 맞아요. ‘퀴어’라는 범주도 어떤 규범의 기준에서 이상하지 않으면 퀴어가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퀴어란 결국 규범과의 끊임없는 불응, 불협화음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노랑: 제가 교환학생 시절에 목격한 특이한 현상이 있어요, 캘리포니아 버클리라는 굉장히 특수한 지형의 일이긴 한데, 레즈비언이나 게이 중에 자기가 퀴어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거예요. 그 뉘앙스가, 정말 동성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비규범적인 면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퀴어하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퀴어함은 물결이 말했듯 반골 기질적인 측면, 규범에 대한 끝없는 저항까지를 내포하니까요. 그런데 미국 서부는 이미 게이 레즈 결혼도 매우 보편화되어있고 법적으로 저촉되는 면도 없어서 더 그렇게 규범적으로 자신을 정의하기도 하나 봐요? 사회 맥락에 따라서 저럴 수도 있구나, 이만큼이나 퀴어들이 여기에 많구나 싶으면서도 게이들이 퀴어 정체성과 굳이 손절을 한다는 것 또한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우리가 지금 궁지에 내몰렸으니까 퀴어의 연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배제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또 안온한 규범성에 포섭되려고 할까 싶어서 아이러니한 불편을 느끼기도 했거든요.


물결: 어쨌든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도 차이와 위계가 있잖아요. 노랑의 이야기가 그런 걸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아요. 항상 그 감각이 있잖아요. “나도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지금도 행복한걸?” (웃음) 이런 모순되는 감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확실히 노랑이 말한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오히려 규범에 영합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노랑: 맞아요. 퀴어판에는 결혼 제도를 해체해야 한다는 말과 “우리도 결혼하고 싶어!”가 공존하죠.


(한바탕 웃음)


물결: 사실 노랑이 말한 모순이 퀴어 운동을 더욱 고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퀴어 시민권을 인정받는 일과 규범적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 모순이 이성애규범성에 의해 더 강화되고 있다는 걸 짚고 싶어요. 왜, 한창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주목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자꾸 자기가 몰랐던 동성 간의 사랑에 되게 감복하고, 새로운 윤리적 탐구의 대상을 발견한 것처럼 굴었잖아요. 대표적인 예가 2014년에 평론가 신형철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로렌스 애니웨이 (2012)>를 두고 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글이에요. 글의 요지가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설명하고 드러낼지에 대해 더 윤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방법이 곧 ‘정확함’이라는 것이거든요. 저도 당시에는 감명 깊게 읽었던 글인데,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묘하게 아니꼽더라고요. 퀴어를 가부장제, 이성애규범성 바깥의 불가해한 타자로 설정하고, 무언가의 승인을 통해서만 공동체 안으로 포섭된다고 생각하는 기만적인 태도가 그제야 선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도대체 그 ‘정확함’은 언제, 어떻게 도착한다는 건지? 신형철은 여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퀴어가 규범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시각이 그 도착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퀴어 연구자 시우씨가 쓰는 ‘퀴어 아포칼립스’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동명의 단행본에서 나온 표현인데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게 반퀴어 운동이 금지한 것은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다. 그러니까 반퀴어 운동이 계속해서 퀴어의 삶에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퀴어가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규범적인 미래를 부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퀴어들의 움직임을 긍정하면서 ‘퀴어 아포칼립스’라는 표현을 써요. 저는 헤드윅이 그런 ‘퀴어 아포칼립스’를 열어줄 수 있는 인물 아닐까 생각했어요. 헤드윅은 미래도 없고, 고통 속에서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자기를 마주하고 비틀거리면서 나아가잖아요. 그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모습이 – 가끔은 퀴어끼리의 적대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 차별과 폭력의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한 퀴어의 모험처럼 느껴져서 정말 좋았어요.


노랑: 물결 말마따나 <헤드윅>은 퀴어 프라이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인물이 겪은 구체적인 괴로움에 대한 증언을 잘 녹여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른 분들은 각자 ‘퀴어 영화’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나요? 퀴어 영화는 어떤 상상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응: 음…. 저는 퀴어 영화가 단순히 하나의 고정된 정의의 ‘퀴어’가 아닌 폭넓은 퀴어함을 담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성적 정체성 혹은 젠더 정체성 관련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약자성과 연관된 ‘퀴어함’이 이야기되었으면 하는?


단: 제가 스스로 퀴어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돌아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각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입고 싶은 옷부터 관계 맺는 방식까지, 우리는 실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종의 탈주를 하곤 하잖아요. 저는 퀴어 영화가 그런 색색깔의 퀴어한 구석들을 보여주고 보듬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그것이 퀴어함을 애써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아니었으면 하고요. 퀴어한 유영들이 그 모습 그대로 섬세하게 담겼을 때, 각자가 살면서 한 번쯤 지어본 적 있는 표정을, 해본 적 있는 고민을 스크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고통스러운 날들도 있겠지만 즐겁고 유쾌한 순간들도 있을 거고, 그게 아니라도 그런대로 괜찮을 수 있고, 사실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 그냥 뭐 다 잘 모르겠어도 상관없다는…. 일종의 위로를 전해줄 수 있다는 게 퀴어 영화의 큰 힘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노랑: 퀴어 문화 혹은 운동 진영이 소외된 존재들의 자긍심뿐 아니라 욕망, 친밀함 등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사유해온 선구자적 집단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나다운’ 모습을 긍정한다는 메세지를 중심에 안고 있어서 강력한 포섭의 힘과 연결의 가능성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한 손에 다섯 손가락만 있도록 멀쩡한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그냥 내 마음에 들었던 아이에게 키스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의 지정성별 때문에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동성의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성기를 잘라야 하고. 이 영화 속 사례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서는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들이 정상성과 떼어놓을 수 없이 혼돈되고 끝없는 좌절, 손상과 고통을 동반하는데.... 오늘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사실은 ‘부자연스러운’ 그 폭력적인 구획들을 응시하며 그 사이를 끊임없이 횡단하거나 더욱 미묘한 경계에 선 채 마치는 것 같아요. 한편 퀴어들은 스스로의 몸을 고찰하고 욕망과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신체와 표현을 정교하게 변형시켜가잖아요.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몸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유동적인 개조와 수행성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도 생각나고요. 혼란함, 복잡함, 개인의 역사를 모두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어렵고 아름다운 세계, 누구도 추하다고 배제되지 않는 대체적인 미학을 퀴어 영화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요.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참고 문헌]

[1] 시우, 『퀴어 아포칼립스』, 현실문화연구, 2018, 133쪽.

[2] Jude Dry, “20 Years After ‘Hedwig and the Angry Inch,’ John Cameron Mitchell Is Just

As Radical As Ever.” Indiewire, 2019.06.28. (https://www.indiewire.com/2019/06/john-cameron-mitchell-hedwig-interview-pride-

criterion-1202154090/)

[3] Esther Newton, 『Mother Camp』, Chicago Press, 1979.

[4]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Routledge, 1990.

[5]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한 뮤지컬로, 한국에서는 2000년에 초연을 했다.

20세기 말 미국 뉴욕의 신세대 예술가들과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6] “청춘 게이물”의 준말로 BL/팬픽의 하위 카테고리다.

[7] 1970년대에 여성 성소수자를 지칭하던 은어 중 하나로,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루인, 정희성, 「퀴어와 공간의 관계 재구성」, 『공간과 사회』 제28권 1호, 2018, 196쪽.

[8] 오혜진,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한국 퀴어 서사의 퀴어

시민권/성원권에 대한 상상과 임계」, 『문학과 사회』, 2018년 겨울호, 84쪽.




추가 영화 픽


노랑:

박찬욱, <아가씨 (2016)> / 배리 젱킨스, <문라이트 (2016)> / 스티븐 돌드리, <디 아워스 (2002)>


단:

드니 빌뇌브, <컨택트 (2016)> / 올리비아 와일드, <북스마트 (2019)> / 엑스맨 오리지널 트릴로지 (2000, 2003, 2006)


물결: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2012)> /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이응:

앨리스 우, <반쪽의 이야기 (2020)> / 페드로 알모도바르, <내 어머니의 모든 것 (1999)> /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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