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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7. 2019

<120호> 우리들의 일그러진 교육

수습 편집위원 봄

     


  사그라지기 직전에 가장 눈부신 어느 저녁의 노을처럼, 그 날의 아침에는 사고를 알리는 복선인 양 가장 무거운 고요함이 내렸다. 5년 전 4월,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재수학원에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거나 단어를 외웠다. 고요한 아침의 공기는 셔틀버스 안까지 흘러들었고 학생들은 자그마한 호흡을 내뱉으며 저마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사님이 라디오를 틀면서 그 침묵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날은 재수학원 선생님이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다음 날이었다. 라디오에서 아이들을 찾는 절규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버스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고요함 속에서 그것은 더욱 찢어질 듯이 들려왔고, 소리를 듣는 것마저 고통스러울 만큼 너무도 무거웠다. 존재와 존재의 부재가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나는 매일 아침 울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일, 그리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현장으로 달려가 이들을 부둥켜안고 싶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험 앞에서 그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아침마다 들었던 라디오는 내가 학원 바깥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고통에 눈물이라도 함께 흘릴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였다. 그러나 재수생에게 그 통로는 ‘지나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선생님들은 “세월호 소식은 우리가 말해줄 테니 뉴스를 보지 말라”라고 하셨다. 뉴스를 보는 것이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입시 공부는 계속되었고 휴대폰 사용 금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의 고통이 성적을 흔들지 않을 만큼만 내 귀에 들려오도록 허락해야 했다. 2014년 4월, 그 사건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부서지게 한 것처럼 그때의 부끄러움은 아직 나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이러한 고백이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나의 고백이자 그 당시 수험생이었던 많은 이들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의 트라우마를 만든 것은 입시 제도였지만 죄책감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었다. 학원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수험생이었던 우리는 사회에서 고통 받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타인의 삶은 우리의 삶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법을 배웠다. 경쟁적인 입시제도에서 타자의 삶은 나의 삶에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타인과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나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일단 대학 가서” 생각해볼 문제였다.          


“일단은 대학 가서”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조심스러워야 했다. 많은 수험생에게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가거나 연애를 하는 것은 대학 이후로 미뤄져야 했다. “대학교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대학교에 가면 연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대학 생활을 신화화하고 낭만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끼리 연애하는 내용의 버스 광고 방송이 낯설다. 초중고 시절 연애는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연애란 일단 대학에 가서야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했던 가장 최근의 기억은, 유치원 때 빨간 색종이를 접어 장미꽃을 만들고 거기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적어 같은 반 친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때는 내 마음이 순수했던 만큼 나의 몸 구석구석에 한국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부작용들이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릿한 유치원 때의 고백(?) 이후로 나는 약속 끝에 언제나 ‘대학 가서’를 달고 살았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가 데이트를 신청할 때에도 “지금은 안 돼. 대학 가서 만나자”라고 답해야 했고, 친한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는 것도 대학 이후로 미뤄졌다.     

  거의 모든 것이 대학 이후로 미뤄지는 상황 속에서, 고등학교 때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TMI, 즉 Too much information으로 여겨졌다. 효과적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우리는 단지 가장 최근의 모의고사에서 몇 점을 받았고, 몇 등급을 받았는지, 그리고 학교에서는 전교 몇 등인지를 설명하면 충분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학교 배치표였다. 수능 성적에 따라 줄 세워지는 대학교 배치표는 놀라울 정도로 단편적이었다. 배치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일렬로 적힌 차가운 숫자들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내려 했다. 대학 지원자들에게는 대기 번호가 부여되었고, 대기 번호 1번이 빠지면 그다음으로 높은 점수의 대기 번호 2번이 들어왔다. 마치 등급이 매겨진 물건들을 운반하며 말이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처럼 말이다. 성적으로 등급 매겨진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와 같이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춘기 시절마저 의도적으로 연기해 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입시 경쟁 체제는 경쟁에서 뒤로 밀려난 학생들을 실패자로 만들었고, 학생들은 자존감과 자기효능감이 낮아졌으며, 주체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어떻게 정답이 두 개야


  수능 문제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고집한다. 정답이 두 개라도 되는 날에는 난리가 난다. 두 개의 선택지가 정답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평가원장이 사퇴해야 할 만큼 큰 잘못이었다. 한 문제당 5개씩의 선택지가 주어졌고, 우리는 그 중 ‘옳은 것’ 하나를 맞혀야 했다. 나머지 네 개의 선택지는 ‘틀린’ 것이었다. 정답이 두 개가 될 소지가 있으면 그것은 출제자의 잘못이었다.

  내가 재수를 하던 학원에는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다 온 강사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문제의 정답을 시원하게 찍어내지 못했다. “평가원에서 내놓은 정답은 1번이지만, 사실 2번도 정답이 될 수 있어.” 선생님은 종종 정답이 여러 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정답이 두 개야? 무슨 문제가 그래.’라고 생각했다. 깔끔하게 하나로 떨어지는 정답에 익숙해진 우리는, 점차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제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선생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은 한국의 입시제도 속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고하도록 도울 마지막 선생님이었을지도 모른다.          


뜻밖의 호접지몽


  좋은 성적을 얻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교과서를 외우고 자기 생각을 출제자들의 생각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문제를 잘 풀기 위해 학생들은 해설지의 출제 의도를 외우기도 하였다. 우리는 뜻밖의 호접지몽에 도달했다. “내가 출제자의 꿈을 꾼 것인가, 출제자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출제자의 생각에 동화될수록 높은 성적이 보장되는 상황 속에서 출제자는 절대자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태초에 작품이 있게 한’ 창작자들이 참고서에 나온 본인의 문제를 풀어 맞힌 문제보다 틀린 문제가 많았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예를 들어 신경림 시인은 참고서에 나온 <가난한 사랑 노래> 문제에서 30점을 맞았다. 최승호 시인 역시 자신의 시를 가지고 낸 2004년 수능 모의고사에서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 이들은 오히려 한국 공교육의 방식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방식을 제한함으로써 학생들을 경직적으로 사고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성적 말고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원하는 대로 스케치하고, 빨파초의 다양한 색깔들로 그림을 채울 수 있었다. 이 시간은 획일화된 교육의 장 속에서 유일하게 다양성을 내 삶에 들여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아리 축제를 빌미로 포스터를 그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와서 말을 걸었다. “인쇄하면 될 것을 시간 아깝게 그리고 있니?” 미대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몇 시간 걸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에게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는 행위였다.

  선생님이 가고, 몇 명의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너 미술 같이 해볼래?” 우리는 함께 교실에 남아 알록달록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색칠할 수 있는 자유를 갈망하던 것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무사히 마쳤다. 점수 말고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대학교 배치표가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는 듯이 기능하는 것이 원망스럽긴 했다. 하지만 배치표만큼 합격 여부를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이 없었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듯 대학배치표와 입시 제도는 컨베이어벨트와 컨베이어벨트를 돌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대학교에 합격한 후 나는 안도하였다. 공부한 보람이 조금은 있네, 하면서 말이다. 그때까지는 한국의 교육 방식에 최적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알지 못했다.          


앵무새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학생회에서 <사람들은 왜 광장에 모이는가?>를 주제로 세미나 겸 영화제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는 한국 집회의 정당성 및 방향에 관한 내용이 다뤄질 예정이었다. 잘하는 것이라곤 수능 문제를 잘 맞히는 것밖에 없던 내가, 1시간 동안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해 발제를 맡게 되었다. 이 날은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발제를 맡은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약 1시간가량의 발제가 끝나고 영화를 상영하려는 순간,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오늘날 노동자 투쟁과 노동 실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제자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졌고, 식은땀이 흘렀다.

  “어... 저는...”

  결국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쳤고, 이미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선배에게 대답을 넘겼다. 세미나를 마치고 방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그 날 밤은 부끄러움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 발표 준비를 하는 며칠 내내 내 생각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생각만 정리해 발표했다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웠다. ‘나는 진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외우고 그대로 옮기는 가짜 공부를 했던 것이구나.’하는 생각에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그 경험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의 모습과 너무도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발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왔고, 그만큼 발표에서 크게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왜 그 순간이 낯설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에서 발표 성적을 평가하는 방식은 교과서 내용을 얼마나 잘 요약하여 정리했는지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깊이 고민하거나 내 생각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받아왔던 성적이 곧 나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부족한 부분이 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가능성이었다. 나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 뿐, 여전히 교과서가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빨파초의 다양한 색깔이 아닌 단일한 검정만으로 쓰인 교과서처럼, 내가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세월호 집회에 참여했던 그 날은 나의 생각이 단단히 틀렸다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내게 세상을 내보였다.          

 

교과서 안의 개구리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개미는 주인공의 발을 붙잡는다. 어제 함께 술을 마신 사내가 이튿날 방에서 혼자 죽어있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기 전에 여관을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개미가 자꾸 발쪽으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개미는 ‘나’에게 남아있는 죄책감과 양심을 의미했다.     

  재수를 할 때 생긴 트라우마는 나에게 개미와 같았다. 세월호 사건 당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를 미뤄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대학 가서 하기로 미뤄둔 세월호 활동에 참여했다. 이는 재수 생활 때 사람들의 고통을 타자화해왔던 것에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기 위한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집회 과정에서 낯선 광경이 많았지만 그 날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서울 시청으로 가는 길목에서였던가. 마이크를 잡은 시민이 외쳤다.

  “여러분,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의 뒤쪽 광고탑에서 고공투쟁을 하고 계시는 노동자분들께 응원의 함성을 부탁드립니다!”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 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맙소사. 그곳에는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광고탑, 그 꼭대기에서 두 명의 사람이 너무도 작은 모습으로 깃발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저러다 떨어지겠어, 할 정도로 깃발이 사람까지 휘저을 양 펄럭였다. 광고탑 위에 올라가있는 너무도 작은 사람들의 모습. 이것은 교과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뒤흔들 정도로 펄럭이던 깃발과 그로 인해 존재마저 휘저어질 듯해 보이던 두 사람은 사회적 문제들이 몰고 온 폭풍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교과서와 수능 문제는 내게 사람들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이 왜 광고탑 꼭대기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교과서 안의 개구리’였구나 하는 반성보다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을 더 크게 느꼈다.     

  사회를 마주하지 않고 사회 성적을 잘 받으려고 했다니현실 사회의 모습이 어떤지를 알지 못해도 되고, 사회적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것이 한국 교육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한국 교육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시민적 덕성을 갖추게 하려는 교육의 사회적인 의도마저 실현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도를 저버린 한국 교육


  대한민국 교육기본법 제2조 교육이념으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 교육은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를 지향한다. 구성원들이 서로 존중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발언권을 부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발언권을 얻은 시민들이 생각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충돌과 화합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의견의 불일치를 경험하고, 무수한 의견들 사이에서 사회가 창조적인 긴장 상태에 놓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라는 점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이러한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세 가지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강압 및 교화 금지, 논쟁성에 대한 요청, 이해관계 인지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원칙은 학생들이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활발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민주시민교육의 중심이 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정치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주체적으로 찾아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적일 수 있다고 전제한다.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타인과의 관계에 응답함으로써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교과서의 내용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비판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교육이념이 민망할 정도로 한국 교육은 교육의 진정한 의도를 저버리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방식을 지속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게 할 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시민적 덕성을 갖추게 하려는 사회적인 의도마저 실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 한국의 교육 제도를 떠나라?


  위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혹자는 한국의 교육 제도를 거부하라고 선언한다. 예를 들어, 김상봉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에서 교육 제도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이 운동은 한국에서 대학입시거부를 선언하는 ‘투명한 가방끈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투명한 가방끈 운동’이란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중등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대학이 취업을 위한 예비 직장인 양성소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학력의 차이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양성하는 구조에 대한 저항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이들이 말하듯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대학에서 뛰쳐나온 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와, 대학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대학진학률이 70%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의 범위는 대학생과 대학을 졸업한 청년으로 상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은 이중적인 소외를 경험한다. 특히, 고졸의 경우 전문대졸이나 4년제 대학 졸업자보다 두드러진 고용률 하락 폭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 취업 가능성도 낮고, 대학 졸업자들과 월평균 임금과 시간당 임금의 격차도 상당히 커지기 때문에 교육 제도의 거부는 큰 위험을 동반한다.

  ‘입시에 게으른 자들’ 간의 연대는 한국의 문제적인 교육 제도에 균열을 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낙오자’의 길을 택하도록 강요하거나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자를 기르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보다 그들이 ‘낙오자’로 분류되거나 격리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은 또한 한국 교육 제도의 변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제도 교육을 성실히 따르는 것이 학생들에게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잃어버린 우리들의 사춘기를 위하여


  나는 한국 입시제도의 ‘승리자’로서 누군가를 이기고, 다른 사람의 삶을 타자화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반성하려 한다. 내가 목격한 충격적인 세상의 모습들은 대학교에 진학한 후 공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에 상당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거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또,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지향하되, 토론의 결과로 만들어진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현실 사회로 착각하는 것을 경계하기로 했다. 그 대신 광장에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또한 언제든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과 유연하되 단단한 용기를 가지고 실제 현실을 마주하기로 했다.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고 외쳤던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아직 우리 몸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존재하는 한국 교육 제도의 부작용들을 힘껏 뱉어 내보자. 함께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를 마음껏 뱉어 내보자. 그리고 ’타인‘과 나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보자. 영혼을 잊어버린 과거의 우리들을 위하여.

  한국 교육 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는 각자의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미뤄 두었던 우리의 사춘기는 어디로 갔는가이제라도 잃어버린 우리들의 사춘기를 되찾자.




봄 (bomisong3025@gmail.com)




<참고문헌>

최선주 외, 「시험형 인간으로 살아가기: 입시경쟁체제에서 형성된 아비투스가 추동하는 삶」,『아시아교육연구』, 13(1), 2012, 73~103쪽.

"'교육과정' 도그마에... 반복되는 수능문제 오류", 매일경제 특별취재팀, 2019. 4. 24.

“[주목! 이 사람] 기아차 고공농성 300일 넘긴 최정명, 한규협 씨 ‘봄이 왔지만 봄을 느낄 수 없어’”, 주간경향, 2016. 4. 19.

장은주 외,『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북멘토, 2018.

이상은,「미래지향적 교육과정 담론에 나타난 학생 주체성의 재개념화」,『교육철학』, 2018. 9., 68, 119~145쪽.

투명가방끈,『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 오월의봄, 2015.

"창업은 '뚝딱' 되는 것 아니다…초·중·고 교육부터 기업가정신 녹여야", 한국경제, 2018.11.5.

남재욱∙김영민∙한기명,「2015 고졸 청년 노동자의 노동시장 불안정 연구」,『사회복지연구』49(1), 2018 봄, 221~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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