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 편집위원 유경
캠퍼스에 부는 사회혁신 바람
우리 학교에 사회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책을 넘어 세상으로" 나가라는 부름이다. 총장 지속 기구로 고등교육혁신원이 2018년 초에 출범한 이래 캠퍼스에는 음악 콘서트에서 전공 수업, 창업 지원까지 다양한 "사회혁신" 사업이 진행 중이다. 2017년 말에 우리 학교는 SK 그룹의 한국고등교육재단과 협약을 맺어 사회적 인재 양성을 위해 100억을 배정하였다.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한양대와 이대 등 다른 대학에서도 학위 과정을 만들며 사회혁신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실로 사회혁신 열풍이다.
사회적 가치는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트렌드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가치에 대한 절대적 숭상이 낳은 결과에 대한 회의가 각종 환경 및 사회적 가치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유럽을 중심으로 영 재단(Young Foundation), 사회적 기업 네트워크 아쇼카(Ashoka), 아스펜 비영리 연구소(Aspen Institute)와 같이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는 민간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스탠퍼드 사회혁신 센터(Stanford Social Innovation Center)를 비롯한 연구 기구가 신설되었다. 전통적으로 사회 공헌으로 알려진 회사외에도 많은 기관들이 새롭게 사회적 가치 담론을 전파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급속도로 사회혁신 담론이 퍼져 현재 각종 소셜벤처, 비영리단체, 기업재단, 협동조합, 대학, 사회적 기업, 스타트업, 지자체, 사회복지재단, 종교재단이 '사회혁신' 아래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래서, 사회혁신이 뭐라고?
그렇다면 사회혁신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사회혁신이라면 기존의 사회변화 운동과 다를 것이 뭔가? "목표와 방법이 사회적인 것" 같은 사전적 정의는 본 개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혁신 담론은 현재 느슨하게 환경, 저출산, 인권, 개발, 교육 및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주체에 의해 사용된다. 혹자는 모든 것이 다 사회혁신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사회혁신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사회혁신은 최근에 도입된 개념이기 때문에 아직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사회혁신은 상당 부분 실리콘밸리와 컨설팅 문화를 직수입하여 사용 중이다. 여기까지 유독 많은 외래어와 외국어의 사용이 눈에 띄었다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런 실정을 반영하듯 사회 혁신 업계에서는 낯선 영어 표현이 상식처럼 통용된다 (조문영, 2018, p.316). 따라서 사회혁신 담론의 특징과 실제 예시 소개로 정의를 대신하겠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혁신"은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권력 구도를 재편하려 했던 "사회변혁"이나, 90년대에 정부에게 제도의 개선을 요구했던 "사회개혁"과 차별화되는 통치 합리성(governmentality)으로서 작동한다 (이승철과 조문영, 2018, p.302). 국가는 더 이상 타도되어야 할 대상도, 밖으로부터 제도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닌, 수평적인 네트워크 안에 함께 존재하는 협력 파트너로 인식된다. 사회변혁이 지식인이 주창한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 이론을, 사회개혁이 전문가의 특정 이슈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였다면, 사회혁신은 누구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큰 "임팩트"를 낳았는지로 평가받는다.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는 이들은 사회적 책임감과 기업가적 능동성을 가진 "체인지메이커"들이다. 체인지 메이커는 기존에 변화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사회변혁의 노동자나 민중, 또 사회개혁의 전문가 집단이나 시민과 다른 유형의 변혁가이다.
사회혁신은 빈부격차, 환경오염, 자원고갈, 고령화, 세대갈등과 같이 익숙한 사회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기존과 달리 사회혁신의 주체인 "체인지메이커"의 정형은 골드만삭스 투자 은행, 맥킨지 경영 컨설팅 회사, 그리고 스타트업 출신 개발자로 대표된다. 이들은 "임팩트"의 크기로 아이디어의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성과를 수치화하고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회적 가치는 경영학 지표처럼 투자수익률이 개선되고 효율성이 최적화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사회혁신 사례로는 개발도상국에 소액금융을 제공하는 키바(Kiva), 무너진 공교육의 구원자로 나선 티치포아메리카(Teach for America), 소비를 통한 기부 문화를 유행시킨 Toms(탐스) 등 단체들이 있다. 우리 학교 고등교육혁신원과 협력한 기관만 살펴봐도 기존의 시민 단체나 정부 기관보다는 카카오 임팩트 (기업 산하 비영리재단), MYSC (소셜벤처 인큐베이터), 드림랩 (비영리 스타트업)과 같은 새로운 변혁가들이 눈에 띈다.
고등교육혁신원 사업 소개
이제 우리 학교 고등교육혁신원 (아래 고교원)의 사업에 대해 알아보자. 고교원 사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대표 사업으로는 사회문제 해결 플랫폼 "워크스테이션"이 학생 주도 활동이 있다. 매 학기 Global Social Entrepreneurship (해외 현장학습), Public Value Learning (학회 지원), 사회혁신 Externship (기업 인턴), Social Innovation Network (인적 교류 플랫폼), 소셜벤처창업, Corporate Citizenship (기업 연계) 총 6개 사회혁신 부문에서 지원자를 모집한다. 선정된 팀은 활동비, 사무공간, 자문 및 기관 연계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활동 이후에는 "SHOW-OFF FESTA"와 "소셜임팩트 챔피언십" 대회에서 발표와 시상 기회를 얻는다.
두 번째로는 사회혁신 수업과 사회혁신가 인증제도가 있다. 신설된 사회혁신 과목에는 경험 학습, 전인 교육, 학생 참여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며, 일정 학점 이상 사회혁신 수업을 이수한 학생은 "사회혁신가" 인증을 받을 수 있다 (브레이크뉴스, 2019.6.14). 사회혁신 수업에는 운영조교, 장학금, 교수자 강의 개발비, 외부 전문가 특강료, 학생 활동비의 명목으로 수업 당 300만 원에서 680만 원까지 지원되는 만큼 상당히 많은 수업이 개설되거나 "사회혁신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수업 목록에는 기술, 경영, 체육, 예술 등 폭넓은 전공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로젝트나 현장 참여형으로 운영된다. 반면 기존에 "사회적"인 연구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수업은 소수인 편이다.
고등교육혁신원 현황
- 사회혁신 역량 수강인원 (교과목) 3,126명 (84과목)
- 워크스테이션 참여인원 (팀) 1,027명 (185팀)
- 외부협력기관 99개
- 참여교원 102명
- 학생발굴 프로젝트 420개
- 장학금 지급액 864,184,440원
- 외부 펀딩 현황 100개
- 사회혁신가 배출 8명
출처: 고교원 웹사이트
고교원은 평소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이 없던 학생에게도 "따뜻한" 인재가 되어보라고 제안한다. 고교원 통계에 따르면 교과목을 수강하거나 워크스테이션에 신청한 다수의 학생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보다 "흥미로워 보여서" 또는 "스펙"이 될 것 같아서 수강했다고 한다. 또한 인스타그램, 현수막, 포스터를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홍보하고 있어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한번 쯤 들어보게 되었을 것이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문제의식이 없어도 수업을 통해, 캠퍼스 벽에서 가볍게 사회적 가치에 대해 접하게 된 것은 긍정적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노출되어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면 생긴다면 말이다.
더불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적당한 판이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학생에게 이제 공식적인 기회가 생겼다. 취업과 학점 관리에 밀려 "사치"로 치부되었던 활동이 고교원에 의해"스펙"화되며 "소속감과 명분"을 주는 이력으로 탈바꿈하였다. 사회 공헌 활동도 공식 학교 기구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어엿한 "스펙"으로 인정받았기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셈이다. 자유로운 유예 기간이어야 할 대학에서도 취업난으로 팍팍한 대학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다른 "스펙 쌓기"보다 기왕이면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스펙"이 낫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이렇듯 고교원은 학내에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실천의 장을 열어주었다. 분명 학교가 지원하는 사업이 천편일률적 취업/창업 장려형 활동에서 다변화된 것은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혁신의 논리를 빌리자면,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좋은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비용을 고려해야한다. 학교에서 가장 잘하는 것, 또는 학교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을 해야 한다.
혁신 없는 사회혁신
워크스테이션에 선정된 팀들은 전체적으로 안전하고 고분고분한 "혁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인다. 많은 팀들이 이미 검증되었거나 현재 유행하는 방법을 큰 반성 없이 그대로 따라 한 듯 했다. 필요성이나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는 사안을 "문제"로 정의한 팀도 있었다. 사회혁신 워크샵에서 끊임없이 문제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무색하게 지엽적이거나 표면적인 문제 정의가 보였다.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 같아 아쉽다. 아래에는 고교원이 우수 사례로 선정한 몇 개의 팀 비평을 통해 고교원이 추구하는 사회혁신 방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빈곤 퇴치 분야에서 활약하는 화이트 불스(White Bulls)팀은 난방 소외 가구를 위해 난방텐트를 개발하여 우수 팀으로 선정되었다. 최근에는 외부 투자 유치에도 성공하며 대표적인 사회혁신 사례로 꼽힌다. 집에 도시가스 공급이 안 되는 독거노인을 위해 실내용 보온 텐트를 만들어 난방비 절감을 돕는다는 계획이다. 의도는 훈훈하고 사업 실행도 성공적이었으나, 해당 사업이 "사회혁신"의 대표 사례로 소개되는 현상은 우려된다. 난방 소외의 해결책은 따뜻한 텐트가 아니다. 한파에도 난방 없이 실내에서 텐트를 치고 자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텐트가 아니라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의 연탄 나눔 봉사는 매해 겨울 이어져 왔다. 달리 말하면, 매해 난방 소외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듬해 겨울에도 예년과 같이 이들은 춥고 불편한 겨울을 보낼 것이다. 빈곤과 노인 소외의 구조적 요인을 건드리지 않고 표면적인 해결책만 찾은 탓이다. 애초에 왜 난방 소외가 이루어졌는지 묻지 않고 따뜻한 난방 텐트만 보급한다면 문제는 지속한다.
"실천"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왜"를 묻지 않는 상황에서 문제의 여건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미디어 봉사 동아리 "리듬오브호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알려 후원을 독려한다. 앞서 소개한 탐스(Toms), 크라우드펀딩으로 유명한 네이버의 굿네이버스 외에도 모금 방법 개선 및 물품 기부를 통해 취약 계층 돕기는 대표적인 사회 혁신 방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후원에만 의존하는 빈곤 퇴치 모델은 문제적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송파구 세 모녀의 안타까운 죽음이 5년이나 지난 지금, "사회적인" 것의 범람 속에 성북구 네 모녀의 "사회적 타살"이 또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프레시안, 2019)? 세 모녀의 상황이 해피빈에 알려져 월세와 공과금을 "크라우드 펀딩"할 수 있었더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인가? 사회적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재난" 렌즈로 볼 때 정작 문제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이고 사회적 요인은 가려진다. 증여 위주의 사회 변화 운동은 해결의 책임을 다른 시민의 "따뜻한 마음"에서 찾는다. 하지만 한 시민이 다른 시민의 선의나 자비에 기대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 아닐까.
또 다른 인기 분야는 환경보호이다. 업사이클은 쓰임이 다 한 재료를 활용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사업으로, 폐트럭 천으로 가방을 만든 프라이탁(Freitag)을 시작으로 큰 유행을 끌었다. 워크스테이션에도 버려진 현수막 천으로 파우치 만들기, 우유 팩 등으로 지갑 만들기 사업이 진행 중이다. 무절제한 소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면서도 새로운 소비할 핑계가 생기다니, 실로 창조 경제스러운 혁신이다. 하지만 다시 환경 보호란 목적으로 돌아가 보자. 업사이클링 제품 생산에도 새로운 자원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또한 제품의 디자인이나 사용성이 기성품보다 떨어져 소비자가 쓰지 않는다면 이는 새로운 쓰레기가 되고 만다 (조선일보, 2019. 09. 24). 환경 파괴의 주범인 "소비"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모순적이다.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텀블러를 구매하기보다, 집에 있는 머그컵을 한 번이라도 더 쓰자. 애초에 정말 필요한 물품만 소비하는 것이 쓰레기를 많이 배출한 뒤에 재처리를 고민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우리에겐 소비주의 문화를 반려하고 과도한 포장이나 폐기가 어려운 물질 사용을 줄이는 혁신이 더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교육분야에서도 YISSIL, 멘토링봉사단, 공강혁신, 우년TV 등 많은 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해 방학 때 캠프를 열고, 진로 코칭을 해주거나 대학 생활의 경험을 영상으로 나눈다. 행사 사진과 설문조사를 보면 참가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위 사업들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만들었다고 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 현재 부족한 것이 더 많은 사교육이나 진로 코치인가? 이미 많은 대학 동아리들은 영리목적으로 중고등학생 대상 동/하계 캠프를 열어왔다. 각종 언론사, 대학교, 학원에서 운영하는 행사와도 내용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문제 삼거나, 위 활동이 참가 학생들에게 효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육 불평등의 문제는 간택 받은 소수에게 동아줄을 던져주어 교육 격차를 극복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아니라, 격차가 왜 생겼는지 고민하고 이를 평평하게 만들어야 해결된다. 현재 입시 제도에서 몇 명의 학생이 더 나은 점수를 받는다고 교육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교육 혁신은 왜 사교육이나 자사고의 지원 없이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없는지, 왜 한국의 청소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능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지, 한국 교육에 가장 문제가 되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회혁신의 한계
위에 지적한 사업들의 문제는 비단 학생 개인만의 탓은 아니다. 고교원의 제도와 더불어 사회혁신 자체의 특성상 한계가 드러난 것에 가깝다. 사회혁신에서 환영받는 문제들은 "심각하고, 임팩트가 있고, 트렌드에 맞아야"하고, 대도시와 지방의 교육 격차, 여성의 안전 문제처럼 "쉽게 어필이 안 되거나 올드한" 사회문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는 외면된다 (조문영, 2018, p.209-364). 실제로 워크스테이션 팀은 AI 스피커, 드론, VR, 온라인 지도와 같은 "트렌디"한 4차 산업 혁명스러운 사업들로 채워졌다. 총 2,000만 원을 상금으로 수여 하는 "소셜 임팩트 챔피언십" 경연대회는 사업 실적을 화폐 단위로 환산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양적 성과가 잘 나올 수 있는 사업이 선호된다. 장용석 고교원 부원장이 한 인터뷰에서 "실패해도 괜찮다. 여긴 대학이고, 대학은 실험하고 도전하는 곳이니까. 대학은 학생들의 소소한 사회혁신 아이디어에 물을 주는 작업을 하면 된다… 결과를 요구하거나 눈에 띄는 업적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문하고 해결책을 생각하고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과정 자체가 학생들을 성장시킬 것이다."라고 한 것이 무색하게 고교원 정책은 화려한 아이디어와 양적 성과 도출을 장려했다 (조선일보 2019.07.09).
또한 고교원 제도는 빠른 해결과 빠른 성과 달성이 가능한 문제 찾기를 유도한다. 학생들은 한 학기 안에 학업과 병행하며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해서 실적을 내야 한다. 사회 문제의 탐구의 범위는 임의으로 좁혀지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구조적 문제는 뒤로 밀린다.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확실하게 많은 사람들을 참석시킬 수 있는 에듀캠프 같은 행사가 선호된다. 물론 1년 안에 풀 수 있는 3단계 사회문제 해결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 대개 그렇듯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바로 성과 위주 사업에 뛰어들기보다 차근차근 사회를 보는 눈과 문제의식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 영상에 예쁘게 담기는 사업이나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사업 위주로 좋은 평가가 주어진다면, 외면되는 사회 문제가 있지 않을까?
고교원 제도와 더불어 사회혁신 자체의 한계도 있다. 첫 번째는 기술적 합리성과 효율성에 대한 오만이다. 경영 컨설턴트, 기업가, 과학자들은 "효율적"으로 "전문성"을 이용해서 환경, 농업 생산성, 역병의 문제를 싸우고 있는 동안 오직 소수의 사회과학자들이 사회혁신의 테이블에 초대된다. 체인지 메이커들은 "냉정한 이타주의자" (effective altruists)로, 사회 공헌 사업의 임팩트를 극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 정의, 분배, 윤리와 같이 측정할 수 없고 도식안에 재단될 수 없는 영역은 제거되고, 더 효율적인 재질의 난방 텐트로 얼마의 난방비 절감 효과가 있을지 "임팩트" 향상에 열을 올린다. 효율성과 숫자를 덮어 놓고 믿는 체인지 메이커들에겐 사회과학에서 익히 강조되어온 오류 가능성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조심성이 없다 (Kavita, 2011). 인간과 사회의 유기성, 각 사회의 문화 및 전통, 문제의 복합성은 결과 중심적, 효율성 강조, 기술 중심적인 (metrics-driven, efficiency-seeking, technology-focused) 사회 변화 기제에서 찾아볼 수 없다 . 기술적 합리성과 경영 효율성이 결국에 비정규직 문제, 환경 문제, 금융 위기의 원인이 되었음을 고려한다면 내재적 모순은 극명하다.
두 번째, 사회혁신은 매력적인 동반 성장의 서사으로 사회문제를 탈정치화한다. 이기심이 경제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얘기했던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서 한층 더 나가 사회혁신가들은 이기적인 것이 곧 이타적이라고 말한다. 예전의 사회 변혁가들이나 개혁가들이 얼굴을 붉히며 변화를 위해 싸웠다면, 혁신가들은 세상이 제로썸(zero-sum)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손을 내민다. 나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이 될 수 있으니, 갈등은 불필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윈-윈(win-win)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회공헌 책임과 주주 가치 극대화가 대립하는 경우 전자가 앞설 수 있을까? 예를 들어, SK 행복 나눔재단에서 환경 규제에 찬성하거나, 카카오 임팩트에서 과점 시장인 메신저 시장을 쪼개자는 정책 제안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성의 사회 참여는 독려하면서 육아휴직이나 수당은 주지 않는 기관, 매해 사랑의 김장 나눔을 진행하면서 구조조정으로 질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는 은행, 환경 보호 기금을 출자하며 삼림을 파괴하는 산업단지 개발을 하는 기업 등 사회 문제의 원인을 만들며 동시에 해결자를 자처하는 주체들은 본인의 이익을 크게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무해한" 사회혁신만을 허용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를 야기하는 구조에 기대여 이익을 얻고 있는 집단은, 본인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가치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분배 없는 성장의 시대에 문제는 동반 성장이 아니다. 파이를 분배하는 문제에서 파이 자체를 키우는 치트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사회혁신이란
위와 같이 한계를 인지한 상황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사회적 인재란 어떤 인재를 일컫나? 고교원의 표어인 "책을 넘어 세상으로"를 비틀자면, 책을 잘 넘어 세상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들이 준비되지 않은 채 세상으로 밀려난다면 새롭고 고유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먼저 기본 역량이 갖춰져야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냉철한 사고와 따뜻한 공감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는 새로운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를 초월한 인재상에 가깝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회혁신법은, 대학의 본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당장의 효용과 이해관계로부터 학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버드대 28대 총장 파우스트 교수는 대학이 당장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미래에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인재를 육성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Faust, 2010). 학문은 오로지 자유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고교원이 화려한 영상, 양적 결과물 등 단기적으로 사회혁신 사업에서 쓸모를 바란다면 학생들은 본인이 정말 관심 있는 사회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실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졸업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효용을 입증하고 단기적인 성과에 휘둘릴 텐데, 적어도 대학에서는 자유로운 탐구를 느긋하게 기다려줘야 하지 않을까? 당장은 유의미한 진전이 보이지 않더라도 소득 양극화, 불평등, 지구온난화와 같이 복잡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과 씨름해야만 언젠가는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마음껏 나이브하고 공상적인 상상을 할 수 있는 때는 지금이기 때문에, "실용"과 "합리"에 묶이기 전에 철이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진정한 혁신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더불어, 기초 학문과 인문학적 탐구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과정에 취업/창업 관련 교육이나 실천적이고 응용적인 수업이 아닌 기초 학문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왔다. 그중에서도 당장 "효용"이나 "쓸모"를 입증할 수 없었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회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 "왜"를 묻다 보면 정치사상이나 역사, 철학의 탐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목적에 대한 고찰 없이는 피상적이거나 방향성을 잃은 해결책만이 나올 것이다. 가치 판단에 대한 성찰 없이 어떤 "혁신"이 나올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치 독일에서 외쳤던 효율성의 극한은 우생학으로 발현되었고, 루소의 "강제된 자유"는 침공을 통한 민주주의 이식을 정당화 했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 없이 인간 사회에 필요한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강사법 실시로 해고된 강사, 고질적인 수업 부족 문제, 그리고 강사수 대비 높은 학생 비율로 개인 지도의 부족으로 등한시되는 교육권의 문제는 우려스럽다. 기초체력이 없이 어떻게 장기적인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가성비" 좋은 대형강의나 온라인 강의가 아닌, 학생들의 비평적 사고 능력과 표현 방법을 꼼꼼히 지도할 수 있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을 늘리고, 교원대학생 비율을 늘려 학부생들의 교육권에 신경을 써야 한다. 매해 수강신청 기간마다 "들을 만한 수업"이 없다는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여 수업 수를 늘리고, 수업 품질을 높이지 않는다면 혁신이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인재 육성은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당장 취업률이나 양적 성과를 내기 위해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이 미뤄진다면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오늘의 사회 공헌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내일의 미래를 위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조문영. (2018). 청년자본의 유통과 밀레니얼 세대–하기: 젊은 소셜벤처 창업자들에 관한 문화기술지. 한국문화인류학, 51(3), 316
- 이승철, & 조문영. (2018). 한국 ‘사회혁신’의 지형도: 새로운 통치합리성과 거버넌스 공간의 등장. 경제와사회, 302.
-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사회혁신 역량교과 강의 ‘참신한 실험’ 눈길끌어", 브레이크뉴스, 2019.6.14
- "송파 세 모녀, 성북 네 모녀, 죽음이 계속되는 이유", 프레시안, 2019. 11. 11
- "소재 수급 어렵고, 만들어도 팔 데 없고… 위태로운 국내 업사이클 사업", "조선일보", 2019. 09. 24
- 조문영. "청년자본의 유통과 밀레니얼 세대–하기: 젊은 소셜벤처 창업자들에 관한 문화기술지." 한국문화인류학 51.3 (2018): 309-364.
- "대학은 사회혁신의 실험장… 도전할 수 있게 '판' 깔아줘야" (조선일보 2019.07.09)
- "The Role of the University in a Changing World", DREW GILPIN FAUST, 07. 30. 2010 https://www.harvard.edu/president/speech/2010/role-university-changing-world
- "Philanthrocapitalism Is Not Social Change Philanthropy", Dec. 15, 2011, Kavita Ramdas, 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