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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31호> 답답하고 불친절한 어느 상담원 이야기

수습편집위원 오디

by 연세편집위원회
답불어상_정방형 이미지.jpg 흰 바탕에 위쪽에 '답답하고 불친절한 어느 상담원 이야기'가 쓰여있다. 그 아래 상담 중인 콜센터 상담원 다섯 명이 있다. 제일 가운데 있는 상담원 한 명만 색이 칠해져 있다.


작년 하반기,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첫 휴학을 신청했다. 졸업하기 전 이런저런 사회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연극과 뮤지컬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보다 배우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덧붙여 ‘청춘’이나 ‘낭만’ 등 이상적인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학로의 느낌이 좋았다. 대학로가 있는 혜화로 출퇴근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은 매일 예술경영지원센터나 링커리어에서 관련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문화예술인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한 공공기관의 인턴이 되었다.


처음으로 지원서를 넣은 기관에 합격. ‘금턴’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인턴 자리를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꼭 일해보고 싶었던 기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9월의 어느 날 대학로로 첫 출근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혜화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달 뒤 일의 스트레스가 잠을 설칠 정도로 덮쳐왔다. 나를 비롯한 인턴들이 해야 했던 일 중 하나가 ‘전화 및 방문 민원 응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원인들을 만나 요구를 파악하고 요구 사항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빠른 시간 안에 타인의 관심사나 욕구를 잘 알아채고 그에 맞게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했다. 모르는 사람과의 전화 통화를 어려워하던 내가 걸려오는 전화를 자연스럽게 받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내기 인턴의 설레는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숫자 속에서 지워지던 맥락들


전화를 받거나 방문 민원을 응대할 때 필수적이었던 감정 노동은 역시나 힘들었다. 다른 인턴들과 우스갯소리로 ‘살면서 우리 엄마 아빠한테 혼난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민원인들에게 더 많이 혼났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감정 노동 자체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점은 우리들의 업무량이 ‘수치화’된다는 것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나 부장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우리 팀의 업무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문의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니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매일의 업무량을 수치화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부장님은 하루 행정 심의 건수, 전화 민원 응대 건수, 방문 민원 응대 건수, 1:1 문의 게시판 민원 처리 건수, 기타 각종 민원 처리 건수 등을 세어 엑셀 파일에 기록하고 매주 금요일 퇴근 전에 이를 보고하도록 했다. 내가 일하던 부서는 ‘예술인으로서 최근 기준에 맞는 예술 활동을 한 이력이 있는지’에 대한 심의를 진행하는 업무와, 이와 관련된 각종 민원을 담당하는 업무를 했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달 전의 신청 건이 아직도 검토 중이다’라는 내용의 문의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몇 달째 관리자 페이지의 ‘검토 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신청 건들을 보며 나 또한 답답했지만 업무량은 재단의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달 전에 접수된 것부터 신청 서류를 하나씩 검토하는데 매일 수십 건의 서류가 도착하던 상황이라 하루를 꼬박 일해도 다음 날 신청 건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그 와중에 ‘왜 이렇게 처리가 늦냐’는 전화와 방문 항의에 대한 응대, 재단 사업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 홈페이지의 1:1 문의에 대한 답변 달기 등의 업무를 감당해야 했다.


‘업무량의 수치화’에 대한 요청 이후 조급함이 배가 되었다. 통화가 길어지면 마음이 급해졌고, 스스로 통화할 때 말이 빨라지고 조급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설명이 얼마나 자세했는지, 요청을 얼마나 능숙하게 처리했는지는 엑셀 파일의 숫자 속에 없었다. 어떤 통화이든지 숫자 ‘1’이 되어버렸다. 돌아보면 수치화와 함께 내가 사라져야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숫자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느낌을 없애야 했다.


수치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직원들이 하루에 어떤 일을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수치화를 통해 심의가 늦어지는 이유를 더 구체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치화가 수치화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평가의 수단이 된 순간 나에게 하루 업무량을 기록하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다. 부장님께서는 가끔씩 인턴들이 일을 하는 사무실로 올라오셔서 간단한 대담 시간을 가지곤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던 주제가 ‘인턴들의 업무량’에 대한 것이었다. 매번 ‘OO인턴 선생님은 요즘 속도가 붙었던데?’하는 식의 업무량에 대한 평가를 듣고 있으면 그 정도의 업무량을 채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정직원도 아니고 전환형도 아니고 체험형 인턴인데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싶겠지만 그러기가 어려웠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아니 일 못하는 인턴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은 마음, 수십 대 일의 경쟁률 속에서 나를 뽑아 주신 것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 다른 인턴들의 ‘건수’에 뒤쳐지지 않겠다는 욕심이 나를 숫자 경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일하면서 몇 번이나 관리자 페이지에 들어가 제출된 서류를 검토하고 문의 민원 전화를 받는 꿈을 꾸었다. 숫자 경쟁 속에 얼마나 많은 맥락들이 지워지는지를, 한 건의 통화를 마칠 때마다 업무 수첩에 기록하며 절감했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던 때, 검토하던 신청 서류 중 한 서류 아래 작성된 메모가 눈에 띄었다. 신청 서류 제출 페이지에는 검토자가 볼 수 있도록 간단한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기능이 있었는데 신청자분이 그곳에 “A 신청 방법으로 신청하고 싶다”는 내용의 메모를 적어 두었던 것이다. 그 신청 서류는 B 신청 방법을 선택해 제출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그분이 신청하신 B 신청 방법의 기준에 따라 처리를 하면 될 일이었지만, 메모를 무시하기 어려워 기본 정보 페이지에 기재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세 가지 신청 방법 각각에 대한 기본 정보와 이들의 차이점, 갱신 시 차이점 등을 물었다. 수십 분 간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질문들이 끝났을 무렵,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신청하시겠어요?”

“아, 저 뭘로 할지 너무 고민이 돼서……. 고민해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날의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며칠 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 지난번의 전화가 잊혔을 무렵, 다시 내 자리의 전화기가 울렸다. 지난번에 통화했던 그분이었다. 수십 분간 또다시 질문 세례가 이어졌고, 친절하고 상세하게 답변을 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선생님, 그래서 신청 방법은 어떤 것으로 변경해드릴까요?”

“아, 저, 죄송한데, 제가 진짜 고민이 돼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고민해보고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두 번째 통화가 끝이 났다.


또 얼마간 날짜가 흐른 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분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질문 세례가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각각의 신청 방법과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은 옆자리 인턴 동기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처리한 민원에 대한 항의 전화에 수십 분간 시달린 날이었다. 더하여 “OO 인턴 선생님은 요즘 민원 처리 건수가 엄청 늘었던데” 하는 식의 태연한 부장님의 말투가 나의 업무 역량에 대한 부담을 키우던 날이었다.


몇 개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보니 짜증이 났다. 신청 방법의 차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 드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청 방법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음’에 대한 증명을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이것이 총 통화 시간 40분이 넘도록 질문을 할 만한 주제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온갖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자니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선생님 상황에서는 A 신청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유효 기간도 가장 길고요. 필요한 서류는 제가 관리자 코멘트란에 적어둘게요. 질문 없으신가요?”

그리고는 또다시 질문 세례가 시작되기 직전, 전화를 끊었다. 1초만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저기요, 제가 그렇게 못 물어볼 걸 물어봤나요? 궁금한 거 물어볼 수도 없는 건가요? 여기가 궁금한 거 물어보고 안내받으라고 있는 기관 아닌가요?”

그리고서 그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나의 불친절함을 지적하고는 내 이름을 묻더니 전화를 끊었다.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맞다, 내가 일하던 재단은 민원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고, 누구나 궁금한 것들을 자유롭게 묻고 친절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수치화 되는 업무량 속에서, 수십 분간 쏟아지던 질문 세례에 답변을 하면서, 그러다 친절함을 잃어버리자 업무 역량을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많은 민원을 처리해야 하는 와중에 도대체 어느 정도의 친절함까지 요구되는 것인가’하는 원망이 들었다. 하루 얼마나 되는 민원을 처리했는지 보고하는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어린 여직원이 된다는 것


일하면서 종종 ‘왜 이렇게 민원 응대가 힘들까’를 생각했다. 랜덤으로 배정된 사람과 대화하고 이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요구를 파악해 들어주는 것이 누구에겐들 쉬울 리 없지만 그것 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주었던,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던, 그리고 남성이었던 전임 인턴분은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가 나보다 괜찮아 보였던 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걸려오는 수십 수백 건의 전화를 받으며, 재단으로 찾아오는 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유를 알았다. 그들에게 나는 ‘어린 아가씨’였다. 오랜 기간 예술 활동을 지속해왔으나 일했던 회사들이 사라져 증빙 자료를 아무것도 내기 어렵다는 분과 통화를 하며 자료가 없으면 심의가 어렵다고 말씀드리자 그는 “저기, 딱 보니 나보다 어린 것 같으니까 아가씨라고 할게요.”라는 말을 서두로 사업 운영의 불합리함을 따지기 시작했다. 여든이 넘었던 한 할아버지로부터는 “아가씨 이름이 뭔가? 김 양인가?”라는 말을 들었다. 본인의 신청이 왜 인정되지 않았는지를 따지러 온 중년의 남성분은 동료 인턴에게 자리에 앉자마자 반말로 따졌고, 나 또한 또 다른 노년의 남성으로부터 반말로 미인정 사유를 따지는 말에 응대해야 했다. 인턴 기간 중 만난 친구에게 이 같은 경험들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사무실 전화기에 음성 변조 기능을 설치해야 한다. 앳된 네 목소리가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변할 수 있게”라는 말로 나를 웃게 했다. 귀여운 발상에 웃으면서, 정말 그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망가고 싶었다. 현재 나의 조건들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폈다. 내가 나이가 많았다면,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키라도 좀 더 컸으면? 나아가 내가 만약 공공기관 말단 인턴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라면,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상담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반말은 안 듣지 않을까, 아가씨가 아니라 변호사님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른들이 소위 말하는 ‘전문직’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 ‘나는 인턴이니까, 민원 응대하는 일이 당장 내가 평생 할 일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 혼자 이 상황에서 벗어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이 상황은 내가 살아가는, 또 살아갈 세상에서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었다. 약해 보이는 사람, 낮아 보이는 사람이 주로 민원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것, 그렇게 민원을 담당하는 이들이 만만하게 보여지는 위치에 놓이는 구조. 이러한 구조가 당연한 듯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 일은 언제든 내 친구, 지인, 또는 나 자신의 일이 될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 모두의 목소리의 크기가 비슷한 사회이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꿈이었을까?



‘악성 민원인’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던 이들


단순히 민원 응대에 있어 감정 노동의 고됨만을 토로하기에는 얽힌 문제가 있었다. 무턱대고 반말을 하거나 공공기관에 이것까지 요구할 수 있을까 싶은 요구를 하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내게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는 민원인들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민원인들의 요구에 시달리는 선량하고 불쌍한 새내기 인턴’쯤으로 생각되었으면 편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나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의 입장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민원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는데 ‘신청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아 각종 지원 사업 신청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과 ‘자신의 신청 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우선 신청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은, 당시 일하는 인원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신청 건이 쏟아진 결과였다. 검토를 진행하는 인원은 제일 많았던 때가 일곱 명이었는데 그에 비해 접수된 서류는 몇 만 건이라 신청 건들은 물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더해서 하루 종일 검토에만 매달려 몇 달 전 1일에 접수된 건에서 그 다음날 접수되었던 건들로, 또 그 다음 날의 서류들로 넘어가는 일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와중에 ‘왜 이렇게 처리가 늦냐’며 걸려오는 항의 전화와 기타 위에서 내려오는 잡무 처리를 하고 있다 보면 서류 검토는 자연스레 조금씩 밀리게 되었다. 민원을 처리하느라 업무를 못하고, 업무가 늦어지니까 다시 민원이 들어오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이런 업무 처리자의 고충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라도 몇 달 전에 서류를 냈던 신청 건이 네 달, 다섯 달째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으면 내 것만 누락된 것이 아닌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고 화가 날 것 같았다. 하루 몇 건씩 들어오는 ‘언제 결과를 받아볼 수 있냐’는 문의들을 마냥 나를 힘들게 하는 민원인들의 전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다음으로 ‘자신의 신청 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에 대하여, 심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에서 위촉한 외부 전문 위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위원분들이 승인 혹은 거절 여부를 판단하고, 그 사유를 간단히 적어 두는데 미완료 사유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면 간단히 적힌 그 메모를 보고 사유를 설명해주는 게 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이유로 이 신청 건이 미완료가 된 것인지를 메모를 보고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적힌 사유만 보고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지만, 내게는 심사를 한 해당 위원 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경로가 없었기에 그런 때면 민원인과 직접 통화를 해야 하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매우 곤란했다. 어떤 민원인분들은 이러한 상황을 눈치채고는 ‘심사한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최대한 잘 설득해서 재신청 절차를 안내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주인‒대리인 이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이 이론은 보통 의뢰인-변호사, 국민-국회의원 등 의뢰인과 그를 대신해 전문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쓰이는데, 공공기관에서 민원 응대 업무를 담당하면서 문득문득 이 이론이 생각났다. 이론의 내용보다도 ‘주인’과 ‘대리인’이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인’의 입장을 대리하는 ‘대리인’이 된 것 같다는 점에서 그랬다. 신청된 서류를 정성적으로 검토하여 해당 신청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술활동의 전문성을 보고 ‘승인’, 혹은 ‘미승인’ 처리를 하는 심사위원들, 전화를 받는 것 같이 불편한 일은 그런 높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다. 심지어 재단 내에서도 정규 직원들이 아니라 몇 달간 왔다 가는 체험형 인턴들이 심사위원들의 대리인으로서 전화 받는 일을 했다. 이는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인 혹은 미승인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과 그에 대한 항의를 감당하는 이들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그러나 항의 전화를 받을수록, 동기들과 ‘욕받이가 된 것 같다’는 진심 어린 농담을 주고받을수록 이 당연한 듯 보이는 구조에 의문이 들었다. 세상 돌아가는 당연한 구조라는 게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일하는 ‘환경’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현실이 야속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모든 ‘방어벽’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각종 이유로 광화문으로 나간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던 경찰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청소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자 해당 기업에서 용역을 써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 대항하도록 했던 일. 사람들이 기업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시위를 할 때, 해당 기업에서는 돈을 주고 용역을 쓴다. 그래서 관련 없는 사람들이 시위대의 이야기를 듣고 기업 대신 이들과 대항해 싸우게 된다.


이러한 사례들이 생각났던 것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대신해서 싸우는 것’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단의 무능을, 시스템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던 사람들이 대화하고 싶어하는 대상은 전화를 받는 것 같이 불편한 일을 하지 않았다. 몇 개월 있다 가는 체험형 인턴인 내가 그 불만을 잠재우는 일을 ‘나의 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꾸만 일을 하는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익숙하지만 기이한 구조를.


퇴사 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인턴으로 일했던 친구를 만나 밥을 먹을 일이 있었다. 마케팅 대행사에서 일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일했던 환경이 그나마 나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주어진 일이 너무 많아서 점심을 거르거나 점심 먹는 시간도 줄여 일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고, 종종 일이 너무 많아 야근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당연히 수당은 없다고 했다. 숱한 감정 노동 속에서도 나의 ‘칼퇴’와 ‘최저임금’이 지켜질 수 있었던 건, 내가 일했던 곳이 그나마 공공기관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인간적인 노동 현장에 있는 것인지를 돌아본다.



답답하고 불친절한 상담원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하거나 공공기관에 민원을 넣을 때, 우리는 기계적인 친절함을 내뿜는 상담원의 목소리를 상상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명쾌하게 알아차리고 친절하게 응대하는 능숙한 상담원을. 내가 ‘그런’ 상담원을 상상하고 있었기에 상담원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그런 상담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담원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누르고 옥죄던 업무 환경은 어떤 민원인들에게 내가 ‘답답하고 불친절한’ 상담원이 되도록 했다. 나는 수치화의 압박에 눌려 같은 내용의 질문이 세 번째 반복되자 친절함을 잃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들었고, 나도 모르겠는 미인정 사유를 쥐어짜내 설명하다 전화기 너머의 답답함에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어쩌다 나는 답답하고 불친절한 상담원이 되었을까? 친절하고 다정한 상담원이고 싶었던 내게, 어떻게 하면 민원 응대를 했던 인턴 경험이 기꺼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내가 명쾌하고 친절한 상담원이기 위해서는 우선 받아야 하는 전화의 건수가, 처리해야 했던 민원의 건수가 현저히 적었어야 했다. 그러면 한 건 한 건의 민원에 집중하고 같은 내용도 몇 번이고 기꺼이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더하여 미인정 사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판단을 내리는 바쁜 심사위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업무 환경을 만나지 못한 채 나의 퇴사일은 다가왔다. 내 뒤에는 취업난 속에서 인턴 자리를 구하려는 유능하고 간절한 청년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많은 민원을 빠르게 처리하는 일과 맞지 않는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퇴사일을 맞았다.



나 혼자 도망친다고 괜찮은 게 아니야


3개월 간의 유사 콜센터 업무 경험을 글로 정리하면서 콜센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찾아보았다. 실제 콜센터 상담원들의 현실은 나의 3개월간의 유사 콜센터 체험기와 비교조차 어려울 만큼 심각했다. 약 1년 동안 콜센터 노동자들을 현지 조사하며 콜센터 여성 상담사의 노동조합 형성에 대한 몸의 현상학을 연구한 논문[1]을 찾았는데 이 논문은 콜센터 노동자들 대부분이 흡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왜 콜센터 노동자들의 흡연율이 높을까’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고 한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해당 논문에서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 환경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들과 저항을 선택했을 때의 몸의 경험과 실천에 집중[2]했다는 것이었다.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콜센터는 서울 지역 공공기관 콜센터로서 해당 콜센터 구성원들은 민주노총 서울본부 희망연대노조 산하의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노동조합 결성 이후 다양한 저항들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적정 콜 받기[3]’였다. 과도한 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안해낸 저항의 방식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상담원들을 지나친 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동시 이석’, 즉 각자 점심시간 이외에 주어지는 하루 40분의 휴게 시간에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집단 행동도 성공적으로 실천되었다고 한다. 연구는 ‘상담사 개개인의 작은 실천들이 모여 어느 임계점을 넘는 순간 모욕에 민감했던 위축된 몸이 지지와 연대를 지향하는 몸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4]’는 말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수많은 민원을 감내하는 일이, 숱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합격했을 당시 우리 부서의 인턴 경쟁률은 26.67 대 1이었다. 당장 내가 그만둔다고 해도 자리를 채울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었기에 업무 환경에 대한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는 발언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바뀔 수 없을 것 같았던 업무 환경을 결국에는 ‘연대’를 통해 바꾸어 낸 사례를 보면서 희망적인 마음이 들었다. 함께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해서 상황을 바꾼 사례를 목격하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이 사례가 나 또한 연대를 통해 문제 상황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도망친다고 괜찮은 게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고, 함께 맞서서 바꾼 사례가 눈앞에 있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다


최근 구입한 헤드셋의 마이크가 고장이 나서 G마켓 콜센터에 전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량이 많아 상담원 연결이 지연되고 있다는 말과 함께 “현재 대기 고객은 일곱 명, 예상 대기 시간은 9분 30초입니다”라는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안내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상담원은 1분이 조금 넘는 시간 안에 고객의 요구를 파악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처리해야 하는 건가? 너무 비인간적이다.’ 9분 30초보다 훨씬 짧은 기다림 끝에 듣게 된 목소리는 아주 앳되었다. 아마 내 또래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어린 여성의 목소리였다. 통화를 마치며 상담원분은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힘듦을 겪고 있으시겠구나, 지금이 금요일 늦은 오후이니 오늘 저녁은 좀 편히 쉬실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ARS 로봇 같았던 전화기 뒤 목소리가 내 목소리로, 내 지인의 목소리로 다가왔다.




에필로그


상담원과 통화를 한 이후,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통화한 상담원을 평가해달라는 문자였다. 대여섯 개의 질문에 모두 ‘아주 좋았다’고 체크했다. 상담원분이 실제로 친절하시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다 좋았다고 체크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을 해본 입장에서, 절대 못했다고 평가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화 통화를 한 후 나의 평가는 이랬다.


상담원: 고생하시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 않았음.

상담사를 재촉하고, 아주 세세한 항목들을 들어 평가까지 하게 하는 지마켓의 노동 환경: 아주 별로임.




[1] 김관욱, 「저항의 무게: 콜센터 여성상담사의 노동조합 형성에 대한 몸의 현상학」, 『한국문화인류학』 제51권 제3호, 2018.

[2] 김관욱, 위의 논문, 170쪽.

[3] 적정 콜 받기란, 상담원들 간에 미리 적정한 수준의 콜 수를 정해서, 정해진 만큼의 콜만을 받는 운동이다. 과도한 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동조합이 고안해낸 방안이었다고 한다.

[4] 김관욱, 위의 논문, 199쪽.


수습편집위원 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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