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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Apr 06. 2020

<123호> 누가 내 파이를 가져갔나

수습편집위원 차지

우리의 소원은 흰쌀밥에 고깃국도, 민주화도, 통일도 아닌 공정이 된 듯하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정유라의 입시 부정에서 시작했고, 최근 정부의 지지율이 큰 폭으로 하락한 것도 조국 사태의 영향이 컸다. 바야흐로 공정성이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것일까. 


대학 입시의 기회균등전형부터 취업 시장에서의 성별 할당제와 학벌 블라인드, 지방인재 전형까지.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의 각종 적극적 우대 조치는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최근 공정성 담론이 부상함에 따라 이러한 일련의 “배려”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 역시 활발해지고 있다. 

[사진 설명] 하얀 바탕에 검은 선으로만 묘사된 파이 하나가 있다. 조각이 아닌 통으로 되어 있는 파이다.

    적극적 우대 조치를 논하는 일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특히 사회에서의 첫 발을 최대한 유리한 고지에서 시작하고자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차가운 머리로 공정을 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우리들은 공정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설탕 발린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모두가 원하는 자리는 정해져 있고 누구에게나 나름의 사연은 있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우리 중 누군가의 몫은 줄어들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토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인만큼 생산적인 논의를 의도적으로 해치는 논리도 팽배하다. 모든 결론을 노력과 실력으로 귀결시켜 엄연히 존재하는 이해관계와 불평등을 지우거나, 실존하는 격차를 모두 어쩔 수 없는 경제의 섭리라 한탄하며 논쟁을 손쉽게 매듭 지으려는 경향 등이 그 예다. 이 글에선 할당제를 논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논리 몇 가지를 다룰 것이다.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는 할당제를 포함한 소수자 우대 정책을 뜻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국내에선 주로 미국의 정책을 일컫는 단어다. 글에선 큰 방향성을 다룰 때엔 적극적 우대 조치라 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할 땐 정책의 이름을 직접 지칭하도록 하겠다.




다 필요 없고 실력대로: 능력주의의 논리

악의적인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은 적다. 할당제에 치를 떠는 사람일지라도 점수 조작과 의도적인 배제에 박수 치는 경우는 드물 테다. 이렇게 평가 주체가 행하는 명백한 차별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2013년~2016년 성별에 따라 커트라인을 다르게 적용해 여성 지원자를 탈락시킨 신한카드, 국민은행, 하나은행의 사례[1], 2016

년 서울메트로가 여성 지원자의 면접 점수를 일괄 조정해 모두 탈락시킨 사례[2], 2016년 하나은행이 SKY 대학 출신을 뽑기 위해 면접 점수를 조작했던 사례[3] 등이 그 예다. 일련의 점수 조작 사건을 보며 평가기관의 계획적인 악의에 분노할 순 있겠지만 결국 가시적인 수치를 조작한 사건은 마찬가지로 가시적으로 해결 가능하다. 임직원 자녀를 우선 합격시킨 신한은행 조용병 회장이 집행유예라도 선고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평가자가 지원자들을 “실력대로” 줄 세우면 다 되는 것일까.

 

“실력대로”의 논리를 파헤치려면 우선 능력주의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능력주의는 경제적, 정치적 재화를 능력에 따라 개인에게 분배하는 체제다. 능력주의는 1958년에서야 정의된 단어이지만, 그 개념은 동서를 막론하고 수 세기 동안 널리 쓰여 왔다. 

    좌파 진영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할 때 자주 차용하는 주장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영미권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적 환상이 현대에 이르러 능력주의의 탈을 썼다는 것이다. 그들은 능력주의가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난을 자신의 능력 부족 탓으로만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이면에 수구 세력이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진보의 지적 담론에서 이 ‘신자유주의적 환상’은 세상 모든 악의 근원으로, 모든 차별과 보수성을 신자유주의를 탓하지 않고 설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우리 세계관에 뿌리내린 능력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굳이 신자유주의를 들먹이지 않아도 능력주의, 특히 표준화된 시험을 통한 능력주의에 대한 깊은 믿음은 이미 우리 사고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능력주의는 지극히 현대적 인사 원칙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동북아시아적 능력주의의 시초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선 이미 7세기에 과거제가 정착되었고, 한반도에선 10세기 고려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갑오개혁 전까지 고위 관료 등용 제도로 쓰였다. 해방 이후엔 엘리트 진입 관문으로써의 과거의 전통적 역할을 일명 3대 고시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노비를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열려 있던 기회라도 실질적으로 양반 남성만이 과거제를 준비할만한 자원이 있었다고 비판할 순 있겠지만, 동시대의 다른 문화권에 비하면 과거제는 공채의 시초라 할만하다. 19세기 이후에야 지금의 고시류의 인재 선발 방식이 상용화된 서구와 일본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비단 시험만인가? 2000년대 초반에 들어 시험 위주의 일괄적 평가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시험 점수뿐만 아니라 외부 활동 경력, 자기소개서, 추천서 등으로 다각화된 평가 전형이 등장했다. 로스쿨과 대입의 수시 등이 그 예일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우월한 평가 전략이냐는 분명 논쟁의 영역이지만, 논란의 양측 모두가 자신이 지지하는 방식이 더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일하다. 

   

모든 평가 전형을 제비뽑기로 전환하지 않는 이상 능력주의를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든 체에 걸러져야 한다. 문제는 능력주의의 대전제, 즉 동일한 출발선의 개념을 얼마나 좁게 혹은 넓게 보느냐다. 혹자는 경쟁에 뛰어들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만 있다면 공정하다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흔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말한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에 대한 맹신은 운명론과 구별하기 어렵다. 부모의 경제력, 인종, 성별 등으로 생기는 격차는 개개인이 감내해야 할 ‘팔자’다. 수험표를 뽑을 기회만 보장되어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편견 없는 전능한 평가자가 지원자들을 실력대로 줄을 세운다 하더라도 특정한 사회적 자원—그게 부모의 재산이든, 성별이든, 인종이든—을 타고난 지원자들이 결국 합격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자는 언제나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그들은 소수다. 계층이 인생 전반의 행방을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이나 소수인종을 향한 비공식적이고 은밀하며, 때로는 의도치 않은 배제는 알아채기 어렵다. 설사 알아챈다 해도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없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차별이 발생하는지 규정하기 곤란하다. 대부분 소수의 악인이 아니라 조직의 구조적 결함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선배 집단이 어떻게 주류가 계속 주류로 남아 있을 수 있게 기능하는지 설명하겠다.


선배 집단은 정보 제공자와 롤모델로써 기능한다. 자신과 비슷한 선례의 존재 여부가 주류, 비주류 집단 간의 위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나 선배 집단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수혜가 아니다. 성별, 학교, 인종, 심지어 국적까지 배제적인 관계망의 구심점은 여럿 있다. 

    선배 집단이 주류와 비주류 간의 위계를 만드는 기제를 정보 인프라의 측면에서 먼저 살펴보자. 의무교육 과정에서 전문적인 직업영역으로 진입할수록 지망자 간의 정보 비대칭은 심해진다. 평가 기관으로부터의 공식 지침이나 인터넷 검색과 같은 공개적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을수록 선배 집단의 유무가 당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문제는 이러한 선배 집단에 대한 접근성이 다니는 학교, 지역, 성별 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수능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지역과 계층에 따른 유불리는 존재할지언정 시험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50만 가까운 인구가 보는 시험인 만큼 국가에서 발 벗고 나서서 인터넷에 문제집과 해설을 게시하고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하여 정보의 격차를 완화한다. 수십만 명이 준비하는 몇몇 공무원 시험 또한 인터넷에서 발품만 조금 팔면 그만이다. 

    그러나 영역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공식적인”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같은 공개채용 시험이라 하더라도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경우 대학 간 격차가 상당하다. 학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정보, 학교 구성원들끼리 구성하는 스터디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고시반까지 학교별로 배타적으로 공유되는 정보 인프라가 중요해진다. 최근 공인회계사 시험 문제 유출 사건 역시 한 대학의 시험 준비반을 통한 것이었다. 그나마 기출문제와 학원이라도 존재하는 분야는 나은 형편이다. 같은 전공 안에서도 세부 분야가 수십 가지로 갈리는 학계에서는 선배 집단의 존재가 절대적이다. 공개채용 과정은커녕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부터 몇 없는 전문 분야에 진출하고 싶다면 앞서 해당 분야에 진출한 교수님과 선배들로부터 알음알음 정보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해외 대학원을 준비하는 나는 선배로부터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연구실에 다니는 한국인에게 연락하여 조언을 구하라는 조언을 받았을 정도이다. 이조차도 나보다 먼저 해당 연구실로 유학을 간 한국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원인이 내적 친밀감이든, 언어적 장벽이든,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당장 누가 누구와 관계를 맺는지 통제할 방법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해결책은 소수자 집단의 사회적 관계망을 통한 정보 인프라를 주류 집단의 그것만큼 잘 갖춰지도록 보장하는 것이고, 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선배 집단을 만듦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정보 비대칭이 문제라면 할당제 대신 공개적인 정보망을 확충하면 되지 않겠냐 반문할 수 있다. 고급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하면 굳이 할당제와 같은 인위적인 조치를 택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먼저 정부에서 주도한 대개의 정보 공유 정책은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2016년, 정부는 사설 입시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자 ‘어디가’라는 입시 정보 포탈을 만들었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시계의 현실을 바꿔 보기 위한 이 야심 찬 프로젝트의 시스템 구축에만 58억 원, 매년 운영비로 12억 원이 들었지만 학생과 교사 양쪽에서 외면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4]. 사교육 업체는 물론, 교사들의 민간단체인 전국진학지도협의회에게조차 밀리는 정보력 탓이었다. 입시라는 매우 한정적이고 공개적인 분야에 대한 정보 공개 시도도 물거품으로 돌아 간 상황에서 훨씬 더 복잡하고 예외적인 직업 시장에 대한 정보를 총집하려는 시도에 승산은 없어 보인다.




선배 집단의 중요성은 보다 심리적인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어느 한 집단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환경은 소수자가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흔히 백인, 동양인 외의 인종과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할 때 인용되는 근거가 이공계 직업군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수학에 재능도, 흥미도 덜하다든지, 흑인은 학문보다 신체적 활동에 적합하다든지 그 이론도 여럿이다. 이 현상의 원인은 미국에서도 널리 연구되었는데, 매번 멘토와 네트워킹의 부재[5]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1년부터 4년 간 진행된 실험[6]에서 공학을 전공하는 150명의 여성 신입생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본인과 동일한 분야를 전공하는 여성 멘토, 남성 멘토를 배정받거나 아무 멘토도 배정받지 못했다. 멘토와 학생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학업과 진로에 관련된 고민을 나눴다. 1년 후 그들의 성과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다. 여성 멘토를 배정받은 그룹에는 자퇴자가 전혀 없었던 반면, 멘토를 배정받지 못한 그룹은 11 퍼센트, 남성 멘토를 배정받은 그룹은 18 퍼센트의 자퇴율을 보였다. 여성 멘토를 배정받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무관하게 전과를 하거나 전공과 무관한 진로를 추구하겠다는 의사를 더 많이 밝혔다. 남성 멘토는 상담 능력에 있어서 여성 멘토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흥미롭게도 남성 멘토의 지도를 받은 그룹은 아예 멘토링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성과에 대한 불안감이 오히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동성 간의 감정적 유대가 더 짙은 탓일까 의심했지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실제로 멘토들에게 학생들과 한 대화를 모두 기록하게끔 했는데 대화 내용은 둘의 성별이 일치하든 불일치하든 비슷했다. 또한 설문 결과 학생들은 여성 멘토나 남성 멘토에게서 모두 비슷한 수준에 친근감을 느꼈다. 세 그룹 간의 격차는 여성 멘토의 유능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지망하는 직업군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였다.

    성인기 이후의 진로에 인적 네트워크와 그에 따른 정보력이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실력은 무결한 잣대가 아니다. 기존의 종사자들 내 수적 비율에 과감히 손대지 않는 이상 순전히 실력대로 지원자를 선별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주류 집단이 여전히 주류인 채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노력이 보상받는 사회: 노력의 논리

능력주의가 할당제의 정석적인 반대 이유라면, 노력의 논리는 보다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반발심리라 할 수 있다. 과실을 얻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고달픈 인내의 기간을 누군가는 면제받는다는 상상만큼 참을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물론 노력 담론이 할당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이 ‘노오력’이라 조롱 당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노력은 양쪽 진영에서 가장 쉽게 꺼내 드는 근거다 


탈북민이란 이유로 쉽게 명문대에 입학했다며 책망하는 모습이다.


[사진 설명] 두 사람의 카카오톡 채팅 내용이다. 

(사진설명 시작. A: 저기요 대화 다 읽어 왔는데 톡방 보면서 B: 네? A: 그 쪽 탈북자니 새터민이니 어쩌고 하는 전형으로 내신도 수능도 국숭세단 잡대들도 못갈 수준으로 고려대 왔으면 입 좀 닫고 사시면 안 될까요 막말로 그 쪽 입 열 때마다 채팅창 싸해지는 거 모르세요? B: 그게 무슨 소리죠.. 물론 제가 비교적 낮은 점수로 입학한 것도 맞고 늘 감새해야 할 일도 맞는데 대뜸 갑자기 11챗 걸어서 이러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A: 꼴랑 북에서 넘어온 걸로 돈 받고 집 받고 대학도 좆으로 와서 탈북썰이나 풀어대는 개돼지가 너무한 건 아니고요? B: 미쳤나 이봐요 북에서 넘어 오다가 다친 사람부터 다시 끌려가서 생사도 모르는 일행도 있는데 말을 너무 가벼이 하시는 것 같고 저한테 화풀이하는 것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요 A: 됐고 북에서 님 아비가 죽든 어미가 못 넘어오든 제 알 바 아니고요 고파스 톡 총대 매고 제가 얘기하는 거에요 여기 사람들 아무도 니가 고려대인 거 인정 안 하고 내신 3따리로 기어온 벌레 취급 할걸요ㅋㅋ 알아 들으시고 눈치 좀 키우세요 학과에서 탈북민이라 꼭 밝히시고 ㅃ  )




소수자가 노력을 더/덜 했기에 제도가 타당/부당하다는 주장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이러한 사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로 노력은 지극히 모호한 개념이다. 평가 기관이 볼 수 있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와 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지원자의 유능함뿐이다. 지원자 개인은 합격을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며 얼마든지 뿌듯해 할 수 있지만 사회적 층위에서 적극적 우대 조치를 논할 때에는 노력이 지극히 주관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력이란 단어의 추상성은 제쳐 두더라도, 노력은 일개 개인의 경험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 타이머로 순수 공부 시간 15시간을 채우는 일이 노력이라면 다른 이는 책상 앞에 3시간만 앉아 있어도 자족한다.

해당 논리의 두 번째 문제점은 노력은 자본에 의해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밤낮으로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 어려서부터 전시회와 공연에 다니며 교양을 쌓을 기회를 갖춘 사람들은 많지 않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자신이 수고하지 않으면 어차피 안 된다”는 식의 반박은 유효하지 않다. 현재 경쟁 참가자들 모두가 동일한 환경을 누리고 있지 않고, 예상 가능한 가까운 미래에도 동일한 환경을 누리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때문에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라는 전제는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한 논의에서 노력을 거론하는 것은 무용하다. 소수자가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더 했기 때문에 적극적 우대 조치가 타당한 것도 아니며, 다수자가 노력을 더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당제 탓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한 것도 아니다. 





기업은 일만 잘하면 원숭이도 뽑는다: 경제의 논리

전통적인 자유지상주의자는 왜 기업이 번거로운 수고를 하면서까지 소수자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지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인종도, 성별도, 출신 계층도 인생의 많은 것을 좌우한다. 그러나 국가가 사회적 차별을 적극적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할당제가 효과가 있든 없든 민간 기업에게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타당하고 효과적인 정책이라 하더라도 시민사회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에 국가가 나서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 역시 마냥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며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사회라면 얼마든지 자립자조 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자주 인용되는 논리가 바로 기업은 이윤만 낸다면 원숭이도 고용한다는 널리 알려진 구호다. 이 글에선 편의 상 기업-원숭이 논리라고 하겠다. 어떠한 대상이 무조건적으로 합리적이고 오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가정하는 다른 모든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업은 항상 금전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자라는 주장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위 논리가 옳기 위해선 다음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어야 한다. 첫째, 기업은 언제나 다른 무엇보다도 금전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둘째, 그 목표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판단을 항상 내릴 수 있는 존재다. 두 번째 명제는 직관과 경험을 통해 확실히 틀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업의 의사 결정자들 역시 다른 모든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결점이 많은 존재들이며,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이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한 실패를 겪어 왔다. 첫째 명제가 사실이기 위해선 기업들이 추구하는 모든 정책이 엄밀한 경제학적 계산에서 기원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을 이데올로기와 현실정치에서 유리된 초월적인 무언가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기업가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창업자 정신이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 해도, 특정 사상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를 후원하고[7] 그 사상을 반영한 제품을 생산하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의 배후에 모두 냉정한 경제학적 계산이 자리 잡고 있다고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설사 두 명제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인사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인사를 담당자와 경영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인사 담당자들은 기업의 이익을 계산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인지 또한 따진다[8]. 경영자는 매 순간 기업의 이익만을 따지는 계산기가 아니며 인사 실무자는 더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성이 기업에도 이롭다”는 주장이 할당제를 옹호하기에 적합한 근거인지는 잠시 제쳐 두고 이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점검해야 한다. 기업 인력의 다양성과 생산성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밝혀 내기 위한 연구는 여럿이지만 아직까지 지배적인 결론은 도출되지 않았다[9]. 다양성과 생산성은 독립적 요소인 양 나타나도 하며, 때때로는 정비례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직 구성원의 다양성이 집단사고를 예방하고, 따라서 심각한 재난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질적인 인구통계학적 요소를 갖춘 구성원들의 집단은 독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여러 인종과 성별로 구성된 외과의 팀이 더 적은 실수를 하며 케네디 정권의 피그스만 침공이 대통령과 비슷한 생각과 경력을 갖춘 코드 인사들의 집단사고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 그 예다[10]. 

    다양성과 기업의 성과 간의 인과관계가 어떻든, 기업-원숭이 논리를 타파하려 애쓰는 할당제의 옹호자들은 기업 구성원의 다양성이 기업에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기업-원숭이 논리에 맞서 다양성이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반격하는 것은 옳은가는 여기서 살피기 어렵다. 할당제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제도는 정의와 합당한 몫의 문제이지 기업 경영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치관의 문제다. 다양성이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에 시행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 한편, 설사 다양성이 기업에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기업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기업은 세금을 내고, 담합, 과독점, 환경 오염 등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셀 수 없는 규제의 대상이 된다. 그 어떤 자본주의 사회도 아인 랜드[11]와 같은 강경한 작은 정부론자가 바라는 만큼의 자유를 기업에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적 정의에 관련된 규제만 받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미국 피씨, 한국 피씨: 사대주의와 쇄국 사이

적극적 우대 조치의 종주국은 누가 뭐래도 미국이다. 미국의 선례는 할당제를 공격하는데 이중으로 이용된다. 첫째는 한국식 할당제는 미국의 그것으로부터 변질되었다는 논리고, 둘째는 정치적 올바름의 원조 미국에서 역시 할당제는 많은 반발을 사는 실패한 정책이므로 한국은 그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입시나 구직 경쟁을 겪어 보지 않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 피씨’에 대한 첫인상은 단연 마블 시리즈를 비롯한 할리우드 상업 영화에서 원작의 백인 캐릭터가 흑인이나 동양인으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한국식 할당제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한국의 소수자 문제의 특이성을 다루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먼저 한국의 정체성 갈등의 현주소를 살펴보겠다. 한국에선 소수인종끼리 모여 살기보다 한국인 배우자와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 서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슬럼(slum)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문화 인구도 2 퍼센트로 워낙 적고, 혼혈 자녀들 역시 그 첫 세대가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형국이므로 인종 갈등은 최근에서야 조명받는 실정이다. 계층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은 6.25 전쟁으로 국토가 모두 초토화된 지 이제 막 70년이 되었다. 한국은 고도성장을 이룬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등했고, IMF 이후에야 자산소득이 임금소득보다 중요해지며 계층의 분화와 그에 따른 갈등이 뚜렷해지고 있는 중이다[12]. 반면 성별 간 임금 격차는 OECD 가입 이래 꾸준히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며[13], 여성 인구는 당연하게도 다문화 인구에 비해 수적으로 많다. 때문에 타 선진국에 비해 인종 갈등과 계층 갈등보다 성별 갈등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편이다.


바꿀 수 없지만 삶의 유불리를 크게 좌우하는 요소들이 적극적 우대 조치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야기하는 불평등은 그 형식과 범위가 모두 다르다. 유럽 여행을 간 동양인이라면 눈을 찢으며 니하오를 연발하는 현지인을 만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지방대를 나왔다고 해서 길가에서 난데없이 모욕을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려 한다면 동양인이라는 사실보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이 훨씬 더 큰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다양한 부류의 불평등만큼이나 그 불평등에 대응하는 방식 또한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작금의 상황에서 서구의 적극적 우대 조치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반면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권의 관련 제도들은 그 대상과 범위에 있어 각기 독창적이다. 때문에 한국의 정책을 서구, 특히 미국과만 비교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하시길 바란다. 

    한국과 서구의 적극적 우대 조치는 인종과 성별을 고려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은 인종적으로 균일한 나라이며 여러 인종이 공존해온 역사도 짧다. 지금도 동북아시아인이 아닌 소수의 미성년자 인구는 대부분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의 적극적 우대 조치는 인종이 아닌 ‘다문화’ 여부를 다룬다. 지원자의 인종과 무관하게 부모 중 한 명이 결혼 전 대한민국 국적자가 아니라면 모두 적극적 우대 조치의 대상인 방식이다. 흑인과 히스패닉이 각각 12 퍼센트, 17 퍼센트씩 차지하는 반면[14] 한국의 다문화 가정 인구는 가정 내 한국인(결혼 전 기준) 배우자까지 모두 합해도 2 퍼센트를 막 넘었다. 이를 고려하면 다양한 배경을 가졌을 그들을 ‘다문화 가정 자녀’라고 뭉뚱그리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성별에 기반한 적극적 우대 조치는 주로 공기업 및 일부 민간기업 채용, 그리고 공무원시험에 적용 된다. 이 중 공무원시험에 적용되는 양성평등 채용목표제는 어느 한 성별의 인원이 선발예정인원의 30 퍼센트 (일부 직렬의 경우 20 퍼센트) 이상이 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실질적인 “여성 할당제”는 공기업 및 대기업의 이사직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중등교육과정까지는 두 성별이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두 사례 모두 인종 중심의 제도를 운영하고 성차별을 대학 입시 과정에서부터 고려하는 서구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물론 배려 대상과 방식에 대한 세계적인 합의 또한 존재한다. 이를테면 한국과 주요 선진국에서 장애는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고려 받는다. 대학은 특수교육대상자를 정원 외로 선발하고, 공공기관은 상시 근로자의 3.4 퍼센트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기업이 장애인 고용 의무 할당량을 채우기보다 벌금을 내는 것을 선택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미성년자의 계층은 고려할만한 대상이지만 성년의 계층은 그렇지 않다는 합의 역시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젊은 성인이 순전히 개인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음을 인정한다 해도, 계층은 성별이나 인종과 달리 자조에 의해 후천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존재한다는 희망적인 전망에서 기인한다. 한국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계층은 고교 및 대학 입시에 반영된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가 운영하는 적극적 우대 조치는 크게 두 전형으로 정리 되는데, 정원 내 수시 모집에선 학생부종합전형의 기회균형전형과 정원 외 수시 모집의 고른기회전형이 그것이다. 두 전형의 지원자격들은 서로 다르지만 –이를 테면 특수교육대상자는 후자에만 지원할 수 있다–, 그 중 가계 소득으로 계산한 지원자의 경제적 계층은 두 전형에서 모두 핵심적으로 다루는 요소이다. 이는 적극적 우대 조치의 시초인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선 기존의 인종 중심의 적극적 우대 조치에서 차츰 계층 중심의 제도로 개편하여 가계소득뿐만 아니라 지역의 교육적 여건과 부모의 교육 수준까지 반영하는 추세이다. 또한, 중위 가계소득, 주거안정, 범죄를 모두 고려하는 “랜드스케이프” (Landscape) 제도를 도입해 지원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다 포괄적으로 대학 입시에 반영할 예정이다. 


앞서 나라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의 방향성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다름은 어떤 집단을 소수자로 명명하는지의 차이지,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시행되는 정책은 대동소이하다. 소수자 우대 정책은 대부분 할당제나 가산점제, 블라인드제의 형태를 띈다. 미국이라고 해서 한국의 “억지스러운” 할당제보다 더 나은 묘책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한국식 적극적 우대조치의 소극성이 마음에 차지 않을진 몰라도, 미국의 정책에 비해 형편 없다고 비판하는 기조는 행정적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적극적 우대 조치가 미국에서도 뭇매를 맞는 나쁜 선례라는 비판은 어떠한가? 일단 소수자 우대 정책은 미국이나 한국만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많은 반발을 산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행정적 실패라고 단언하기에 할당제류의 정책은 확대되었으면 되었지 주춤하는기색은 없다. 인종 뿐만 아니라 계층을 고려한다던가, AI를 통한 블라인드제를 도입하는 식의 기술적 수정은 늘 있어 왔지만, 적극적 우대 조치라는 커다란 방향성은 확대되는 중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이할 만한 저

후대에 적극적 우대 조치가 실패작이라 평가 받는다면 이는 그 실효성 부족 때문이지 대중적 여론 탓은 아닐 것이다. 



머리 수 맞추기의 한계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소수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사용되는 한편, 그 수적 열세 자체가 소수자 집단의 태생적 열등성을 함의하기도 한다. 이 글 내내 적극적 우대 조치 없이 악의적인 차별을 없애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못하다 역설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노력은 필요하다.


할당제의 의의는 제도의 덕을 본 초기의 소수자 집단이 주류 집단과 비주류 집단 간의 정보 격차를 해소하고 진입 장벽을 없애 궁극적으로 할당제의 필요성을 종결시키는 데 있다. 때문에 초기 소수자 집단이 해당 영역에 진입한 후 기존 분위기에 포섭되어 그 정체성이 주류 집단의 그것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제도의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제도의 수혜자들 스스로 제도가 단지 자신들이 과거에 받았던 차별에 대한 보상이라고만 여기면 곤란하다. 동등한 출발선 관점에서 할당제는 분명 소수자들에 대한 피해 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소수자 정책의 장기적 목표는 소수자가 받는 피해를 보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가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니게끔 하는 것이다.

    제 3자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엘리트 계층 내 소수자들의 존재를 평등의 달성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바마가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부재하다는 신호가 아닌 것처럼, 적극적 우대 조치를 통한 수적 분배는 평등의 수단이지 그 자체로 문제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균일하게 유지되던 엘리트 계층에 몇몇 소수자가 진입했다고 천지가 개벽한 것 마냥 감동하며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성토하는 사람들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실질적 힘을 주지 않으면서 전통적 비주류 집단의 구성원을 구색 맞추기용으로 조직에 몇 포함하는 행위 자체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한다고 이해하는 이러한 풍조를 토크니즘(Tokenism)이라 한다. 토크니즘을 통해 기용된 개인은 소수자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일종의 캐리커처가 된다[15]. 그들은 여전히 주류 집단과 친밀감을 쌓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요 결정에서 배제되고, 이는 다시 소수자 집단의 무능함으로 여겨져 주류-비주류 간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공정에 대한 열망이 조국 사태로 인해 지펴진 잠깐의 불씨가 아니라 실로 이 시대의 정신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공정과 이를 방해하는 구조적 차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 우대 조치는 개인의 손익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주제다. 모두가 당사자인 이 주제에 그 누구도 마냥 태평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편을 대변하는 근거를 무조건 취사선택하는 대신,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가려내야 할 때가 왔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독립관계에 있지 않다. 후자는 전자의 성취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다. 결과의 평등 없이 기회의 평등이란 신기루에 불과하다. 현재의 불평등은 평가자의 노골적 악의와 소수의 부유층의 농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와 정보력, 그리고 문화적 자본의 격차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결과물이다. 실력을 쌓을 환경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이상 “실력대로”라는 구호는 기존의 특권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수습편집위원 차지 (avril11th@naver.com)



[1] 정성민. (2018. 05.14). “금감원 조사에서 드러난 금융권의 ‘성차별’ 채용”. 중앙일보.

[2] 최미랑. (2019. 09.30). “여성 지원자 점수 조정해 전원 탈락시킨 서울메트로”. 경향신문.

[3] 한애란. (2018. 02.03). “하나은행, SKY 붙이려고 동국·한양대 출신 떨어뜨렸다”. 중앙일보.

[4] 주희연. (2018. 02.14). “58억 들인 정부 입시포털 ‘어디가’ 정작 필요한 정보가 없다”. 조선일보.

[5] Settles (2014, 10).「Women in STEM: Challenges and determinants of success and well-being」.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6] Dennehy, Dagupta (2017). 「Female peer mentors early in college increase women’s positive academic experiences and retention in engineering」. Proceedings of the Natural Academy of Scienc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7] “David Koch and his brother Charles are”. (2019. 08.23). “David Koch, funder of conservative causes, dies at 79”. Deutsche Welles.

[8] Gerdeman, D. (2017.09.11). “Why employers favor men”. Harvard Business School.

[9] “Dear David, you face pressure to”. (2019, 11). “How to make your firm more diverse and inclusive”. 《The Economist》, 20191108, pp.53

[10] Robson, D. (2019. 08.07). “The science of creating a dream team”. BBC.

[11] 객관주의라는 철학적 체계를 발전 시켰다. 그녀의 사상은 기성 철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대중적 지지는 크게 얻어 미국의 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 배정원. (2020. 02.20). “대중의 분노는 불공정에 대한 불만, 계층이동이 막혔기 때문”. 중앙일보.

[13] 이영재. (2019. 09.26). “남녀 임금격차 지난해 37.1%…OECD 최고 수준”. 연합뉴스.

[14] 통계청. (2019. 09. 12.). 2018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보도자료.

[15] Menad, L. (2020, 01). “The changing meaning of affirmative action”. 《The New Yorker》, 20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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