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4호 10화

비로그 #2

물결

by 연희관 공일오비

읽는 건 한 순간이지만 쓰는 데는 품이 든다. 교지에 실을 글을 쓰는 요즘 매일 하는 생각이다. 글 쓰는 게 이렇게 힘들었나, 예전에는 뭘 어떻게 썼더라. 이런 푸념들만 머릿속을 떠다니고, 평소 마시지도 않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대령해 글을 쓰려 앉으면 허공에 문장들이 왕왕 돌아다녀서 그대로 유튜브만 틀게 된다.



종종 글쓰기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뭐 증상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샤워할 때만 떠오르는 생각이라 정말 막연하다.) 정성들여 입력하는 글쓰기 말고, 토해내는 글쓰기. 열을 내며 쓰고 보니 황당할 정도로 의미값이 0에 수렴하는 글쓰기. 고치고 고쳐도 끝내 실패하고 마는 글쓰기. 그럼에도 왜 써야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한때 좋아하던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그 누구의 글도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이,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이, 하얀 화면에 쌓여가는 글만이, 정말이지 아주 조금 나를 위로해주었다. (…) 쓰일 수 없는 내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 써야 했다.” (「Auto」)



그 작가는 지난여름 이후로 종적을 감췄다. 사적인 대화를 소설에 무단인용 했다고 한다. 자기만이 자기에 대해 쓸 수 있다는 양, 질투 나게 배타적인 태도로 글을 쓰더니 결국엔 그도 타인 없이 글 한편 못 쓰는 사람이었던 게다. 그 소설로 받은 상은 반납했고, 책은 판매 중지가 됐다. 수업을 듣던 국문학과 교수님은 이제 문단에서 그의 글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 넌지시 말했다.


문제의 책을 치우니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잠잠한데, 나만 아직도 그의 글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다... 아직 나에게 남은 일말의 윤리로 그의 책을 펼칠까 말까 헤아리다가 제풀에 못 이겨 가끔 들춰보곤 한다. 그러고선 생각한다. 지금도 쓰고 있을까? 자기가 글을 쓴다는 사실에 위로받던 그가, 자기가 쓴 글로 자기 커리어를 끝낸 그가, 여전히 하얀 화면에 검은 글자들을 소복소복 쌓고 있을까? 쓴다면 무엇을 위해 쓸까, 아니, 애초에 왜 써야했을까. (우리가 킬링이브의 이브와 빌라넬도 아닌데)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눈앞의 소설엔 흥미가 떨어져서 책을 덮고 만다.



그가 고집스럽게 내건 제목 Auto를 두고 김건형은 “문학적 자기 선언”[1]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걸 자기 삶에 대한 정언명령이라 생각했다. 거창한 선언 아니고, 체화된 명령.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써야 해서 쓰는.


그러나 이 강렬한 당위가 “지나치게 강력한 매력으로 작동하여 미처 주의가 기울어지지 않는 틈새를 만들었”다는 백지은의 말[2]에 동감하는바, 그 틈새가 드러난 지금에서야 그의 글들이 ‘쓰고 싶어서 쓰는 글’과 ‘써야 해서 쓰는 글’ 중 어디에 떨어질까 의문이 든다. 둘 사이? 둘 모두? 아님 둘 다 아닌가. 그는 어디에 도달하려 했나. 그는 우리를 어디에 데려다 놓으려 한 건가. 당위는 어디에서 맹목으로 바뀌었나. 새어나오는 질문은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혼란 속에서 내 노트북 스크린을 본다. 가다 서다를 거듭하다가, 마감을 지켜야한다는 에너지로만 마구 밀어붙인 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만하고 번잡한 문장 속에서 나는 어디에 도달하려 하는 건가. 나는 누구를 어디에 데려다 놓고 싶은 건가. 나도, 그도, 결국 어떤 이든 혼란한 시간 속에서 혼란하게 쓰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멈추고 말았다.


편집위원 물결 (eunbitmulgyeol@gmail.com)


[1] 김건형, 「퀴어 테크놀로지(들)로서의 소설-김봉곤식 쓰기, 되기」, 2018, 문장 웹진.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3189

[2] 백지은, 「왜 소설에 사적 대화를 무단 인용하면 안 되는가」,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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