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세편집위원회 Sep 16. 2019

<121호> 가을호를 펴내며

편집위원 nope

 틀리길 바랐던 지난 호 여는 글의 날씨 걱정은 현실이 되어, 소나기보다는 스콜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고,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게 선크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마주하는 여름이었습니다. 편집위원들은 어쩌면 이미 익숙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글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새롭게, 솔직하게 내놓아 독자분들께 전달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모습을 더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조심스럽게 열었다가 두려움에 닫아 버리고 부끄러움에 숨어 버리는, 그래도 다시 용기 내어 당신에게 말을 걸고자 노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글 쓰는 이의 변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날씨 못지않게 사회도 시끄럽고 변덕스럽습니다. 민족주의라는 비판과 정당한 투쟁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일본 불매’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광화문에서는 금요일마다 양진호 처벌, 웹하드 카르텔 해체, 조선일보 폐간을 외치는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장애인 단체들은 거리에 다시 나와 대책이 마련된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홍콩에서는 시민들이 고립된 채 중국 정부의 반인륜적 폭력에 저항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고 있고, 그 고립과 공포, 시민들의 연대는 1980년의 광주를 보는 듯합니다. 홍콩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고 하지요. 침묵과 삶이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뒤집는 소란과 변덕이 가득합니다.


 아픔을 딛고 펼쳐진 투쟁과 희망이 있는가 하면, 알수록 절망적인 세상도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가 에어컨 하나 없는 휴게실에서 폭서로 사망하고, 아사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탈북민 모자는 아사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목동에서는 안전 지침이 지켜지지 않은 노동 환경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삼성 해고노동자는 강남역의 철탑에서 수십 일 단식과 함께 목숨을 건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생명보다 전기세가, 식사보다 밥값이, 안전보다 비용 감축이 중요한 세상을 살고 있고, 그 안에서는 지금도 하나둘 생명이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세』 가을 호에 아픔, 절망, 희망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우선, 《학내기획》에서는 올해에 연세대학교 안에서 화제가 된 사건들 혹은 거기서 나타난 사고방식을 다룹니다. <우리 안의 합법만능주의>는 올해 상반기에 연세대학교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합법만능주의’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펴봅니다. 법을 어기면 모두 나쁘고 법만 어기지 않으면 모두 괜찮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연세인은 많지 않겠지만 실상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법과 절차의 불완전성을 간과하고 모든 사고와 판단을 사법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글입니다. <응원단,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응원단에 지속해서 제기되어 온 비판들을 하나씩 짚어 봅니다. 연세춘추, 중앙운영위원회 회의록,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 제보의 검토와 인터뷰를 통해 논란의 실제를 담아내고자 노력하며 연세를 대표하는 응원단이 가져야 할 책임은 무엇인지 다룹니다. <강사법은 죄가 없다>에서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대학에서 벌어진 일들을 분석합니다. 특히 강사법을 핑계 삼아 구조조정을 진행한 대학들의 변명을 비판하며 대학의 재정과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강사법이 대학에 가져온/가져올 변화들을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기획 《나를 찾아줘》에서는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고민을 당사자의 내밀한 목소리로 담아내었습니다. <페르소나, persona>는 말하고 싶어도 하지 않았던, 행하고 싶어도 하지 않았던, 입고 싶어도 입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이를 통해 일상 속의 대단하지 않은 자기 검열을 보여주고, 남을 핑계로 가려왔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이 과정이 독자 여러분께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소망하는 글입니다. <피칠갑은 말할 수 있는가?>는 거리를 두고 소수자의 삶을 관찰하지 않고,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된 경험과 느낌을 충분히 정돈하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쏟아냅니다. 논리적 이해보다는 자기혐오와 증오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2019년 여름 호의 《납량 특집》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에 이를 읽은 분들이라면 더욱 몰입하여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세 번째 기획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고》에서는 미디어가 어린 여성들에게 주입하는 이미지와 이를 소비하는 방식을 다루며, 최근의 여성 서사의 변화와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심화를 통해 희망과 결의를 다집니다. <I'm doing this for you, superstar>에서는 영화계에서 늘어나고 있는 여성 서사를 다룹니다. 연세대학교 안에서 여성주의자로서 살아가며 느낀 절망을 영화를 통해 위로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입니다. 히어로 영화와 동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언제나 ‘해피 엔딩’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마블과 디즈니가 극장가를 휩쓰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가 영화에서나마 주인공의 승리를 보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히 ‘위로’로서의 여성 서사뿐 아니라, 이 ‘해피 엔딩’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여성들의 저력과 희망입니다. <그런 소녀는 없다>는 한국 사회의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양상을 살펴봅니다. 최근 논란이 된 배스킨라빈스의 광고로 시작하여 아이돌 산업을 중심으로 미디어가 어린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피고, 그 시선의 권력을 파헤칩니다. 어린 여성들이 겪는 문제의 심각성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길 바라며 쓰인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를 보다》에서는 2019년 한국에서 문화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감성 에세이’들과 영화 <기생충>을 다루며, 문화 속 우리의 태도를 되짚어 봅니다. <위로라는 말>은 위로는 무엇일지 고민합니다. 그저 말일 뿐이지만 누군가를 살아갈 수 있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 위로. 글쓴이는 이를 돌아보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못된 위로와 진정한 위로의 방향을 제시해 봅니다. <기생충/들>은 121호의 모든 편집위원이 참여하여 2019년 개봉한 영화 <기생충>을 보고 함께 쓴 글입니다. 하나의 소재에서 다양한 관점이 드러나길 바란다는 119호 독자위원님의 제안으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기생충>이 화제가 된 배경부터 영화를 본 이후의 고민과 한국 사회까지 시선을 펼쳐 나갑니다. 공동 작업이기에 여러 의견을 담을 수 있었지만, 지면상의 한계로 각 편집위원의 고민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이 글이 <기생충>의 기억을 상기하고, 이 영화와 그 주변의 세상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집위원 전원의 글을 모았습니다.


 무덥고 변덕스러운 여름, 그러나 그 변덕 속에서 또 다른 희망을 찾고자 하며 두 달 동안 써 내려간 편집위원들의 글을 담아 완성된 『연세』 121호를 내놓습니다. 소란스럽고 변덕스럽더라도 그 중심에는 사람과 희망, 대화와 성찰이 있는 가을을 그려 봅니다. 발에는 낙엽이, 눈에는 이 글들과 사람이 밟히길 바랍니다.      


2019년 가을호 편집장 nope


YIRB 듣는교지 사운드클라우드 들으러 가기

작가의 이전글 <120호> 여름호를 펴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