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제이
‘가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실제 가족 구성원들의 얼굴, 집이라는 공간, 혹은 ‘따뜻함’, ‘안정감’, ‘사랑’ 등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구체적인 가족의 형태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둘을 꼭 닮은 자녀들이 웃고 있는 장면이 떠오를 수도 있다. 가족 사랑을 주제로 한 공익 광고에 나올 것처럼,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가족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가족의 이미지를 보며 낯섦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조사에 따르면 2015년 전체 혈연 가구 중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44.9퍼센트였다. 이에 비해 편부모와 미혼 자녀 가정은 15퍼센트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부모와 자녀로 정의할 수 없는 ‘기타’ 가족은 전체의 13퍼센트를 차지했다. 대략 전체 가족의 28퍼센트가 부와 모, 자녀가 함께 거주하는 전형적 가족 정의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1]
내 부모님은 약 10년 전, 내가 12살 때 이혼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아니었던 셈이다. 사회적으로 한부모 가족의 자녀들은 소위 결손 가정의 자녀로서 양성 부모가 모두 있는 ‘정상’ 가족의 자녀에 비해 성장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정 내에서 오직 ‘어머니’, 혹은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애정, 돌봄, 훈육, 지원이 결핍된 채로 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애들한테는 엄마(아빠)의 역할이 필요하지”라는 말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하곤 한다.
우리 가족의 형태로 인해 내가 겪었던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함께 사는 부모가 한 명이라는 사실에서 전적으로 기인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대부분은 우리 가족 내부보다 우리가 사회와 관계하는 방식, 혹은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법적으로 한부모 가족은 모자 가족, 부자 가족 중 자녀가 만 22세 이하인 경우를 일컫는다고 한다. 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한부모 가족 자녀’ 졸업을 앞둔 지금,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좀 더 상처 없는 관계일 수는 없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종종 부부 싸움을 하셨다. 아빠가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고 나서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아빠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에 왔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아빠는 꼭 나를 깨워서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했다. 자다가 일어나 수십 번은 더 들은 레퍼토리의 술주정을 들어야 했는데, 그건 정말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올 것 같은 밤이면 엄마는 나를 작은 방에서 재우고 안쪽에서 문을 잠가주었다. 그러면 나는 방 밖에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듣는 일이 없도록, 아주 깊이 잠들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런 일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되풀이되었다.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하기만 했다. 결국 열두 살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이혼에 대해 부모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간의 경험과 이혼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을 통해, 부모님의 이혼을 그냥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엄마와 둘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집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빠가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다만 그 후 몇 년간은 ‘아빠를 버리고 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후 아빠를 만날 때마다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때 부모님의 이혼이 서로를 위한 일임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이혼은 남들에게 숨겨야 할 수치였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친한 친구나 선생님에게도 철저히 숨겼다. 어쩌다 부모님에 대해 말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와 같이 사는 척 거짓말을 했다. 아빠도 이혼 후 한동안은 주변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경조사에 아빠와 둘이 참석해야 할 때 가장 난처했다. 친척들이 나에게 “엄마는 어디 갔니, 엄마 데려와~”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러는 엄마와 아빠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기 어려웠기에 나를 떠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는 이혼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엄마는 바빠요, 하고 얼버무렸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고 내가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이혼 가정’의 자녀라는 것이 어딘지 흠결로 느껴졌다.
“정상 가족”이란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적 가족의 형태이며, 여기서 벗어난 가족은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이다.[2]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특히 부부의 이성애적 결합을 통한 가족의 구성과 가족 내에서 생계부양자로서 남편, 가사와 돌봄제공자로서 아내의 분업을 이상화한다. 이러한 정상 가족은 가족 구성원에게 물질적ㆍ정서적 안정을 제공하고 자녀를 건강하게 길러내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단위로 여겨진다. 반면 이성애로 결합된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생물학적으로 잉태된 자녀라는 정상 가족의 구성요소를 갖추지 못한 가정은 결손 가정으로 규정된다.
우리 사회는 말로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실천으로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다. 교육과 미디어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을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이외의 가족 형태는 ‘한부모’, ‘입양’, ‘조손’, ‘딩크족’ 등 수식어를 붙여 예외적인 형태로 소개된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존중하고 차별해서는 안 돼요”라는 내용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러한 상투어는 친구들의 가족이 ‘일반적’인 형태고 우리 가족은 화목하지 못한, 실패한 가정이라고 여기는 내 생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광고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화목한 가족은 늘 4인 가족이었다. 한부모 가족은 주로 이혼이 아닌 사별로 한쪽 부모님을 잃고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규정되었다.
부모님이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 나의 경험과 감정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털어놓으면 그들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할 것 같았다. 다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엄마와 둘이 사는 것은 이혼 전에 비해서 훨씬 좋았다. 아빠의 반대로 키우지 못했던 고양이도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엄마는 혼자 돈을 벌고, 혼자 나를 키워야 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곤 했다. 나도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엄마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았다. 나도 학교에서 있었던 어려움 같은 일에 대해서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엄마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일, 혼자 노는 일, 혼자 공부하는 일, 슬프거나 분한 일이 있으면 혼자 속으로 삭이는 일에 익숙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집에는 항상 고양이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 엄마, 아빠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일을 나는 나 혼자서도 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고, 음식을 해 먹는 건 좋아했지만 설거지하는 건 싫어했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는 것도 싫었고, 방에 털이 쌓이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것들을 질색했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그릇이 잔뜩 쌓여 있는 싱크대, 내가 식탁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보고 신경질을 내기 시작해서 자기 전까지 신경질만 내곤 했다. 하루는 “집에 들어오면 편히 쉬어야 하는데, 문 열자마자 짜증부터 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금 그 말을 다시 생각하면, 엄마의 지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어렸고, 엄마의 다정함을 내심 바랐던 나로서는 이런 말과 행동들이 상처로 다가왔다. 엄마가 집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청소와 설거지에 대한 잔소리뿐이었다. 어쩌다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지는 날에는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일상을 함께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엄마와 이야기해야 할 때는 항상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내가 혼날 짓을 해서였다.
대학 신입생 때 본가를 떠나 멀리 떨어진 지역의 기숙사로 가게 되었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 집에 오랜 시간 혼자 있어야 할 고양이들이 걱정일 뿐이었다. 가끔 본가에 내려갈 때도 대부분의 경우 주된 목적은 고양이를 보는 것이었다. 괜히 쑥스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이제 나는 대학생으로서, 부모님으로부터 반 정도의 독립을 이뤘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은 했다고 본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이혼을 생각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엄마도, 아빠도 각자 직장을 다니며 안정을 찾았다.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우리의 관계가 ‘좀 더 나은 모습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혼에 대해서 부모님과 솔직하게 이야기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집을 나올 때 이제부터 엄마랑 둘이 살게 되었다고 통보받았을 뿐 그렇게 된 이유나,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모든 것을 혼자 짐작하고, 알아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부모님의 입으로 직접 이혼은 슬픈 일이지만 절대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더라면 이혼에 대한 오해가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느꼈던 슬픔을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님에게 이해받고, 또 위로받을 수 있었더라면 혼자 아파해야 했던 기간이 좀 더 짧았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도 이혼을 일종의 실패로 여기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혼을 금기시하는 풍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자주 일상 속의 대화나 매체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형태가 온건해졌을 뿐 이혼에 대한 고정 관념은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대중 매체에서는 이혼이 놀림감이나 가십으로 소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혼 경력이 있는 출연자를 상대로 ‘선을 넘는’ 농담을 던지고, 타깃이 된 출연자는 약점을 찔린 듯 화를 내거나 고개를 숙이는 일이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다. 이혼이 방송의 소재로 이용되기 시작하자 아예 이혼을 중심 콘텐츠로 한 프로그램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혼한 남녀들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최근 큰 화제다. 이혼한 부부가 2박 3일 동안 다시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전(前) 부부의 갈등과 자녀의 상처를 자극적으로 편집하고, 재결합을 ‘해피엔딩’으로 설정하여 이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연출되는 등 논란을 빚었다. 전 부부 사이 갈등이 그대로 드러난 일로 인해 일부 출연자들은 심한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방송 프로그램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이혼이 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한 PD 또한 “자극적으로 이혼이라는 주제를 풀어내려고 하는 방송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어필하기도 했다.[3] 하지만 공익이 아닌 흥행을 목적으로 제작된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재미를 추구한 연출과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제작자들은 이혼한 부부와 자녀를 타자화하고, 이들의 속사정을 오락거리로 즐기고자 하는 대중의 ‘샤덴프로이데’의 심리[4]가 작용하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까? 해당 프로그램은 전 부부 사이 되풀이되는 갈등과 상처를 관찰할 뿐, 이혼에 대해 이들의 변화한 시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혼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극복되어야 할 상태로 보는 잘못된 시각에서 프로그램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혼한 부부를 굳이 한집에서 지내게 하는 것부터 부적절하다. 공개된 스튜디오나 카페 같은 공간에서, 필요하다면 중재자의 동석 하에 대화를 나누게 할 수는 없었을까. 이러한 포맷으로 인해 부모의 재결합을 기대하던 아이들이 두 번 상처 입는 모습이 방송에 드러나기도 했다. 아이들의 상처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한 것이 아닌, 이혼과 부부에 의한 것인 것처럼 전달된다.
말로는 어떻게 포장하건, 이혼은 현재까지도 인생의 오점이자 불행이며, 아이들에게는 ‘못 할 짓’이라는 암묵적 시선은 존속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이혼의 과정에서 그에 직면하지 못하고, 그 슬픔을 서로 솔직히 나누지 못했던 것은 이런 사회적 인식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이 실패가 아니라 관계의 변화였다고 본다. 아빠의 실직 이전부터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부모님이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피했더라면 분명 우리 세 사람은 더 불행했으리라 생각한다. 이혼이 우리에게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결단이었다. 이를 실행하고, 변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 상실이라고 한다. 이혼을 결혼 생활의 실패, 인생의 실패로 여기고 동정하는 것은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혼 이후 엄마와 둘이 살면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돌봄의 공백이 크게 다가왔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한부모 가족의 월평균 소득은 약 220만 원으로 전체 가구 소득 대비 절반 수준이다. 한부모의 84.2퍼센트는 취업 중이지만 근로 소득은 비교적 낮아 근로빈곤층에 해당하였고, 근무 시간이 길어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혼∙미혼 한부모 중 73.1퍼센트는 양육비를 한 번도 받은 적 없고, 5.7퍼센트는 최근에 받지 못했다고 응답했다.[5] 자녀의 전 연령에 걸쳐 한부모 80퍼센트 이상이 양육비와 교육비가 부담된다고 응답했다. 통계상으로 나타난 한부모가족의 전반적인 특성에 우리 가족도 해당했다. 엄마는 경제 활동과 가사를 거의 전적으로 혼자 해야만 했다. 나는 특히 비싼 사교육비와 관련해서 엄마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컸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엄마는 그때 “살아내기에” 급급했다. 낮 동안 일하느라 에너지를 다 소진해 집에 들어오면 고슴도치처럼 예민했다. 나와 다정한 감정적 교류는커녕, 싸우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정에서 구매할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든다는 표면적 결과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가족 구성원 사이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어낸다.
정부는 2022년 기준 소득인정액이 약 170만 원 미만인 저소득 한부모 가족에 대해 월 20만 원의 아동양육비, 연 8.3만 원의 아동교육지원비, 월 5만 원의 생활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의료와 주거지원도 제공한다.[6] 하지만 지원의 규모가 한부모 가족의 어려움을 덜어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원 대상의 폭도 지나치게 좁다. 우리 가족은 가장 어려웠을 때도 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았다. 정부 지원을 계속 받기 위해 일부러 170만 원 미만의 소득에 머무르는 한부모도 있다.[7]
금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한부모 혼자 경제활동과 가사, 양육을 해내야 하는 한부모 가족의 특성을 고려하면 가사와 돌봄 서비스의 제공이 더욱 필요하다. 서울시는 ‘한부모 가족 가사 서비스’를 통해 중위소득 120퍼센트 이하 한부모 가족에 월 3회, 4시간씩 만 원 이하의 비용으로 청소, 세탁, 설거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 따르면 서비스 만족도 조사 응답자 285명 중 240명(84퍼센트)가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응답자들은 육체적 피로감과 심리적 스트레스가 감소해 잔소리, 가족과 다투는 횟수가 감소하고 자녀와 대화 빈도가 증가했다고 답했다.[8]
우리 사회는 아동의 양육을 비롯한 돌봄의 전반을 전적으로 가정에 내맡기고 있다. 자녀를 키우는 데 드는 돈은 '아빠'가 벌고, 자녀의 신체적 정서적 발달을 위한 돌봄과 자녀의 사회적 성장을 위한 교육은 '엄마'가 시키는 것이 국가의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재생산 모델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부재, 불화, 이혼, 실업 등 요인은 이러한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가족을 만들어낸다. 이때 발생하는 돌봄의 공백은 누구도 메워주지 않는다. 이는 가정 내에서 어떻게든 감당해내거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진다. 복지의 공백 지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비극에 대하여, 우리는 그 책임을 부모에게 묻는 방식으로 이를 처리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책임은 교묘하게 은폐된다. 이는 한부모 가정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흔히 '정상 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형태의 가족도 깊은 상처와 어려움을 품고 있을 수 있다. 한부모 가족은 이것이 한쪽 부모의 부재나 별거라는 형태로서, 겉으로 드러나 보일 뿐이다. 가정폭력, 돌봄의 공백 등은 돌봄을 전적으로 가족의 책임으로 이상화하고, 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가족의 모델로서 가족 내 성역할 고정관념과 권력구조에 기초한 가부장제적 가족 형태를 지목하는 무책임한 사회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가족’의 역할과 형태에 대한 정의는 변화해야 한다.
작년에는 내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올해 2월부터 다시 본가(엄마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벽지도 없는, 거의 골방처럼 느껴졌던 기숙사에서 벗어나 쾌적하고 고양이도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엄마와 산다’는 사실이 걱정되는 마음이 기쁨에 앞섰다. 엄마와 나는 다정하게 대화하는 일이 드물었고, 집안일을 두고 매일같이 싸우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기숙사라는 선택지도 없이, 집으로 온전히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와 갈등을 피하고자 스스로와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 둘 것, 그리고 고양이 화장실을 하루에 두 번 치울 것. 매일 위 두 가지 일을 하고, 그때그때 방 청소나 빨래 개기, 쓰레기 내놓기, 걸레질 등 엄마가 시키는 일을 했다. 집안일을 하다 보니 어릴 적보다 훨씬 쉽게 느껴졌다. 2년 전쯤 카페에서 마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 이후로 설거지나 청소가 손에 익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간단하게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 약간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프라이팬과 그릇에 묻은 기름기를 세제로 깨끗이 닦아내다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의 잔소리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엄마와 나는 청결의 기준이 아주 다르다. 엄마는 감각이 나보다 예민한 것 같다. 엄마의 기준을 완벽히 맞추기란 나에게는 아직 힘든 일이다. 얼마 전에는 엄마의 “너는 머리카락을 뽑아서 뿌리고 다니니?”라는 말에 상처를 받아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엄마는 “네가 요즘 설거지랑 화장실 청소만큼은 잘해서 편하다”라며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젊었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도 아가씨 때는 과자를 먹고 봉지를 서랍장에 넣어두어서 외할머니에게 매일 혼났다고 한다.
“네가 성장한 거지.” 그 말을 듣자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엄마가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을 만큼 어릴 적 일들 말이다. 나는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 중에서도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를 제일 좋아했다. 구리와 구라라는,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생쥐 두 마리가 커다랗고 노란 빵을 만들어 숲속 동물들과 나눠 먹는 이야기였다. 구리와 구라는 내 웃음벨이었다. 엄마는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말투로 동화책을 읽어줬는데, 그럴 때면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었다. 동화책이 끝나면 또, 또 읽어 달라고 졸랐다. 고등학교 때 주말이면 엄마가 기숙사로 나를 데리러 왔던 기억도 난다. 엄마가 아는 맛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그러고 나서 빙수 같은 것을 먹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장면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엄마와 내 관계는 예전보다 더 편안하다. 나도, 엄마도, 그리고 우리의 관계도 더 성장한 거다. 나는 엄마가 섭섭한 말을 하면 섭섭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면 엄마도 화내지 않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제 가상의 독립이 아니라 진짜 독립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할 수 있고, 좀 더 편안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게 목표다.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이 나에게 남긴 상처를 결코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가족 안에서 살가운 딸이 아니고,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심적인 거리를 좁히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그 밖에도 갈등에 대처하거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서투른 것 같다. 종종 혼자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과도한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결코 나쁜 부모가 아니었고, 나도 불쌍한 아이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집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 있을 수 없었던 만큼 여러 가지 일을 스스로 하는 법을 터득했다. 어릴 때부터 시작했던 요리는 지금 내 특기이자 취미다. 학원을 원하는 만큼 다닐 수 없었지만, 혼자 공부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느낀다. 우리 부모님도 힘이 닿는 한, 나를 지원하고 응원해주셨다. 우리는 결국 각자의 분투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다만, 그 분투의 과정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갈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모님의 싸움과 이혼에 대해서 나를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너무 적었고 우리 가족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모든 어려움은 버겁더라도 오직 가족 내에서, ‘혼자 알아서’ 해결해 내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정사로서 아주 조심스럽게 취급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 어려움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부부 사이 화목함과 자녀에 대한 사랑은 가족의 자연스럽고 신성한 섭리로서 가족 구성원에게 강요된다. 하지만 꽤 많은 가정에서 이 ‘섭리’는 어그러진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그들 개개인의 삶과 정체성, 그리고 서로와 맺어왔던 관계에 대한 맥락이 생략된 채 죄 많은 엄마, 무능한 가장, 불쌍한 아이로 바깥에 표상되고 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 가운데 홀로 고립된 신성하고도 거북한 섬,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핵가족의 모습일지 모른다.
모든 형태의 가족이 자신을 사회에 드러낼 수 있고, 만약 어려움이 있다면 이를 조금쯤 나눌 수 있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다. 용기 내어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과, 이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 사이의 믿음과 연대가 절실할 뿐이다.
[1] “가족의 형태별 분포”, <e-나라지표>, 2022년 5월 2일.
[2] 김환희, 고병진, 「한부모가족 담론의 균열과 변형된 정상가족 신화로의 포섭 -KBS1 다큐 공감 <아이가 행복입니다>의 서사분석을 중심으로」,『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8(8), 2018, 262~271쪽.
[3] “[10문10답] ‘우이혼2’ 앞둔 이국용PD 生리얼, 스케치북&대본 아예 없다”, <스포츠경향>, 2022년 3월 29일.
[4] 독일어 ‘schadenfreude’는 피해라는 뜻의 ‘schaden’과 환희라는 뜻의 ‘freude’가 합성된 단어로서, 남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지칭한다.
[5]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8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
[6] “한부모가족 자녀양육 지원”, <여성가족부>.
[7] “한부모 가족, 강요된 가난”, <KBS>, 2022년 11월 29일.
[8] “서울시, 호응 높은‘한부모가족 가사서비스’월3회로 확대…상시접수”, <서울특별시>, 2021년 4월 26일.
편집위원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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