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129호> [동물] 미궁, 온 사방이 시멘트로 뒤덮인

기고자 도요

by 연세편집위원회
동물-1.jpg 주황색 배경 위에 '미궁, 온 사방이 시멘트로 뒤덮인'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이미지 위에서부터 글자 아래까지 거미줄이 있고, 거미줄 끝에 초록색 거미가 매달려 있다.



갈증이 차오른다. 그는 물을 얻기 위해 걸었다. 이슬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되었다. 하다못해 젖은 흙을 짜내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실 수도 있었다. 허나 그곳에는 시멘트뿐이었다. 시멘트가 온 바닥을 덮어서 풀 한 포기 없이 텅 빈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미래의 감옥도 외계인의 실험장도 아닌 평범한 내 방이다. 앞선 문단의 ‘그’는 작은 벌레다. 나의 방은 그의 몸집에 비해 수억 배나 크다. 그러니 이곳은 그에게 시멘트 사막이다.


인간은 곧잘 벌레의 생존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당연히 벌레는 다른 모든 생명과 비슷하게 생존 능력이 좋은 편이다. 다만 그것은 몇 발짝만 가면 이슬이나 풀이나 흙 속 유기물이 있는 공간에서만 성립한다. 그 어떤 생명이라도 몸집의 수억 배가 되는 텅 빈 감옥에 가둬두면 하염없이 공간을 헤매다 굶어 죽을 터이다. 벌레에게는 인간의 집과 도시의 아스팔트가 그런 곳이다.


나는 오래된 빌라의 일 층에 산다. 벽지 아래에는 콘크리트와 철근이 있고 식물이 뿌리를 내릴 여유는 없다. 장판 아래에도 시멘트가 있는데, 또 그 아래에는 시멘트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매미 애벌레들과 숱한 땅벌레들이 있을 것이다. 간척사업 때 생매장당하는 수많은 갯벌 생물의 이야기는 모든 도시에서 펼쳐지고 있다.


간혹 창틈으로 거미가 들어온다. 그들은 세면대와 변기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왜 그곳인가 하면, 한 번 그 안으로 발을 내디딘 거미가 세라믹 벽을 다시 오르지 못하고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거 공간 전체가 그렇다. 인간의 집은 따뜻하거나 시원하고 단내가 나거나 빛이 있기에 많은 벌레가 이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공간의 넓이에 비해 무척 작다. 방금 설명한 것처럼 어딘가에 갇혀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모든 공간이 흡사 벌레를 가두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미궁과 같다. 그들은 결국 굶어 죽거나 인간에게 죽임당한다.


거미를 보면 나는 종이로 그를 들어 밖에 내어주는데, 며칠 전에는 그렇게 하나를 내보낸 후 비가 거세게 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도시의 바닥은 흙이 아니라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다. 바닥에는 물이 고이고 벌레에게는 비를 피할 풀숲이 없다. 모인 빗물은 하수도로 거세게 빨려 들어가는데, 이에 목숨을 잃는 벌레도 많다.


이 공간은 작은 생명들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름엔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가는 매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운이 없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매미들은 푹신한 흙바닥과 풀숲 대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 부딪힌다. 달팽이와 지렁이는 끝없는 보도블록 위에서 길을 잃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못해 말라 죽는다. 거리에는 다른 포유동물이 없기에 모기는 유일한 단내를 따라 인간의 집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저 간지럽다는 이유만으로 죽는다.


도시는 인간 외의 모든 생명을 배제한다. 본래 공간이란 독점할 수도 구획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며 한 공간에 다양한 생물 종이 섞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흙을 뒤덮었다. 그렇게 모든 비인간 동물을 몰아낸 후, 겨우 생존 중인 작은 생명마저 발견하면 죽이기에 거리낌이 없다. ‘여기는 인간만 살아야 해!’라며 다른 동물들에게 선언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물며 다른 동물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았다. 수만 헥타르에 달하는 넓이의 공간에 단 한 종류의 생명체만이 득실거리는 것은 지극히 기괴하다. 아직 많은 생명이 버티는 중이지만, 인간은 그 기괴한 형태를 목표로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또 시멘트를 바른다. 누구와도 합의된 적 없는 인간의 영역 독점이다.


인간은 작은 생명들이 자신의 공간을 침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벌레를 죽이기까지 한다. 이는 자신이 원할 때 상대가 제거되어 마땅하다 생각하는 일종의 특권 의식이다. 이런 착각은 인류 역사에서 유구하게 반복되었다. 예로 1950년대 미국에서 버스에 오른 흑인을 쫓아내려는 백인이 있었다. 백인은 인종 간 위계를 태생적이고도 불변한 것으로 보고, 흑인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비인간 존재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했다. 그 관계가 완벽히 같을 수는 없으나, 인간은 작은 생명을 생명으로 대하지 않고 ‘종’의 차이를 빌미로 그들을 내쫓거나 죽인다. 상대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알고 그를 대등한 존재로 존중한다면 침범이라는 명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한 번도 인간의 것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조금만 둘러보면 벌레를 괴롭히고 죽이는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모기를 태우거나 굶기거나 자르는 영상은 쉽게 유행을 탄다. 그러나 인간이 거리의 포유동물을 절멸시켰기에 모기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인간의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유인된 모기를 고문하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인간의 유흥거리가 된다. 모기를 비롯한 벌레들이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은 전부 인간의 탓임에도, 인간은 그들을 고문하며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종종 집안에서 모기를 발견하면 그가 내 몸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만히 피를 빨린다. 집안에 고양이가 있다면 밥을 챙겨주는 것과 같이, 모기가 굶어 죽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기가 하루에 필요로 하는 피의 양은 한 방울도 되지 않기에, 한 번의 흡혈을 참으면 모기는 배를 채우고 다른 곳은 물지 않아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벌레들이 어찌나 막막하게 헤매다 굶어 죽을지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집안을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 수도 없다. 이 논의 너머의 것을 상상하고 싶은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는 커다란 화분에 고구마를 심었다. 그러자 고구마 잎과 줄기에서 단물이 나와 집안의 파리며 벌레들이 종종 화분에서 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에 손님을 들이기 힘들 정도로 벌레가 많아진 것도 아니었다. 벌레들은 종일 화분에서만 놀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분을 들이기 전보다 파리가 덜 보이는 듯했다.


당장 인류가 반성을 시작해도 지금의 가해는 돌이킬 수 없다. 단적으로 모든 인간이 도시를 떠나고 비인간 동물들에게 이 공간을 넘겨주더라도, 인간이 만든 세라믹 세면대와 변기에는 계속해서 벌레들이 갇히게 된다. 작은 생명들은 폐허가 된 시멘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가 나가지 못해 굶어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도시를 부수고 철거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또 많은 생명이 다치고 죽을 터이다. 도시를 세운 시점에서 인간은 이미 미래의 가해까지도 예정해버렸다. 어찌 공간은 딱 나뉘었는데 가해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침범하였다.


아직 나의 고민이 깊지 않아 이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이념적으로 무언가 주장하거나 거창한 이론을 세우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해충퇴치를 하는 빌라로는 이사하지 않을 것이다. 길을 잃은 벌레를 본다면 집 밖으로 내줄 것이고, 집안에서 살기에 괜찮아 보인다면 그냥 살게 내버려 둘 것이다. 나는 방 안의 생명을 살리려 한다. 인간의 깊은 사색도 중요하겠지만, 그 생명에게는 하루의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아직 해결책을 상상할 수는 없더라도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

마침.



사진1.jpg 잘 자란 고구마 화분이다. 흰 벽 앞에 커다란 미색 화분이 있고, 초록색 고구마 잎이 화분보다 크게 웃자라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29호> [동물] 들어가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