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호> 편집위원 혜정
이미지 Marta Zgierska, Selfkiss I, from the 'Votive Figure' series, 2019
인스타그램 속 피드에 “평생 함께하고 싶은 짝을 만나 결혼합니다”와 같은 문장과 함께 결혼사진이 올라오는 일이 잦아졌다. 친구들(혹은 지인들)의 청첩장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결혼식장에 들락거린다. ‘결혼 적령기’에 가까워질수록 ‘결혼’은 낯설지 않은 대화 주제로, 오히려 익숙한 대화 주제로 소환되곤 한다. 여러 이야기가 오간다. 지금 교제하고 있는 애인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든지, 현재 애인과 결혼까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든지, 결혼을 위해 소개팅을 열심히 받고 있다든지, 언제쯤 결혼을 하고 싶다든지 등등 결혼을 필두로 한 대화는 끝없이 펼쳐진다. 청첩장을 주고받는 일명 ‘청첩장 모임’을 할 때도 결혼하는 이들에 대한 미혼 친구들의 질문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와 같은 것들이다. “(결혼할)때가 돼서”, “(조건이)뭐 하나 걸리지 않고 무난해서” 식의 답변을 꽤 많이 듣게 된다.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흔히들 결혼할 시기가 되었을 때 옆에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 그러니까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 결혼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열렬히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꿈꿨다. 아마 지금도 그러하다.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어떤 제도로의 진입은 일정 정도 이상의 용기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 제도로 편입하고자 하는 용기를 촉발하는 힘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열정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면 여러 위험 요소를 제쳐두고 굳이 제도 속으로 들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열렬히’, ‘열정적인’ 등으로 수식한 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위다. 쉽게 말해,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인지하고 또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함께하는 태도다.
사랑을, 또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두 다를 테다. 이 글은 모두가 사랑만으로 결혼을 결심하지 않는 이 시대에, 결혼이 삶 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고 느끼는 이가, 불안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결혼이라는 제도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 시작됐다. “왜 결혼에 사랑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와 같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과 결혼의 맞물림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와 『사랑은 왜 끝나나』, 게일 루빈의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존 가트맨의 『사랑의 과학』을 읽고 쓰였다. 특히 에바 일루즈의 논의를 열심히 따라갔다.[1]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 혹은 결혼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그래서 이 글을 읽고, 더 알고 싶다면 에바 일루즈의 수많은 저서를 탐독해보면 좋겠다.
사랑만으로 결혼하지 않는, 일종의 ‘거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있다. 결혼정보회사(이하 결정사)다. 결정사는 가입자에게 결혼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만남을 주선하는 회사다.[2] 성평등가족부가 지난 5월 공개한 ‘국내결혼중개업공시 현황’에 따르면, 2025년 4월 30일 기준 국내결혼을 주선하는 총 750개의 결정사가 존재한다. 잘 알려진 결정사 ‘듀오’의 2024년 매출은 454억, 순이익은 111억을 웃돈다. 매출액과 순이익 모두 최근 3년간 상승세다.[3] 네이버 데이터 랩에 따르면, 올해 10월의 ‘결정사’ 검색량은 5년 전 동월보다 3배 증가했다.[4]
[2] 네이버 국어사전
[3] 나이스디앤비
[4] 성별과 연령 모두 전체로 설정했을 때의 검색량
결혼정보회사는 일반사와 노블사[5], 대형과 소규모 등으로 구분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가입자는 가입비를 내고 사람을 소개받는다. 금액은 기간제(기간 안에 자유로운 만남)와 횟수제(정해진 횟수만큼 소개팅 진행)인지에 따라 구분되고, 결정사마다 천차만별이다. 만약 소개받은 사람과 결혼이 성사된다면 성혼 사례비라는 금액 역시 지불한다. 한 결정사 대표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성혼 사례비로 건당 최대 3,300만 원까지 받아봤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 시장에서는 통상 남성의 능력과 여성의 외모 및 나이가 교환되는 가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결혼을 재화 교환 관계로 설명하는 교환이론은 주로 남성의 소득과 여성의 외모가 교환된다고 본다. 소득이 높은 남성이 외모가 뛰어난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즉, 소득과 외모에 따른 이질혼이 나타나게 된다.[6] 어린 여성은 출산의 측면에서 ‘좋은’ 조건이 되며, 따라서 통상 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은 가입이 어렵다. 한 결정사 대표는 유튜브 채널에서 “여자 대학생은 가입되지만, 남자 대학생은 가입되지 않는다”라며 “남자 대학생을 원하는 여자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5] 전문직, 명문가, 고소득 등의 조건을 가진 이들만 가입할 수 있는 결정사
[6] 김용학, and 윤호영. 한국인구학. 3rd ed. Vol. 36, 2013.
보통의 결정사에서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육각형’이라는 납작한 판단 기준을 동원한다. 외모, 성격, 학력, 집안, 직업, 자산이라는 6개의 기준이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에서 결정사 커플매니저로 일하는 주인공 루시는 직업에 관해 묻는 질문에 “영안실이나 보험사에서 일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답한다. 의문을 품는 이에게 그녀는 “188cm, 168cm, 마른, 탄탄한, 뚱뚱한 체형 / 백인, 흑인, 아시아인 / 의사, 변호사, 금융권 / 연봉 1억, 3억, 5억 / 흡연자, 비흡연자”라는 사람 분류 기준을 읊는다.
바쁘고 또 바쁜 현대 사회에서 결정사의 시스템은 효율적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당장 앞에 데려놓을 것 같은 환상 역시 심어준다.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결혼해서 무사히 죽을 때까지 산다는 가정을 하면, 보통 한 사람과 70년을 함께 해야 한다. 평생을 살 각오로 하는 선택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지점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성비’[7] 좋게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에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루시는 “데이트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며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막대한 리스크와 괴로움이 따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람과의 만남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누구와, 어떻게, 어디서 만날지 등을 고민하고 후의 만남을 원한다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골라 건넬지 고심한다.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혹은 끊어내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거절을 당하기도, 포기하기도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과정을 통해 감정과 이성이 교차하는 여러 층을 쌓아간다. 그런데 결정사는, 즉 커플매니저는 이런 과정을 대신해 준다. 데이트 상대를 골라주고, 장소나 스타일링에 대한 조언을 얹고, 데이트에 대한 피드백을 전해준다. 고민이 사라진다.
결정사는 사람들의 번거로움, 다른 말로는 관계 전체에 걸친 고민의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감정을 나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피로함은 당연히 수반된다. 그러나 결정사는 이런 피곤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됨을 내세우며 가시화된 조건표를 내민다. 인간관계가 ‘교환’과 ‘거래’(조건의 맞교환)의 논리로 축소된다. 결정사는 인간을 한 인격이 아닌 데이터로 취급하며, 인간적 성숙 없는 비인격화의 일종의 흐름을 공고히 하고 있다.
[7] 가격은 ‘관계에 들이는 시간과 감정의 투자’, 성능은 ‘인간관계의 결과(배우자 매칭, 결혼 성사)’
“결혼은 비즈니스예요. 원래부터 그랬어요. 최초의 부부가 결혼했을 때부터. 거래 조건이 별로면 그만둬도 돼요.”
-루시-
하지만 결혼은 원래부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거래’의 한 형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고대부터 부르주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결혼이 주로 여성과 재산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보호하는 제도였다고 비판했다. 즉, 결혼은 계급과 재산, 상속 같은 경제적 이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결혼을 단순한 제도나 계약이 아닌 ‘선물 교환’의 가장 근원적인 형태로 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 사회의 근친상간 금기는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원시적인 부족(tribe) 간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이 금기를 통해 두 집단을 분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그러니까 서로 다른 두개의 친족)이 형성되었고, 여성은 그 구분을 표시하는 교환물이었다. 교환의 주체는 남성이었다. 다시 말해,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거래하고 수여하는 구조 위에 세워진 관계의 체계였다.
교환적 구조 위에서 결혼이 감정이나 낭만보다는 가족 간의 재산 균형과 사회적 지위를 맞추는 ‘공평한 거래’로 여겨진 역사도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이전의 대부분 사회에서는 결혼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재정 계획 중 하나로 간주했다. 사랑은 오히려 결혼 계획에 복잡함을 불러일으키는 ‘적’으로 여겨졌다. 근대 자본주의의 확장은 인간의 모든 관계를 ‘교환’과 ‘계산’의 원리로 조직했다. 노동이 상품이 되고, 사랑과 결혼 역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지위의 언어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 중산층 사이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로런스 스톤이 말한 ‘감성적 개인주의의 부상’으로 인해 결혼이 단순한 계약이 아닌 감정을 탐색하고 확인하는 사회적 프레임으로 변모한 것이다. 과거에는 구애가 가족의 승낙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공식 절차에 가까웠다. 이제 구애는 개인이 상대의 감정을 탐색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사회적 의례였던 구애의 틀 안에서 개인들은 서로의 감정을 시험하고 확신하는 문화적 기술을 습득했다. 이는 개인이 사회 제도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 즉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은 혈통 내부의 결혼이나 동족결혼의 규칙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루소의 『신엘로이즈』가 강조했듯, 사랑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는 감정의 자율성과 자유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낭만적 사랑은 결혼을 결정하는 새로운 도덕적 규범이 되었고, 감정의 문제는 곧 개인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사랑을 통해 결 혼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발현이 아니라 기존의 가족 질서와 사회적 권위에 맞서는 혁명이었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낭만적 사랑이 결혼의 중심 가치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부르주아들은 경제적 보상 없이 순수한 사랑만으로 결혼을 결정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이익을 계산했고, 이런 ‘장점’들이 곧 결혼의 조건이 되었다. 18세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비교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속성들을 전제로 했다. 결혼은 그런 조건들에 부합하는 상대를 선택하는 행위였기에 감정적 구애조차 전통적 교환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겉으로는 낭만과 감정이 강조되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조건에 크게 의존하는 거래였다.
결론적으로 결혼은 원래부터 단순한 감정 교류나 낭만적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다. 사회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거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근대의 개인주의적 감정문화가 등장하면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그 제도 속으로 새롭게 유입되었을 뿐이다. 애초부터 교환의 성격을 지닌 제도 속에서 낭만을 절대적 가치로 세우려 하니 결정사와 같은 문화에 내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자발성’, ‘무조건적임’ 등으로 이상화(비합리적인 감정 중심의 영역)된다. 낭만적 사랑은 일상의 단단한 질서 위로 피어오르는 균열처럼 개인에게 잠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랑이 단순한 조건이나 계산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불어넣는 특별한 힘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자본주의의 ‘상품’과 결합해 사회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불균형적으로 펼쳐진다. 예컨대, 데이트나 기념일의 소비가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여겨진다든지, 경제적 여유의 정도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즐기는 정도가 결정된다든지 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 가진 ‘유토피아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현실 사이의 모순 속에서 사랑과 결혼이 공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그 대상이 대부분 지리적·사회적 조건에 의해 자신과 가까운 계급 구성원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회 구조가 거주지와 직장 등의 맥락에서 계급 분리를 낳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계급의 사람─쉽게 만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사랑은 인간의 감정으로 인한 자율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낭만적인 감정은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 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계급 질서를 다시 굳히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사랑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복잡한 긴장이 공존한다.
마찬가지로 감정이라는 것 자체도 생리적 각성과 인지, 문화적 해석이 결합된 복합적 현상이다. 감정이 만들어지고 해석되는 과정은 뒤섞여 있는데, 사랑을 예시로 들어보자. 첫째는 신체 반응(심장이 빨리 뛰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등), 둘째는 그 반응을 ‘사랑’이나 ‘좋아한다’는 의미로 인지하는 마음의 과정, 그리고 셋째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규범이다.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낭만적 사랑은 이러한 감정의 문화적 관행 중 하나다. 단순히 개인적 경험을 넘어 경제와 정치 등 사회 전반 영역의 영향을 받는다.
결혼을 계약으로만 여기는 순간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계약은 이해타산을 전제한다. 주고받는 조건이 명확히 합의되어야 유지된다. 하지만 인간의 친밀한 관계, 특히 결혼은 거래가 아니라 신뢰와 감정의 교류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일례로,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에서 다루는 이성 간의 계약은 마치 인간관계가 명확하게 구획되고, 감정은 관리 가능한 계약 조항인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실제로 감정은 계약처럼 명확히 통제하거나 항목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법적 계약은 강제성과 구속력을 가지며 조건 불이행 시 제재가 뒤따른다. 반면 성적·감정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고 언제든 자유롭게 해체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가진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에 따르면 계약이라는 비유는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말해주지 못하며, 또 관계가 꾸려져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 모델도 아니다. 즉, 계약이라는 비유는 인간관계에 적용할 때 너무나 빈곤하고, 실제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식도 규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버나드 머스타인은 인간관계에서 ‘보상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이 병든 관계의 징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관계가 깨지기 전까지는 감정적으로 손익을 따지지 않는다. 보상을 주고받는 관계는 신뢰도가 낮은 관계의 특징이다. 반대로 깊이 신뢰하는 관계에서는 상대가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한다. 신뢰는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도 함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결혼은 이런 신뢰의 감정적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협상으로 지속되는 관계는 결국 피로를 남기지만, 감정으로 연결된 관계는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붙잡을 여지를 남긴다.
실제로 부부 관계의 행복이나 불행을 이해하고 관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감정(정서)’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감정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관계 심리학자 수잔 존슨으로, 정서중심 부부치료(EFT, Emotionally Focused Therapy)를 개발했다. 그는 부부 관계의 문제를 단순히 ‘협상 실패’ 등으로 보지 않았다. 갈등의 이면에는 타인과 의미 있게 연결되고 싶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에게 의존하고 싶지만, 거부당할까 두려워 숨기거나 공격하는 감정의 역동 속에서 관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존슨은 이를 인간 조건의 일부로 보았다. 의존은 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능이며, 효과적인 의존은 오히려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녀의 치료는 결혼을 감정의 공동체로 다시 복원시키려는 시도였다. 부부가 “최상의 보상을 위해 협상하라”는 조언 대신 서로가 “내 편”이라는 감정적 확신(언제든 도움을 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신뢰는 법적 계약이 보장하는 의무보다 훨씬 강력하다. 계약은 의심에서 출발하지만, 애착은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 생활의 실패와 이혼 사유로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것은 떨어져 지내는 생활의 증대, 친밀감 상실,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지 못한다는 느낌, 성생활을 둘러싼 갈등 및 라이프스타일과 가치를 보는 시각의 엄청난 차이 등이다. 자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술이나 담배 같은 중독 물질의 오용, 폭력 등은 이혼 사유로 훨씬 더 적게 거론되었다.[8]
[8] Gigy, and Kelly. “Reasons for Divorce: Perspectives of Divorcing Men and Women.” Journal of Divorce and Remarriage 18 (1–2): 169–88. doi:10.1300/J087v18n01_08. (1993): 173.
결국 결혼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단순한 낭만적 명제가 아니다. 사랑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감정적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계약이 서로의 약속을 묶는 형식이라면, 사랑은 그 약속을 유지하게 만드는 내적인 힘이다. 서로를 조건의 대상으로 보는 순간 관계는 흔들리지만, 서로를 신뢰의 대상으로 인정할 때 결혼은 살아 있는 관계로 남는다. 사랑이 결혼의 본질인 이유는, 사랑이 인간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 욕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한정된 지면 혹은 필자의 짧은 식견 등을 이유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 사랑이야말로 결혼을 시작하고 유지하게 하는 내적인 힘이라는 점에 지금쯤 독자 여러분이 고개를 끄덕일지, 갸우뚱할지 걱정된다. ‘현실’이라 여겨지는 사회경제적 조건 등을 무작정 버려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가지 않았기를, 혹여나 결정사 등을 이용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비난으로 느껴지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사랑과 결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모순을 인식하는 가운데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 이해와 헌신, 그리고 존중할 수 있다면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희망의 불씨로 가닿았길 바랄 뿐이다.
오늘날 ‘가성비’의 언어로 설명되는 사랑은 점점 짧고 가볍게 소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이제 감정이 아니라 선택의 기술이 되었고, 자유는 오히려 관계의 불안정성을 부추긴다.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은 만남을 상품화하고, 감정의 진정성과 헌신 대신 효율과 쾌락의 논리를 심어 놓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실패보다는 ‘비용 대비 손실’을 두려워하고, 감정의 상처보다는 ‘관계의 비효율’을 걱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효율의 언어는 결국 사랑이 지닌 인간적 깊이를 갉아먹는다.
사랑이란 타인의 고유성을 ‘소비’하지 않고 ‘존중’하려는 윤리적 행위일 것이다. 사랑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어야 한다. 불확실함과 불완전함에도 서로를 붙잡으며 견뎌 나가는 여정인 사랑과 결혼이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만 소비되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모든 이가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사랑하고, 끝까지 함께하고자 하는 단단한 용기를 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