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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n 23. 2019

<120호> 귀신의 정치학

수습 편집위원 이해일



一.


어떤 죽음은 귀신이 되고 어떤 죽음은 귀신이 되지 않는다. 귀신이 되지 않는 죽음은 무엇이고, 또 귀신이 되어 돌아오는 죽음은 무엇일까?     


 “홍콩할매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애들을 골라서 죽인대” 


이것은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 들어본 귀신 이야기. 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작은 무서운 이야기 책자의 제목도 ‘홍콩할매’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할머니도 아니고, 도대체 이 국적도 생뚱맞은 할머니는 왜 괴담의 대명사가 된 건지 문득 궁금하다. 이 괴담의 근원을 찾아보니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죽은 할머니가 함께 탄 고양이와 한 몸인 흉측한 원귀가 되었고, 밤늦게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이야기가 원본이라고 한다. 홍콩할매 괴담은 나중에는 손톱을 안 보여주면 괜찮다는 둥 수수께끼를 맞히면 살려준다는 둥 갈라지고 변주되면서 80, 90년대 수많은 아이들을 일찍 귀가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당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나 인신매매와 사건이 자주 보도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키고 싶은 부모님들이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음모론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런데 왜 굳이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였을까?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홍콩 느와르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홍콩 느와르 영화 특유의 질척한 정서로 인해 ‘홍콩’이라는 단어에 음울함을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80년대에는 두 번의 비행기 사고가 발생했다. 1983년 소련군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7년 김현희 KAL기 폭파 사건이 그것이다. 겁을 주기 위한 귀신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필요하기 마련이므로 자연스럽게 이런 시대상들이 반영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비슷한 레퍼토리의 ‘빨간 마스크’ 이야기가 대유행했다. 이 빨간 마스크의 기원인 일본의 ‘입 찢어진 여자’는 경제성장 이후 유행한 성형수술을 바라보는 보수적인 시선의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처럼 귀신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귀신이란 무엇일까. 지옥에서 온 악마? 인간의 심리가 만들어낸 허상? 죽은 이들의 영혼? 귀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또 문화마다 다르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 국가들의 귀신은 사탄 혹은 악마인 반면에 우리나라의 귀신은 일반적으로 ‘한’을 품고 죽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다. 유명 코미디언 하리스 이스칸더가 스탠드업 코미디의 소재로도 다뤘듯이, 이런 차이는 각 문화권이 공포영화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림1], [그림2]  하리스 이스칸더가 미국 공포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귀신들린 집에 일부러 들어가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풍자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장면.

    

서양의 공포영화는 절대악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그린다. 이 귀신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마라는 존재론적 이유로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사탄의 인형> 시리즈같이 ‘묻지 마’ 공포인 셈이다. 반면에 동양 공포영화의 귀신들은 귀신이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로 자신이 원한을 품은 이들에게 찾아온다. 권선징악의 교훈을 가진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당 장소를 완전히 탈출하거나 귀신을 물리쳐야만 벗어날 수 있는 서양 귀신과 달리 원한을 풀어줘야만 서사를 일단락할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귀신이란 아주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또 정치적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귀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악마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지, 불안함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지, 혹은 정말로 사자의 귀환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 중 아무도 죽기 전에는 진실을 알 수 없을 테다. 다만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귀신과 관련된 인간의 행위들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귀신이 무엇이라고 여기는지의 차이는 우리가 보게 되는 귀신의 생김새와 행동양식뿐 아니라 그 귀신을 대하는 반응의 차이도 만들어낸다. 인간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혹은 불러낸다. 때로는 귀신을 보는 이들을 중개자 삼아 귀신과 대화하길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귀신을 보고 들으며 귀신과 연결되거나 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행위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특히 다른 어떤 귀신도 아닌 ‘이곳의’ 귀신, 죽은 자의 귀환으로서의 귀신을 대하는 우리의 행위 말이다.          



二.

 남길 것이 자신밖에 없는 이들만이 귀신이 되어 돌아온다. 지체 높은 양반 귀신이나 재벌 2세 귀신, 혹은 유력한 정치인 귀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어렸을 때 동네 상가의 비디오 가게 앞을 혼자 지나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비디오 가게 앞에 붙여진 까맣고 푸른 공포영화 포스터들 때문이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피를 흘리는 여자 귀신이 나를 째려보고 있거나, 여성 배우가 눈을 한껏 크게 뜨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거나, 어린아이 귀신이 오도카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곤 했다.      


[그림3] 어린 내 눈에 비쳤을 법한 광경.


그래서 나는 혼자서는 절대로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나가지 않았고, 꼭 지나가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 바닥을 보고 다다다다 뛰어서 그 복도를 벗어났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내게 ‘귀신’의 이미지는 축축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머리가 긴 여자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인지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귀신 이야기 속에는 유난히 할머니, 여고생, 처녀와 같은 여자 귀신이나 어린아이 귀신이 많이 등장하곤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여자 귀신의 전통은 몹시도 오래되었다. 먼 과거에도 우리나라 공포영화에는 주로 ‘여귀’가 등장하곤 했다.      


[표1] 괴기담 소재 영화에 나타난 괴물의 형상.


시간이 지나고 2000년대 초반에는 한동안 할리우드의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흉내 낸 공포영화들이 대거 개봉했다. 슬래셔 무비는 ‘스플래터 무비’라고도 불리는데 8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잔혹 공포영화이다. 난도질(slash)과 피가 튄다(splatter)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로 이상 성격의 살인마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을 그린다.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슬래셔 무비들은 방종한 십 대들이 무자비한 살인마나 귀신에게 차례차례 희생되는 ‘십 대 살인 영화(teener-killer pic)’가 주였는데, 대부분은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어린 소녀 원귀를 등장시킨 <여고괴담>, <장화, 홍련>, <분신사바>는 큰 인기를 끌었다. 호러는 그 시대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를 보여준다. ‘원한 맺힌 처녀 귀신’이 여전히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는 호러였던 셈이다. 


다만 죽은 여성들을 소환시키는 ‘한(恨)’은 시대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1990년 이전의 여귀들은 시어머니의 핍박이나 처첩 간의 갈등처럼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맺힌 노골적인 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녀>의 주인공 여화는 남편과 아이를 빼앗긴 한을, <살인마>의 흡혈여귀는 시어머니의 계략으로 죽임당한 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여자 귀신이 등장하는 공간도 집을 벗어나 학교 등 공적인 공간으로 넓어진다. 또한 여자 귀신의 원한의 대상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산된다. 한동안 학원 공포물 붐을 불러일으켰던 <여고괴담>은 공포영화였지만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어른들과 입시제도, 교사의 성추행 등 사회 문제를 이슈화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학기 초라고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거나… 하는 거에 들떠있는 모양인데, 이제 그런 싸구려 감상은 다 집어치우도록 해! 그건 고3한테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너흰 좋게 말하면 친구지만, 서로 적이야 적!” - <여고괴담> '오광구'의 대사     


“네가 졸업한 후 9년간, 아무도 날 문제 삼지 않았어. 아마, 내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을거야.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그냥… 교실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머릿수를 맞춰주면 됐으니까.” - <여고괴담> '진주'의 대사     


나의 아버지는 살면서 귀신을 본 적이 두 번 있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어린 나를 데리고 동네 슈퍼를 다녀오는 길이었다는데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본 귀신은 어두운색 옷을 입고 있는 나이 많은 아저씨란다. 나는 이따금 그것이 군인 귀신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존경하는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지만 총상으로 인한 장애를 안고 사셨다. 그런 아버지의 무의식 한 구석에 상이군인 귀신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아버지의 귀신에 대한 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실제로 군인 귀신은 꽤 자주 재현되는 귀신이기도 하다. 나의 친구들도 훈련소를 다녀오면 ‘귀신 썰’ 하나씩은 꼭 가지고 왔던 것 같다. 


군인의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국가폭력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면서 국가폭력의 희생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알포인트>는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죽은 군인들이 계속해서 무전으로 구조요청을 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모두 죽은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구조를 요청하는 ‘당나귀 삼공’ 부대를 구하기 위해 ‘두더지 셋’ 수색부대가 알포인트라 불리는 ‘Romeo point'로 투입된다. 이들은 베트남 여자 귀신과 교전을 벌이고 정글 속의 보이지 않는 위협과 싸우지만 결국 그들을 위협하는 귀신은 자기 자신들이었음을 깨닫는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군인의 미묘한 위치는 군인 귀신을 이승으로 데려오는 독특한 한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손에 피를 묻힌 자, 돌아갈 수 없다.’ -<알포인트> 비석에 적힌 글   

  

“나는 너무 두려워요 내가 이렇게 변해버린 거 보고 엄마가 나를 못 알아 볼까 봐” -<알포인트> ‘장영수 병장’ 대사     


젊은 여자, 할머니, 어린아이, 학생, 군인…. 이처럼 귀신이 되는 죽음은 따로 있다. 편안하고 명확한 죽음을 맞은 자는 귀환하지 않아도 된다. 힘 있는 이들은 죽기 전에, 그리고 죽어가는 동안에 많은 것들을 남기기 때문이다. 변호사를 대동한 유언, 확실한 병명, 수많은 기록……. 한이 없는 이들은 굳이 돌아올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삶이 그러하듯 죽음 또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떤 죽음들은 죽은 자신의 몸뚱이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도 한다.     

 

ㅇㅇㅇ(여)님은 1934년생으로 서울시 강북구에 사시다 지난 2019년 4월 23일 거주하시던 곳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미상이지만 영양 결핍 등 노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됩니다. 자녀가 있지만 50년 이상 단절을 이유로 시신 인수를 포기하여 무연고자가 되었습니다. ---에서 장례를 진행합니다.     


ㅁㅁㅁ(남)님은 1960년생으로 마지막 주소가 인천시의 한 주민센터로 거주지가 불분명했고, 지난 2019년 3월 22일 서울시 중구의 한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위궤양이고, 먼 지방에 거주하는 어머니가 계시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장례를 치를 형편이 되지 않아 시신 인수를 포기하여 무연고자가 되었습니다. ---에서 장례를 진행합니다.     -‘BeMinor’ 무연고자 장례 공지     


프로이드는 괴물을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우리 자아 내부에 억압된 존재가 외부의 타자로 투사되어 괴물이 된다고 설명함으로써 정신적인 차원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회적,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괴물을 설명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는 공포영화 속에서 괴물들이 외계인, 과도한 섹슈얼리티를 가진 여성, 동성애자, 흑인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이 정상성과 비정상성,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등 확고한 듯 보이는 구조와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기 때문에 괴물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정상성’과 이를 위협하는 ‘타자성’을 기준으로 경계 밖의 것들을 괴물로 만들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질서이기 때문에 지속해서 ‘억압된 타자’를 상정하여 괴물로 만든다. 다시 말해, 괴물이 되는 ‘억압된 것’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억압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 구조 속에서 억압된 타자들이기도 하다.


이질적이고 두려운 존재가 괴물이라면, 귀신 또한 괴물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귀신 또한 필연적으로 배척되고 억압된 이들의 얼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강간당한 여자, 살인을 무서워하는 군인, 경쟁에서 낙오된 학생, 너무 일찍 죽은 어린아이와 너무 오래 산 취급을 받는 늙은 여인과 같은 얼굴 말이다. 죽은 이가 매개 삼아 돌아올 ‘한’이란, 언제나 약한 이들에게 넘치는 법이다. 축축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왜곡된 귀신의 외형 안에 숨겨진 이들은 아주 비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앞서 무연고자들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무연고자들이 모두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억압되어 죽음 뒤에 남긴 것이 별로 없는 이들만이 귀신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돌아올 것이 본인의 존재 자체밖에 없는 이들 말이다.                         

三.

그렇다면 인간은 귀신을 무섭고 불길하게 여기면서도 왜 계속해서 귀신을 불러올까. 

     

영화 <환상 속의 그대>는 사랑하는 연인 차경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잃은 혁근 앞에 죽은 차경이 돌아온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차경이 죽은 게 아니라 늦는 것이라고 믿는 혁근에게 계속해서 차경의 목소리가 들리고 차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차경은 나타난 것이 아니고 붙잡혀 있을 뿐이다. 


[그림4] 차경의 분골을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방 안의 어항에 뿌리는 혁근. 푸른 어항에 하얀색 가루가 퍼진다.
[그림5] 차경의 목소리를 듣는 혁근. 멍한 표정으로 귀를 파는 혁근의 옆에서 차경이 귓속말을 하고 있다.
“아 그냥 그날만, 그날만 잘못된 거면 되는 거야. 그날 하루만 아무것도 아니면 되는 거야. 우리 그냥 계속 같이 있으면 돼.” -<환상 속의 그대> ‘혁근’의 대사     


어쩌면 귀신을 불러오는 것은 죽은 자의 미련이 아니라 산 자의 미련인지도 모른다. 죽은 이는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간은 그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남은 자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지, 왜 그 시간에 그 공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야만 하는지, 또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설명되지 못하고 맴돌게 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애도란 자신이 리비도, 다시 말해 생의 에너지를 쏟았던 대상이 사라진 누군가가 그 리비도를 회수하고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이 리비도를 다른 대상에 재투자해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에 대한 미련을 거두고 그다음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 바로 애도 작업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애도는 단순히 감정적인 과정이나 의례만을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햄릿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완수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고, 안티고네는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주기 위해 크레온 왕의 칙령에 대항한다. 안티고네는 이 과정에서 크레온 왕에게 죽임당한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은 “의무의 수행이나 진실의 현현” 같이 아주 적극적이고, 때로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행위로 확장되기도 한다. 애도를 마무리하여 상실을 딛고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히 슬퍼하는 것뿐 아니라 외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을 취하기까지 한다.


하지만애도를 허락받지 못하는 죽음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잃었지만 진실에 대한 요구는커녕 기억을 부탁할 수도 없는 죽음 말이다. 사회에는 애도 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 자들, 체제의 헤게모니 반대편에 선 자들….” 이들은 과연 애도 될 수 있는가?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북파 간첩들의 죽음, 기업이 숨기는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들의 죽음과 과로한 우체부의 죽음과 같은 것들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정받은 자의 죽음은 이미 충분한 설명을 남긴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면 이를 선명히 밝혀낼 힘도 있다. 하지만 약하고 비천한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잃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목소리가 없는 죽음인 경우, 설명을 찾다 찾다 결국에는 죽은 이를 다시 불러오는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뭐라도, 말을 좀 해보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앞에서 서양의 귀신은 본질적으로 악한 악마로 그려진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미국 사회에도 죽은 자의 귀환으로서의 귀신이 있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에는 죽은 어린아이 유령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노예주로부터 탈출한 흑인 여성이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자식을 베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다 체포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어린 딸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도망친 흑인 여성 시이드는 죽은 딸의 묘비에 ‘Beloved’를 새기는 아주 작은 애도마저도 석공에게 몸을 팔아서 얻어내야 했다. 그런 그녀 앞에 유령 빌러비드가 돌아온다. 시이드는 이 유령에게 헌신하며 자신, 그리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앞서 이야기했던 ‘어떤 죽음이 귀신이 되는지’의 문제는 결국 ‘어떤 죽음이 애도 될 수 있고 될 수 없는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애도는 사회의 인정과 죽은 자의 위치에 좌지우지된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이다. 사랑하는 이를 억울하게 잃은 모든 이들이 귀신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귀신’을 다른 모든 애도를 빼앗긴 죽음에 대한 ‘최후의 애도’로 볼 수 있다. 죽은 사람을 계속해서 붙잡아보려는 노력 자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이해해보고 싶은 산 자의 최후의 몸짓이 아니겠는가.   


       

四.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발바닥의 살처럼 단단하고 둔한 곳도 있지만 입술 안쪽의 살 같이 여리고 취약한 곳도 있다. 귀신이 가장 많은 3대 장소는 학교, 병원, 군대라고들 한다. 우리는 억압당하고 불안해하는 곳에서 귀신을 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귀신을 보는 이들마저도 기피할 만큼 귀신을 비천하게 여기곤 한다. 각종 귀신 이야기를 흥미롭게 소비하면서도 귀신을 보고 듣는 이들을 불길하게 여기며 ‘기가 약하다’고 치부한다. ‘신들림’이나 ‘푸닥거리’ 같이 귀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 그리고 나약한 이들의 지푸라기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이 귀신이 되는지, 혹은 귀신이 어떤 얼굴로 우리의 인식 속에 묘사되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애도 받을 권리를 줄지 주지 않을지는 결국 힘의 문제다. 사회는 배제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은 “타의로 억눌린 감정에 붙여진 이름”인 동시에 “출구를 봉쇄당한 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세상에 외쳐질 힘조차 없거나, 강제로 틀어 막힌 목소리들이 응축되어 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약하고 억압된 이들만이 이 한을 매개로 귀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귀신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억압되고 약한 부분을 보여준다. 어둡고 축축해 보이는 이 귀신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그늘을 들추는 존재다. 우리 사회가 어떤 귀신을 보고, 왜 그 귀신을 보는지 항상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항상 경계하며 고민해야 한다.     


“이 시대의 우리는 누구를 귀신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해일 (dlgodlf00@gmail.com)



   

<참고문헌>

1. 박주영, 「1998년 이후 한국 ‘귀신영화’에서의 여성 재현」, 2004

2. 문강형준, 「애도의 차원들」, 박찬경 외,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 현실문화연구, 2014

3. 최기숙, 『처녀귀신: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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