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데어
2022년 12월 25일 밤에 조세희 작가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조금 놀랐다. 조세희 작가는 나에게 피터 싱어 같은, 교과서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름을 검색한 화면에는 벌써 추모의 글이 한가득이었다. 그가 썼던 책의 구절, 생전 한 인터뷰가 헤드라인으로 채택되어 정렬되어 있었다. 그 글자의 나열을 보니 고등학교 심화국어 수업에서 때 한 학기 내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또 읽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내신 성적을 위해 갈래, 주제, 등장인물, 이런 요소를 달달 외우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초점을 맞추는 인물, 그 인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바, 소설의 장면이 사회에서는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생각하고 토론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수업에서 글 쓰는 과제가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글을 오랫동안 곱씹는 경험은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억에 남을 글을, 의미 있는 글을.
그날의 컴퓨터 화면에서 조세희 작가는 "비관주의자도 냉소주의자도 돼선 안 된다. 비관주의는 나쁜 정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분노할 땐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싸우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귀신이 돼서 다시 싸우러 이 세상에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강렬하게 싸우겠다고 다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글은 정적이니까. 혹은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렇게 싸우겠다고 다짐했기에 글을 쓸 수 있던 것일 수도 있겠다고.
글은 가장 보편적인 자기표현 수단이다. 내게는 가장 쉽고 대중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패션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보다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손쉽다. 글을 잘 쓴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글을 좋아한다. 그건 내 몇 안 되는 강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고, 일기나마 꾸준히 썼다. 코로나로 무기력한 1학년을 보내고 연세지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세지에서 여러 번 글을 쓰며 조세희 작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글은 조용할망정 글쓴이는 조용하지 않다. 글 쓰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불편해하고 있다. 적어도 내 주변은 그렇다. 분노를 표현하고 싸우기 위해 글을 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신촌역과 승강장 사이 틈은 못해도 10cm가 훌쩍 넘는다. 웬만한 성인 남성도 까딱 한눈을 팔면 충분히 발이 빠질만한 틈이다. 그러니 보통 지름이 6~8인치, 센티미터로 환산하면 15~20센티인 유모차나 휠체어의 바퀴가 빠지기는 더욱 쉬울 것이다. 아니 사실 승강장까지 내려올 것도 없다. 지상에서 개찰구로, 개찰구에서 승강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더욱 어려울 테니까. 노선만 11개, 역 수는 280개가 넘는 서울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휠체어 이용자'를 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을 본 것은? 그들을 대중교통에서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지금껏 연세지에서 나는 노키즈존, 청소노동자 시위, 우크라이나 전쟁, 한국의 ‘갓생러’, 연세로 차 없는 거리 및 대중교통전용지구 폐지, 연세대학교 내 배리어프리와 장애 학생 이동·활동 보조 근로, 그리고 내 취미에 관해 썼다. 애초부터 즐겁고 가벼운 글을 쓰자고 약속했던 취미열전을 제외한다면, 목소리 내기 어려운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 쓰고자 노력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더 이상 글을 쓰기 싫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고민한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글을 읽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을 바꾸기에 글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과에서 주최한 진로 행사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신 선배님이 오셔서 '작가나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독자가 없는 글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지 않아도 효력이 있는 글, 법이나 규칙에 관심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읽어주는 사람 없이 글이 의미를 갖는가? 설령 읽히더라도 그게 충분한가?
그런 경험들이 종종 있었다. 지난 학기 ‘사회 문제와 공정’이라는 수업을 듣기로 결심했다. 강의 계획서에 쓰인 "'에브리타임' 플랫폼에 대한 개선 필요성을 느끼는 학생"이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매일매일 주제를 갈아치워 가며 물고 뜯는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에 피로를 느꼈지만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막막했던 때, 수업과 수업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진행되며 에브리타임에 올라오는 글을 보고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다. 검색 키워드를 바꾸어 가며 최근 6개월간의 혐오적인 글을 검색하고, 글의 주장을 정리했다. 다음으로는 그런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쓰고 에타에 올렸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두 아시다시피, 에타에서 토론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신고가 누적되면 글이 블라인드 처리되고 게시글의 작성자는 계정이 정지되는 불합리한 신고 시스템 때문이다. 토론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거나 적어도 청중을 설득하기 위함인데, 글이 삭제되면 상대나 청중도 같이 삭제된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윤리가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내 글은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글을 쓰면서도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알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노트북을 덮었다.
누군가는 빠르게 글을 뱉는다. 나는 느리게 글을 쓴다. 1초마다 글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뒤로 하고 나는 겨우 몇백 번 읽히면 다행일 글을 쓴다. 강의가 끝나고 성적 확인 기간에 연세 포탈을 들어가며 나는 선배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했다. 독자가 없으면 글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성적은 잘 받았지만 글에 대한 의문은 남았다.
에타에서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연세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글은 종종, 아니 자주 무력감을 남긴다. 내 글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언론의 일방적인 특성 때문에, 독자와 피드백을 실감하지 못해 그런 면도 있다. 내 글은 무엇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역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 역시 무언가 내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 이런 고민이 나의 용기 없음을 증명한다고 느낀다. 용기가 없어 행동하지 못하면서 이젠 용기가 없어 글도 쓰지 못하는 거지. 이름을 데어dare로 달고 있으면서.
계간지의 특성상 한 글을 오래 붙잡고 있게 되는데, 이런 고민들이 번갈아 가면서 다가온다. 그러니 무엇을 써도 못나 보인다. 더더욱 글을 쓰기가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을 쓴다. 글쓰기 싫다는 이야기를 한 바닥 내내 글로 쓴다. (글러 먹었다는 뜻이다.) 이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아마 평생 끝나지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계속해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를 다시 두 가지로 대답하자면, 첫째로 그럼에도 나는 글이 좋고, 둘째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참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일도 사회적인 차원의 일도 무엇도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몇 안 되게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 내용과 형식을 오롯이 내가 ‘잘’ 선택할 수 있어 글을 좋아한다. 그러니 아무리 글쓰기 싫다고 중얼거려도 그것은 애증이지 미움만은 아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평생 노키즈존을 보고, 배리어프리 하지 않은 학교를 보고, 끝나지 않는 전쟁을 보고, 어떠한 전문적 근거도 없이 밀어붙여지는 행정을 볼 게 될 테다. 내가 쓴 글은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그저 순응하고 눈 감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 비참하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행할 거라면 적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불행해해지겠다는 알량한 다짐이다.
그러니 오늘도 ‘감히’ 글을 쓴다.
이런 글을 연세지에 실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뭉뚝하지 않나. 하지만 그래도 굳이 이 글을 싣는 이유를 만들어 본다면, 글쓰기 싫어하는 사람도 잘 글 쓰고 있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럴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