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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9. 2019

<120호> 언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수습편집위원 봄


“한국의 주류 언론이 ... 희생자들이 직면한 고통, 고통의 주체들, 사회적 고통에 대한 책임의 속성이나 소재를 규정하는 방식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생명이 이해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의 삶은 서로의 존재 의미가 무한히 교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을 관통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고 삶이 섞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어디일까? 만약 한국에 그런 공간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듬뿍 담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그러던 중 한 언론사에서 인턴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부 국회팀에서 6개월간 스크립터 일을 하는 것이었다. 스크립터는 국회에서 열리는 위원회나 기자회견에서 오가는 말들을 기록하고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는다. 이미 휴학을 두 번이나 한 까닭에 더 휴학할 계획이 없었지만, 언론사 정치부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흔들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목소리가 교차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국회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집약되는 공간이다. 언론사 정치부라면 그러한 목소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세 번째 휴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인턴을 시작한 시기는 2018년 초였다. 당시는 안희정 사건이 터지고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막 시작되던 때였으며 6월 지방선거의 열기가 서서히 오를 때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비슷한 시점에 안희정 사건과 지방선거가 있었던 것은 비극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론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을 통해 사건을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2차 가해들을 고발하려고 한다. 진솔한 나의 이야기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변화를 선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당신은 무엇을 가졌는가?


  내가 일한 기자실은 국회 기자회견장인 정론관 바로 옆에 있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종종 회견 전후로 기자실에 들러 기자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자신이 진행한 회견을 기사로 써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의례’를 통해 국회 기자실에 어떤 권력관계가 작용하고 있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첫 번째 권력은 국회 안의 지위에 따른 권력이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인턴인 나와 높은 기사 조회 수를 기록하는 정규직 기자, 그리고 거물 정치인이 그곳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엄연히 달랐다. 기자실을 찾은 사람들에게 내가 인턴 신분임을 밝혔을 때 이들의 태도는 빠르게 바뀌었다. 악수하려던 손을 거두기도 하고, 명함을 쥔 손을 바로 다음 기자에게 옮겨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환하게 짓던 미소를 빠르게 거두는 순발력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들의 태도는 당황스러울 만큼 빠르게 변했다. 

  이렇듯 내가 느낀 국회 기자실은 당황스러운 일들로 가득한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당황스러울 만큼 빠른 태도 변화’는 이곳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인과 기자의 관계는 각자의 몫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였다. 이들이 맺은 수많은 관계에서 특별한 힘을 얻으려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당 관계자는 좋은 기삿거리를, 기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를 내보낼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관계를 맺고 끊는 데에 있어 계산의 논리가 크게 개입하는 곳. 내가 느낀 국회 기자실은 그런 곳이었다. 

  가진 것보다 안 가진 것이 많은 인턴은 국회 기자실에서 커피 배달을 담당해야 했다. 가장 높은 기수의 선배가 나에게 카드를 내밀면 인턴이 매일 아침 커피를 사와야 하는 것은 루틴이었다. 처음에는 “제가 다 들고 올 수 없으니 같이 가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아무도 모를 만큼의 작은 반항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내 음료수를 가장 비싼 메뉴로 고르는 것뿐이었다. 선배에게 카드를 돌려주는 순간, 참 절묘하게도 건너편의 다른 기자가 거물 정치인에게 건네는 농담이 들려왔다. “선배, 제가 모시겠습니다! 비리 하나 덮어드리겠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어쩌면 이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따로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기사로 쓰일 회견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


  소수정당이 메이저 언론사에서 다뤄지는 방식     


  국회 정론관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국회의원들은 준비한 법안들을 발표하러 왔고 각국 단체 대표들은 행사를 알리러 오기도 했으며 다양한 현장 노동자들도 정론관을 찾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출마선언을 하러 온 사람, 선거 출마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연이어 이곳을 찾았다. 그만큼 회견을 예약하는 정당들도 다양했다. 거대 양당은 단연 정론관의 단골이었고 녹색당, 민중당, 노동당, 대한애국당 등 소수정당으로 분류되는 당들도 때때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 참석자들은 회견 전후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곤 했다. “기자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꼭 기사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아주 가끔은 어떤 기자의 마음을 흔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정론관을 채운 공기분자처럼 공중에 흩어져버렸다. 기자회견을 모니터링하는 일은 스크립터가 담당하는데, 스크립터 마음대로 기사를 쓸 수 없거니와 회견이 기사로 나가느냐 마느냐에는 어떤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견 참석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회 기자실에서 느낀 두 번째 권력은 당의 규모에 따른 권력이었다. 거대 정당이나 어디에서 들어봄직한 단체들은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굵직한’ 사안들을 가져왔다. 이들의 이야기들은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의 드루킹 사건 관련 기자회견, 민주당 후보의 선거공약 발표 기자회견, 남북 정상회담 관련 거대 정당들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제1야당의 지방선거 로고송 논란까지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회견들은 시작과 동시에 기사로 나가기도 했으며 아직 회견을 마치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에서 회견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스크립터들은 ‘당연하게도’ 이들의 기자회견을 속기로 남겨놓아야 했다.

  한편, 끝날 때까지 카메라 플래시 한 번 터지지 않는 회견들도 있었다. 당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속기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예를 들어, 민중당의 회견은 현장 노동자들이 함께 참석하여 발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회견은 대량 실직을 낳은 한국GM공장 폐쇄와 같이 사회적 논란이 큰 사안이 아닌 한 속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쩌면 바쁘게 돌아가는 국회 정론관에서 소수정당의 기자회견까지 ‘챙기지’ 않는 것은 ‘의무’로 간주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지방선거 등 굵직한 행사로 여겨지는 사안에 대해서도 어떤 정당의 출마 기자회견이냐에 따라 속기의 우선순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국회 기자실을 가득 채운 계산의 논리들로 ‘값이 매겨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되지 않으면 속기 대상에서도 제외되곤 했다. 예를 들어 지방선거에서 소수정당 후보의 출마, 현장 노동자의 고발 기자회견 등이 그랬다. 이렇듯 정론관은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가장 크게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누군가에게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뚫어야 할 또 하나의 벽이었다.


  언론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     


“타자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방법을 우리는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때로 언론은 타자의 얼굴을 단정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양가성이라고는 없는 납작한 얼굴의 타자.”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정론관을 찾았다. 정론관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TV에서 느껴지는 것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발언자들의 표정과 감정이 조금 더 섬세하게 나타난다. 회견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는 아마도 정론관에 있는 기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 회견이 끝나고 언론에 보도될 때, 다른 각도에서 찍었을 뿐 거의 동시에 찍힌 것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기사에 딸려 나갔다. 기사로 나가는 사진은 발언자가 회견 내내 짓고 있던 표정이 아니라 잠시 눈물을 보이거나 분노에 찬 모습이었다.

  작년 4월의 에스티유니타스 고발 기자회견이 그랬다. 에듀테크 기업인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였던 고 장민순 씨가 직장 내 괴롭힘과 과로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2018년 4월 5일 유가족과 정의당 의원은 특별근로감독과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유가족이 발언하는 내내 터지지 않던 카메라 플래시가,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자 그제야 동시에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나간 보도 사진의 대부분이 30분가량 진행된 그 회견에서 10초 정도 터진 그 눈물만을 담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유가족의 눈물로 ‘장식된’ 보도 사진들을 남긴 채 ‘중대한 사안이 아닌데도 길다’는 이유로 타 언론사 스크립터들에 의해서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 일은 내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에스티유니타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시간대에 다른 상임위원회는 열리지 않았고, 앞뒤로 예약된 기자회견이 없었기 때문에 이 회견을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오지 못했던 한 노동자의 죽음은 ‘속기록에 남기지 않아도 되는 기자회견’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을 목격하며 ‘보통 사람들 중 한 명의 죽음은 분노와 함께 터뜨린 눈물로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이처럼 국회 기자실에서 타인의 존재와 존재의 소멸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2월의 어느 날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참석과 관련해 북한의 김영남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방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던 3월을 앞둔 때였던 만큼 이 소식은 당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내가 일했던 언론사에서도 사건 취재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나의 옆자리에 앉는 기자가 누군가를 만나고 오겠다며 취재를 가셨다. 알고 보니 천안함 사건 희생자의 아버지를 인터뷰하러 간 것이었다. 얼마 후 그 기자가 자리로 돌아왔는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분께 물었다.

  “좋은 일 있으셨어요?”

  그러자 기자가 대답하길, 천안함 희생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떠올리며 우는 모습을 인터뷰에 담았다고 했다. 좋은 일이 있었냐는 대답에 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동문서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 기자들이 ‘축하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건넬 때에서야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눈물을 인터뷰 화면에 담은 것에 대한 축하임을 알아차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일들을 계속 경험하면서 점점 국회 기자실 자리가 불편해졌다. 무언가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적어도 내가 일했던 기자실에서는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무한히 교차하는 서로의 존재 의미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너와 나의 더불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진정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은 나날이 커져갔다. 나는 스크립터로서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기록해야 할 것과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구분하라고 요구받았다. 이것이 스크립터 매뉴얼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4개 대형 언론사 스크립터들은 그렇게 하도록 인수인계 받았고, 나는 그것을 분명한 ‘요구’로 느꼈다. 누군가가 고통스럽게 마주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 혹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하여 ‘사안의 중요도’를 매길 수 있을까? 언론은 보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건을 취사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곧 사안의 중요도를 매길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기자의 고백으로 인해 그곳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느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 소식이 들려올 때 기자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자막 띄워!”라는 말들이 화살처럼 기자실 안을 쏘아 다녔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차가운 기자실에서, 다만 나를 버티게 한 것은 노회찬 의원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고백한 한 기자의 말이었다. “나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는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사는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들에 맞춰져 왔다.” 그녀는 노회찬 의원의 죽음 앞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든다고 했다. 이러한 고백을 하기까지 그녀에겐 몇 방울의 눈물이 필요했다.     


아버님 축하드린다. 당선되시겠네.


  안희정 사건이 터지고 며칠 후 기자와 식사 자리가 있었다. 기자는 주변 사람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사건이 안희정 지사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나는 안희정 지사에게 크게 실망하고 낙심한 사람들이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자는 나에게 되물었다. “그 지지를 철회했다는 사람과 연결해서 김지은 씨를 인터뷰할 수 없을까?” 나는 이 질문이 매우 불쾌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 혼자서만 불편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기자실로 돌아왔는데, 아까 그 기자가 다시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지금 안희정 팬카페를 들어갈 수가 없는데...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에게 안희정 팬카페의 글들을 캡쳐해서 보내달라고 할 수 있니?”

  이 기자에게 사건의 피해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그를 신뢰해왔던 지지자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어떤 의미였을까? 타인이 겪고 있을 아픔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위의 질문들을 그토록 쉽게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안희정 사건이 터졌을 때는 지방선거 열기가 한창 높아진 시기였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은 ‘공교롭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비극적인 일이었다. 미투 운동은 본래 성추행, 성폭력 등의 피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심각성을 알리는 여성 인권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마치 ‘폭탄 돌리기’를 하듯 미투 운동을 경쟁하는 당을 끌어내리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야당을 노린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2018년에 이윤택 연극연출가, 고은 시인 등의 성폭력,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자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우리 당 국회의원을 음해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소위 미투 운동이 좌파 문화권력의 추악함만 폭로되는 부메랑으로 갈 줄 저들이 알았겠느냐.” 또한 당에서 주최한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해 “미투 운동을 좀 더 가열차게 해서 좌파들이 좀 더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기자들 사이에선 “너 그러다 미투 당한다”는 말이 농담으로 사용되었다. 올해 4월 공개된 어떤 기자 단체카톡방에서는 “미투 그 지랄 조심하라”, “미투 때문에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한다” 등의 조롱이 오갔다. 이것을 보면 “너 그러다 미투 당한다”는 농담은 내 주변의 기자들이 입 밖으로 꺼낸 최소한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윤리적 잣대를 내미는 자들이 저지르는 비윤리성의 역설이란.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아버지가 자유한국당원으로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니?”라는 물음에 “이번에 조그마하게 선거를 준비하고 계세요”라고 대답한 것이 소문으로 번졌던 것 같다. 그런데 정치부 기자들에게 그 얘기를 꺼낸 것은 화근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 지역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일면식도 없는 우리 아버지를 찾으셨다. 기자들은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물은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이들에게 나의 아버지는 단지 선거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납작한 얼굴의 타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비극이었던 것은 안희정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이었다. 그날도 기자들은 우리 아버지가 지방선거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출근하자마자, 한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진심이 담긴 축하를 건넸다. 


  아버님, 미리 축하드린다. 당선, 되시겠네.


  이들에게 안희정 사건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이 축하 메시지야말로 사람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무엇이 문제인가?


  과거부터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은 ‘언론권력’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했다. 정권을 잡으려는 집단이 가장 먼저 언론을 장악하려 했던 것은, 언론이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물리적으로 제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소식을 전달받는 것 또한 주로 언론을 통해서이다. 

  올해 4월 16일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 5주년을 맞아 사건 당시 언론의 취재 내용과 방식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조문 연출’이라든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대던 기자들을 국민들은 ‘기레기’라고 냉소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당시 세월호 사건을 보도한 몇몇 언론의 취재 내용과 방식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기레기’로 만들었나. 6개월 간 기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몇 가지 자료를 참고해 분석해보았다.     


  기자의 감수성 부재와 보도 관행에 대한 성찰 부족     


  우선 기자들 개인의 감수성 부재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있는 사건의 경우 인권보도는 곧 언론윤리와 전문성의 문제 모두와 상당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기자들의 취재 과정에서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그리고 언론 윤리와 전문성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기자들은 자료에 접근이 용이한 기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불법촬영 영상을 공유하는 등 성범죄에 직접 가담하기도 하였다. 4월에 디지털성범죄 근절 운동단체 ‘디지털 성범죄 아웃 DSO'가 입수하여 공개되었던 기자들의 단톡방 내용을 살펴보자. 다음은 60여 명이 있는 익명 카카오톡방 ‘기형도 시인 30주기 추모 문학방’의 대화 일부다.       

  


디지털성범죄 근절 운동 단체가 입수해 공개한 기자 단체카톡방의 내용

           


  올해 4월 12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관련 동영상이 보도된 후 방장은 단톡방에 기사를 올리고 “YTN 형들 나누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지난해 10월 한국항공대 학생들의 단톡방에 성관계 영상이 불법유출된 사건에도 “궁금합니다”, “요런건 꼭 봐야합니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 이들은 또한 단체카톡방에서 모 가구회사 성폭력 피해자의 사진을 공유하고 “한번 유혹해볼만 하네”, “유혹이라기보다 남자 3명이 발정 날만 한 게 정확한 듯”이라는 대화를 나눈 내역이 공개되어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기자는 타인의 사생활이나 고통 등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어야하는 만큼, 높은 윤리가 요구된다. 한국기자협회는 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을 두고 취재 과정에서 취재원을 보호하고 존중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은 감수성을 가지고 취재를 해야 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단독과 특종으로 폭로의 수를 늘리고 가해자 리스트를 늘리는 일을 넘어서, 폭로 행위들이 열어젖힌 역동적 공론장을 더 생산적이고 장기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종종 피해자 회유를 통해 자극적인 폭로전에 몰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러한 보도 관행은 오래 지속되어왔다. 기자들은 “감정이 무뎌지는 것 같다”고 고백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성찰이나 적극적으로 바꾸어나갈 의지가 부족해보였다. 『한국 언론의 품격』에 따르면 과거부터 한국 언론은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반면그것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남재일과 박재영은 이러한 문제를 “현상의 사건화”라고 정의한다. 사건이 발생한 사회적 맥락들을 살피지 않고 단순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성범죄 사건을 보도한 몇몇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홍주현(2018)은 이와 관련하여 지상파 121건, 종편 104건 등 전체 225건의 보도를 분석했다. 성추행의 경우 직장 내의 잘못된 성문화, 성교육 부재 문제 등에 대해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제도적인 측면에서 미투 운동을 분석한 기사가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유력 정치인-비서의 관계, 연예계 내부의 권력 관계 등 성범죄 사건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기사가 부재하다고 분석한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단순하게 보도하는 것보다 사건을 둘러싼 맥락과 다양한 관점들을 복합적이고 분석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자들에게 ‘성찰할 여유’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조금 더 큰 맥락에서 살펴보자.     


  무리한 취재 강행으로 모는 환경적 요인들 

- 단독, 특종과 기자의 명예, 언론사들 간의 과도한 경쟁     


  함께 일했던 기자들 중 몇몇 분들과 취재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들은 무리한 취재를 하도록 하는 몇 가지 환경적인 요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논의를 다룬 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세월호 사건 당시 취재를 맡았던 박소영 기자와 김주성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은 세월호 5주기를 맞아 사건 당시 기자들의 취재 방식을 성찰하고자 한국일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박소영 기자 “회사에서는 ‘그 친구 몇 학년 몇 반인데, 반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추모의 말이라도 받으라’는 거예요... ‘기레기’라고 욕 먹을 때 ‘내가 왜 기레기야, 왜 나한테 이래!’라고 한 현장 기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 내가 기레기 짓을 했지’라고.”     


  몇몇 기자들은 무리한 취재 강행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기사를 써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체득했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주성 기자 “세월호 현장은 가까이 갈 게 아니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는데 자꾸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마음에선 ‘들어가면 안 돼’ 이러는데 나도 모르게… 빨리 기사를 써야 한다는 습관 속에서 배운 루틴한 방식 때문에. 그런데 잘못된 거잖아요.”     


  이처럼 기사를 효율적으로 내야 한다는 부담은 기자들이 무리하게 취재를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한편, 다른 기자는 단독과 특종 기사를 써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뻔하지 않은 기사’를 써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대답한 기자는 실제로 정치부에서 임원을 맡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언론사들 간의 과도한 경쟁이 취재 과정에서 비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언론사들 간의 과도한 경쟁은 ‘단독’ 기사 남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단독과 특종 기사가 기자의 사내 평가와 승진에 크게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경쟁과 생존의 논리 속에서 저널리즘 원칙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기자들은 감수성과 취재 관행을 성찰하기 위한 여유를 충분히 제공 받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고 기존의 사안들을 다른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단독과 특종 기사가 가지는 본래의 사회적 함의만큼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대형 언론사에서 의사결정권은 임원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회사의 이익을 위한 사업적인 고려가 저널리즘적 가치판단에 우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급에 실패하면 취재를 계속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해지는 상황 속에서 기자들은 기존 관행들을 따라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다. 

         

언론은 무엇인가?
고통을 언어화하는 장으로서 언론의 역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기자 개인의 감수성 결여와 언론사의 구조적인 문제들은 언론 윤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회사 내부의 시스템이 기자들로 하여금 취재 관행을 성찰하게 할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거나 경영이 저널리즘을 압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구조 전반을 흔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자 개인의 노력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기자 개개인이 쓰는 기사들이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기자 개인의 성찰은 언론이 안고 있는 문제적인 구조들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그렇다면 언론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로티에 따르면 고통은 비언어적이다. 그에 따르면 잔인한 사건 속에서 희생당한 자들은 언어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토해내지 못할 만큼 너무나 큰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언론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보통인 사람들의 분노, 그리고 이들이 호소하는 절박함에는 많은 진실들이 숨어있다. 언론이 희생자들이 마주하는 고통과 그 책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 사회에서 생명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존재 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또한 민주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이들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치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고, 공동체의 약속 이행에 대한 주관적인 심리적 기대와 함께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사회적으로 고통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언어화함으로써 이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국회 기자실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와 목소리들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의 외침은 어딘가를 향했지만 종종 들어주는 이 없이 공기처럼 허공에 흩어지곤 했다. 그러나 공기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처럼, 흩어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자실을 가득 메우고 세상이 살아가게 하는 동력임이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이곳을 가득 메운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우리 각자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일개 인턴일 뿐이었던 나와 정규직 기자들정치인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마주하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 되기를 희망한다.



수습편집위원 봄(bomisong3025@gmail.com)     





<참고문헌>

김수미,「고통의 재현, 그 정치성에 대한 단상」, 『언론과 사회』, 23(4), 67-119, 2015.

남궁협,「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언론의 역할」,『한국언론정보학보』, 91(), 41-75, 2018.

이희은,「페미니즘 운동과 미디어 윤리」,『언론정보연구』, 55(3), 120-157, 2018.

“끝없는 미투 조롱 홍준표에 ‘바로 이게 2차 가해’ 비판 쇄도”, 한겨례, 2018.3.9.

“기자 단톡방에서 욕설대상 된 미투운동”, 미디어오늘, 2019. 4. 29.

『한국 언론의 품격』,박재영 외, 파주: 나남, 2013.

“기자 단체 카톡방에 ‘성관계 영상 좀’“, 미디어오늘, 2019.4.19.

김효실,「#미투 속의 언론, 언론 속의 #미투 - ‘2차 가해’ 행위 보도 멈추고 대안 담론 매개 역할 해야 하지만....」,『한국방송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 23-24, 2018.

이나영,「‘미투 운동’을 대하는 언론의 자세」,『방송기자』, 41(), 13-15, 2018.

“[오리지너] 세월호 5주기... 그날 우리는 왜 ‘기레기’가 됐을까”, 한국일보, 201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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