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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Oct 15. 2020

<125호> 나와 당신의 경쟁에 묻는 안부

수습편집위원 재주

 

 당신은 언제 경쟁을 처음 경험했는가? 받아쓰기 시험, 구구단을 재빠르게 외워야 한다는 압박감, 혹은 유년 시절의 달리기 시합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는 기억이 불가한 시점부터 경쟁이 스며든 삶을 살아왔을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명체로 거듭나는 숭고한 시간에서조차 경쟁적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충실히 따른다. 한층 질 좋은 의료 서비스, 한층 효과적인 태교, 한층 상품성 좋은 태아보험까지 상대적으로 더 괜찮은 태아가 되기 위해 경쟁에 떠밀린다. 인간이 탄생과 함께 내지르는 우렁찬 울음은 앞으로 펼쳐질 경쟁의 굴레에서 살아남겠다는 선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 경험했던 ‘인간’은 그 자체로 경쟁에 내던져진 존재였다.






누구보다 경쟁적이면서도 경쟁을 견뎌내지 못한 개인

 당신도, 나도 태어났기에 경쟁을 한다. 나 역시 무수한 경쟁을 겪어온 한 개인이다. 조금 별난 구석이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 경쟁적이면서도 경쟁을 견뎌내지 못한 개인이었다. 나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물론 대학교까지 아침에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지각은 당연지사, 결석도 밥 먹듯이 해 평생 개근상 한번 타보지 못했다. 학교가 숨이 막혔다. 교실에서 나는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없었다. ‘입시 경쟁자’로서 지켜야 하는 시간표가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일의 대가가 ‘이름’인 것 마냥, 세상과 관계를 맺는 순간마다 나에게는 이름표가 하나씩 부여되었다. 이름들은 ‘모범생, 착한 딸, 활발한 반장, 전국 모의고사 평균 몇 등급, A대학은 겨우 갈 수 있으니 더 노력을 해야 하는 학생’과 같이 다양했다. 이러한 이름은 타인의 소유이기도 했고, 나에게 한계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이름이 아닌 화려한 수식어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했다. 세상은 이를 성장이라 불렀지만 나는 성장이 두려운 성장기 아이였다. 결국 나는 경쟁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고등학교 자퇴를 했다.


 금기를 깬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을 만끽했다. 나는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조우한 모험가이자 본연의 삶을 쟁취한 투쟁가였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찬란했던 청소년기의 끝자락은 진부했다. 나는 다시 경쟁의 품으로 돌아갔고, 입시경쟁에서 승자의 성취물로 회자되는 대학에 진학했다.  경쟁을 거부했지만 다시 경쟁으로 회귀한 어정쩡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퇴는 명백한 변곡점이었다. 짜릿했던 도주 경험은 경쟁의 부조리에 집중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고통을 마주하고, 원인을 찾고 싶었다. 나는 경쟁이 야기한 사회의 구조적 궁핍, 권력과 지배, 그리고 경쟁에서 밀려난 삶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경쟁의 횡포에 분노했고, 노동 문제에 뚜렷한 가치관을 성립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좋은 학점, 좋은 스펙, 좋은 커리어를 가진 선배를 부러워하고 때로는 그 이름들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늘어난 나이를 조용히 셈하며 취업의 문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이상하다. 나는 경쟁을 증오하면서도 승자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모순덩어리 인간이 되었다. 찌질한 자책은 쌓여만 갔다. 초여름의 냄새가 진해지던 어느 날, 나는 이러한 양가적 감정을 절정에 다다르게 했던 사건을 마주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2020년 6월, 인천국제항공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1900명을 정규직화했다. 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그렇기에 반대 목소리가 개인의 이기심 혹은 무지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공식적으로 먹고 살 방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나이였고, 주변은 온통 인국공 정규직 전환에 분노한 취준생 혹은 기존 정규직으로 가득했다. 문득 그들의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분노하는가? 왜 경쟁에 열광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듣자 단순히 이기심만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인국공 소식으로 기뻐했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미약한 불편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경쟁에 대한 나의 양가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가치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생경한 경쟁을 가만히 바라본다. 정규직이 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던/하는 이들, 그리고 비정규직으로서 내몰린 삶을 살아가는 이들. 경쟁은 모두를 병들게 한다. 그런데 왜 당신,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경쟁에 동의를 표하는가? 경쟁을 두려워하지만 경쟁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 당신과 나의 경쟁에 안부를 묻고자 한다.



‘인국공 정규직 전환’이 가져온 균열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하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었다. 정책의 일환으로 6월 인천국제항공사는 여객보안검색 근로자를 ‘청원경찰’ 형태로 직고용하기로 발표했다. 또한 이들 중 2017년 5월 이후에 들어온 이는 공개 채용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코로나 사태로 좁아진 취업 시장에 지친 청년들과 파이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인국공의 정규직, 비정규직 노조는 이에 분노했다. 2019년 공채에서 156 대 1의 경쟁률을 자랑한 인천국제공항은 청년들이 가장 가고 싶은 공기업 1위 자리를 3년 동안 유지해온 꿈의 직장이었다. 피나는 노력을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취의 고고함이 자격 없는 이들의 ‘로또 취업’으로 훼손되었다. 분노의 가장 큰 원인은 사실상 직고용되는 보안 검색 요원들이 받는 혜택이 과도하며 이들이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여러 의혹이 달궈진 공기를 타고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환 기준이 불분명하여 아르바이트생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으며, 정규직 전환자에게 과도한 임금이 책정되었다는 소문이 곳곳을 방랑했다. 한 언론사는 정규직 전환으로 인해 인천국제공항의 올해 신규채용이 1명에 그친다는 자극적인 기사를 보도했다.[1]


 굉음과 함께 터져버린 폭죽이 밤하늘에 잔해를 남기는 것처럼, 인국공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건, 의견, 감정이 뒤섞였다. 이에 공사는 첫째, 까다로운 보안 검색 요원 채용 절차를 밝히며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은 보안 검색 요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공사는 보안 검색 요원의 평균 임금 수준은 약 3850만 원이며 직접 고용 시에도 동일 임금으로 운영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사자인 보안 요원들도 12시간 근무에 야간, 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한 신입 연봉이 평균 3240만 원이라 밝히며 최저 시급 수준의 임금을 매도하지 말아달라 전했다.[2] 셋째, 공사는 올 상반기 70명, 하반기 50명을 채용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하반기 공채가 내년으로 미뤄진 것이며 정확한 채용 규모는 연말에 확정된다고 보도했다. 또한 정규직 전환은 채용 규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공사의 논리를 들어보면 타당하다. 보안 검색 요원의 정규직 전환으로 인해 당장 취준생들의 밥그릇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취준생들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몇 년째 취업 준비를 하는 내 친구는 말했다.



 “내 삶이 부정당한 것 같아. 난 잠도 못 자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에 라면 먹으면서 공부해왔거든.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부족함을 탓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 나보다 잘난 사람, 나보다 노력한 사람이 합격하는 것은 진리인 거잖아. 현실을 수긍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들’은 어떤 노력을 했지? 노력과 경쟁에 대한 기준이 부재한 세상은 무책임해. 내가 바보라서 이 악물고 죽어라 하고 노력하는 건 아니잖아?”



 내일을 위해 청춘을 파는 청년들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떳떳한 삶이 세상 앞에서 부정당하는 경험, 즉 강렬한 상처였다.


 그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비춘다. 세상의 논리를 바둑을 통해 분석하는 총명함 정도는 갖춰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사회에서, 미생은 완생이 되기까지 혹독한 절차를 밟는다. 무수한 청년들이 9%에 불과한 공공부문[3]이나 민간 대기업 정규직 쟁취를 위해 경쟁한다. 경쟁의 기준이 그 무엇보다 공정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로써 괜찮은 미래를 위한 자발적 착취를 행한다. N가지는 기꺼이 포기[4]해야 평범한 삶을 살 자격을 갖는 N명의 청춘들. 그들의 피로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들이 외치는 절규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는 다시 사회를 지탱하는 수많은 비정규직에 눈을 돌린다. 저임금, 고용불안, 편법 계약이 판을 치는 비논리로 가득한 그들의 세상. 사람이 다치고 죽어도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필수 노동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 그들은 그저 노동자로서 필수적인 보호와 권리를 요구한다. 인간다운 대우를 위해 인간다움을 또 한 번 담보로 걸고 세상과 싸워 나간다. 그들의 가려진 삶 가까이 울려 퍼지는 투쟁과 설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대부분의 개인은 비정규직을 철저히 비난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막연한 연민을 가지거나,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슈를 마주하면 불편한 마음이 슬그머니 차오른다. 동시에 나의 가난하고 초라한 삶을 돌아본다. 투자한 땀과 시간의 무게를 잰다. 나는 이 정도 노력을 했으니 그만한 대우는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의 목소리는 서서히 가려지고, 공정성에 취해 경쟁의 논리를 신봉하는 충혈된 눈이 번뜩인다.



치명적인 중독, 경쟁

 경쟁. 생김새마저 치열한 이 두 글자는 우리 곁에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의 친숙하고도 매력적인 얼굴을 마주한다. 경쟁의 가장 큰 매력은 공정이라는 합리성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경쟁은 정의로운 심판자다. 누구나 경쟁에 참여하면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나아가 경쟁은 자유를 낳는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새로운(Neo) 자유(libera)를 말하는 이론이다. 자유무역, 자유시장,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개념들을 천천히 읊조린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에는 무엇보다 ‘자유’가 자리하고 있다. 어떠한 규제도 없는 순수한 경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한 사업가의 성공 신화는 자유 아래 펼쳐진 개인의 눈부신 성취이다. 사회는 그저 성취에 박수를 보내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 그리고 그에 적당한 심심한 삶을 선물하면 된다. 공평하다. 노력한 자가 왕좌에 오르는 세상. 이 지점에서 경쟁은 인간 존엄을 위한 근본적인 두 원칙,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원리이다.


 그렇게나 자유롭고 평등한 원리가 사람을 죽인다. 대한민국 청소년(9~24세)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5] 입시 경쟁에 내몰린 한국 청소년들의 삶이 숫자로 드러난다.[6] 이는 단편적인 예시일 뿐이다.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적인 삶은 경쟁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기에, 정상성 획득에 실패한 사람들은 경쟁의 낙오자로 낙인찍힌다. 정상성 밖으로 밀려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은 피상적인 권리일 뿐이다. 배제된 삶[7]은 경쟁적이지 못한 개인에게 걸맞은 자유롭고 평등한 결과일까? 경쟁의 얼굴은 얼굴에 불과하다. 우리는 경쟁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실체를 마주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라 읽히는 경쟁의 거짓말을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경쟁에 중독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자퇴를 했다. 경쟁으로 과열된 삶이 괴로워 자기 연민에 빠졌을 때였을까. 성과 하나하나에 자학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을까. 혹은 어렸을 적부터 끝없이 성취를 일궈내던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을 때였을까. 경쟁에 젖은 공허한 나의 역사를 훑어보게 됐을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경쟁 중독자로 호명했고, 그 칭호가 나와 완벽히 어울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사랑을 먹고 산다. 지극히 독립적인 개인도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한국은 인간의 본능인 사랑을 성취로 치환하는 교육을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성취를 해야지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이한 조건 관계를 학습해나간다. 자퇴 후 지저분한 감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내가 걸어왔던 경쟁의 역사를 성찰했다. 기억을 더듬자 ‘무엇이든 잘하는 아이’가 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어 ‘무엇이든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아이가 있었다. 나는 1등을 하면 기대보다 큰 사랑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고, 변변찮은 성과를 내면 나의 존재가 잊힌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사랑이 간절했고, 경쟁에서 사랑을 쟁취해내는 자신을 사랑했다. 차근차근 경쟁을 학습해온 결과였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상처는 무엇일까? 나는 ‘존재의 상실’을 그 답으로 내린다. 존재의 상실은 내 존재가 반복적으로 거부당한 경험으로부터 야기된다. 즉, 우리의 쓸모가 부정당할 때 나는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볼품없는 존재가 된다. 합당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경쟁은 영리하다. 쓸모와 무쓸모, 정상과 비정상을 쉴 새 없이 양산하여 개인에게 이를 학습시킨다. 경쟁의 결과는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된다. 경쟁이 만들어낸 소수의 ‘쓸모’는 빛난다. 그렇게 경쟁은 상처 입은 자들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환상을 생산하여 누구나 경쟁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존재의 상실’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면, 당신에게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를 마주한 경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사회는 정갈한 세 글자를 통해 당신을 거절한다. 개인은 ‘불’합격, ‘비’정규직으로서 다시 호명된다. 정상성에 한 글자를 덧붙인 음산한 여집합의 세계가 탄생한다. 당신이 안락한 세상의 구성원이 아닌, 여집합의 원소라는 사실이 명시된다. 합격한 소수 역시 간접적으로 존재의 상실을 겪어낸다. 합격 앞에 한 글자가 붙는 순간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녹아내릴 것이라는 공포가 도사린다. 성취와 무관한 한 생명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의 성취만이 세상에 승인됐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끝없이 존재의 거절을 겪는 일은 인간 모두의 숙명이 되었다. 나의 필요를 부정하는 사회를 마주한다. 우리의 존재는 천천히 빛을 잃는다. 이는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상처, 존재의 상실이다. 그렇게 삶은 상처와 상실로 환원된다.


 감히 추측하건대, 나 그리고 당신,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이 경쟁 중독자로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을 속여 존재를 앗아가는 중독. 이는 사회에 은밀히 퍼져있는 가장 치명적인 독, 중’독’에 대한 나의 성찰이다.



누가 진정한 호모사케르인가?

 경쟁은 계급을 나눔으로써 인간을 소외하는 것에 본질을 둔다. 온전한 자유와 공정을 규칙으로 펼쳐지는 경쟁이란 없다. 자유시장은 착취의 역사를 그 기반으로 하며, 공동체의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이룩한 최초의 부는 대부분 노예경제로부터 왔다. 현재 한국 경제를 책임지는 대기업의 성취 역시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결실이 아니다. 한국 대기업은 국가의 보호 무역과 선택적 투자로 성장했다. 시장 경쟁력을 갖춘 물품이 아닌 엉성한 국산 제품을 소비했던 공동체의 일원들이 있었기에 극적인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자유시장의 승리자는 편파적인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경쟁에 참가했고, 기울어진 운동장은 권력이 불균등하게 분배된 독과점 시장을 탄생시켰다.


 모든 성취가 개인의 것이라 여기는 승자들의 목소리는 염치없지만 견고하다. 가난하지만 능력 있는 자가 능동적으로 자유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틈은 매우 좁다. 틈은 인종, 젠더, 국적, 종교 등으로 경계 지어지며 촘촘해진다. 그렇게 자유시장은 자유를 배반한다. 우리는 어렴풋이 경쟁의 출발선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경쟁의 환상에 속아 넘어간다. 동시에 모든 역사는 침수된다. 경쟁의 규칙을 되뇐다. 나 홀로 경쟁과 투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으며, 투쟁의 결말은 도태와 몰락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이 약속한 보상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저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왈저[8]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치의 분리가 필수적이라 했다. 인간은 그 생김새만큼 다원적이다. 다원적인 인간은 다원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사회는 다원적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이다. 그러나 사회 권력 구조는 인간의 다원성을 단숨에 획일화한다. 하나의 지배적 가치가 다른 가치를 흡수한다. 말끔한 학생기록부를 채울 수 있는 자질, 수능 몇 문제를 더 맞힐 수 있는 능력, 미래에 자본 친화적인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자그마한 가능성이 개인의 교육 환경, 관계, 커리어, 가정 환경, 노년기 삶의 질을 결정한다. 정치권력이 친족의 대학 입시를 결정하기도 한다. 하나의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 줄줄이 다른 가치들이 손아귀로 딸려 들어온다. 분명 분리되어야 할 가치들이 뒤섞인다. 인간은 개인적인 삶의 맥락에 근거해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뒤집힌 세계를 마주한다. 인간은 ‘지배적 가치’를 소유해야 존엄한 삶을 지켜낼 수 있기에 이를 향해 경쟁할 수밖에 없다.


 아감벤[9]은 사회가 권력에 의해 포획당했다고 설명한다. 권력은 계급을 만든다. 그는 권력이 만들어낸 최하위 계급, 즉 사회가 지워버린 존재를 호모사케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권리가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체이자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과거의 노예, 현대의 난민은  호모사케르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사케르를 양산하는 권력 뒤에는 장치가 존재한다. 그는 생명체들의 행동과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장치’라 부른다. 즉, 장치는 사회에 침투하여 개인의 가치관, 인식,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판옵티콘[10], 학교, 감옥과 같은 권력과 결부된 사회 시설뿐만 아니라 문화, 철학, 미디어와 같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는 요소들이 장치에 해당된다. 한마디로 장치는 세상의 좋고 나쁜 것을 정하고 삶의 가이드라인을 준다.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장치의 가이드가 선한 것이라 믿으며 살게 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는 어느 정도 정답이 있었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고, 예쁜 가정을 꾸려 노후자금이 두둑한 말년을 보내는 삶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는 명제는 늘 ‘참’이다. 대체 이러한 삶의 정석은 누가 정한 것인가? 페미니즘이 부상하고 여성이 비혼을 외쳐도 여전히 많은 콘텐츠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현모양처의 아름다움이 그려진다.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의 출처는 어디인가? 아감벤은 이를 장치라고 본다. 장치는 시야를 가리고 인간을 조정한다. 그러므로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문화는 장치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감벤은 인간을 생명체로서 고찰한다. 인간은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요구한다. 최소한의 의식주,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관계, 뛰어놀며 소통할 수 있는 소박한 공간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환경이 필요하다. 장치는 생명체를 환경과 단절시켜 그를 포획한다. 단절된 틈에 장치를 집어넣는다. 인간은 장치 속 생명체가 되어 경쟁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 생명체가 자발적으로 장치에 붙잡히는 이유는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생명체는 장치가 언젠가 평안한 생을 실현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장치의 요구를 이행했을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향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경쟁으로 인한 진득한 상처의 냄새만이 은은히 남아있을 뿐이다.  


 흔히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개념을 말할 때, 인간으로서의 성원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예시로 나열된다. 법과 정치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분리되고 배제된 사회적 약자를 떠올린다. 그렇다면 당신은 호모사케르의 삶과 무관한가? 내 눈에 비친 당신과 나는 장치에 지배 당해 박탈된 삶을 사는 애처로운 호모사케르이다. 물론 경쟁이 포섭하는 인간은 호모사케르 중에서도 기득권이다.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기 때문이다. 호모사케르 개념을 남용하며 타인의 고통을 끌어내리거나 자기 위로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모사케르가 되지 않기 위해 장치에 들러붙는 나, 장치의 손짓에 휘둘리는 당신, 생명체로서의 행복이 좌절되는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결국 장치로 회귀하는 우리들 또한 호모사케르로서 호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상실과 피로에 물든 나와 당신의 얼굴은 누가 진정한 호모사케르인 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의 외침이 너에게 닿는다면

 나는 경쟁을 반대한다. 이 단호한 명제는 안일하게 결과적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유와 평등이란 무엇인가? 하늘이 내렸다는 당연한 권리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어떠한 재화나 가치를 소유함에 있어 개인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로 인해 개인이 다른 개인을 지배할 수 없을 때, 자유와 평등이 얼굴을 들어 우리를 향한다. 나는 지배적 가치의 횡포를 반대한다. 결국 불균형한 사회 권력 구조의 피해자는 ‘우리’다.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를 포함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비롯한 모든 이는 동일한 존재의 상실을 안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적이 아닌 서로의 이질적 뒤태다.


 경쟁을 미워하다 보면 증오의 끝에서 고착된 사회 구조를 만난다. 뒤틀린 권력은 굳건하다. 장치에 맞서 투쟁한다 해도 내일 당장 권력이 무너져 우리가 생명체 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우리가 억압을 겪었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동일한 경쟁을 선물할 수도 있다. 당신이 걸어온 세상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만한 정당한 세상이라 생각하는가?


 경쟁은 그것의 속박을 끊고 나온 개인에게 곧바로 생존의 위협을 가한다. 경쟁에서 벗어나는 순간 말 그대로 ‘경쟁력 없는 사람’이 되기에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만난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퇴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결단인 경우가 많았다. 경쟁에서 벗어날 여력은 개인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여러 환경적 조건들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18살에 자퇴를 선택할 수 있었고, 자퇴를 선물이라 여길 정도로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가족이 있었다. 나의 이야기가 기만으로 비칠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경쟁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경험한 해방을 나누고 싶었다.


 자퇴를 하고, 나는 한동안 경쟁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오롯이 나를 위해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성찰했다. 경쟁 중독자가 아닌 도전하는 인간이 되었다. 정체된 성장의 시기가 종결되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나만의 성취가 시작됐다. 어떠한 이름도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 나의 모습을 사랑했다. 생명체로서 삶을 향유한 경험이었다.


 자퇴의 여운이 사라질 무렵 대학생이 된 나는 사회철학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수업에서 만난 사회철학자들이 준 위안과 울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경쟁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나의 부족함이 아니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처음으로 말해준 어른이었다. 사회 구조를 냉철히 분석하는 철학자들의 어조가 나를 경쟁의 실체에 서서히 다가설 수 있게 했다. 경쟁을 직시하니 경쟁은 두렵기만 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당연한 권리와 삶을 되찾기 위해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는 다시 경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나는 해방과 직면을 통해 확연히 달라졌다. 경쟁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장치에서 벗어난 우리를 꿈 꿀 수 있다.


 나는 내가 겪어낸 경쟁의 경험을 당신에게 외친다. 또한 당신과 사회의 외침을 끄집어내 듣고자 한다. 당신이 경쟁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다면 그 경험을 세상에 공유하고, 승자로서 경쟁을 무심코 긍정했다면 그것의 실체를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경쟁에 소외된 타인의 외침이 당신에게 닿는다면 그 아릿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우리’이기에 경쟁의 폭력에 젖은 내면의 목소리를, 경쟁으로 중독된 사회가 호소하는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들어내야 한다.


 경쟁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쟁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경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횡포를 인식하고 올바른 경쟁을 만들어갈 수 있다. 경쟁의 민낯을 파악하는 형형한 눈빛의 생명력 넘치는 우리가 모인다면, 경쟁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비로소 우리가 경쟁의 주체적인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외치고, 천천히 움직이며, 천천히 공존한다. 상상하자. 우리가 서로를 향해 온전한 생명의 몸짓을 전하는 사회를, 그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꿈꿔보자.





수습편집위원 재주 (rkdud4904@gmail.com)


[1] “[단독] 4년간 4800명 정규직 전환 인천공항, 올 신규채용 1명”, 조선일보, 2020.07.01

[2] “로또취업이라고요?···’인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은 속이 터집니다’”, 경향신문, 2020.06.29

[3] 2018년 공공부문 일자리 통계, 통계청, 2018

[4] N포세대는 2015년 취업시장 신조어로, 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이나 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를 뜻하는 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5] 2020년 청소년 통계, 통계청 및 여성가족부, 2020

[6] 각주 5와 같은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는 8년째 자살이다. 더불어, 2019년 중·고교생 10명 중 4명(39.9%)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응답했다. 중·고교생 28.2%는 최근 1년 내 우울감을 느꼈다. 초등(4∼6년)·중·고교생의 평일 평균 수면시간은 7.3시간이며, 고교생은 6.0시간에 그쳤다. 고교생 45.9%는 수면 시간이 6시간 미만이었다.

[7] 배제된 삶이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쓰인 ‘배제된 삶’의 의미가 궁금하다면 하나의 예시로 학내에서 벌어지는 청소경비 노동자 문제와 코비 컴퍼니 사태를 둘러싼 논쟁을 제시한다. 관련 글로 연세지의 아코디언 기획기사 <백양로의 빨간현수막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를 추천한다.

[8] 마이클 왈저, 『정의와 다원적 평등』, 정원섭, 철학과현실사, 1999

[9]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새물결, 2008

[10]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이다.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1975년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현대의 컴퓨터 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죄수들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처럼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한다고 지적하면서 사용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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