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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Sep 22. 2019

<121호> I'm doing this for you

편집위원 이해일

*<캡틴 마블>과 <알라딘>의 결정적인 스포일러, <아이언맨2>의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슈퍼맨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 기자 클라크일 때 어딘가 좀 서툴고 말이 없다가도 정의로운 일을 할 때는 놀랍도록 융통성 없이 직진하는 류의 모습에 반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이상형을 물어볼 때면 DC코믹스가 지치지도 않고 슈퍼맨 영화를 말아먹기 전까지 슈퍼맨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현재진행형인 나의 모든 히어로 덕질은 슈퍼맨에게 반한 그날 시작됐다. 당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도 슈퍼맨이었다. 누구보다 곧고 강하며, 정의로운 남자.

 이 생각은 내가 영화관에서 <캡틴 마블>을 보고 나왔을 때 깨져버렸다. ‘캡틴 마블 너무 멋있어! 쩔어!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잠깐, 내가 히어로 영화를 보고 마음 깊이 ‘저렇게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문득 난 슈퍼맨 같은 남자를 원하긴 했지만 슈퍼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 어렸을 적에 남자애들이 히어로 영화만 보고 나오면 어깨에 보자기를 두르고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는지, 그리고 왜 나는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게 내 이야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 <신데렐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보고 자랐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랐을 때는 범생이 여자 주인공을 일진(?)들로부터 멋있게 구해주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인터넷소설을 봤다. 재밌게 보던 드라마들도 비슷했다. 착하고 예쁜 여주와 강하고 능력 있는 남주, 그리고 종종 표독스럽고 야망 넘치는 악녀가 등장했다. 가끔 어쩌면 내가 여섯 살 이후로도 평생을 <신데렐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보고 산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자주인공은 언제나 예쁘고 무해하며 구원은 곧 남자주인공인 이야기 말이다. 그런 나에게 요즘은 꽤 신나는 시절이다. 강하고 개성 있고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스크린에 활발히 등장해 자기 이야기를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블 같은 돈 냄새 풀풀 나는 상업 예술에 지갑을 열길 마지않는 나에게 올해는 흥분의 연속이었다.

 <블랙 팬서>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블이 여기까지 왔다니!’라고 생각했다. 소박하던 나는 (섹시한 옷을 입지 않으며) 능력 넘치는 과학자 슈리와 (섹시한 옷을 입지 않으며) 대의를 위해 망설임 없이 사랑을 버리는 장군 오코예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몹시 행복했다.     


"Drop your weapon 무기 버려" -오코예

"Will you kill me, my love? 날 죽일 거야? 날 사랑하면서?" -와카비

"For Wakanda, without question! 와칸다를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오코예    

 

사실 그동안 마블을 덕질 하는 일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몹시 ‘길티플레저’인 면이 있었다. (길티플레저란 말 그대로 죄책감 드는 쾌락이라는 뜻으로 주로 약간의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순간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뜻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건강에 나쁠 것을 알면서도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일 등이 있다.) 내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삼 일을 오열하고도 <아이언맨> 1, 2, 3만은 절대 복습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시리즈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밥 먹듯이 눈요기용 스트립 댄서가 등장함은 물론이고 아이언맨의 파트너 페퍼 포츠를 그리는 데도 성 고정관념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남자주인공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며 안정을 바라는 모습, 잔소리 하는 모습, 남자주인공에게 구해지는 모습, 남자주인공의 약점이자 각성의 계기 등으로 페퍼를 소비하던 마블은 포츠에게 CEO 자리를 넘겨주는 것으로 캐릭터에게 진 그간의 빚을 한 번에 퉁 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히어로가 된 아이언맨이 수십 개의 아머를 불꽃놀이처럼 터뜨리는 장면의 짜릿함을 잊지 못했고, “애증의 마블!”을 염불처럼 외며 불편한 덕질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그랬던 나의 눈앞에 <캡틴 마블>이 등장했을 때 내가 얼마나 감동했으며,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꼈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이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어!’라는 마음이었다고 할까. 마블이 페미니즘에서 풍겨오는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부러 노골적인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자본주의는 원래 그런 것이다. 주인공 캐럴 댄버스는 남자만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던 시절 피나는 노력 끝에 공군 파일럿이 된 용기 있는 캐릭터다. 특히 댄버스가 크리 행성의 AI 통치자인 수프림 인텔리전스의 통제를 벗어나는 장면에서 밀쳐지고 쓰러진 어린 댄버스들과 지금의 댄버스의 모습이 차례대로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이것이 모든 여성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특히 계속해서 “감정적이지 마라”라며 힘을 통제하는 욘-로그의 존재는 기시감마저 든다. 욘로그는 댄버스를 크리 행성으로 데려온 사람인데, 댄버스를 훈련시키는 스승이자 팀의 리더로서 댄버스의 상사이기도 하다. 댄버스는 과거의 기억을 통째로 잃은 사람치고 충분히 의연한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욘-로그를 한 방에 보내버릴 때 댄버스의 대사는 평생 별걸 다 증명해가며 살아와야 했던 여성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I have nothing to prove to you.

내가 너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은 없어”  -캡틴 마블     


 사실 캡틴 마블 이야기를 꺼냈다면 블랙 위도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마블은 남성 히어로의 조력자로서의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 히어로를 그리는 데에도 영 형편없었다. 블랙 위도우는 항상 포스터에서 엉덩이와 가슴을 강조하며 ‘섹시 포즈’를 취해야만 했다. 영화는 그를 계속해서 다른 남성 캐릭터들과 묘한 성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소비했다. 제작사가 캐릭터를 취급하는 방식은 자연히 팬들이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고, 팬 커뮤니티에서도 성적 대상화되기 일쑤였다. 기자들은 남성 배우들에게는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이나 연기를 하며 어려웠던 점 등을 질문했지만 블랙위도우를 맡은 여성 배우에게만 ‘다이어트 비결’을 물었다. 블랙위도우는 이 모든 걸 묵묵히 버텨낸 끝에 질질 끌어오기만 하던 솔로 무비를 얻어냈다.

 그랬던 마블이 <캡틴 마블>을 만들더니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여성 히어로들의 'Assemble(집결)' 장면을 연출하다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작은 스파이더맨이 캡틴 마블에게 건틀렛을 넘겨주며 거대한 적들에 대해 걱정스러워하자 스칼렛위치, 발키리, 가모라 등 모든 여성 히어로들이 등장하며 간지 나는 대사를 날려준다.     


“No worries, she's got help 걱정 마, 그녀는 혼자가 아니니까” -스칼렛위치&오코예     


물론 가장 바람직한 미래는 이런 장면을 굳이 연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여성 히어로가 특별하지 않은 세상일 테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의 어딘가 좀 ‘구린’면도 이해한다. 마블이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들을 차별적으로 소비해놓고 이제 와서 페미니즘을 하는 척을 하느라 해당 장면을 연출한 것이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히어로들의 전투를 다른 히어로들과 어우러지게 연출하지 못하고 한 번에 몰아 처리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마블이 계속해서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비중 있게 등장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는 히어로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알라딘>은 “제목을 자스민으로 바꾸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스민 캐릭터를 완전히 새롭게 변주했다. 자스민은 자파의 편에 선 장군 하킴에게 정말 정당한 술탄이 누구인지를 설득해냄으로써 국왕인 아버지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디즈니는 'Speechless'라는 새로운 사운드트랙을 삽입하며 자스민의 비중을 늘렸고 캐릭터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알라딘> 하면 가장 먼저 ‘A whole new world'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Speechless'를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새로운 자스민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디즈니의 각성은 유독 반가운데, 디즈니야말로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섹시하고 아름다워 보일 것을 강요하는 대중문화는 아이들을 우울증, 섭식장애,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 등으로 몰아넣어 왔다. 특히 디즈니의 공주들은 전 세계 모든 여자아이들의 롤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거대하기까지 하다.

 특히 초기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모두 '비탄에 빠진 소녀(damsel-in-distress)' 모티프가 사용된 작품들로, 곤경에 빠진 여자주인공을 백마 탄 왕자님이 구해주는 틀을 가지고 있다. 약칭은 DID인 이 모티프는 위기에 빠진 약한 미혼 여성을 영웅이 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플롯을 말한다. 이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자각했는지 디즈니는 2세대 공주 상을 내놓았다. 알라딘의 자스민, 포카혼타스, 인어공주의 에리얼 등을 위시한 이 세대의 공주들은 호기심이 넘치고 넓은 세상을 갈망하며 용기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 바람직한 성격들이 모두 ‘왕자’ 혹은 ‘사랑’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치명적인 한계다. <알라딘> 원작의 자스민에게 주어진 최대의 자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다였다. 포카혼타스의 호기심과 모험심 또한 낯선 백인 남자 존 스미스를 향한 것에 그치고 만다. 내가 <블랙 팬서>를 보며 조국을 위해 망설임 없이 사랑을 버린 오코예에 통쾌해한 이유는 어쩌면 어린 시절 내내 내가 아리엘이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자신의 재능인 아름다운 목소리를 포기하는 그 캐릭터 말이다.  

 그랬던 디즈니도 다시 한번 바뀌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공주와 개구리>의 주인공 티아나가 최초로 ‘왕자님’이 아닌 꿈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만의 레스토랑 개업이라는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겨울왕국>은 공주와 왕자의 사랑이 아니라 엘사와 안나 간의 ‘자매애’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왕자를 빌런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동안의 디즈니의 사랑 타령의 안티테제를 보여줬다고도 평가된다. <모아나>는 <겨울왕국>에서 그나마 은은하게 남아있던 연애 이야기를 완전히 뺐다. 자신의 부족이 사는 모투누이 섬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떠난 모아나와 그를 돕는 반인반신 마우이의 관계는 친구나 동료에 가깝다.      

 그런데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여성 서사’ 열풍 와중에도 어떤 작품을 보면서 그게 ‘여성 서사’라는 인식을 해본 일이 없다. 여성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을 하고, 내가 말을 하고, 내가 행동을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낸 무수한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유령 취급을 당해왔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벡델 테스트’라는 게 고안됐을 정도다.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인가?”, “이 여성들끼리 한 번이라도 대화하는가?”, “그 대화에 남자 주인공과 관련 없는 주제가 있는가?”라는 세 개의 문항을 충족시키면 이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이 테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의 나의 기분을 기억한다. ‘이 당연한 걸 테스트해야 할 리가.’ 하지만 작년에 개봉한 한국영화(순제작비 30억 원 이상) 중 이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겨우 25.6%였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등장인물의 상황에 이입하여 울거나 화를 내고, 긴장하거나 안도하는 이유는 아무리 허구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현실에 기반을 둠으로써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는 “개연성이 없다”, “급전개다”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우주를 날아다니고 마법을 쓰는 판타지 장르라고 하더라도 제작자는 최선을 다해 ‘그럴듯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므로 영화가 그리는 세상의 반도 여성인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격과 생각, 꿈을 가진 여성들이 있으므로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들이 그러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계에 ‘여성 서사’가 늘어나는 광경을 보는 나의 감상은 어떤 ‘신선함’이라기보다는 ‘아,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군’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제 자리’가 너무나 낯설고 불편한 이들도 있었다.               



 최근에 어떤 친구의 발언을 전해 들은 일이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캡틴아메리카가 자신의 방패를 팔콘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그는 “할리우드 요즘 흑인 쿼터 채워야 되니까ㅋㅋㅋ”라고 농담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그의 친구들은 모두 같이 웃었단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조금 충격에 빠졌다. ‘흑인 쿼터’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의 정체는 둘째 치고라도 흑인 배우가 비중 있는 캐릭터를 맡게 되는 게 쿼터를 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그 동기 한 명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언제부턴가 인터넷 댓글 창에서 “PC 묻었다”라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표현을 처음 목격한 것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완성도가 만족스럽지 않자 최초의 여성 제다이인 주인공 ‘레이’와 중국계 배우가 연기한 저항군 캐릭터 ‘로즈’에 대해 쏟아진 반응 속에서였다. 제다이(Jedi)는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일종의 기사단 조직으로 은하계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스타워즈: 클론전쟁>에서 여성 제다이가 등장한 적이 있지만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 스쳐가는 수준이었고 특히 포스를 다룰 수 있는 제다이는 그동안 모두 남자였다. ‘PC충, 페미한테 먹힌 스타워즈 근황’, ‘pc충 페미XX들아 스타워즈 주연이 저X아 트롤러 새X가 됐는데 씨X’ 등등 검색 창을 조금만 둘러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충분했다. 나 또한 최근에 개봉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연출과 전개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팬으로서 여러 비판과 논쟁이 있겠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시리즈의 부진을 여성 제다이와 인종 다양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들은 스타워즈와 제다이의 ‘전통’을 자주 주장하지만 남자만 제다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스타워즈 시리즈 어디에도 언급된 적이 없다.

 비슷한 반응을 <캡틴 마블> 제작 소식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블의 첫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인 <캡틴 마블>은 개봉 전부터 ‘캡틴 메갈’이라는 조롱과 함께 평점 테러에 시달렸다. 네티즌 관람평에서는 ‘마블에도 페미(니즘) 묻었네’ 와 같은 발언을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개봉한 <캡틴 마블>이 세계 흥행 수익 1조 원을 돌파하며 호평 받자 기존의 유치하고 저열한 댓글들은 태도를 조금 바꾸기도 했다. 짐짓 점잖은 체하며 ‘페미(니즘)고 뭐고를 다 떠나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새로운 댓글들은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영화가 별로라서 정당하게 욕하는 것’이라는 논지를 가지고 있다. 이 평들에는 주로 ‘슈퍼파워를 얻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너무 강해서 밸런스가 무너진다.’와 같은 비판이 이어졌다. 영화가 여성을 진보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모든 비판을 면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많은 여성 히어로가 나와서 그렇지 않은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많이 흥하고, 또 많이 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판을 하기 전에 과연 이 잣대를 남성 히어로 영화에도 똑같이 들이밀어 왔는지, 또 들이밀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슈퍼맨은 슈퍼파워를 얻는 개연성 따위는 없다. 그는 그의 고향 행성 광물인 크립토나이트 수저를 물고 태어난 외계인이기 때문에 하늘도 날고 눈꺼풀로 총알도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스파이더맨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유전자 변이 거미에 물린 게 전부다. 다만 ‘운’이 히어로 탄생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영화도 노력을 한다. 주인공이 힘을 얻기 전에도 얼마나 정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능력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알려주는 식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약골 병사였을 시절에도 애국심과 끈기가 넘치는 청년이었음을 골목 싸움 장면을 통해 보여주며 “I can do this all day(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어)”라는 대사를 내세웠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캡틴 마블>은 캐럴 댄버스가 캡틴 마블이 되는 개연성을 넘치도록 보여줬다. “누군가 위험에 빠졌다면 내가 가겠다.”고 외치는 공군 조종사 캐럴은 물론이고 그가 어린 시절부터 용기 있고 모험심이 넘치는 소녀였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밸런스에 대한 부분은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히어로 영화는 언제나 더, 더 강한 빌런과 더, 더 강한 히어로를 만들어내는 장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도 이런 반응을 보며 내가 가장 절망스러웠던 점은, 이런 댓글을 다는 이들이 대부분 20대 남성, 다시 말해 나의 또래 남자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20대 남성의 보수화’는 꽤 유명한 현상이 되고 있다. 《시사IN》은 지난 4월 3부작 기획을 20대 남성을 분석하는 데 할애했다. 대대적인 설문조사를 통한 분석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20대 남성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자면 바로 ‘역차별’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여성 우대가 과하며, 남성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이와 동일한 인식이 영화 작품 볼 때도 작용하는 것이다. 이들이 왜 화를 내는지, 글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영화 산업에 ‘페미가 묻는 바람에’ 진취적이고 멋있는 여성 캐릭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 열풍에 편승하기 위해 일부러 남성 캐릭터를 밀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20대 여성의 절망은 시작된다.

 오늘날 여성들은 세상에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여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브래지어를 벗어 던진 어떤 연예인과 염색하지 않은 백발의 여성 장관까지,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터부를 깨고 막혀있던 직업과 분야에 도전하며 또 성공해내고 있다. 이건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다. 토목공학과를 전공하고 현장직을 준비하는 선배, 학사 장교 과정을 밟으며 ‘내가 나의 동기들이 처음 보는 여군이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하고 있다’던 친구, 그리고 중고생들을 만날 때는 일부러 절대 화장을 하지 않는다던 동료……. 멋있는 여성들은 스크린 안이 아니라 밖에 더 많다. 핵심은 영화들이 ‘멋진 여자’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멋진 여자들을 이제야 제대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나의 또래 남성들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당신의 친구, 애인, 어머니, 여동생, 누나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편견이 빚어낸 가상의 ‘여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내가 그 수많은 댓글과 평점 테러 현장들을 보면서 절망한 이유는 나의 존재가 나의 남성인 친구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 과정을 지켜보며 ‘저런 댓글’을 남기는 누군가가 나의 동기, 후배, 선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가장 마음 아프게 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나는 도대체 뭐였어?’ 이 참으로 개인적인 물음이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다소 거시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나의 우울의 핵심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여성이 얼마나 더 많은 고정관념을 깨부숴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줄 거야?’라는 아득함도 함께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확실하고, 또 강력한 희망이 있다. 바로 이 변화한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들을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보고 자란다는 사실이다. 변화의 바람을 타고 모든 영화산업이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내가 유독 마블과 디즈니의 변화에 가슴이 뛰는 것은 그런 이유다. 어린아이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막강한 영향을 미칠 매체라는 사실 말이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알라딘>을 보고 나온 나는 문득 엘사나 모아나는 작품 안에서 아무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통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새삼 신기해했다. 자스민과 알라딘이 결혼하는 결말을 보았을 때,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알라딘이 왕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 뒤로 얼마 후 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클립 영상들을 보고 있었다. 아빠의 실수로 가장 아끼는 가방을 지하철에 두고 내리게 된 나은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당황한 아빠는 나은이를 달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데, 이어지는 장면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은이의 엄마는 나은이를 달래면서 계속해서 “울지마. 너는 강하잖아.”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나는 울 때마다 어떤 위로를 들었더라? “예쁘지~ 울면 예쁜 얼굴 못생겨진다~ 뚝!” 아, 울 때마다 ‘예쁘지’를 들으며 자란 여자아이와 ‘너는 강하잖아’를 들으며 자란 여자아이는 얼마나 다를까! 다시 디즈니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이들이 1992년 버전 <알라딘>에서는 위기에 빠진 자스민이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리지널 <알라딘>에서 자스민은 자파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무희 복장을 한 채 알라딘이 요술 램프를 훔치는 동안 자파를 유혹해서 시선을 돌린다. (진심이야?)


  


“Jafar. I've never realized how incredibly handsome you are. 자파. 당신이 이렇게 잘 생겼는지 미처 몰랐네요." -자스민 1992     

“Try to lock me in this cage. I won't just let me down and die. 날 가두려고 해봐. 가만히 누워서 죽진 않을 테니까." -자스민 2019


 나는 카일 스티븐스의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거센 ‘스쿨 미투’ 움직임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이미 강해지고 있다.     

 이따금 정보를 찾기 위해 교내 익명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 접속할 때마다 나는 높은 확률로 절망에 빠진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여성도 그저 인간임을 보여줘도 아무도 우리 목소리는 듣지 않을 거야. 이렇게 계속 조롱할 거야. 나도 혼자 신상이 털려서 악플 세례를 받을지도 몰라. 세상이 좀 나아진다고 해도 아무도 우릴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럴 때 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멋진 연출과 함께 모든 여성 히어로들이 한 화면에 등장했을 때, 블랙 위도우는 거기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블랙 위도우는 여성이 조력자 이상이 되지 못하던 마블 세계 맨 앞에서 홀로 풍파를 견디며 여성 히어로의 자리를 뚫어낸 캐릭터이자 배우였다. 하지만 정작 마블이 여성 히어로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기 시작하는 순간에 그는 죽고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슬펐지만, 블랙위도우가 그 장면을 정말로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다시 절벽에 몸을 던졌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캡틴 마블> 개봉 이후, 캡틴 마블 역할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의 트위터가 다시 한번 이슈가 되었다.      

브리 라슨은 마블의 명예 회장 스탠 리의 죽음에 대해 SNS에 추모글을 남기며 불량한 포즈의 사진을 사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 역할을 하기로 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을 통해 그가 어떤 생각으로 <캡틴 마블> 촬영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른 여성인 그가 자신과 같은 옷을 입은 어린 여성과 눈높이를 맞춰 앉아있는 이 모습은 묘한 울림을 준다. 사실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경계는 애매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고 ‘배우는’ 위치보다 누군가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어른에 그리고 책임에도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원동력이 이 책임감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세상의 반을 먼지 취급하려는 강력한 무언가를 없애기 위해 눈앞의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 나보다 앞선 나의 자매들은 어린 딸들에게 자파를 유혹하는 자스민이 아닌 아그라바를 통치하길 원하는 자스민을 보여줄 것이다. 또 할로윈 날에 백설공주 드레스가 아니라 캡틴 마블 수트를 입혀줄 것이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제자와 조카들을 달래며 “너는 강해”라고 말해줄 것이다. 여성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됨과 야망을 품어도 됨을 보여줄 것이고, 더 높고 더 먼 곳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보고 들으며 자란 어린 여자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강한 여성이 되어 우리가 미처 부수지 못한 것들을 부수러 올 것이다. 그러니 당신과 나, 그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함께 나아가자.     



이해일(dlgodlf00@gmail.com)







참고자료

페기 오렌스타인, (김현정),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 에쎄, 2013.

“성평등 벡델테스트 25% 관문 통과한 2018년 한국 영화는?”, 한겨레, 2019.02.21.

“‘캡틴 마블’ 평점 테러한 이들, 왜 뿔이 났을까”, 노컷뉴스, 2019.03.12.

“‘캡틴 마블’, 2019년 전 세계 최고 흥행작... 수익 1조 돌파”, SBS, 2019.03.25.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시사IN》, 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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