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예술 속 인류의 마지막은 아름답거나 절망적이게, 즉 화려하게 그려지곤 했으나 실제의 종말은 대비할 틈도 없이 허무하게 닥쳐왔다. 어느 겨울의 화요일 아침, 미국인가 러시아에서 띄운 탐사 우주선이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대에서 거대한 운석과 충돌했고, 일련의 폭발에 의해 튕겨 나온 거대한 파편 하나가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NASA는 약 69분 뒤에 한국 땅만 한 크기의 운석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후 2시 23분. 평소와 같이 점심 식사 후 전기장판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겨우 동네 카페로 기어 나왔고, 엄마와 함께 마시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해놓고서 앉아있던 참이었다. 음료가 나오면 집으로 곧장 이어지는 학원가를 통하지 않고 큰 반원을 그리며 개천이나 거쳐서 둘러갈 생각이었다. 어쩐지 타고나기를 마음에 쉽게 바람이 들어서 이따금 그저 흐르는 방향대로 다리가 지끈해질 때까지 걸어야만 비로소 충만해지는 편이었다.
소파 명당석에 중년 여성 셋이 앉아있었다. 어느 여배우의 수술과 이혼, 다른 주부의 게으른 내조를 평가하면서 그들은 분명 충전 중인 표정이었는데 나는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며 거부감이 솟았다가 이내 마음이 이상해졌다. 대화에서 삭제된 여분의 일상을 모르는 채로 그들을 섣불리 평가하거나 윤리적 우월감을 가지기는 싫었다. 그저…. 분명 같은 땅을 디뎠고 살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영영 닿지 않을 우리의 시차와 어긋난 궤도에 대해, 그 궤도가 어쩌다 스쳐 서로를 붙잡고 설득하려 할 때 벌어지는 작은 기적과 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반드시 수반되는 거대한 피로와 상처에 대해 길게 곱씹었다. 그러다가 아, 우리 아들이 충분히 서울대 갈 수 있었는데 수능 날 몸이 너무 안 좋았던 바람에 연대에 갔잖아, 하며 시작된 긴 변명을 들으니 마음이 급격히 식어 30대가 되도록 인생의 가장 큰 상처가 서울대나 의대를 못 간 것뿐인 삶의 안온함에 대해 싸늘한 냉소가 솟았다. 흘러들어오는 타인의 삶을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으나 또 하나의 맥락 없는 이야기가 급습해왔다. 동일한 우주선 사진이 몇 개나 정렬되어있어 눈길을 잡았고 맨 위에 놓인 기사의 제목은 “[속보] 우주선 폭발, 미국 NASA 발표 ‘70분 안에 지구 종말’?”이었다.
과학자들이 내놓은 69분의 계산이 2분 뒤에 속보가 되고, 그보다 4분 늦게 내게 닿았다. 추가로 7분을 이게 사실인지 뉴스를, 댓글을, 카톡과 인스타를 오가며 확인하는 데에 허비했다. 잠시 기사와 검색어가 폭발했다가 이내 듬성듬성 업데이트되는 와중 소파석의 여성들도 다소 정신없이 당황한 눈빛과 해답 없는 질문과 침묵을 나누다가 딸 아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나갔다. 재택으로 일하고 있던 우리 엄마에게서 한발 늦게 다급한 전화가 왔고 동시에 알바생이 커피를 건넸다. 58분이 남아 있었다.
하필 오늘도 출근한 아빠는 고민도 없이 마지막 한 시간 중 40분을 오로지 집을 향해 어떻게든 운전해서 오는 데에 쓸 예정이었다. 그다운 선택이었다. 시간이 아깝고 애석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보다 안타까운 상황과 사연이 한둘일까? 갈 곳이 없는 사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이 없이 혼자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 사랑하는 모두가 지구 반대편에 있거나 문턱만 넘으면 찾아갈 수 있는데 혼자서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까지. 동물원과 사육장에는 우리를 열어주고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면 다른 생물을 위해 문을 여닫는 그 시간마저 아깝다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하려나. 다양한 격리와 고립의 가능성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묘하게 담담했다. 이 모든 게 ‘하필’이라고 할 만한 상황인가? 언제나 존재했고 심지어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일상인 것을. 연결을 위한 수많은 외침들이 미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더라면 인사 없는 죽음들을 좀 더 줄일 수 있었을 테지만, 마지막이라고 해서 전에 없던 기적이 생길 리는 없었다. 운 좋게 동네에 있었던 나는 바로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몸과 마음과 추억을 정돈하는 편이 타당해 보였지만 가야 할 곳이 집은 아닌 기분이었다.
마음의 온도에 맞는 질감, 굴곡, 건물과 인구 밀도를 가진 길을 걸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얻곤 했다. 길에 대한 진심 때문인지 모든 여로旅路를 열어두는 다른 유목민을 만나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를지라도 함께 걸을 수 있고 그 걸음 속에 수반되는 모든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사랑해버릴 때가 있었다. 바깥을 걷는 삶 속에서 수많은 시공간과 사람이 조각조각 모여 나를 이루었으니 마지막이라고 해서 인생을 축약하듯 찾아갈 만한 단 한 곳은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노스탤지어를 일러준 락 앨범을 틀어놓고서 계획대로 개천을 걸었다. 웰메이드 에스프레소 커피와 함께 하는 종말이라니 참 사치스럽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러니에 피식 웃었다.
모태 신앙이 기독교인 친구가 가장 먼저 나도 하지 않는 나와 식구들을 위한 기도를 남겨놓고는 사라졌다. 사람 없는 강둑에 앉아 오랜 친구 세 명에게 이대로 우리가 정말 죽는다면 그동안 고마웠다, 너희가 있어 다행이었다 카톡을 보냈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장문의 절절한 답장으로 응하는 와중에 언제나 폰을 잘 보지 않았던 한 명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친구와는 짧은 통화를 했고 우리가 지난주에 봐서 다행이었다 어느 독일 독립영화가 생각나는 상황 아니냐고 말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내 머릿속 한켠에는 감정 기복이 크고 히스테리컬한 친구가 맴돌며 걱정이 되었지만 은근한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여태는 기꺼이 나누었던 그의 불안과 쏟아지는 날 선 말들을 마지막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몇 년간 부른 적 없는 이름에게서 응축된 사과가 왔다. 그때 너를 그렇게 두어서 미안해. 이제 와서 변명하지 않을게.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플레이리스트가 락을 지나 힙합과 재즈라는 더 늦은 과거에 도달했을 무렵 음악을 껐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더 많은 마지막 만남을 지체할 것이었다. 핸드폰이라도 있는 시대여서 다행인가. 하얀빛을 따라 저승으로 걸어가던 어느 주인공들의 클리셰적 죽음이 떠오르며 소복소복 쌓이는 눈이 누군가의 의도적인 미장센일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일상은 수많은 우연의 화학 작용으로 구성되어있고, 누군가에게 감지되는 우연만이 의도가 있는 것처럼 해석될 뿐이다. 오늘 가닿지 못하고 흩뿌려질 일방향적 진심은 몇 개일까. 마지막 순간에 결국은 응답을 요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왜 평소에는 말할 수 없었을까. 어차피 곧 모든 것이 끝날 텐데 왜 굳이 말하고 싶을까. 지금 말하는 감사와 사랑과 용서가 남아 무슨 의미를 남길까.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이 두려운 걸까 혹은 몸과 그림자가 자비 없이 바스라지기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자의적으로 덜어내고 싶은 마음일까. 현재의 미성숙을 핑계로 미래의 언젠가 천천히 해결하고 사죄하려 했던 비뚤어진 선택들을 재빨리 정돈하면서 최후까지도 주체성만은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위로지 뭐, 냉소하면서도 분명 한결 가벼운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일련의 위로와 몇 초의 따뜻한 마음들이 남은 것의 전부인지도, 아니 언제나 전부였는지도. 집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이제 가족과 단 한 사람이 남았다. 27분이면 충분했다.
죽기 전에 굳이 나누고 싶었던 장대한 비밀과 응어리는 없으나 이 기회를 빌려 묻고 싶은 것은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몸이 안 좋을 때도 굳이 나와서 걷는, 유랑의 미덕을 아는 사람. 나와 우주 끝까지 다른 사람이지만 또 궤도의 한 결정적인 축이 보란 듯이 겹쳐져 있어서 나는 너의 많은 것을 알았다. 어쩐지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 너는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응, 웬일이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뻔뻔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심이기도 한 물음.
- 그냥 한 번 더 얘기하고 싶어서. 눈 온다.
- 응, 보고 있어.
- 바깥이야?
- 응.
- 그럴 줄 알았어.
- 이그.
- 이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음, 잘 모르겠는데.
- 재수 없어. 끄집어내서라도 좀 해봐.
너는 항상 우울했고 나는 미리 불안했기에 종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이 순간을 예감하며 일평생을 각자의 방식대로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나를 괴롭힌 지난한 지옥의 시나리오에서는 기후 재난으로 물과 자원이 부족했고 녹은 빙하에서 나온 고대의 바이러스가 수많은 죽음을 야기해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상실했다. 카페, 친구들과의 번개, 시간과 장소가 확정되었고 준비가 필요한 약속, 새벽의 산책, 편안하고 보송한 침대와 샤워, 미식…. 그리고 인간성. 죽기 싫다는 이기심으로, 혹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는 자포자기와 두려움 때문에 추악해진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은 나도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며, 타인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 강자와 부자, 운 좋은 이들의 사회에서 사느니 아무래도 그냥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듯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잃은 채로 연명하는 존엄 없는 삶에 비하면 급격한 종말은 축복일까. 하지만 또, 내가 상상한 최악의 미래는 이미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과거였고 현재이지 않은가. 생각은 여전히 두서가 없고 모순되었다. 인간사의 지층과 형형색색의 유산, 많은 이들의 삶을 바친 이야기와 사랑이 모두 휘발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마음이 저릿했지만, 새삼 불교 이데올로기의 궁극성에 공감하고 말았다. 사랑, 평화, 그보다도 크고 탈가치적인 무소유의 결말.
집에 가는 길에는 교통 신호를 죄다 어기는 어떤 차들과 신의 자비를 좇아 교회로 뛰어나온 일가족, 펑펑 우는 사람과 왕왕 짓는 강아지, 이것저것 부수고 마지막 순간에 굳이 누구라도 죽이거나 덮치려는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말로를 오염하는 작자들이 가득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모든 것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재촉해 인적이 드문 여고 뒤 골목길을 통과했다. 언젠가 동물행동학 수업에서 재난과 핍박 앞에 고결하게 자살하는 고래에 대해, 지상의 위협을 피해 지하 깊숙이 도망가 몇 달이고 살 수 있는 두더지에 대해 배운 것이 생각났다. 분명 모두의 멸종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가져온 최후로부터 어느 생명이라도 기필코 살아남기를 염원했다.
13분 전. 무사히 도착한 아파트는 왜인지 정문의 유리가 깨져있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듯 우는 듯 절규하고 있어 계단을 택했다. 오는 길에 야외에 놓인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내온 블랑 맥주 한 캔을 까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나름 건네고 싶던 모든 인사를 건네고, 담담한 마음으로 커피와 맥주까지 마시고서 맞이하는 죽음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현관문에 도착하자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채 누르기도 전에 엄마가 문을 연다. 동생도 울면서 달려온다. 한 차례 모두를 부둥켜 안고나니 엄마 아빠는 오래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나와 동생이 측은해, 그리고 아빠는 요양원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가 더 걱정되어 한 맺힌 눈물을 흘린다. 간호사와 도우미들도 모두 자리를 떴는지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 통화 버튼을 눌러주기만 하고 갔으면 됐을 텐데. 하지만 이날까지 타지에서 남의 가족을 돌보면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했을 조선족 여성이었던 그를 나는 기억하고, 애석한 각자의 처지들을 곱씹을수록 점차 슬퍼진다. 신파 드라마처럼 당연하다는 듯 가족과 맞이하는 마지막에 대해 엷은 회의를 느끼면서도 가족이 결국에는 내게도 눈물을 만든다. 남은 9분 동안 껴안은 채로 두런두런 끊기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 사랑해 미안해 그때 참 속상했어요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태어났을 때 손에 살이 얼마나 퉁퉁하게 쪄있었는지 남들이 다 못생긴 아기라고 하는데 난 세상에서 가장 예뻤어 네가 처음 걸을 때 얼마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지, 나는 정말 너희들의 미래를 보고 싶었어
대기가 일순간에 거무튀튀한 바람으로 뒤덮였다. 굉음과 함께 닥쳐온 극심한 두통을 짓누르거나 어둠이 세상을 덮음과 동시에 일순간 찾아온 침묵 속에서 영문을 알아내려는 사람들, 그 틈에서 문득 세상에 얼마나 잡음이 많았었는지를 깨달았다. 필요 없는 소리를 지우기 위해 듣고 싶은 음악이 없어도 비교적 마음에 드는 소리를 고민하고 켜야 했던 과거의 순간들에 대해 또 의미 없는 생각을 저만치 멀리까지 뻗어냈다. 아무래도 살아있는 게 분명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태양을 등지고 있던 두 개의 대륙이 붕괴되는 동안 이쪽의 생명들은 대부분 멀쩡히 살아남았다. 아주 큰 소리와 충격에 많은 이들이 청력을 상실했을 뿐이었다.
누군가 맞이한 종말의 1분 46초 뒤. 말이 필요 없던 관계가 문득 그리워졌다.
마지막 한 시간이라고 믿었던 순간의 일들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열어줄까?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