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120호>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까

수습 편집위원 비탈

by 연세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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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들이 모이는 집회에 나가고, 성폭력에 대한 기사를 많이 공유한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페미니스트’ 혹은 그들이 생각하는 나의 성별을 강조하여 ‘남페미’라고 부른다. 혹자는 이 단어가 성별을 함부로 단정 짓는 폭력적인 표지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의 실제 성별 정체성과 관련된다기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속죄 서사’와 가장 관련이 깊은 것 같다. “제가 예전에는 이렇게 쓰레기였지만 엄마/여동생/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이렇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답니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동안 상당히 인기 있는 유형의 글이었다. 이는 ‘남페미 서사’라고 부르기 충분할 정도로 정형화된 서사 구조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손희정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15년,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 … 영화에서 ‘리부트reboot’란 기존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몇몇 기본적인 설정들을 유지하면서 작품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 2015년 촉발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에서부터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메갤)의 미러링 스피치mirroring speech 운동을 거쳐 ‘강남역 10번 출구’를 지나 ‘전국디바협회’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온라인을 중심으로 (그러나 온·오프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흐름의 운동 역시 ‘페미니즘 리부트’라 할 만하다.”

그 이후로, 많은 경우 속죄 이외에 ‘남페미’가 할 수 있는 건 ‘내부고발’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항상 여성만을 청자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남페미 서사’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속죄하고, 남성들의 ‘진실’을 ‘까발리며’, 남성들에게는 호통을 치는 것만이 ‘남페미’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 남성들은 그 이상의 무엇을 할 수 있다. ‘한남’의 종류를 나누고 비판하고 까발리는 것 외에도 분명히 남성들이, 남성들 사이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논조의 글로는 《연세》 118호의 “한남이 한남에게”, 《연희관 015B》 10호의 “단톡밭의 한남꾼”, “‘남페미’가 어쨌다구?” 등이 있다. 나는 흔한 ‘남페미 서사’와 비슷한 나의 궤적을 짚어 보고, 나를 비롯한 ‘남페미’들이 왜 지금까지 부족했는지 이야기한 뒤에, 속죄, 내부고발, ‘남자 패기’에 가려서 여태 충분히 나오지 못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남성으로 살아온 어떤 약한 사람의 고백이자 제안이다. 빤한 이야기는 많이 줄이려고 노력했다. 나는 남성들이 ‘약함의 이야기’를 많이 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손상되거나 잃어버린 남성성에 관한 사고를 복구하려는 시도”인 ‘남성성 테라피’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남성의 페미니즘’이 결국 “젠더 관계로 상처받은 이성애 남성을 치유”하는 것으로 이어진 바 있으니까.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페미니즘이 자기를 맨박스에서 꺼내 준 덕분에 자신의 삶이 너무나 행복해졌다는 어느 이성애자 남성. 물론 이는 중요한 일이다. 나 또한 맨박스에서 벗어나면서 자유를 느꼈으니까. 그러나 여기에만 집중한다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은 가능할까?


솔직히 그리울 때가 있어


얼마 전에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다시 봤다. 개봉 당시에도 봤지만, 그때와는 영화를 보고 드는 생각도 느낌도 크게 달랐다. 2015년에 그 정신없는 액션에 빨려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적이 진정한 동지가 되는 서사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나는,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까.

“동성사회”는 가끔 사학, 사회과학에서 사용되는 말인데, 이는 같은 성별의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유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조어이며, 명백히 “동성애적인homosexual”과의 유사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만큼 또한 명백히 “동성애적인”과 구분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마 강력한 동성애혐오, 동성애에 대한 증오와 공포로 특징지어질 “남성 간 유대male bonding”와 같은 활동에 적용된다. 나 또한 남성 동성사회에서 어울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서 퇴출당하면 끝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나는 남성인 친구를 원했다. 어쩌면 친구가 아니라 소속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에 나는 소위 ‘일진’들과 함께 다니거나, 욕/게임/운동을 통해 남성 동성사회의 성원권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여전히 이런 질문들이 던져졌다. “여자 아이돌 왜 안 좋아해?” “야동 본 적 있어?” 여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거나 대답을 피하면 “여자 싫어해?” “게이야?” “섹스 싫어해?”라는 또 다른 질문들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에는 운동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면서 수업시간에도 몰래 소주를 홀짝이는 “멋있는 놈”이 될 수 있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이 다른 남성들보다 남성성에 덜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는 좋은 친구가 많았다. 사실 그게 가장 슬픈 지점이다. 나는 내 친구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험생활을 할 때는 건강 때문에 운동에 끼지 못해서 남학생들과 별로 놀지 못했고, 대학교에 와서는 술을 안 마시다 보니 카페를 즐겨 가게 되었다. 남성인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다. 가끔 둘이 만나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내가 남자들의 모임에 편하게 끼지 못하게 된 거 하나는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정말로 슬펐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니까.

친구 하나하나, 뭉친 우리가 그리웠다. 내가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모임들이었으니까. 우리는 뭉쳐서 즐겁게 떠들고 놀았으니까. 그렇지만 어느 날부터 나는 내가 없을 때 친구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두려워졌다. 나와 아는 이들의 어떤 무리에서 “이거 OOO 없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걸 전해 들은 이후로 나는 남성 동류 집단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그리고 친구들이 나를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지낸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정말 슬프게도, 친구들 한 명 한 명을 많이 그리워하고 믿으면서도, 내가 없는 모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모임에 나갔을 때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아마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페미니스트 대표 역할을 맡도록 강요받았을 것이다. 나는 도망쳤다.


속죄의 윤리

“죄를 후회하고, 판결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범죄를 신과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사형수의 모습이 분명해지면, 사람들은 그가 죄로부터 깨끗해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친 이유에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나는 남성 동성사회에서 중심부로 가기 위해 상당히 많이 노력한 사람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무지했고,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잘못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나의 모든 활동을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를 파헤쳐서 나에게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지 ‘혼자 깨끗한 척’을 하는 ‘남페미’를 여성들로부터도 이탈시켜서 갈 곳이 없도록 만들기 위함임을 안다. 다른 남성들에게 “너도 괜히 ‘남페미’짓 하다가는 저렇게 되는 수가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본보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기억하니까. 그게 잘못이었음을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고, 내가 후회를 해도 상처와 잘못은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페미니즘을 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최근까지도 나는 ‘남자 패기’에 열중했다. 성차별적인 언행을 보면 지적하고 상대가 수용하지 않으면 싸우는 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싸울 때마다 내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다. 가까운 내 과거가 보였고, 그런 모습은 지금 내 안에도 남아 있으니까. 내가 학창시절에 대한 글을 쓸 때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건 혐오가 그 이름을 가진 개인의 잘못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호명함으로써 혐오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모르고 한 어떤 일들이 잘못임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다른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단지 내가 ‘속죄하는 나’를 전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다. 그리고 속죄 페미니즘은 “남성이 스스로를 도덕적 우위를 지녔다고 여겨지는 페미니즘의 편에 위치시킴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욕망이며, 사유의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목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이 아닌 도덕적 나르시시즘이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덜 더러워지기 위해 묵묵하게 노력하는 것뿐이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잘못이 사라지지는 않음을 나는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의 반성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꽁해 있어서도 안 된다. 반성은 나의 몫이고, 나를 바꾸기 위해 하는 거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반성은 결코 자신을 바꾸지 못한다.

정말 아주 솔직해지자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결심한 이후에 남성들에게 욕을 먹고 배제되는 것보다 여성들에게 비판받는 게 더 힘들었다. 물론 여성들에게 받는 비판 또한 예측했다. 그래서 미러링 전략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가능한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남페미’의 모습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남성이 적절한 포지션을 잡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SNS에서 나는 남성들을 훈계하고, 비난하고, 회유하고, (아주 드물게) 토닥인다. 페미니즘 이슈에서 여성들보다 앞에 나서는 경우는 남성들을 ‘패는’ 경우밖에 없다. 이 경우 나의 명분은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말해 왔기 때문에 남은 건 남자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지쳐 갔다. 특히 SNS에서 다른 여성들과 싸우게 될 때, 그리고 여성들에게 악플을 받을 때 가장 힘들었다. 이 상태에서 나는 내 행동 저변에서 내가 연대하는 이들로부터 믿음을 받고 싶다는 욕망을 발견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내가 참가하는 투쟁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연대하는 사람이 사랑받기는 언제 어디서나 참 간편했다. 나는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흔해 빠진 표현이지만, 나에게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이런 상황에서 박탈감을 덜 느낄 것이고, 그게 더 나은 방향이다. 여성들, 다른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들이 나의 속죄에 대해 부둥부둥해 줄 의무는 요만큼도 없다. 반성은 반성이다. 반성은 나를 향해야 한다. 전시행정이 기만이듯, 전시반성 또한 그렇다.


나의 몫 찾기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않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건 아마 ‘내 일이 아니라서’ 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남성에게도 어느 정도 변주되어 나타난다. 비당사자로서 침묵해야 한다는 이야기. 나는 이 태도가 굉장히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신이 직접 폭력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방관하는 자는 무관하지 않다고. 제삼자는 흔히 무관한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차별에는 언제나 세 명이 필요한 법이다. 차별하는 사람, 차별당하는 사람, 그리고 차별하는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고 차별을 용인하는 사람. 우에노 치즈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자가 ‘남성’이 되기 위해 필요한 동일화와 배제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차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다’고 갈파한 것은 《차별론》(2005)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사토 유이다. 그의 차별에 대한 정의를 조금 수정하여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음담패설이다. 이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한 뒤 그것을 폄하, 언어적 능욕 대상으로 삼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의례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이처럼 차별은 결코 2자적 관계가 아니다. 차별을 2자적 관계로 파악하면 차별하는 한 명만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고, 실제로 문제 해결을 그러한 방식으로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차별을 용인하는 사람들이 남는다. 그리고 그중에서 다시금 차별하는 사람이 등장할 것이다. 차별을 용인하는 공간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차별은 끝나지 않는다. 협의의 당사자성을 벗어나서 제삼자의 존재, 차별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볼 때 비로소 차별의 원리를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누가 가해자인지를 따져서 그 개인을 쫓아내기보다는 무엇이 폭력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여기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남성 페미니스트는 ‘속죄’와 ‘남자 패기’에 집중해 왔다. 그런데 사실 ‘남자 패기’는 이미 여성들이 자신의 투쟁을 위해 모두 짜 둔 판이다. 즉, 성차별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투쟁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차별을 하거나 방조하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따라 하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 보니 ‘남페미’를 보는 사람도 자연스럽지가 않고 불편한 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게으름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데에 상당히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차별하던, 차별을 방조하던 사람이 이를 끝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올바른 역할 모델이 없었다. 그리고 ‘남페미’들은 일정 부분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빠르게 걷어내고 손쉽게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미 있는 투쟁 방식을 억지로 입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남페미’의 존재 방식에서 찾는다. ‘남페미’는 남성 동성사회에서는 남성성을 잃은 존재로, 여성들에게는 위험 요소를 가진 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남페미’는 남성 동성사회의 동질성을 깨고, ‘페미니스트’의 동질성을 깬다. ‘남페미’는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스파이다. 남성 동성사회 내부의 모습을 폭로할 수 있는, 잠재적 내부고발자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남톡방 폭로’ 등의 내부고발을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남페미’들이 겪는 시선은 내부고발자들이 흔히 겪는 것과 같다. 남성들은 자신의 이러한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가해 집단 안에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 말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는 ‘핀’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은하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퍼스트 오더’에서 태어날 때부터 세뇌된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만행을 본 뒤 문제의식을 느끼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이 내부자였음을 활용하여 기지의 구조를 반란군에게 알려주고 임무 수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내부고발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집단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남성 동성사회는 연약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 남성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내부고발이 꼭 ‘단톡방 폭로’와 같이 커다란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금 더 길고 넓게 생각해서, 자신이 속해 온 수많은 남성 집단들, 그리고 남성인 친구와의 관계들 속에서 겪은 일들을 돌아보자. 이를 하나하나 꺼내어 보고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내부고발이다. ‘남페미’들은 자신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변적 남성들의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남성 동성사회를 내부에서부터 부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핀’이 기지 내부에 균열을 내는 동안 반군들은 바깥에서 기지를 타격했다. 결국 기지는 폭발했다. 그 거대한 행성이 통째로 무너졌다. 나는 내가, 당신이 ‘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약하면서 용감한 이기심, 나를 위한 돌봄의 윤리


나는 다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떠올린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가 여성들을 쫓는 무리에게 우연히 붙잡혀 있던 맥스는 결코 퓨리오사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복수하기 위해 여성들과 함께했을 뿐이다. 맥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쫓던 무리에 있던 ‘워보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오직 영화 속 남성 동성사회의 우두머리 남성인 ‘임모탄’에게 복무하도록 세뇌되었을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이해와 연민을 요구하지 않았다. 두 남성은 모두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서로 죽이려던 맥스와 여성들, 그리고 여성들과 맥스를 쫓던 워보이가 모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운명을 함께하는 동지가 된 과정을 생각해 본다. 워보이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모두를 구했고, 맥스는 목적을 달성한 뒤에 자신의 갈 길을 간다. 결코 믿을 수 없던 적이 생사를 함께하는 동지가 된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핀’도 반군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그 폭력적인 집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갇혀 있던 반군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서로의 이기심이 합리적으로 만날 때, 이 관계는 ‘당사자에 대한 비당사자의 연대’를 넘어선다. 우리는 모두 당사자가 된다. 연대는 언제나 나와 당신이 다름을 전제하고, 자주 자신을 비당사자로 호명함으로써 거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시혜적이다. 그런 면에서 연대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합리적 이기심을 제안한다. ‘진짜 사나이’의 기준들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를 ‘주변적 남성’에 위치시키는 남성 동성사회의 억압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바로 그 자유를 향한 합리적 이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겪어 본 ‘남페미’들은 ‘주변적 남성’들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 ‘남페미’들이 자신의 올바른 몫을 찾고 이를 묵묵히 해 나간다면, ‘남페미’들은 여성들에게 동지로 인정받게 될 거라 나는 믿는다. 인정을 요구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함에 서운해하지 않고, 여성들에게 악플 좀 받았다고 흑화하지 않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나가자.

그리고 주변적 남성으로서 남성들에게 겪은 피해 사실들을 말함으로써 기존의 남성 동성사회에 균열을 내자고 제안한다. 애초에 완전한 외부인이었던 맥스와는 달리, 워보이는 ‘임모탄 님’께 인정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다른 동기가 없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망친 여성들을 붙잡아서 임모탄에게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주는 이들을 만나서 위로받았다. 한 번의 따뜻한 눈길은 모든 것을 바꿨다. 어느 시에서 이야기하듯, 그런 순간은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르니까. ‘남자의 의리’가 남성들 사이의 감정적 지지를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인한 남성성’을 회복하여 다시금 기존의 남성 동성사회로 복귀하도록 만들기 위한, 즉 ‘강한 남자’라는 남성 동성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다. 이는 감정적 지지보다는 ‘약한 남자’가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면역반응에 가깝다.

‘페미니스트 앨라이’ 간의 연대를 요청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남성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남페미’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페미’의 존재양식은 굉장히 애매하기 때문에 나 또한 저 글의 내용에 공감한다. 그러나 ‘남페미’ 사이의 연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어쩌면 아직 무리일지 모르지만, 나는 남성들에게 제안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이 부담스럽다면 단지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 등 ‘남자답지 못한’ 연약한 감정들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자고. 그리고 이를 점차 넓혀 나가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와 ‘약함’을 나누자고. 한두 명으로 시작해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시작해도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는가. 남성들은 가부장제가 초래한 집단적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피해를 분명히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치유와 안정을 위함이며, 무엇이 자신을 ‘주변’으로 내모는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깨닫는다면 장난으로 포장된 성/폭력과 기이한 서열 정리로 가득한 지금의 남성 동성사회를 깨고, 각자가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각자의 몸의 경험과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 주었다. 남성들도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진정으로 보듬어주고 아끼는 돌봄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 이 돌봄의 윤리는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함이기에 이기적이다. 연약하면서 용감한 이기심이 뭉친다면 우리가 “소외와 시혜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남성들이 솔직하게 연약해져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면, 정말 글자 그대로 남성들이 서로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다면,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면, 진정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비탈 (beetlope@gmail.com)



<참고 자료>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나무연필, 2017.

R. W. 코넬, 『남성성/들』, 안상욱·현민, 이매진, 2013.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나남출판, 1996.

최성용,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하다」, 바꿈청년네트워크,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 2019.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은행나무, 2012,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권김현영 외 4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참고문헌 없음> 준비 팀,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앞의 책.

고정희, “천둥벌거숭이 노래 10”,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94,

성필, 「‘페미니스트 앨라이’의 역설, 소외와 시혜의 함정: 연대를 통해 역할갈등 극복하기」,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자치도서관 교지 편집위원회, 《연희관 015B》, 2016년 가을호(통권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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