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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1. 2020

<124호> 코로나가 뿌리내린 삶의 방향에 대하여

수습편집위원 유랑


    코로나 사태가 예상을 뛰어넘고 장기 사태로 전환되었다. 나는 신종플루에 걸렸었지만 완치됐던 사람이고, 다행스럽게 메르스와 에볼라를 넘긴 사람이다. 순진하게도 내게 질병이란 극복의 대상, 혹은 지나칠 수 있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코로나는 이전의 질병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나는 캐나다와 한국, 두 나라에서 코로나 사태를 경험했다. 코로나에 관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교환학생 도중 코로나로 인해 이른 귀국을 했다. 먼 발치에서 한국과 중국을 바라보던 나는 코로나를 마치 남의 일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캐나다가 입국 금지 선언을 하고, 내 귀국 일정이 불투명해졌을 때 나는 오갈 데 없는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가능하면 더 오래 해외에 남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헐레벌떡 귀국을 선택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만 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을 배달 시켜 먹으며 나름 안온한 자가격리를 해냈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서 유학생 출신 확진자가 나왔다는 알림을 받을 땐 혹시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을까 전전긍긍했다. 친구들은 귀국을 축하해 줬지만, 그들도 집에만 메어 있는 것은 똑같았다. 휴식과 드라마 정주행을 간절히 바랐던 친구는 어느 순간 더 볼 드라마도 없다며 뜻하지 않은 휴식기를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SNS에 매일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다는 글이 올라왔고, 집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지루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어쩐지 그것은 조금 기묘한 경험이었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나. 친구들은 ‘코로나가 끝나면’, ‘지금이 지나가면’, ‘개강하면’, ‘한 달쯤 뒤엔’과 같은 머리말을 붙이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교환학생 생활 탓에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도 ‘너 자가격리 끝나면’, ‘사태가 좀 진정되면’과 같은 말을 시작으로 ‘밥 한번 먹자.’ 하고 여느 때와 같은 약속을 했다. 나와 내 친구들에게 코로나 사태는 비일상과 동의어였다. 우리에게 이 비일상은 언젠가 일상으로 전환될, 일시적인 예외 상태였다.


너와 내가 같은 전제 위에 선 순간

    시작은 중국에 거주하는 친구였다. 서구권 국가에서 중국을 야생동물을 먹는 미개한 국가로 프레이밍 할 때, 내 친구는 그 한복판에서 고통을 견뎠다. 이틀에 한 번씩 가족 중 한 사람만 외부에서 식료품을 사 올 수 있었으며 몇 주를 집 안에서만 버텼다. 한국 유학생인 그 친구는 당장 방학 이후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고 했다. 그다음은 이탈리아인 룸메이트였다. 유럽에서 사태가 확산하자 결국 이탈리아는 국경을 봉쇄했다. 이탈리아인 친구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다급하게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룸메이트 단체 톡방에 귀국을 알리는 문장이 착잡해 보였다. 마지막 파티라도 하자고 톡방에서 시간을 맞춰보려 했으나 어려웠다. 파키스탄인 룸메이트는 곧 있을 귀국을 대비해 그 많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곧 떠나는 일본인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그렇게 파티는 흐지부지되었고, 곧이어 기숙사가 텅텅 비었다. 나는 당시만 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한국 정부가 입국 제한 조치를 하지 않았고, 캐나다가 비교적 안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떠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확진자가 별로 없었던 캐나다에서조차 사재기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워서 나는 비좁은 기숙사 공간 안에서 며칠을 숨죽여 지냈다. 그리고 캐나다의 입국 금지 선언 탓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한국을 향했다.


    한국의 상황은 점점 나아지는 듯했다. 그 와중에 내가 떠나온 캐나다는 환자가 폭증했다. 자가격리 이후 나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는 선에서 산책을 하는 등의 짧은 외출을 했지만, 이윽고 이렇게 잠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허겁지겁 귀국했던 이탈리아인 친구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고선 근황을 물었다. ‘조금 그렇긴 해. 귀국하고서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고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네. 그런데 앞으로 한 달은 더 집에 있어야 해.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해.’ 담백하게 상황을 정리한 글 다음에 온 ‘그건 그렇고, 너는 잘 지내니?’라는 안부 묻기는 되려 상대의 기분이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여기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말을 전하기 껄끄러웠다. 더 나은 상황을 자랑하는 듯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가 얼마나 순식간에 무너졌는지 뉴스를 통해 보고 들었기 때문이고, 한국 역시 사회적 감시망이 포착하지 못한 감염자가 확산한다면 상황이 언제 나락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걸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즈음 일본은 ‘한 가구 면 마스크 두 장 정책’으로 온갖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일본인 친구에게 영상통화로 괜찮은 거냐 물으니, ‘어이없지?’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걸 그저 머쓱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자가격리 기간 불안한 줄타기를 계속했다. 2주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내가 탔던 비행기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미 2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보건소에선 그저 나머지 격리 기간을 잘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고, 정말 괜찮았지만, 그 전화 한 통이 내 불안에 던진 파동은 컸다. 그렇게 나는 불안한 줄타기를 계속하며 친구들이 겪은 불행 역시 차곡차곡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평등하지 않은 낭떠러지

    나는 불안에 목이 메어 일상을 간절히 바랐다. 나는 모두가 나와 내 친구들처럼 불안해하면서도 괜찮다 자신을 다독이고,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해 노력할 줄로만 알았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래도 누구나 전파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들 인지하고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냥 이타적이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일본인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포장 음식을 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유난히 사람이 없는 거리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백인 남성이 갑작스레 “hey!”하고 우리를 불렀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내뱉은 말은 “Go home!”이었다. 그 순간 느낀 황당함은 다시 생각해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캐나다는 자국을 평화로운 다문화 국가로 홍보해왔다. 실제로 내가 머물렀던 도시는 그 위명에 맞게 다양한 인종과 그에 걸맞은 평등 의식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캐나다를 완벽하진 않아도 앞으로의 평등한 세상을 상상하는 데 꼭 보고 들어야 할 법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명명백백하게 동양인 여성 둘을 겨냥한 인종차별은, 나로 하여금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쉬움마저 잊고 분노하게 했다. 분노는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번졌다. 나는 결정적으로 인종차별 때문에 귀국을 선택했다. 떠날까 말까, 갈팡질팡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음을 바꾸던 때였다. 몬트리올에서 한국인이 피습당한 사건이 발생했다[1]. 두려움을 모른 채 거리에 나갔다가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칼에 찔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귀국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마치 여러 인종이 함께 섞여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에서도 백인 위주의 인식이 도시를 지배했다. 유색인종 비율이 월등하게 높고 평등 의식이 자리 잡은 듯했던 서양의 도시에서조차 코로나는 유색인종만의 질병이었다.  모두가 어렵게 구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백인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활보하고 있었다. 제일 어이가 없었던 건 은행이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명목으로 한 명 한 명을 일 미터 간격을 두고 서게 해 놓고선 정작 업무를 보러 들어갔더니 직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 어딘가 엉뚱하면서도 순진한 모든 조치가 내게는 그저 한 번 웃고 넘겨버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병에 대한 무지였으며, 다문화 국가라는 칭호가 무색한 뿌리 깊은 이분법이었다. 병자들이나 쓰는 마스크는 백인과 관계없으리라는 태도, 일 미터 떨어져서 해외여행 경력이 없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꺼지는 경고등. 그렇게 고려되지 못한 질병의 사각지대가 내 숨통을 조였다. 


    코로나는 끊임없이 파편적인 사회를 건드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에 모두의 미덕이 되었지만, 덕을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시원의 좁은 공동공간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환경이다[2]. 답답한 단칸방을 넘어서면, 모두가 부대끼며 마주쳐야 하는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상류층의 호화 격리 논란은 이와 정반대인 상황을 보여준다[3]. 리조트, 호텔 등에서 격리 생활 혹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이들은 손님을 처음 맞은 프런트의 직원, 방을 청소하고 룸서비스를 가져다주는 직원 등은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이렇게 누군가는 격리 공간을 선택하지만, 누군가는 선택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중국과 같은 나라가 일부 지역에서 외출을 금지한 것과 달리 한국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대부분 개인의 자발성과 도덕성에 의지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시민의 자율성을 철저히 지지했던 것도 아니다. 외부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코호트 격리는 건물을 통째로 봉쇄하기 때문에 내부 격리엔 취약하다. 그리고 이 조치는 장애인, 노인 등이 거주하는 시설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의된다. 심지어 장애인 시설과 노인 집단시설을 대상으로 내려진 코호트 격리 권고는[4] 안전을 위한 봉쇄라고 좋게 이야기하지만, 약자를 대상으로 했기에 가능했던 자율성을 무시한 나태한 조치였다. 이는 국가가 하고자 하는 것이 질병을 위시한 감금은 아닌지 질문하게 한다.


    2020년 2월 기준 고용시장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대상은 여성이었다[5]. 여성이 비교적 저소득 서비스업에서 많이 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콜센터 집단 감염 사태는 대부분이 여성 직원이었으며, 콜센터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문을 닫는 가게들이 줄을 이었지만, 반대로 부를 가진 자는 오히려 부의 증식 기회를 거머쥐었다. 3주 동안 미국에서 2200만 명이 실업자가 될 때, 미국 억만장자들의 자산은 2820억 달러(약 345조 원) 늘었다[6]. 지금, 이 순간에도 부의 격차는 거침없이 커지고 있다.


    방역 모범국 중 하나로서 코로나 사태 호전을 보이던 싱가포르는 어느 순간 확진자 만 명을 훌쩍 넘겼다. 대부분의 감염자는 이주 노동자로, 이주노동자 이만 천 명을 검사해보니 58%가 확진이었다[7]. 이주노동자의 집단 숙식과 싱가포르가 실시한 선택적 방역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집단 숙식은 마치 고시원을 떠오르게 하며, 한국 역시 이주노동자 약 200만 명이 경제의 토대가 되고 있다[8]. 이들은 법과 서비스가 많은 부분 닿지 않는 사회적 약자다. 누군가는 집에서 나갈 수 없는 답답함을 호소했고, 뜻하지 않은 휴식기를 얻거나 재택근무를 했다. 이들은 외출을 줄이고 배달음식을 시켰고, 급증한 배달 주문과 맞물려 오토바이 사망사고가 전년 대비 48% 증가했다[9]. 누군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무시하고 밖에서 여흥을 즐겼고, 어떤 지자체는 벚꽃을 보기 위해 몰리는 시민을 억제하기 위해 거리를 통제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10].


    코로나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 나열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분명 TV 뉴스에서, 인터넷 뉴스에서, 또 SNS에서 한 번쯤은 본 사례일 것이다. 우리가 집 안에 머무는 것에 지쳤듯 너무나 많은 피해 사례와 사회적 격차 역시 지겨운 이야기다. 사실 나 역시 이제는 뉴스에 감정이입하기보다는 ‘또 일이 터졌구나.’하고 한숨을 쉬는 것이 다다. 그러나 사례를 나열했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주거, 고용, 여성, 장애인, 노인, 부의 격차, 이주민 노동자, 노동 환경. 코로나 사태가 점화하고 2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까지 나온 문제들이다. 각각의 문제가 대주제가 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들이다. 그러나 2월부터 점진적으로 글로벌 팬데믹이 선언된 코로나 사태는 두 달도 안 되는 시점에 이 모든 문제를 부각했다. “코로나 시대의”, “코로나로” 등의 코로나를 전면에 둔 채 우리 사회의 병폐가 뉴스 기사에서 호명되었다. 재난 상황에서의 삶의 궤적은 결코 평등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위기 상황이기에 평화의 이름 아래 은폐되었던 불평등과 혐오가 점화된다. 같은 위기 상황 위에서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때인 것이다.


내 삶의 위치는

    코로나 사태 위에서 보호받지 못했던 이들은 그저 사회의 부품이었다.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그들이 마주한 환경을 개선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갔다. 모두가 시민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그 권리를 보장받지만, 분명 보호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국가의 시야에서 지워진 불법 이주민 노동자는 국가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코로나 시대는 그 영역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식별되지 않는 이들을 묵살해도 그럭저럭 돌아가던 세상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오는 질병의 위협을 맞닥뜨렸다. 그러자 비식별 영역이 사회를 굴리는 부품이 아닌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위협이 되었다. 사실 모두가 감염 가능성을 갖는 질병조차 평등한 위협은 아니다. 의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환경, 마스크, 소독제 및 질병에 대비한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금전 등 여러 사회적 조건에 따라 질병을 상대하는 갑옷은 그 겹을 달리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금전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계급 차에서 오는 질병 노출 가능성의 차이를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팬데믹 상황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다 스러지는 목숨이 단지 안타까운 사망으로 치부되고, 나는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비일상을 탈출하고자 하며, 믿기지 않게도 질병이 나의 일이 되자 태도를 달리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비참한 존재가 되어서도 계급 차는 유지된다. 내 삶은 보호받아온 삶인가? 내 삶은 몇 겹의 갑옷을 입고 있나?


    고대 그리스의 삶은 두 형태로 나뉘었다. 첫 번째 삶은 조에 zoe다[11]. 조에는 삶, 생명을 뜻하는 말로 집 또는 가정의 영역에 있는 삶으로서 그저 존재할 뿐인 생명이다. 반대로 비오스 bios는 가치 있는 삶으로서 폴리스, 즉 정치의 영역에서 남성들이 누리던 삶의 방식이다. 조에로서의 삶에 포함되었던 여성, 장애인, 외국인, 미성년, 노예 등이 정치의 주체로 편입되는 것이 근대 정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가 시민권을 기반으로 평등을 보장한다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순진하게 배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언젠가 싱가포르인 친구에게 싱가포르는 어떤 나라냐고 물었었다. 친구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 이민한 이주자로,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나와 함께 캐나다에서 교환 생활을 한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다. 친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실 싱가포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의 대부분이 중국계이고, 그 외 유색인종이 저임금 이주 노동자인 나라에서 친구는 일상의 기묘한 알력에 진절머리가 난다 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모범적인 방역 국가였지만, 그 방역은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배제한 반쪽짜리 방역이었다[12]. 싱가포르의 급변한 상황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삶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의 보호에서 배제된 조에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 설사 코로나 사태가 싱가포르의 이주민 노동자 차별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이 구멍 난 방역이 싱가포르 전체를 위태롭게 한 것은 틀림없다. 결국 국가의 선택 아래에서 중국계 싱가포르인 역시 질병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조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분법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명’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지 그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부여잡는다. 조에는 정치에 포섭되었지만, 여전히 촛불처럼 춤추는 생명이었다. 정치적 주체로서 행위 할 수 있다는 애매한 진실 안에서 조에는 한순간에 꺼뜨릴 수 있는 취약한 생명이기도 하다. 이 양가성 위에서 나 역시 온전히 가치 있는 생이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였다.


    내가 귀국한 이후에 상황이 가장 급박하게 변했던 국가는 일본이었다. 그리고 내 일본인 친구는 매번 연락할 때마다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부러워했다. 내가 외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나는 캐나다에 있을 때조차 한국에 돌아가면 어쨌든 보험의 비호를 받을 수 있으니 귀국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마냥 안전하기만 한 유토피아였나. 이미 콜센터 집단감염과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사태의 여파로 취직 시장에서 고배를 마신 여성들, 목숨을 잃은 라이더가 보여준 열악한 현실이 우리를 흔든 뒤였다. 모두가 다른 위치에서 코로나 사태를 바라보았다. 한국을 부러워했던 일본인 친구가 나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인 친구가 역전된 상황을 두고 또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또한 두려웠다. 나는 서로 다른 맥락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우리를 보고 절감했다. 나는 국가의 보호 아래 놓인 생명이었고, 어떤 이들은 그 보호 바깥에 있거나 또는 비호가 불충분해 구제될 수 있었던 생을 놓쳤다. 


    푸코는 국가가 지배하는 권력이 생명을 보호하는 동시에 지배하기 때문에 대량 몰살될 위기에도 처해있다고 보았다. 근대의 생명은 보호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깊게 공감할 수 없었던 분석을, 어쩐지 코로나 사태를 바라보며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나의 생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정말 아프고 싶지 않았고, 그보다 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단순히 내가 손을 잘 씻고 마스크를 잘 낀다고 해서 생을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삶의 위치는 어떠한가. 나는 코로나 방역의 모범이 된 나라의 시민이다. 나는 자가격리를 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집이 있었고, 한 장에 1,500원이나 하는 마스크를 살 돈이 있었다. 내가 탄 비행기에서 확진자가 나오자마자 보건소가 연락을 주었고, 나는 내가 화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출근을 미루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나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동양인이었다. 삶은 지극히 상대적이어서 어떤 때에는 내게 우월감을 주었고, 어떤 때에는 자격지심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삶의 많은 부분을 개인의 성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나의 위치를 자각하는 순간에도 나는 통제 당하는 조에였으며,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시민이었다. 나는 허무하게 내가 그저 존재할 뿐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내가 획일화될 수 없는 삶을 거머쥔 주체라는 것 또한 다짐하고자 했다.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려 했다. 얽히고설킨 우리 삶의 궤도를 읽고 그 안에서 나의 잠재력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 그리고 어떤 변곡점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는 여러 갈래가 있으며, 그 많은 길만큼 내가 상상하지 못한 삶이 박동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내 위치가 변화할 때마다, 내 시선 또한 방향을 달리할 것이다. 그렇기에 2개국에서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기회는 내게 질문과도 같았다. 이 수많은 삶의 맥락과 부당하고도 불가피한 사회 속에서, 코로나 이후의 삶을 어떻게 일궈낼 것이냐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 앞에서의 나는 적어도 통제 당하는 자가 아닌 행위자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향해가는 조에였다.


비일상 속의 계기

    나는 우리가 지나치게 바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곤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놓치게 한다. 뉴스에서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떠들어도 정치, 사회문제 등이 나와 아주 동떨어진 문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또 내가 당사자인 문제에는 열심히 공감하면서, 내가 당사자가 아닌 문제에는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문제에 동감하거나, 해결을 촉구하기에 우리는 바쁘고 지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순간의 깨달음은 종종 벼락처럼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계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계기는 정말 우연한 것이라 누가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기는 또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엉뚱하기도 하다. 남들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 하는 일이 나에게 갑작스러운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처럼 계기를 목도하기도, 또는 스스로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언제나 어떤 분야에서든 크건 작건 한 사람의 변화를 이끄는 계기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 계기는 언제나 주관적이고 생뚱맞기 짝이 없어서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기제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금의 코로나 사태는 모든 이에게 질병과 사회적 위협이라는 형태로 동등하게 다가왔다. 대처 방식에선 계급 차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고 국가마다 대책이 상이하기도 했지만, 올해의 코로나가 모두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는 건 일반화할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심지어 이 질병은 국제적이기도 하다. 이 글의 유학생 친구들의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는 어디를 가든 코로나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공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두에게 차별 없는 불안을 안겨준 사례가 또 있을까? 설령 존재했더라도 코로나 사태가 매우 이례적인 예시임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코로나 사태가 공통적인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비일상의 상황에서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일상의 뒤틀림과 불합리를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은 어떤 위치에서 코로나 사태를,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한편으로 이 계기는 인위적인 개입 또한 필요하다. 계기가 변화를 끌어낸다지만, 코로나를 계기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으로 남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한 듯 보인다. 우리는 거대한 위협에 대상을 착각한 두려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인 입국 금지 국민청원의 동의자는 한 달 만에 76만을 넘어섰다[13].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을 비난하고 그들을 피하려했다. 국내에선 사태 초기부터 조선족 혐오 역시 판을 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인 거주자가 많은 대림동에선 단 두 명만의 확진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인 감염과 무관했다[14]. 중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바이러스의 타깃이 민족을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혐오 현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코로나 때문에 두려워 중국인에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냈다기엔 대림동은 언제나 낙인찍힌 동네였으며, 부풀려진 혐오의 온상이었다. 이 글에서 나열된 주거, 고용, 여성, 장애인, 노인, 부의 격차, 이주민 노동자, 노동 환경 등의 문제들은 누더기 같은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결코 흠결 없는 비단이 아닌, 찢긴 채 운행되어 왔던 사회가 있다. 병폐는 숨어있지 않았다. 언제나 산재해 있었지만, 코로나가 엉성하게 기워냈다. 그리고 기워진 누더기는 모두에게 우리 사회의 누덕누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사회 속의, 환경 속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모든 행위와 결과는 관계와 함께 작동한다. 누더기 위에선 그 어떤 특권층도 안전하기만 할 수 없다. 누군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손을 씻지 않고 기물을 만지는 순간, 그 주체의 계급은 사라지고 위협은 공평하게 모두를 향한다. 공동의 협력만이,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인지가 우리의 생을 유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코로나 시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안온한 일상이라 믿어왔던 순간들을, 나의 위치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을 질문할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온전하거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 번쯤 답을 내려보아야 한다. 계기를 변화의 기회로 삼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완전한 토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을 유지할 것이다. 누군가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추락할 때 우리는 위에서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을 잃는 것이다. 죽음조차 평등하지 못한 순간이 자신을 옥죄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고야 만다. 코로나로 인한 비일상이 일상으로 전환되었을 때, 코로나 이전의 일상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갈 것인가. 아감벤은 비오스의 영역에서 배제된 조에로서의 생명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근대 들어 조에는 정치적 대상이자 주체로 거듭났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권력 아래에서도,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을 상상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이 더 나은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코로나 시대를 겪은 청년으로서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칠흑 같았던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희망을 배태했다. 케이트 브라운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상황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화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변화하기에 인간이다. 우리는 변화를 끌어내기에 인간이다. 인간의 삶은 결코 가치 없는 삶인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나의 위치와, 그런 나와 연결된 또 다른 온전한 존재를 그려 보고자 했다.


    앞으로의 삶은 절대 코로나 사태 이전의 삶과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드러낸 사회의 이면을 마주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예외 상황에 놓였을 때야 비로소 깨닫게 된 공통의 위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왜 우리는 사회의 불평등에 눈을 감고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가? 나는 기워진 채로 드러난 우리의 불안정한 지반을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계급, 인종, 성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한 위치가 위협 앞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질문해 보았다. 그렇다면 타인의 위치는 어땠을까? 타인의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까? 어떻게 사회의 공동 구성원으로서 서로의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인지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질문을 거쳐왔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하고, 조금씩 답을 내려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기에, 묻고자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겪어보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수습편집위원 유랑 (cyoon0402@yonsei.ac.kr)



[1] “캐나다서 한국인 흉기 피습… 범행 동기 미상”, 동아, 2020. 03. 18.

[2] “고시원은 코로나19 감염 사각지대… 대책 마련해야”, news1뉴스, 2020. 04. 02.

[3] “코로나가 드러낸 ‘계급 사회’”, 한국일보, 2020. 03. 29.

[4] “'격리수용 약자' 파고든 코로나… 집단감염 내몰린다”, 경향신문, 2020.02.26.

[5] "코로나19발 '고용 한파'... 20대 여성에 더 혹독했다", 경향비즈, 2020. 03. 12.

[6] “’코로나’ 와중에도 부의 격차는 멈추지 않았다”, 한겨레 미래&과학, 2020. 04. 28.

[7]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2만1천명 코로나 검사…58% 확진”, YTN, 2020. 04. 28.

[8] “코로나19 싱가포르의 위기…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탓”, 조세일보, 2020. 04. 21.

[9] “코로나로 배달 오토바이 사망 48% 늘었다...업주도 ‘제재’”, 머니투데이, 2020. 04. 09.

[10] “한적한 포항경〮주 벚꽃 명소…코로나19로 곳곳 출입통제”, 연합뉴스, 2020. 04. 04.

[11]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김상운 옮김, 앨피, 2018.

[12] “싱가포르, 코로나 환자 4명 중 3명은 기숙사 거주 이주노동자”, 교수신문, 2020. 04. 21.

[13] “중국인 입국 금지 요청”, 청와대 국민청원, 2020. 01. 23.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4593

[14]  “[르포] 언론이 대림동에 비수 꽂았다”, 탑데일리, 2020.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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