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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31호> 디톡스가 필요해

수습편집위원 아메

by 연세편집위원회
표지 정방형 이미지.jpg 연한 하늘색 바탕에 여섯 명의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며 걸어간다. 가운데에는 '디톡스가 필요해', '나의 일상이었던 스마트폰 과의존을 돌아보며'라고 쓰여 있다.

손목이 아프다. 침대에 누워 자판을 치고 스크롤을 내린 지도 몇 시간이다. 사실 손목 통증은 내게 스마트폰이 생긴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달고 사는 고질병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하기 위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설정해 두었다가도 시간을 늘리거나 시간제한 앱을 삭제하는 때도 많았다. 스마트폰을 왜 쓰면 안 되는지 하나도 설득되지 않은 채로, 기계적으로 '사용 시간을 n시간 이하로'라는 목표를 세우니 나오는 결과였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매일 몇 시간가량의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이 되고 나니 오히려 디지털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며칠간 디지털 디톡스를 하기로 했다. 디톡스(Detox)는 '인체 유해 물질을 해독하다'라는 뜻이다. 즉 과도한 디지털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해독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디지털 사용을 멈추는 것이 디지털 디톡스다.[1] 디지털 디톡스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획이 필요했다. 핸드폰은 중요한 일정 처리를 위해 하루의 끝에 1회, 10분만 하기로 했다. 노트북은 수업을 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노트북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을 최소한으로 하기로 했다. 시작하기 전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이 있었다. 필통을 꺼내고 새 공책을 뜯었다. 손목시계도 준비했다. 마지막 만찬처럼 SNS에 디지털 디톡스 소식을 공표하고 한참 동안 채팅 수다를 떤 다음, 핸드폰 전원을 끄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긴장한 탓인지 알람이 없어도 제시간에 일어났다. 원래 같았으면 SNS 알림을 점검하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나를 시끄럽게 하는 외부의 자극이 줄어드니 아침 시간이 평화로웠다. 내가 상상하던 디지털 디톡스와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만 돌아가지는 않았다.




스마트폰 없으면 안 되는 사회


디지털 디톡스를 해 보니 좋았던 점보다 불편했던 점이 훨씬 많았다. 가장 크게 느껴진 건 고립이었다.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참고 넘어가면 되는 일인데, 사회적 영역에서 스마트폰이 필수적인 경우가 많았다. 디톡스 첫 날,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이 따로 없어도 약속 시간인 3시에 보자고 미리 언질을 해 두었고, 그걸 믿고 핸드폰을 끈 상태로 방 안에 두고 나갔다. 그러나 인파가 너무 많아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만나지 못한 상태로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켰을 때는 많은 전화와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또 한 번은 물건 나눔을 받기 위해 줄을 서러 나갔는데, 갑작스럽게 QR코드를 찍어야 할 상황이 생겼다. 나눔 받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QR코드로 미리 정보를 기재하는 것으로 당일 진행 방식이 바뀌었었는데, 진행요원분께 휴대폰이 없다고 설명을 드리니 매우 당황해하셨다. 나는 다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거시는 그 분을 몇 분간 보고 서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미 스마트폰을 가지지 않고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특히 대학생 사회는 더욱 그랬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시간표가 있는 대학생들이 약속을 만들고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빠른 정보 교류를 위해 인터넷상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생 사회에서 대부분의 정보 교류는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졌다. 정보를 얻기 위해, 또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십 개의 오픈 채팅방과 일반 채팅방에서 카톡이 오고 간다. 사이버 세상에 익숙하지 않으면 정보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스마트폰 사용을 연습해야 했다. 중학교 때 처음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계기도 비슷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교내 동아리에서는 공지사항 전달을 카카오톡 채팅방으로 했다. 공지사항을 편하게 전달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부모님께서는 그전까지 금지하던 스마트폰을 사 주셨다.


국가에서도 광범위한 스마트폰 사용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전 학교에서 실시했던 스마트폰 관련 검사의 이름은 스마트폰 '중독' 검사였지만, 이제는 스마트폰 '과의존' 검사가 되었다. 국가정보화 기본법이 2020년 6월에 지능 정보화 기본법으로 개정된 것이 이러한 용어 변화의 배경이다. 법 개정 시 함께 수정된 여러 가지 용어 변화의 기저에는 중독을 바라보는 관점에의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는 '질병 모델'로 중독을 바라보았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선택이론'과 사용자의 조절 역량에 주목하는 '역량 모델'의 관점으로 중독을 바라본다. 정책을 만들 때도 학계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를 반영하여, '스마트폰 과의존'으로 용어를 규정한 것이다. 2022년에 살아가는 우리는 스마트폰과 함께 공존해야만 한다.


사실 스마트폰, 잘만 쓰면 유용하다. 종이 신문을 따로 배달받지 않아도 매일매일 뉴스를 볼 수 있고, TV가 없어도 동영상을 마음껏 시청할 수 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배달시킬 수 있고, 이동할 때 지도 앱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오락거리는 편하고 즐겁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구독하는 OTT(Over the Top, 넓은 의미로는 인터넷 기반의 동영상 서비스를 의미한다) 서비스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았고 10~20분의 짧은 휴식 시간에는 웹툰과 유튜브 콘텐츠를 소비했다. 주위 친구들의 상황도 비슷했으므로 문제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스마트폰 사용에 경각심을 느낀 건 나의 핸드폰 사용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나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손바닥 위의 모래더미처럼 사라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이 유해한 이유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지 않으니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 때, 길을 걸을 때, 대중교통을 타고 있을 때도 (강제로) 멍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블랙홀이 만들어진 것처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이제는 시간이 내 것이 되었다. 스마트폰 없는 버스 안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이 시간은 평소 나에게 '삭제되는 시간'이었다. 경기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면 이동 시간이 기본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한 시간 반, 버스에 앉아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분명 열심히 무언가를 보고 듣고 터치했다. 그런데 좌석에서 엉덩이를 뗌과 동시에 그 시간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없어져 버렸다. 차라리 한 가지 활동을 진득하게 했으면 모르겠지만,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카카오 지도로 도착할 역 확인하고, 잠깐 유튜브 보다가 또 알림이 떠서 인스타그램 디엠을 하고, 인스타그램을 들어간 김에 스토리 구경도 조금 하다가 도착지까지 얼마나 남았나 다시 체크하면 시간이 없는 건 당연했다.


알림들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 보면 내 몸의 반 정도는 현실 세계에 존재했지만, 나머지 반쪽은 사이버 세상에 있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몸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현실을 살다가도 최소 20분에 한 번씩 인터넷 세상에 접속하여 알림들을 지웠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대인에게 멀티태스킹은 필수를 넘어서서 특기가 된 것 같다. 멀티태스킹은 사실 복수의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전환이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2] 계속된 주의 전환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실제로 디지털 미디어 활동을 자주 하는 청소년의 ADHD 발병률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에 비해 1.5배~2배가량 높았다.[3] '팝콘 브레인'이라는 용어도 존재한다. 이는 강한 자극이 넘쳐나는 첨단 디지털 기기의 화면 속 현상에만 반응할 뿐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느리게 변화하는 진짜 현실에는 무감각해진 뇌를 이르는 말이다. 짧은 줄글을 읽는 것, 유튜브 영상을 2배속 해서 멍하니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는 게 어려워졌다. 간단한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니 사색할 수 없어서 나만의 주장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인터넷 세계에서 본 문장을 주워 나의 것처럼 두르고 다녔다. 사이버 세상에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 젠더 문제나 정치 문제에 대한 나의 태도가 그랬다. 스스로 근거를 찾아보고 문장을 만들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쳐 주류 의견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며 나는 스마트폰을 아예 두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 대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조절해 보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켜게 되는 일이 잦았다. 엘리베이터 1층에서 10층으로 올라가는 20~30초,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10분 동안에도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려 잠금 화면을 켰다. 잠금 화면에서 홈 화면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손놀림을 막기 일쑤였다.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에 빠져 주위를 살피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은 좀비나 시체와 비슷하다고 해서 '스몸비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도 꼭 이러한 꼴이었다. 이렇게 짧은 여유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찾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띠링, 하고 울리는 SNS 알림이 지루함 속에서 날 구출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기 싫은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무언가를 억지로 참아야만 할 때는 스마트폰을 켜고 싶은 충동이 더욱 극심하게 느껴졌다. 과제를 하다가 까만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터치하던 나의 모습, 시간표를 확인한다고 에브리타임[4]에 들어갔다가 시간표를 확인하려는 본래의 목적은 잊고 에브리타임 속 게시물을 하염없이 내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꼭 해야 하는 일에 투입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집중력은 떨어졌던 것 같다. 주의 전환이 습관이 된 팝콘 브레인과 업무를 피하고 싶은 심정, 그리고 이걸 실현해 주는 편리한 도구인 스마트폰까지 있으니 무언가를 미루고 회피하는 습관은 강화되기 마련이었다.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1시간이면 1시간. 스마트폰은 어떤 길이와 종류의 여유 시간이 생기든 나를 달래 주고 직접적인 쾌락과 보상을 쥐어 줄 것이었다.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스마트폰이 이제는 내 멱살을 끌고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다.




과의존에 취약한 사람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 지지가 부족하고 사회적 차별과 낙인을 겪는 사람들은 자존감 저하, 우울, 위축, 고립 성향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런 요소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5]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우울감이 심각한 사람 중 스마트폰 이용이 '매우 늘었다'라고 답한 비율은 21.7퍼센트였으며, 불안감이 심각한 사람 중 그렇게 답한 비율은 25.6퍼센트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15.2퍼센트, 13.2퍼센트)보다 눈에 띄게 높은 결과였다.[6] 나 또한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스마트폰을 가장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원활하게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건강한 일상을 영위할 때는 현실의 삶을 사느라 바빠서 스마트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액정과 5cm의 내밀한 거리를 유지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이런 나의 상황은 우울한 성향이 높은 경우, 부정적인 정서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쉽게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는 경향[7]과 일치했다. 유튜브나 웹툰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현실을 잊고 가상에서 펼쳐지는 즐거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중독에 빠진 사람의 뇌는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oxycontin)을 먹은 사람의 뇌와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8]


나도 모르게 중독 증상이 발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편의, 재미라는 단어 아래 일상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이용하지 않는 다른 여가 활동을 찾아보기로 했다. 웹툰을 보는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공공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에서 소설책을 읽던 날들이 떠올랐다. 어떤 친구는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며 그 물성을 직접 느끼는 활동은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질 높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스마트폰 여가는 어찌 보면 필수적이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스마트폰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여가에 집중하게 된다. 공부라는 목적 앞에서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기타 여가 활동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비용 부족, 또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청소년이 직접 자신만의 취미를 개발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스마트폰의 경우 일단 접근이 쉽다. 모두가 연락을 위해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SNS를 통한 청소년 문화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문화 아래 있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사용을 익히고 이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의 주된 이유는 남학생은 ‘게임’, 여학생은 ‘친구와의 소통’이었다.[9] 중·고등학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가생활에 비용을 투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접근성 덕분에 스마트폰을 활용하기 쉽다. 뮤지컬의 경우 한 번의 관람에 몇십만 원이 투자되며, 영화 또한 만 원을 훌쩍 넘는 돈이 필요하다. 스포츠 경기 관람이나 여행은 또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 여가 생활에 일정 금액이나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주워 들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남는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과의존을 부추기는 세상


정부는 정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스마트폰 보급에 열을 올렸고, 2021년 한국의 성인 스마트폰 사용률은 95퍼센트라는 수치를 달성했다.[10] 기업들의 화려한 광고 틈에 스마트폰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세를 이뤘고, 2007년 이후 70억대 이상의 스마트폰이 생산되었다.[11]


그러나 이런 노력을 통해 형성된 디지털 세상에서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문제가 되었다. 사용자에게 그 부작용과 문제점을 떠넘기게 되는 상황이다. 사회에 물어야 할 책임은 없을까? 사용자의 건강한 서비스 이용과는 관계없이 무분별하게 중독될 만한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에 물을 책임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 공공의 안전보다 이윤 추구를 우선시하고 있다는 고발이 있었다. 내부 고발자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이용자들의 이용 시간을 늘리기 위해 그들의 반응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노출할 콘텐츠를 고른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고 극단화하는 콘텐츠들이 분노 등의 반응을 추동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형성하는 것이다.[12] 페이스북의 공동 창업자 숀 파커 또한 2016년 페이스북을 떠난 후, “소셜 네트워킹은 인간 심리의 취약성을 착취하는 것”이라며, “당시 우리는 인간이 중독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고백했다.[13] 무한 스크롤 기능을 개발한 라스킨은 “의도적으로 사용자들을 중독 상태에 빠지도록 이 기술을 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14] 무한 스크롤 기능이란 스크롤이 끊기지 않고 무한하게 가능하여지도록 하는 기능으로, 인스타그램 등에서 무작위 게시물을 계속해서 추가하여 새로운 피드를 만드는 데에 활용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숏 폼 콘텐츠의 경우에는 60초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크롤하여 새로운 영상을 볼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다양한 섬네일의 영상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전의 방법에 비해 사용자들에게 더 작은 선택권을 부여한다.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인데, 화면을 내리면 재미있는 콘텐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기대와 함께 스크롤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도파민을 분비한다.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후 성과를 얻음으로써 도파민을 얻는 기존의 보상 체계가 어긋나고 스크롤을 내리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보상받게 되어 중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뽑기 게임, 도박, 그리고 스마트폰 중독은 하나의 선 상에 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화면을 아래로 끌어당겨 새로운 콘텐츠를 업데이트하는 방식은 슬롯머신을 당기는 행위와 유사하기도 하다.


혼자서 스마트폰을 관리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이용하길 원하는 기능과 이용을 피하고 싶은 기능이 교묘하게 붙어 있어서 이 둘을 따로 떼어 놓고 판단하거나 관리하기 어렵다. 인스타그램에서 메신저 기능인 DM은 활발하게 사용하고 싶어도 스토리나 게시물 확인 등은 꺼려진다. 유튜브에서도 검색을 통한 영상 시청이나 구독하는 채널들의 영상 시청은 하고 싶지만, 유튜브 쇼츠는 피하고 싶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인터페이스상 이러한 기능들이 붙어 있는 것이 유리하므로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기능을 내놓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코딩을 배워서 스마트폰 기능을 각자의 입맛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소비자로서 알게 모르게 중독에 빠져 있었다. 더 이상 기업이 만들어 낸 구조 안에서 충실히 스마트폰에 과의존하며 건강을 해치기는 싫었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절하는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이 나오는 것도 이런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품질 나쁜 콘텐츠들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건강하지 않은 서비스는 스스로 이용을 자제하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치며


우리나라는 IT 강국이라고 불린다. 그런 사회에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우리는 디지털 환경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턴이나 대외활동, 취업 준비를 하다 보면 “SNS 이용에 능숙하신 분을 구합니다”라는 글이 자주 보인다. 나 또한 이런 사회의 기대에 발맞추기 위해 달려왔다.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 등장한 각종 서비스를 이용했다. 내 핸드폰 안에는 지난겨울 ‘핫’했던 클럽하우스[15]가 깔려 있고 거실 서랍에는 VR 헤드셋이 있다. 하지만 이 방향이 무조건 옳거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 사용에 능한 만큼 디지털 과의존에도 취약한 것이 우리 사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과의존에 빠진 사람들은 일반 사용자들보다 디지털 사용 역량이 높다.[16] 즉 ‘온라인상에서 필요한 정보 및 콘텐츠를 잘 찾을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획득한 정보가 신뢰할 만한지 파악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참여할 수 있다’ 등의 질문에 과의존 위험군이 ‘그렇다’라고 더 높게 응답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디지털 환경을 구축하고 이에 적응하기 위해 투입했던 사회적 비용만큼, 과의존에서 빠져나와 온전한 삶을 되찾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추신: 건강한 스마트폰 사용을 향해서


스마트폰 과의존은 세 가지 증상을 통해 나타난다. 스마트폰 활동이 일상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현저성’, 스마트폰 사용을 스스로 조절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조절 실패’, 그리고 스마트폰 이용으로 인한 문제점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용을 멈추지 않는 ‘문제적 결과’가 그것이며, 과의존을 측정할 때도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측정한다. 스마트쉼센터 사이트 (https://www.iapc.or.kr/)에서 과의존 자가 진단과 관련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다.


며칠 전 과의존 테스트를 실시해 보니 ‘잠재적 위험 사용자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7~8시간 정도다. 극단적인 디지털 디톡스는 불가하더라도 스마트폰 사용 시간 통제를 지속 가능하도록 유지하려 한다. 다음은 나의 핸드폰 사용 조절 전략이다.


① 침대로 스마트폰을 가져가지 않는다.

② 앱 알람을 꺼 둔다.

③ 하루 평균 사용 시간을 측정한다.

④ 사용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앱은 특별 관리한다.

⑤ 오감을 이용하는 취미를 만들어 본다.

⑥ 디지털 디톡스를 통해 디지털 환경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주기적으로 갖는다.


짧은 디톡스는 일상이 된 우리의 스마트폰 환경을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나는 뻐근하지 않은 손목을, 쑤시지 않는 허리를, 그러니까 건강한 나의 몸을 상상해 본다. 안전하고 건강한 스마트폰 사용을 향해서, 우리에게는 디톡스가 필요하다.









[1] 시사경제용어사전, ‘디지털디톡스’, 2017년 11월.

[2] “[심리학 교실]주의 집중과 전환을 순식간에…멀티태스킹의 핵심”, <매일경제>, 2019년 9월 18일.

[3] “스마트폰 자주 보는 10대 ‘ADHD’ 경고등 켜져”, <MEDICAL Observer>, 2018년 7월 19일.

[4] 대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시간표 작성 등 학업 관리와 학교 생활 정보를 접할 수 있으며 익명 커뮤니티를 통해 같은 캠퍼스의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다.

[5] 서보경 외 3인, “장애인 스마트폰 중독 실태 연구”, 재활복지공학회 제10권 제3호, 2016, 186-197쪽.

[6] 중독포럼, ‘코로나19 전후 음주, 온라인게임, 스마트폰, 도박, 음란물 등 중독성 행동변화 긴급 실태조사’, 2020년 6월 30일.

[7] 김병년, 대학생의 자기통제력과 스마트폰 중독 간의 관계에서 우울의 매개효과, 『한국가족복지학』, 제39호, 2013, 49-81쪽.

[8]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Digital Addiction : Increased Loneliness, Anxiety, and Depression”, 2018.

[9] ‘경기 고교생의 하루…”6시간 미만 잠자고 여가엔 스마트폰” ’, <연합뉴스>, 2019년 10월 1일.

[10] 한국갤럽, “2012-2021 스마트폰 사용률&브랜드, 스마트워치, 무선이어폰에 대한 조사”, 2021년 06월 03일.

[11] 그린피스, “‘스마트’하지 않은 스마트폰 10년의 비밀”, 2017년 2월.

[12] ‘신원 드러낸 내부 고발자…”페북, 공익 저버려” ’, <한겨레>, 2021년 10월 04일.

[13]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파커 “SNS는 인간심리 착취” ’, <한겨레>, 2017년 11월 10일.

[14] ‘SNS는 의도적으로 사용자를 중독 상태로 만든다’, <나우뉴스>, 2018년 7월 8일.

[15] 클럽하우스는 쌍방향 음성 소통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소셜 미디어로, 2021년 초에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유행했다.

[16]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2021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 2022,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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