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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화

<132호> 붕괴될 결심

수습편집위원 모호

by 연세편집위원회
2022 연세대 132호 홍보용_페이지_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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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은 내가 처음으로 ‘혼영(혼자 영화를 보는 것)’을 시도했던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 만큼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려 보는 이들도 많았지만 우습게도 나는 작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지 못한 채로, 단순히 이름에 끌려 무작정 표를 예매했다. 당시의 나는 나만의 작은 과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 대학 생활은 그냥저냥 끝났다. 학점도 만족스럽게 나왔고 인간관계도 무난했다. 그게 문제였다. 너무도 무난한 것. 과거의 나에게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무난함이었다.


고등학생 때의 나와 대학생의 나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입시를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던 시기에서 벗어났지만 정작 대학생으로서의 삶에 대한 목표 의식은 한 학기가 끝나도록 생기지 않은 것이다. 나는 기존의 나에게서 못내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짧은 삶에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혼영을 시도했고 그게 바로 헤어질 결심이었다.


사람이 없는 평일 조조 시간에 예매한 탓에 영화관에 들어서자 휑한 기분이 나를 잠식했다. 첫 일탈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음료수와 팝콘을 혼자 바리바리 든 게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 좌석에 앉아 상영을 기다리며 그제서야 영화 정보를 검색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영화가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며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탔다는 것을 말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날, 집에서 그의 영화인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다. 고운 얼굴에 대비되게끔 눈만 시뻘겋게 칠한 이유가 친절해 보이기 싫어서라던 그녀. 나는 그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기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증폭됐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영화의 줄거리를 읽지 않은 채로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과 영화 한 줄 평까지만 보는 편이다. 영화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을 때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해준, 서래. 속으로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읊으며 이동진 평론가의 평점을 보았다. 영화에 별점 5개를 부여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는 이 영화에 별점 5개를 남기며 한 줄 평을 썼다.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


영화를 보지 않은 채로 이해하기엔 다소 의아한 그의 한 줄 평에 갸우뚱하던 순간 영화관 내의 불이 천천히 꺼졌고 영화는 상영됐다.


138분. 다른 영화들보다 다소 긴 상영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내게 쏜살같이 빨랐고 영화가 끝난 순간 그의 한 줄 평을 무거운 마음으로 곱씹게 되었다.


헤어질 결심의 명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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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서래(탕웨이)가 해준(박해일)에게 했던 말이다. 산 절벽에서 추락사한 남편의 시체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형사인 해준에게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의아함과 동시에 ‘마침내’라는 단어를 쓴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마침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중국인이기에 한국어가 익숙지 않아 문어체를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방수’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고 번역기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 순간들은 그녀가 긴 문장들을 구사해야 했을 때뿐이었다.


‘마침내’라는 단어의 뜻은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다.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이를 신고하면 남편의 보복으로 한국에서 쫓겨날까 전전긍긍했던 그녀의 삶에서 남편의 죽음은 ‘드디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사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서래의 남편은 서래에 의해서 추락사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리 있는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드디어’라는 단어가 서래라는 한 개인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어눌한 한국말과 상황에 맞지 않는 문어체.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을 품기엔 너무 순진하고 순수해서 사랑스러운. 그런 서래의 삶 말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고.


남편의 죽음에 너무나도 의연한 서래의 모습을 보고 수완(고경표)이 그녀를 의심하자 해준이 시니컬하게 뱉은 말이었다. 해준은 후자에 서래가 속한다고 본 것이다. 해준이 읊은 말은 이 영화에서 그들의 관계와, 그 관계의 끝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모습을 암시한다고 느꼈다.


그들의 관계에서 서래는 갑이었고 해준은 을이었다. 해준이 먼저 서래에게 사랑에 빠졌기에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잠복수사를 하는 순간에도 해준은 형사로서의 마음보다 그녀를 향한 애정이 더 컸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으로 대체 식사하는 것을 기록하고 그녀가 담배를 끄지 못한 채 잠드는 것을 걱정하며, 그녀가 울 때 “마침내” 운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녀가 남편을 죽인 것을 묵인하고 증거 인멸을 도우며 경찰로써의 품위까지 버린다. 하지만 경찰의 품위를 버린 순간, 그는 곧장 그녀를 떠나 이포로 내려간다.


해준에게 있어 서래에 대한 마음은 밀물처럼 밀려와 그를 깊은 바다에 빠뜨렸지만 이내 빠르게 썰물처럼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녀와 이별한 후유증으로 한동안 피곤한 내색을 띠긴 했지만 그녀를 다시 찾아가려는 행위 따위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완전히 붕괴(崩壞)시킨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서래는 아니었다. 서래에게 있어 그를 향한 마음은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들어서 이내는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깊게 잠식되어버린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해준과 통화하던 중, 해준이 서래에게 언제 자신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냐며 화를 내자 서래가 한 말이다. 해준은 서래에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분명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해준이 제 사랑을 뱉은 순간 해준의 사랑은 붕괴했고 서래의 마음은 세워졌다. 그가 옆에 있을 때보다 정작 헤어지고 나서 그녀의 사랑은 더욱 커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고도 그를 잊지 못해 그가 있는 이포로 내려온다. 사람들을 상대로 투자 사기나 벌이는 사람과 재혼한 그

녀의 모습에 해준이 못내 답답해하며 왜 그런 남자를 만났느냐고 묻자 서래는 답한다.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해준이 서래와 헤어졌다고 믿었던 그 순간에 서래는 그와 헤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와 헤어질 결심이 필요했지만, 그 결심은 끝내 붕괴하여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하지만 해준은 이전과 달리 서래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선 그녀에게 초밥을 사줬고 용의선상에서 배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포에서는 그녀에게 핫도그를 주며 어떻게든 그녀를 용의선상에 올릴 증거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을 향한 서래의 사랑은 식지 않고 되레 더 깊어진다. 미결사건들의 사진은 항상 방에 두어 기억하고 또 기억하던 그의 모습을 알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되뇐다.


나는 당신의 미결사건이 되려고 이포에 왔나봐요.


그건, 그가 모르는 결말이 되어서라도 그의 마음에 남고 싶다는 뜻이었다.


서래의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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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서래는 여러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의 첫 번째 살인은 제 어머니의 안락사였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위해 간호사가 될 정도로 효심 깊은 딸이었지만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제 어머니를 안락사시켰다.


두 번째 살인은 남편의 추락사였다. 남편은 서래와 나이차가 상당했다. 사망한 남편의 잠금화면을 본 수완이 서래의 사진을 보고 서래를 그의 딸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둘의 갈등 원인은 단순히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서래는 해준에게 자신의 남편을 한국에 온 자신을 처음으로 품어준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남편은 결혼 생활 내내 서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의사는 남편이 행한 폭력의 흔적을 보고 그가 일부러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곳에 폭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 서래의 남편은 남들에게 중국인 아내를 보듬어준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길 의도했지만, 실상은 서래의 한국 추방을 협박거리로 이용해 그녀를 폭행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 번째 살인의 대상은 철성의 어머니였다. 서래는 재혼한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 재혼한 남편이 자신과 해준의 관계를 해준의 아내에게 폭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그를 죽일 순 없었다. 그가 살해당하면 용의선상에 제일 먼저 아내인 자신이 오를 것이기에 살인이 들통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제 남편을 죽일 만한 사람이 그에게 사기당한 어머니를 끔찍이도 모시는 철성이라고 판단했고, 철성의 분노를 이용하기 위해 철성의 어머니를 죽였다. 자신의 어머니를 안락사시켰던 방법과 동일하게 말이다. 그녀의 생각대로 어머니의 죽음에 분노한 철성은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 결국 그녀의 남편을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철성이지만 서래는 간접 살인을 했다고도 볼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그녀는 3번의 직접 살해, 1번의 간접 살해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살인의 횟수를 보면 그녀는 결코 선역이 아니다. 첫 살인을 저질렀을 때는 끝없는 고민을 거쳐 죽음을 간절히 원하던 어머니를 안락사시켰다. 하지만 이후 첫 남편을 죽일 때에는 결혼 몇 년 후 제 손으로 직접 그를 죽였다. 그리고 세 번째 살인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점점 살인에 무뎌진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 영화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완의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란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부터는 쉽다. 그렇다면 살인에 있어서 점차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어진 그녀는 살인이 쉬워진 것일까. 영화 속 서래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지만 우리는 그녀를 무서운 연쇄살인마로 생각하지 않는다. 되려 그녀의 삶을 동정하고 그녀의 비극적인 사랑과 결말에 대해 안쓰러워하며 그녀의 매력을 찾는다. 이는 모두 ‘그럴 만해서’라는 이유로 종결되었기 때문과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그녀의 인간성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서래와 첫 번째 남편의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서래는 독립군의 손녀였다. 한국인으로서의 제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것이 조상 대대로 물려져온 호미산이라 생각해 호미산을 “내 산”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미산은 그녀의 산으로 인정되지 못했고 끝내 국가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녀 또한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여겨졌다. 중국인인 그녀는 독립군의 후손일지라도 불법체류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서래는 남편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국에 남을 수 있었고 남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래가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서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나는 순간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쫓겨나면 중국에서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했다. 중국의 형벌은 가혹하다. 특히 존속 살인죄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남편의 폭력을 견딜지, 아니면 벗어나서 중국에서 죗값을 치를지. 그것도 아니면 다시 한번 손에 피를 묻힐지.


결국 첫 번째 남편의 태도가 서래를 비극적인 삶의 서막에 데려다 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입은 청록색 원피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를 찍을 때, 파란색 원피스와 녹색 원피스 두 벌을 준비했다고 한다. 해준과 해준의 아내는 그것을 각각 녹색과 파란색이라고 말하며 헷갈려했지만, 실상은 결국 둘 다 따로 존재하는 옷이었다는 거다. 어느 한 면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그 옷처럼, 서래 또한 냉혹한 살인마로만 볼 수 없는 따뜻한 면들이 있었다.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다정함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대담한 모습. 살인과 사랑은 대조되는 것이지만, 결국 그 두 모습 모두 서래의 것이 맞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모든 살인의 시점은 서래의 시각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정말 그녀의 살인이 “그럴 만한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녀의 어머니가 정말 안락사를 원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고, 두 남편의 죽음의 계기 또한 우리는 그녀가 말해준 것으로만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관객의 시선이 해준의 시점에 닿아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준은 그녀를 못내 원망하지만, 그녀를 향한 제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랑은 모든 것에 있어서 객관적인 눈을 가리기 마련이다. 해준은 그녀를 사랑해 그녀의 말을 모두 믿었기에 관객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녀를 믿게 된다.


하지만 해준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그녀의 살인이 잔혹하게 와닿는다. 특히 세 번째 살인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철성의 어머니는 정말 무고한 피해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해준을 지켜주기 위해 한 살인이었다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준까지도 그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택해야 했던 가녀린 개인이었을까, 아니면 복잡한 것들을 회피하고 싶어 살인을 최고 효용으로 본 이기적인 개인이었을까.


그녀를 하나의 잣대로 판가름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강하게 표현하면 연쇄살인마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가 너무 가련한 까닭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 살인에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매 살인마다 그녀의 기준에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매번 후회하는 것은 제 살인에 해준을 개입시킨 것이었다.


잔혹하지만 아이처럼 순수했던 그녀의 이중적 면모는 두 번째 남편의 살해 현장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두 번째 남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서래와 그가 함께 살던 호화 리조트 수영장이었다. 경찰이 사건을 보러왔을 때, 수영장 안에서 남편의 시신은 핏기 하나 없이 앉아있는 모습이었고 수영장 내부 물은 모두 빠져있었다.


모두 서래의 짓이었다. 그 행동이 증거 인멸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래는 수영장의 물을 모두 뺀 후, 피로 범벅된 남편의 시신을 호스를 이용해 씻겨놓았다. 사실 그녀는 증거 인멸이 죄든 뭐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당신이 와서 이걸 볼 텐데. 당신이 무서워할 텐데.

해준이 피로 범벅된 현장을 보지 않는 것이었다. 해준이 자신은 피를 무서워한다고 스치듯 말한 것을 서래는 기억해두었고 남편의 시신을 본 순간 그것부터 걱정했다. 분명 이곳에 올 그가 피를 본 순간 두려워할 것이라 믿어 열심히 수영장 내부를 청소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시신을 마주하는 두려움. 청소를 하다 시신과 시선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녀는 아득바득 열심히도 그곳을 청소한다. 서래는 남편의 사망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지만, 그 사망을 보고 두려워할 해준에 대해서는 연민과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고 볼 수 있는 그녀의 청소는 사실 그녀에게 있어선 해준을 향한 사랑이었다.


이외에도 해준을 향한 그녀의 죄책감은 첫 번째 남편의 사망과 관련한 휴대폰에서도 나온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범인이 맞음을 증명해줄 휴대폰을 다시 돌려주곤 말한다.


깊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눈을 감았던 그 순간이 해준에게 있어서는 붕괴였다. 경찰로서의 품위도, 서래를 향한 사랑도 모두 말이다. 서래는 자신이 붕괴시킨 그의 사랑을 후회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를 잊지 못했을 만큼. 깊은 바다에 버리라던 휴대폰을 버리지 못해 다시 그에게 가져다줄 만큼.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살인을 후회하진 않아도 그를 붕괴시킨 것은 후회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붕괴시켜버린 그의 품위, 그리고 사랑 모두를 말이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란 말은 어쩌면 사랑도 돌이키고 싶었던 그녀의 마지막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헤어질 결심 속 ‘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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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속 인물들의 관계는 주로 불륜으로 나온다.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불륜이었고, 해준이 쫓던 용의자, 산오(박정민)또한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불륜은 사회 윤리관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되려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관계를 대놓고 꾸짖지 않는다. 되려 낭만 가득한 프레임 안에 그들을 담는다. 영화 속 사랑관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서래의 대사이다.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그 말에 해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산오가 유부녀를 찾아갔을 리 없다고 생각한 해준은 서래의 말에 생각을 바꿔 유부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해준은 서래의 말처럼 유부녀의 도움을 받아 숨어있던 산오를 발견한다. 산오는 해준에게 잡히자 자살한다. 자살을 하기 전, 산오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에게 말한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그래도 너 없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그 말은 결국 해준과 서래의 관계에서도 통한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갉아먹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더 좋은 관계 말이다.


해준과 서래는 영화 속에서 직접적인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하는 등의 연인끼리 할 만한 그런 스킨십말이다. 해준이 육체적 관계를 맺은 이는 본인의 내뿐이었지만 관객들은 해준과 서래를 불륜이라고 규정한다. 육체적 관계가 없었을지라도 그들은 정신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헤어질 결심은 불륜 미화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따지고 보면 가정을 파탄 낼 수도 있는 일들을 사랑이라는 보기 좋은 껍질에 포장한 것 아니냐는 시선들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관계가 사회적 관념으로는 결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래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을지언정, 아내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그녀를 택한 해준의 모습은 그가 서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불륜 미화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드러내고 싶어 했던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 아닌, ‘사랑의 미결’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나오는 커플들은 모두 사랑을 완결짓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동화 속에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함으로써 해피엔딩이라고 기록되지 않는가.


하지만 해준은 결혼을 했음에도 아내와의 사랑에서 완결을 짓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의무적으로 주 1회 섹스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결코 사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미결된 사랑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헤어질 결심이라고 하면 결심을 한다고 하지만 헤어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런 것에 대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며 계속 보게 되는 영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감독이 미결되는 사랑을 주제로 잡은 이유는 결국 모든 사랑에 완결이라는 것은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상대와의 영원을 꿈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완결할 수 없기에 그것은 언젠가 붕괴되지만 그럼에도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여운으로든, 얼룩으로든 남게 된다. 뭐든 완결보단 미결되었을 때 더 미련이 남아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해준이 미결 사건만큼은 계속 기억하고 되짚기 위해 방에 걸어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모든 사랑은 미결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모두의 마음속에서 숨 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을 대변해주는 것은 헤어질 결심을 본 한 관람객의 후기 댓글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시인의 글귀인 저 문구가 이 영화를 전반적으로 관통한다. 붕괴하여 멀어져도 언젠가 다시 밀려와 나를 그때 그 순간에 가두는 그때의 사람과 사랑. 해준에게 영원히 미완으로 느껴질 서래처럼, 우리 모두도 나만의 서래를 품고 있진 않은가?


헤어질 결심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위의 내용을 통해 나는 헤어질 결심의 명대사, 서래의 살인, 그리고 불륜에 대해서 다뤄보았다. 내가 다룬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박찬욱 감독만의 하나의 세계관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전부터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많은 평론가들에게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복수 3부작으로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그 대표이다. 이 외에도 다소 마이너한 장르라고 불릴 수 있는 퀴어물, 아가씨 또한 흥행과 더불어 좋은 평을 얻은 것을 보면 그의 작품성이 꾸준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많은 대표작 중 굳이 헤어질 결심을 칼럼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해당 작품이 이전의 그의 영화들과는 장르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정통 멜로 장르와는 다소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복수를 기반으로 한 내용이 많고, 아가씨는 멜로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배경의 동성애를 다룬다는 점과, 타 작품들처럼 복수가 주내용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정통 멜로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공동 집필자인 정서경 작가는 박찬욱 감독이 정통 멜로물을 쓰자 했을 때,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감독도 자신도 정통 현대 멜로를 집필해본 적이 없기에 큰 모험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서경 작가의 반응과 달리, 박찬욱 감독은 멜로를 쓰는 것에 대해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처음 도전하는 장르일 지라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거장의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그의 예상대로 헤어질 결심은 예술성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들은 하나의 ‘밈’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N차 관람객이 유독 많은 영화로도 유명해졌다. N차 관람객이 많은 이유를 추측하자면 이 영화는 볼 때마다 감회가 남달라서라고 생각된다. 보편적이지 않은 과정의 관계일지언정,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우리 모두 한 번쯤 가져본 마음이니 말이다.


이 영화가 주로 다룬 것은 그들의 사랑이었다. 복수처럼 추가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오로지 그들만의 사랑.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 그 사랑의 과정이 온전히 정직했다고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경험, 제삼자에게 상처를 줘야 했던 경험,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줘야 했던 경험. 온전히 좋은 추억만 남기는 사랑은 그 어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완결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사랑엔 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형태는 모두 다양하다지만 완벽하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헤어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는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감독이 말했듯, 헤어지겠다 결심한다고 바로 헤어질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이다. 결국 사랑은 모호함 그 자체인 것이고 사랑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성장한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미결과 완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그사이 어딘가에서 사무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가진 순간, 붕괴될 결심 또한 가져야 한다. 이는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은 까닭이다. 헤어짐의 과정과 그 과정을 위해 붕괴되어야 했던 순간들을 단편적으로 담아낸 것이 영화 헤어질 결심이라고 정의하며 칼럼을 마친다.


ps. 이 영화를 보며 지나간 옛사람, 옛사랑이 생각난다는 후기가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습편집위원 모호

junghyowo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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