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정돈 찌부찌
지난 가을, 언더우드 기념도서관 앞 광장과 백양로를 차례로 물들였던 초록빛 축제를 알고 계신가요?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와 신촌캠퍼스에서는 제 3회 인권축제 <-ever!>가 개최되었습니다. <-ever!>는 다양한 인권 의제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가 “누구든, 언제나, 어디서나, 잘 지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학내 인권 관련 단체들이 다함께 참여한 축제였는데요. 단체별 부스제 뿐만 아니라 인권영화제, 토크콘서트, 무대 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답니다.
세 번째 인권축제를 맞아 문우에서는 ‘나만의 책갈피 만들기’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나만의 책갈피 만들기’는 말 그대로 제 2회 인권축제 이후로 출간된 문우 60호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 61호 <SURPRIDE!>와 당시 출간을 앞두고 있었던 62호 <별에도 이면이 있다면>에서 다루었던 메인 테마 및 기획들을 바탕으로 한 미션을 수행하고, 재료를 모아 간단한 종이 책갈피를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축제가 진행되던 3일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가지각색의 책갈피가 탄생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부스 기획, 제작, 참여를 모두 맡은(!) 편집위원 찌부찌의 시점으로 (네, 바로 접니다.), 당시 문우 부스에서 책갈피를 만들던 과정을 되짚어봅니다. 직접 체험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보아요. 또 ‘나라면 어떤 책갈피를 만들었을까?’와 같은 즐거운 고민도 함께 해봅시다. 이미 문우 책갈피를 가지고 계신 독자님들은 기사를 읽으며 각 미션의 기획 의도나 제작 과정 등 체험만으로는 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부스 오셔서 책갈피 만들고 가세요!”
“책갈피 만드시겠어요?”
줄줄이 늘어진 천막들 사이로 간간히 들려오는 목소리. 따라가 보면 현란한 색깔의 머리칼을 뽐내는 유령 친구와 함께 문우의 책갈피 만들기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문우 편집위원들이 보입니다. 매 수업마다 들고 다녀야 하는 전공책이나 즐겨 읽는 소설책이 있고, 수업이나 다른 할 일에 방해받지 않을 5분가량의 시간이 있다면 굳이 책갈피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스에 들어가 첫 번째 미션을 위한 안내를 듣습니다.
책갈피 몸통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미션은 바로 아래의 문구가 적힌 두 판넬 중 하나를 골라 빈칸을 채우는 것입니다. 보드마카를 받아들고 판넬을 골라봅니다.
나에게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란 “__________”다.
나는 중립적인 글에 대해 “__________”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미션은 문우 62호 <별에도 이면이 있다면>의 메인 기획인 ‘정치적 올바름과 문화 산업’, 또 메인 기획을 여는 기사 ‘기울어진 글, 중립적이지 않아도 괜찮아’와 맞닿아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 PC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을 통제하려는 운동의 철학”입니다.
문우 62호의 바탕이 되었던 2019년 1학기 세미나에서, 문우 편집위원들은 당시 부상하기 시작하던 예술계 PC 흐름에 주목했습니다. ‘캡틴 마블’, ‘알라딘(2019)’ 등의 영화에서 기존에 ‘남자다움’이라 부르며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던 성격과 역할이 여성 배우에게 똑같이 주어지기 시작한 때 즈음이었습니다. ‘블랙 팬서’, ‘코코’에서와 같이 서구 백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이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분명 눈에 띄는 변화였지만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기류는 아니었습니다. 이전부터 작은 규모의 공연장이나 영화 촬영장에서 조금씩 ‘성별에 따라 사회에서 규정한 성질을 탈피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시도들이 저마다의 형식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대중 영화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을 유독 관심있게 바라본 이유는 바로 그 영화가 말 그대로 ‘대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블, 디즈니와 같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앞다투어 ‘주체적인 여성’, ‘비-백인’ 캐릭터가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들고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만큼 대중적인 문화 소비 시장에 PC가 하나의 트렌드로서 떠오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앞으로의 문화,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 PC가 고려될 것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 변화의 시작 앞에 서 있는 우리는, PC라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중립적인 글’의 실현 가능성 또한 우리가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글을 쓸 때 ‘중립적’일 것을 요구받습니다. 어느 한 쪽 집단의 성격이 묻어나지 않되 정확한 정보와 논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글만이 올바르다는 인식은 점차 텍스트를 생산, 소비하는 일에서 사람들을 떨어트려 놓지요. 그렇지만 정말 중립적인 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거쳐 나오는 이상 인간의 견해가 묻어날 수밖에 없는 텍스트의 바다에서 중립성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정치적 올바름과 중립적인 글. 둘 중 하나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첫 번째 미션은 참가자들에게 위와 같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자 기획되었습니다. 단순히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한 작은 고민이 부스를 떠나서도 꼬물꼬물 이어진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요.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신 만큼 초록 판넬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요. 어떤 말들이 채워졌는지 같이 살펴봅시다.
☞ 나에게 PC란?
상식적인 자유 / 유토피아 / 생존 / 스스로 성찰하여 추구해야 할 것 / 최대한 덜 빻기 위한 노력 / 최소한의 예의 / 약자가 상처받지 않는 것 / 이해 / 필수불가결 / 기본이어야 하는 것 / 서로의 상이함을 알려주는 것 / 모든 논의에 있어 중요한 것 (important for any discussion) / 필요한 불편함 / Representation / 당연함 / 미룰 수 없는 것
☞ 나는 중립적인 글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기울어진 곳에서 중립 기어는 후진한다 / 중립적인 글의 결과는 중립이 아니다 / 뷔페식 중립이다 / 용기 없는 변명이다 / 안 쓰는 것만 못하다 / 좋지는 않다 / 개소리. / 도망치는 일이다 / 삐딱한 고개로 보는 중립에 불과하다 /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다 / 의도적인 회피이다 / 꼬리자르기. 가능한 거야? / 정치적 무책임이다 / 대세에 편승하는 글이다 / 무엇보다 정치적인 글이다 / 비겁하다 /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 중립적인 글을 쓸 요량이라면 펜을 최대한 빨리 내려놓아야 한다 / 편향적이다
빈칸을 다 채우고 나면 드디어! 책갈피 몸통이 손 안에 들어옵니다. 문우 60호부터 62호까지의 기사들에서 발췌한 10가지의 문장이 하나씩 들어있는데요.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미션 완료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갈피 몸통을 골랐다면 이젠 책갈피에 걸어 장식할 끈을 얻을 차례인데요. 부스에 들어설 때부터 신경 쓰였던 유령 친구 ‘브리지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브리지타를 살펴봅시다. 굉장히 예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요.
다음 할 일은 간단합니다. 다양한 색의 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고르는 것만으로는 문우 책갈피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책갈피의 끈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직접 고른 끈의 색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미션에는 다행히도 힌트가 제공됩니다. 바로 컨닝페이퍼인데요, ‘컨닝페이퍼’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당당하게 비치된 힌트 종이 덕분에 어떤 색의 끈을 골라도 어렵지 않게 그 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함께 볼까요?
브리지타의 머리를 장식한 각각의 끈들은 ‘프라이드 플래그’ 여덟 가지의 색들을 의미합니다. 프라이드 플래그는 퀴어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며 어떻게 보이기를 바라는지 등을 퀴어 커뮤니티 안팎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정말 다양한 색의 플래그와 그가 포괄하는 범주가 있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간단하게 문우 61호 <SURPRIDE!>,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퀴어 정체성 용어 사전’에 등장한 이름 중 여덟 개만 소개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성이 유동적이고 무수한 가능성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우리 자신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여성’, ‘남성’과 같이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분류법을 벗어난 이 범주들은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특색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하나의 상징을 골랐다고 해서 무조건 그 상징에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상징들은 ‘이름표’에 불과하고, 이름표는 언제든 수정하거나 떼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세심한 묘사가 도리어 이후의 ‘나다움’을 제한한다면 기존의 이름표는 이름표로서의 순기능을 잃어버리겠지요.
이렇게 몸통과 끈까지 모았다면, 드디어 하나의 책갈피가 완성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밋밋하죠. 부스에는 약간의 센스로 조금 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마성의 꾸미기 부스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책갈피를 완성한 사람 누구나 스티커와 색연필, 싸인펜 등을 사용해 만들어진 책갈피를 꾸밀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인권 의제의 축제에서 얻은 스티커부터 귀여운 문구점 스티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입수한 희귀한 스티커까지, 여기저기서 모은 스티커들이 총출동한 자리. 많은 사람들이 이 재료들을 활용해 오롯이 자신만의 책갈피를 만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티커를 얻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은 바로 문우 60호 여기저기에서 출제된 퀴즈 세트 중 한 문제를 골라 맞추는 것인데요. 사실 이 또한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퀴즈 종이 바로 앞에 참고할 수 있도록 문우 60호가 떡하니 놓여있거든요. 당시 출제되었던 문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답이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 바로 문우 60호를 찾아 읽어보시면 되겠죠?
동의를 구하지 않고 무단으로 상대방을 촬영하는 범죄 행위. 기존의 '몰카'라는 단어가 장난스러움을 내포하고, 비 범죄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용어입니다.
힌트 : p.14~15 의 핵심어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문우 60호 전체의 메인 테마입니다.
힌트 : p.4~5 편집장 서문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 노인과 같은 약자의 생활을 유지하거나 증진, 또는 회복을 돕는 행위. 문우 60호의 기사 ‘24시간이 모자라’에서는 이것이 여전히 '여성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로써 여겨지는 문제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힌트 : p.58
성관계, 유사 성행위, 성욕, 성애, 성적 매력 뿐만 아니라 넓게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역할과 젠더 문제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힌트 : p.23
전통적인 로맨틱 커플이나 친구의 모델에 들어 맞지 않으며, 흔히 우정이라고 간주되는 것 이상으로 더 강렬하고 친밀한 관계.
힌트 : p.88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의 유일한 언론 동아리인 문우의 편집기조는 무엇일까요?!
힌트 : 문우 뒤표지에 늘 적혀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갈피들을 ‘우리-갈피’라 불러보려 합니다. ‘갈피’는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책갈피 또한 책을 읽은 부분과 읽지 않은 부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눠주는 역할을 하지요. 인권축제에서의 몇 가지 활동으로 만든 ‘우리-갈피’는 말 그대로 책갈피이면서 동시에 우리, 즉,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어림값이기도 합니다. 이 손바닥만한 책갈피에는 정치적 올바름과 중립적인 글에 대한 나의 견해, 내가 가장 끌렸던 문장, 내가 고른 플래그와 그 상징에 대한 이해, 내가 뽑은 문제와 답, 나의 꾸미기 취향 등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의 모습이 잔뜩 들어있거든요. 아마 이 문장을 읽고 나면 그 당시에는 그저 시키는 대로 미션을 수행해 책갈피를 만들었던 분도 다시 한 번 이 책갈피를 들여다보게 될 거예요.
사람들은 누구나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크고 작은 차이는 개개인을 ‘다른 누구와도 다른 나 자신’으로 만들어줍니다. 일종의 특별함을 부여해 주는 것이지요. 이 차이를 이유로 상처입지 않고, 이 차이가 상처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지 않을 때 인권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모쪼록 우리의 갈피를 잡는 ‘우리-갈피’와 일련의 미션들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특별함을, 또 다른 사람들의 특별함을 얄팍하게나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라봅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