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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6. 2020

<124호> 합리적 보수 비판

수습편집위원 차지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합리적 보수라는 유령이. 말 얹기 좋아하는 달변가 노교수와 거대정당의 “청년인재”들부터 댓글란에 날 선 말을 곧잘 다는 익명의 누군가까지 너도 나도 이 매력적인 타이틀을 점유하려 애 쓴다. 게다가 이들을 잠재적인 위협이라 여긴 진보주의자들도 “이기적인 20대”의 우향우 현상에 대해 진지한 해설을 내놓는 중이니, 합리적 보수는 인터넷의 허깨비 이상의 무언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보수를 개조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이루어졌고, 모두 보수에 갖은 수식어를 붙이는 데서 시작했다. 합리적 보수, 중도 보수, 개혁 보수, 젊은 보수 그 버전도 다양하다. ‘따뜻한 보수’를 내세운 바른미래당과 그 후신 새로운보수당, 비록 보수라고 자처하지 않았지만 해묵은 좌우파 담론의 대안이라 나서는 안철수는 매번 등장한다. 게다가 로고를 분홍색으로 바꾼 후에도 총선에 참패하자 균형 잡힌 젊은 인재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미래통합당 등 2017년 이후 이미지 쇄신은 보수 진영의 지상 과제였다.     


 합리적 보수를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당이라 하기엔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던 바른미래당과 새로운보수당은 현존하지 않는다. 사회 운동이라 하기엔 이들의 방식은 고요하다. 시위도, 성명서도, 대자보도 찾기 어렵다. 저편에서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운동의 수뇌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상은 더욱이 아니다. 합리적 보수는 그 자체로 일관된 사상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사상의 주장을 한국의 정치 현실에 맞게 취사 선택한 어떠한 덩어리다. 거대 야당 내의 정치인 몇몇과 온라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폭넓은 지지층들이 이루는 하나의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나마 본질에 가까울 듯 하다.

     이 난해하고 끈적거리는 세력을 해석하기 위해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합리적 보수 세력은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이해됨이 옳다. 관념적 차원에서 이들을 지적하다간 공연히 신자유주의와 청춘들의 이기심을 탓하는 무용한 결론에 다다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선 합리적 보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이유가 무엇이고 그 지지층들은 과연 어떤 핵심 전제를 공유하며,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성의 실체가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우파 진영 내의 새대 교체를 이루어낼지 차례대로 살피려 한다.

     20대 유권자의 보수화에 대한 논의는 10년 전부터 담론장에 슬금 슬금 등장하였으나, 정작 합리적 보수주의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괴물이 된 20대”라던가 “386 세대에 대항하는 깨어난 청춘” 등 과장된 캐리커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 세력을 양적으로 분석하는 일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기존 서술자들도 잘 알려진 구호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을 감히 중도라 여길 생각은 없다. 다만, 합리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일이 많았던 20대 개인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정성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무엇이 다른가?

어떤 세력이든 낡아 보여 좋을 것은 없다. 권위와 정통성이 있다면 고루함마저도 안정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능함이 결여된 보수성은 노쇠함일 뿐이다. 낡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집단에게 매력을 느낄 유권자는 없다. 이것이 합리적 보수가 미래통합당의 원로들과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노년층들로부터 선을 긋는 이유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보수의 패인이 현실정치보다 성평등이나 환경 문제와 같은 정치적 올바름 이슈에 관심이 더 많은 젊은 표심을 잡지 못한데 있다고 분석했다. 국론 분열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올바름 이슈를 외면한 채 하던 대로 우아하게 경제와 행정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 수명을 다했다는 자성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21대 총선 패배 이전부터 보수 세력 사이에서 합의로 자리 잡았으나,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매번 무시되었다. 그렇기에 젊고 영리한 청년들의 세력을 자처하는 합리적 보수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여야를 막론하고 거대 양당은 젊은이들에게 다소 지루한 문제에 시간을 할애해왔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합리적 보수”는 검찰 개혁이니, 지방 분권이니 하는 현실정치의 지루한 행정적 문제에 별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공정성 담론과 교육 문제 등 청년들이 조금 더 가까이 느낄 법한 아젠다에 편승해 목소리를 낸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이 신문지의 특집 기사를 골똘히 들여다봐야 겨우 이해가 갈까 말까 한 주제에 흥미를 가질 만큼 대중은 여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보다 직관적인 아젠다에 힘을 쏟는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관심을 가질 국민의 수보다 입시 정책과 군필자의 보상 문제, 그리고 인터넷에서의 “성별 대결” 문제에 열을 올릴 국민의 수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합리적 보수는 많은 사람들이 당사자성을 가질만한 주제를 공략한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라는 판도라의 상자 앞에선 누구나 신중할 수 밖에 없다. 합리적 보수의 이러한 행보가 한국 정치를 소모적인 정체성 정치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시선들이 보수 진영에도 많다. 미국인이 성별과 인종, 성지향성과 지역으로 사분오열된 선례를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세계 민주주의의 등불이라 여겨졌던 미국의 정치 문화가 부족주의로 퇴행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시점에서 그 전철을 따라가는 게 과연 맞나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지금껏 경제, 외교 이슈에 가려 빛을 못 보던 소수자 이슈를 전면에 부상시키는 정체성 정치를 마냥 퇴보라 여기는 것도 오만한 발상이지만, 싸움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는 일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거국적인 판단은 단기적인 정치적 계산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다. 만약 합리적 보수의 전략이 선거에서 효과적임이 드러난다면 좌우 진영 모두 망설임 없이 성별과 성지향성 카드를 꺼내 들 것이다. 수십 년 전 지역과 소득으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 합리

동어반복처럼 들릴진 몰라도, 합리주의는 합리적 보수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오늘날 이성과 합리를 구호로 내세우는 이들은 대개 보수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이성을 우파와, 감성을 좌파와 연결 짓기 쉽상이지만, 이성에 대한 과신은 언제나 우파보다는 좌파의 업보였다. 

무솔리니는 레닌을 조각가에 비유한 적이 있다. “레닌은 조각가다. 다른 조각가는 대리석이나 철을 갖고 작업하지만 그는 인간성을 소재로 쓴다. 그러나 인간성은 대리석보다 단단하고 망치로 두드린다 해서 철처럼 펴지지도 않는다. 레닌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각가였다.” 비단 공산주의만이 아니다. 모든 진보적 담론은 일정한 원리에 따라 엉망진창인 현실을 개조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왕의 목을 요구했던 이들과 1987년에 호헌철폐를 외쳤던 이들 모두 혼란 후에 펼쳐질 유토피아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가슴에 품고 있었단 점에서 비슷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순진하다고 비웃을진 몰라도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진보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세상을 인간의 지성으로 정돈할 수 있다는 오만은 야심 찬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을 여럿 좌절시켰다. 혁명 이후의 세상이 그 전에 그려왔던 이상적인 도면과 닮은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주의는 이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보수주의자들은 탁상 위의 위정자들이 시장보다 덜 똑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사회는 설계되기보다 스스로 자란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의 복잡성 앞에서 패배를 선언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합리에 대한 숭배가 다름 아닌 우파 진영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롭다.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에드워드 카는 모종의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미 존재하는 체계를 갈아 엎자고 말하기 위해선 첨예한 논리가 필요하지만, 완벽하진 못해도 나름 잘 버텨온 체계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일엔 대단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 탓에 관료와 사업가가 보수 진영에 주류를 이룰 동안 진보 진영에선 지식인과 학생들이 그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다 덧붙였다. 긴 세월 축적된 현실 경험에 대한 존중이 뜬구름 잡는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는 승산이 있는 것이다.


합리에 대한 집착은 기존의 보수는 비합리적이라는 자백이다. 보수가 본디 합리적이라면 자신들을 굳이 합리적 보수라 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합리적 보수의 출현은 보수 진영의 비합리성과 궤를 같이 한다. 추상성을 혐오하던 보수주의자들이 왜 합리를 외치게 되었나 고민해봐야 한다. 단지 냉철한 태도를 권장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합리를 하나의 이념으로 채택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근대 정치가 출현하기 오래 전부터 보수주의자라면 대개 동의할 법한 주장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들에게 일관된 사상이랄 것은 없었다. 보수주의에 체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많은 유럽인들이 프랑스 대혁명의 과격성에서 모종의 공포 내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나서였다. 그 이후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의 지향점은 절대왕정으로부터 입헌군주제로, 또 민주정과 자본주의로 옮겨 갔지만 모든 급진성에 반한다는 대전제는 그대로였다. 그 처단 대상만 자유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변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변화는 받아들이되 갑작스러운 혁명에 맞서 시장 경제의 거시적인 골조는 유지하자는 식의 주장이 보수주의자들 간의 느슨한 합의라 볼 수 있다. 미래통합당 김희국 의원은  “전세나 월세를 사는 사회적 약자가 2~3년 만에 수십 퍼센트가 오른 억 소리 나는 집세를 거의 폭력적으로 강요당해도 우리 당은 언제나 ‘계약자유의 원칙’과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면서 표를 잃어왔다”고 지적했다. 그렇듯,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대담한 사회 실험을 하기 좋아하는 진보 세력과 달리 보수 세력은 자본주의 원칙을 완고하게 고집해왔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했는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건국 이후 수십 년 간 한국 보수의 요체는 경제 성장과 반공이었다. 경제 성장은 한국 보수 진영의 가장 화려한 기념비다. 군부독재가 한강의 기적에 기여한 공이 어느 정도인가는 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지만 아무렴 좋다. 군부독재를 작금의 보수 세력을 연속선 상에 두고 생각하는 일은 보수 진영에 지나친 누명을 씌우는 일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1960~70년대 경제 성장의 역사를 다소 꺼림칙해하는 진보 진영과 달리 보수는 그 역사를 당당히 긍정하고 있으니 박정희와 전두환을 다른 쪽보단 우파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일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요지는 과정이 어찌 됐든 독재 정권 치하에서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한 나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비슷한 출발선에서 냉전 시대를 맞이했던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 중 냉전이 끝났을 때 선진국 진입에 가까워지기라도 한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의 자금을 등에 업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지지부진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1960~70년대의 학자들이 고안해낸 종속이론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몇 국가들의 성공 사례 탓에 사장되었을 정도다. 한국의 현대사는 자본주의에 위한 가장 강력한 변론이다. 이러니 고도성장이 끝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보수 진영이 경제 성장에서 그 당위성을 찾는 일이 이상하지 않다. 반공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30km도 채 가지 않아 있는 세습 독재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국에서 반공산주의가 필연인 시절은 분명 있었다. 

경제와 반공산주의만으로도 우파의 대의명분은 충분했을 테다. 9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대변동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뒤이은 소련의 해체는 전조에 불과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탓에 국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한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운운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제대로 기능하는 공산국가가 다 분해되어 버린 시점에서 반공의 칼끝은 향할 곳을 잃었다. 그뿐이 아니다. 한여름 밤의 꿈만 같았던 고도성장기는 IMF로 초라하게 끝이 났다. 한국경제는 기사회생했지만 그 전보다 훨씬 벌어진 빈부격차와 망가진 사회 안정성을 끌어안은 채 21세기를 맞이했다.

     낙관론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의 패배를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라 해석했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쪽이 있다면 지향점을 잃어버린 좌파 진영이어야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패망은 보수 진영에게 악재임이 드러났다. 북한의 체제는 건재하고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 대며 안보 차원의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더 이상 그들을 사상적 대척점으로 삼긴 어려워졌다. 배를 곪아 보지도, 전쟁 따윈 겪어 보지도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매번 북한만을 보수의 존재 이유로 내세워 봤자 싸늘한 반응을 얻을 뿐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나마 경제 아젠다에 관해서는 최근까지 우파가 승기를 잡아 왔지만, 저성장 시대에 선형적 발전에 대한 희망도 점차 그 마법을 잃어가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구 세력의 화신이라 여기는 박근혜만 해도 “경제 민주화”와 “증세 없는 복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보수적 색채라곤 전무한 구호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어떤 강경한 보수당도 경제 성장에 대한 공수표만으로 정권을 잡진 못할 것이다. 한국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단계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경기 침체를 겪으며 7-80년대의 두 자릿수 성장이 되려 한국사에 다신 없을 이변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 버렸다. 여전히 우파는 경제 이슈에서 우월한 입장을 점유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자영업자들의 고충은 문재인 정권 내내 유효한 명분이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을 외치던 예전에 비해 작금의 아젠다는 방어적이다.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 진보 세력이 뚜렷한 지향점 없이 정권심판론만 내세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듯, 작금의 보수는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 이상의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합리”는 한국 보수주의를 떠받들던 두 대들보에 금이 간 상태에서 보수 진영의 비주류 세력이 찾은 해답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확신하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본인이 이성적이라 생각하며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지만, 그들이 정의하는 합리는 조금 다르다. 계량적 사고방식과 “감성팔이”에 넘어가지 않는 냉철함이 그들이 정의하는 합리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선 젊은 보수주의자들에게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과학주의에 대해 살펴 보겠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계량적 학문에 무한한 경의를 보인다. 여기에서 계량적 학문이란 수학과 자연과학, 공학, 그리고 경제학과 같은 학문들을 일컫는다. 이준석 역시 자신이 과학을 전공했으며 그로 인해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참신한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책에서 걸쳐 여러 번 반복할 정도다. 물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여러 개인의 집합체이므로 그들의 “입장”을 임의로 상정하여 비판하다가 자칫 허수아비나 때리는 꼴이 될 수 있으나,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수학과 물리학만이, 더 관대한 누군가에겐 수학과 자연과학만이 학문이겠지만 그 기저의 사고는 엇비슷하다. 가치의 영역을 다루려는 모든 시도에 불신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무슨 기준으로 계량적 학문을 정의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양적 방법론의 사용 여부가 기준이라면 정치학과 행정학, 심리학 등의 사회과학도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진짜 과학”이어야 마땅하다. 또한 재현 가능한 관찰만이 학문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면 인문학, 사회과학과 함께 경제학이나 생명과학도 학문 딱지를 떼야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독일 바이엘의 제약회사나 미국 암젠은 암 관련 논문 대부분이 재현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랩에서의 실험이 아예 불가한 경제학, 진화론과 전혀 무관한 연구기법을 사용하는 진화심리학은 말할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계량적 학문과 비계량적 학문을 가려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데다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도 못하다. 그들은 그저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좌파 아젠다를 지지하는 사회과학 지식인들이 눈꼴 시릴 뿐인 것이다.

     물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보수의 반감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서양의 대안우파, 우익대중주의자, 파시스트들 사이에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이 퍼져 나갔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은 19세기부터 존재했으며 특히 나치 독일이 유대인 지식인들이 주도해나가는 진보 담론을 배척하기 위해 사용한 전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재점화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간단히 말해 전지구적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유혈 혁명을 포기한 대신 문화, 예술 분야를 잠식해 서구의 사회적 기강을 흔든다는 이론이다. 이 때 주로 퇴폐주의, 허무주의 성향의 현대 예술이 마르크스주의적 색채를 띤다고 지목 받는다. 현재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는 주류 학계로부터 허무맹랑한 음모론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소위 ‘문과’ 지식인들이 좌파 세력과 결탁했다는 데엔 많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공감을 표한다. 대안우파 세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조심하는 조던 피터슨 교수조차 북미의 대학가는 ‘포스트모던 신-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인문학 교수들한테 장악 당했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정치적 올바름 회의론자인 철학자 지젝은 피터슨이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2019년 4월 19일의 토론을 참고하면 좋다. 토론 주제는 “Happiness: Capitalism vs. Marxism”)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간의 오랜 반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같은 부류겠거니 넘겨 짚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 ‘포스트모던 신-마르크스주의’라는 용어 역시 심리학 교수인 피터슨이 스스로 만들어냈으며 실존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개념이다. 그러나 피터슨의 주장의 엄밀함과는 별개로 리버럴들의 문화 패권을 탐탁치 않아 하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그의 이론에 동의한다. 요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그 정성성과 좌파 사상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젊은 보수주의자들이 “진짜 과학”을 가려내는 대법관 행세를 하게 된 것은 취업난의 반작용으로 상경, 이공계열 학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커진 탓도 있다. 어느 때보다도 학문의 쓸모 있고 없음의 명암이 확실해진 시대에 인문학 서적에 난무하는 미묘하고 함축적 표현에 진절머리를 내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취업난이 이들의 자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된다. 과학적 개념의 무차별적 인용이 자신의 합리성을 보증한다고 믿으며 주장이 아닌 합리성 그 자체를 무기로 삼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먼저 경제학을 살펴보자. 앞서 자유주의적 개방 경제는 합리적 보수에게 큰 관심사가 못 된다고 말했지만 그들만큼 경제학적 개념을 경제가 아닌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길 즐기는 사람들도 없다. 요컨대, 합리적 보수들에게 자유시장은 경제 정책 기조가 아닌 세계의 작동 원리로써 의미를 갖는다. 자유시장이라는 관념은 단지 기업세율과 소득세를 낮추고 관세장벽을 허물자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보다 현실에 존재하는 불균형과 그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보정의 필요성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된다. 합리적 보수 세력이 자유시장을 인용할 땐 인플레이션이나 세율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중팔구 정치적 올바름과 각종 소수자 제도에 반하기 위함이다.

     자연과학의 영역도 이들에겐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진화론만큼 무지각한 오용을 견뎌온 이론은 없을 것이다. 젊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다윈을 숭배하는 방식은 그들이 애덤 스미스를 사용하는 방식과도 매우 닮았다. 여기에서도 역시 문제는 진화론을 생명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무언가에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별을 보기 위해 현미경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양새다. 진화론을 통해 종의 분화보다 국가 간의 세력 다툼을 이해하려 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19세기의 제국주의자들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엔 아무도 사회진화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지만, 여전히 진화론은 차별과 불평등을 자연의 이치라 못 박고 싶어하는 일부 세력들에 의해 변주되고 있다. 진화심리학이 그런 시도의 대표적인 예시다. 스티븐 핑커를 위시한 일군의 심리학자들은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들은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만, 성별과 인종에 의한 선천적인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말한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성차와 인종 간 차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하자”라는 입장을 보인다. 이 때 주로 인용되는 근거가 진화심리학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은 그저 가능성 높은 ‘사실’을 제시할 뿐, 여성이나 소수인종 개인들에게 행동 지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들어 관찰사실로부터 ~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 아직 검증을 거치지 못한 신생학문이며 진화생물학과 별 교류가 없을 정도로 진화론과 무관한 연구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부 우파 세력은 진화생물학을 무지각하게 남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문적 개념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엔 좌우가 없다. 정치적 주장에 엄밀함만을 따져서도 안 된다. 완전히 다른 데서 유래한 개념을 차용하는 경우는 학계에도 얼마든지 있다. 푸코가 권력의 재생산을 설명하기 위해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양자역학을 들먹이며 그를 엉터리 취급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합리를 제1의 가치로 내세우며 합리에 반하는 논리를 펼치는 일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3. 미래

90년대 연세지를 들춰보면 급격히 탈정치화 되어가는 캠퍼스 문화에 대한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당시부터 “독단적이고 위계적인 운동권”의 안티테제로서의 “개방적인 비운동권”이 이미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논리에 힘 입어 1996년 11월 34대 총학생회는 50.4%의 지지율을 획득하여 당선되었고, 이듬해 그간 숨겼던 기독교 성향을 드러냈다. 1997년 가을호는 34대 총학생회를 비판하는 글에서 같은 해 출간된 『동아리문화』를 인용하며 비운동권과 운동권 구도의 부당함을 설파한다. 

“ ‘비운동권’ 혹은 ‘비권’이라는 말은 ‘운동권’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용어이다. 제 18대 연세대학교 동아리 연합회에서 펴낸 『동아리문화』 1997년 가을호 32쪽에서는 ‘비운동권’이란 말을 ‘운동권’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패러다임의 이탈자로서 대안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동시에 이 두 단어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라는 말은 운동권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소산으로 생겨난 용어임에도 소위 운동권과 비권 모두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기준으로 학생사회를 운동권과 비권으로 이분하고서 이 둘의 상호 우위를 판단하려하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이다.” 
연세편집위원회, 「34대 총학 되돌아보기」, 연세편집위원회, 《연세》, 46호, 9쪽.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총학생회가 정치적 집단으로서 존재할 명분이 사라지며 정치적 화젯거리에 기웃거리는 학생회보다 당장 학생의 복지와 실무를 중시하는 학생회가 학생정치의 뉴 노멀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그런 가운데 ‘운동권’의 맥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기에 ‘비운동권’ 학생회는 ‘보수’ 입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교내에서 성장과 분배 이슈가 유효할 리 없다. 따라서 학내 정치의 진영을 가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퀴어 퍼레이드에 깃발을 들고 참가하는가? 임원들에게 페미니즘 성향이 있는가? 어떤 사안에 대자보를 붙였고 어떤 사안엔 붙이지 않았나? 배리어프리 사업엔 얼마나 적극적이며 간식행사 때 채식주의자용 메뉴를 마련하는가? 대체로 사회적 이슈에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면 운동권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비운동권’의 정체성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무엇을 —학교 바깥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가의 문제다.


왜 갑자기 학생회 얘기인가? 아무리 나라의 미래가 곧 청년이라곤 하지만 학내 정치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젊은 보수주의에서 학생회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의 젊은 보수는 유별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청년 보수 세력이 부상하는 와중이지만, 그 중 합리와 이성, 중산층 등의 이미지를 차용한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중산층 고학력자들이 주도하는 진보 담론에 염증을 느끼며 자신들을 그와 대비되는 블루칼라라 정체화하여 자신들의 분노를 설명한다. 미국의 대안우파의 지지자 중 육체 노동자의 비중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는 모를 일이다. 정당성 획득을 위해 전략적으로 저소득 계층임을 광고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도 많다. 그러나 대안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변호사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그들은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약자성을 강조한다는 건 확실하다. 트럼프가 괜히 저학력자undereducated를 공약하겠다 공공연하게 선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보수는 다르다. 과학을 사랑하며-적어도 사랑한다 믿으며-, 감정에 휩쓸리는 무지한 일반대중에 비해 높은 지적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약자를 자처함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모종의 이득보다 무능한 집단이라는 낙인으로 인한 손실이 더 크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어느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세대가 주축이 된 세력이 저학력과 육체 노동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일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서 강조했듯,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의 수뇌부의 지휘를 받는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전략적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 그들이 자랑하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실제로 평균 이상의 학력과 소득을 가졌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386 세대가 오늘날의 권력이듯, 반386 정서를 중심으로 뭉친 오늘날의 비운동권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내일의 권력이 되리라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미 2000년대 초반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섭외된 일이 있다. 몇 달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은 과거 비운동권 총학생회 출신 30-40대 인사들을 "그릇된 이념에 빠진 운동권이 점령하던 대학 총학생회를 합리적인 시각과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밀레니얼 시대 총학생회로 바꿔놓은 주역들"이라 평하며 이들에게 자유한국당의 청년 정책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제시했다. 지금은 간식행사에서 채식주의자용 샌드위치를 주네 마네 하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수십 년 후 보수의 수사를 미리 익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주위에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친구 하나 없는 20대는 드물리라 생각한다. 합리적 보수의 입장에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과학을 숭상하고 온정주의에 몸서리치는 또래들은 많은 청년들에게 이미 낯선 존재가 아니다. 주류 언론에선 청년 보수를 아직 생경한 존재로 그리고 있지만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다가오는 시대에 새로운 주류가 될 그들을 위해 많은 반박—혹은 지지 논리들을 준비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다.




수습편집위원 차지(avril11th@naver.com)




[1] 곽관용, 이인섭, 「한국 20대의 보수와 진보: 세대 간 및 세대 내 비교」, 『비교민주주의연구』, 제 15집 2호, 2019.

[2]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개마고원, 2014.

[3] [양성희의 시시각각] 386 세대 유감 ‘내로남불 끝판왕’”, 중앙일보, 2019. 08. 21.

[4] [만물상] 3040 세대의 표심”, 조선일보, 2020. 04. 17.

[5]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김승진 역, 개마고원, 2020.

[6] '3金 시대'의 종언… 巨頭 사라진 한국정치, 지역주의도 저물다”, 한국경제, 2018. 06. 24.

[7] E. H. 카아, 『20년의 위기』, 김태현 역, 녹문당, 2000.

[8] 제시 노먼,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홍지수 역, 살림출판사, 2019.

[9] 우노 시게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류애림 역, 연암서가, 2018.

[10] “김희국 "따뜻한 마음이 부족해서 진 것…문제도 모르고 삽질했다"”, 뉴스 1, 2020. 05. 21.

[11] “[소득격차 확대]① 상위 10%가 싹쓸이…1980년대와 달라진 한국”, KBS 뉴스, 2019. 03. 16.

[12] “월트 하버드대 교수 “서구자유주의 심각한 위기 ‘역사의 종언’과 정반대 길로””, 동아일보, 2016. 06. 29.

[13] “박근혜는 왜 ‘선거의 여왕’인가”, 한겨레, 2012. 04. 21.

[14] "[김세직의 이코노믹스] 25년째 저성장 내리막길, 일본처럼 되고 있다”, 중앙일보, 2020. 04. 28.

[15] 이준석, 『공정한 경쟁』, 강희진 편, 나무옆의자, 2019.

[16] Spotts, F. (2002). Hitler and the Power of Aesthetics (1st Edition, pp 18-24). Woodstock, New York: Overlook Press. 

[17] Wiggershaus, R. (1995). The Frankfurt School: Its History, Theories and Political Significance.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18] Why Jeffrey Epstein loved evolutionary psychology”, The Outline, 2019. 09. 19.

[19] “Donald Trump, Joe Biden and the Vote of the Irish”, The New York Times, 2020. 05. 25.

[20] “'비운동권' 총학생회 출신 3040세대, 한국당 모인 이유는?”, 한국경제, 2020.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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