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 사구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미하일 엔데의 『모모』를 살펴보면, 상당히 독특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 ‘회색 신사’들은 어느 날 홀연히 주인공 모모가 사는 마을에 나타난다. 그들은 ‘시간 저축 은행’의 사원들을 자처하며 주민들에게 여태까지의 ‘나태한’ 삶으로 인해 낭비된 시간을 보전할 수 있는, 치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권유한다. 이 논리정연한 설득에 넘어간 마을 사람들은 ‘근면한’ 생활을 영위하며 영문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시간을 아끼지만, 모인 시간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곳은 회색 신사들의 시가 연기 속이다.
엔데의 이 재기발랄한 저작을 해석하는 데 있어, 신자유주의의 코드를 배제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모두가 그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회색 신사’들의 원칙은 마을 주민들의 움직임 속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어있다. 그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있어 대부분의 경우 물리력은 동원되지 않는다. 그저 이성적이고 분명한 논증을 통해 사람들이 신사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그러나 능률적 삶을 사는, 회색 신사들에게 경도된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생산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들이 생산한 시간은 회색 신사들을 먹이고, 부풀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기계들을 창출해 낸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경험된다는 점이다. 시간은 경험되기에 저장될 수 없으며,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심지어, 시간은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조차 없다.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의 구분이 이 점을 예시한다.). ‘시간을 저축한다’라는 관념은 이 측면에서 명백한 모순이다. ‘회색 신사‘들은 바로 이 모순 위에서 서식하는 존재들이다. 시간,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삶과 노동의 관념을 미하일 엔데는 매우 재치 넘치게도 시가의 이미지로서 집약한다. 한 번 쓰이고 — 소비되고 — 버려지는 시가는 회색 신사들에 의해 상품으로 전락되는 시간의 메타포이다. “노동·토지·화폐는 산업의 필수 요소이며, 이것들도 시장에서 조직되어야 한다. (…) 그러나 토지·노동·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1] 폴라니의 말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해야 하는 자기조정시장의 효과적인 기능을 위해서 인간(노동)과 자연(토지)은 상품이 되어버린다. 이는 놀랍도록 회색 신사들이 시간을 가공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회색 신사들은 『모모』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현현으로서 기능한다.
『모모』 속의 회색 신사들이 그러하듯이, 신자유주의의 통치방식은 은밀하다. 그것은 지식권력으로서 삶의 현장에 침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신자유주의적 삶의 방식은 사람들과 기관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이윤추구의 기능을 수행하게끔 이끄는데, 여기에는 본디 학문과 성찰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기획이 지배하는 대학 하에서 학문과 지식은 상품의 위치를 지니게 되고, 교원들과 학생들 또한 상품인 동시에 기업으로서 기능한다 정확히는 ‘상품인 동시에 기업’이다. 이 점은 이후,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교원과 학생은 권력을 지닌 존재에 의해 규제되고 선택받는 객체(상품)인 동시에, 스스로의 행위를 규제하는 주체(기업)이다.[2] 그렇다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대학 사회를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통치하는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자유주의적 통치 하에서, 학생인 우리들은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가?
지난 학기, 수강신청을 앞둔 많은 학생들은 당혹감에 휩싸여야 했다. 전 학기에 비해 신청 가능한 과목의 가짓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특히, 교양 과목에서 ‘문학과 예술’ 카테고리 강의 수의 급감이 두드러졌다. 더불어, 그들을 가르치던 강사들의 수업을 더 이상 수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도 더러 존재하였다. 이 사단의 중심에는 ‘강사법’의 존재가 있었다.
강사법은 본래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인 대학 내 시간 강사들의 안정적인 고용을 위해 마련된 제도적 타개책이었다.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간의 갑을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서 출발하여 2018년 국회에서 통과된 시간강사법(강사법)은 학기 단위의 임용기간을 1년 이상으로 할 것, 재임용 절차를 3년간 보장할 것, 그리고 방학 중 임금과 퇴직금을 지급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법안의 결과는 강사들의 대량해고였다. 8월 29일 교육부가 발표한 ‘2019년 1학기 대학강사 고용현황’에 따르면, 399개 대학에서 2018년 1학기 대비 2019년 1학기에 줄어든 강사는 7,384명에 달했다.[3] 나아가, 교육부와 한국 대학교육협의회가 10월 31일 발표한 ‘10월 대학정보공시 분석결과’는 강사법 시행 이후, 2019년 2학기의 강좌 수가 예년에 비해 5815개 줄었음을 드러냈다.[4] 대학의 재정곤란을 핑계로 시행된 이와 같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은 시간강사들의 일자리를 부당하게 빼앗은 처사였음은 물론,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조치였다.[5]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1년 7월, 동국대학교는 11개 학과의 통폐합을 결정하였다. 이 중에는 국어국문학과와 문예창작학과 및 철학과와 윤리문화학과 등 인문사회 및 예술분야의 학과들이 두드러졌다. 학과 통폐합은 비단 동국대만의 사안이 아니다. 정부가 2016년 시행한 프라임 사업의 여파로 인해, 각 대학이 경쟁적으로 인문·예체능 분야의 학과를 통폐합하는 현상은 격화되었다. 프라임 사업의 골자는 사회와 산업의 수요에 맞게 정원을 조정하는 대학에 파격적으로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이다.[6] 이 사업과 더불어, 국가 예산 지원 대상 대학 선정 시 취업률 등을 비롯한 단기 정량적 평가가 동원되는 등의 여러 정책적 원인들로 인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의 수는 14.2%p 줄었다.[7] ‘대학’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학문탐구의 장으로서 온전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경제적 힘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함이 마땅하다. 위의 사례는, 무엇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대학이 시장 논리에 의해 기업의 입맛에 맞게 재편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학의 기업 종속은 실상 훨씬 이전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2004년 전국 경제인연합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학 설립을 비영리법인으로 한정함으로써 산업계의 인력 수요에 맞는 고등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교육을 통한 이윤추구가 목표인 영리전문대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이는 대학을 이윤 추구의 기관으로 전환시키겠다는 발상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대학을 신자유주의의 통치 하에 두려는 이러한 기획은 이미 1995년, 김영삼 정부 하에서 발표된 ‘5·31 교육개혁안’에서 그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교육, 나아가 학문을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전환시킨 이 개혁안의 여파로 대학의 기업화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대학의 기업화의 가장 완벽한 형태는 일반대학이 기업의 사내대학으로 전환되는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97년 삼성이 성균관대학교를 인수한 사건이 있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일반 대학원에 개설되었던 휴대폰학과의 존재는 대학을 기업에 예속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의도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의도를 더욱 확실히 못박은 것은 학과의 전 학생에게 주어졌던 등록금 면제와 더불어 졸업과 동시에 주어졌던 삼성전자 취업혜택이었다. 이보다 더욱 최신의 산학협력의 예시는 2015년부터 구체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LINC+(산학협력 선도대학)사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9] LINC+ 사업은 산학협력의 확대와 다양화를 통한, “산업선도형 대학”육성을 통한 청년 취·창업 확대 및 중소기업 혁신 지원 등 국가경쟁력 강화를 그 목표로 삼고 있다.[10] 대학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예시들은 대학이 학문 공동체가 아닌 영리조직으로 기능하는 일련의 현상들로서, 독립적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정체성이 퇴색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11]
현대 한국의 대학이 직면하고 있는 일련의 기업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개별적인 대학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각각의 대학의 행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넓은 차원에서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대 사회 속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 신자유주의적 통치란 무엇인가? 정확히는,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어떤 테크놀로지, 기술을 동원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설정은 권력의 주체보다는 권력 행사의 기술을 질문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푸코적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통치성이란, 푸코가 정치권력의 분석을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푸코의 통시성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물을 배치, 배열하는 기술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행동방식에 영향을 행사하면서 합리화하는 전략이다. 이와 같은 통치성은 중세, 근대 자본주의, 현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컨대, 중세에는 사법적 금기, 처벌과 통제를 통해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었다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는 규율을 동원하여 인간의 신체활동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통제를 통해, 변형하고 통제하기 용이한 대상으로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강제되는 노동의 규칙(수면이 허용되는 시간, 휴식이 허용되는 시간을 정해놓는 등 — ‘시간표’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발명품 중 하나이다)들이 근대적 규율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는 금기가 아닌 허용을 통해 주체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중세적 사법 통제와는 그 결을 달리한다. 자본주의 속의 주체는 이러한 규율들을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권력에 복종한다.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 속의 개인은 파놉티콘 속의 죄수와 같은 심리를 지니게 된다.[12] 한편, 자유주의적 통치는 안전기술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는 종래의 통치가 객체로 삼았던 개별적 육체가 아닌 종/인구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자유주의 통치는 경쟁이라는 기본적 시장작동원리 아래, 인간을 방임상태로 내버려 둔다. 한편, 자유로운 시장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비극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이 자유주의적인 안전기술이 동원하는 주된 방편이다.[13] 권력기관의 역할은 개인이 스스로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복지 공간을 마련하는 데 국한된다(민간 보험제도가 좋은 예이다).
다시 『모모』로 돌아와 보자. 회색 신사들의 역할은 마을의 주민들이 ‘시간 저축 은행’에 가입하도록 하는 데서 멈춘다. 시간의 효율적인 저축을 위해 학교를 짓고, 도로를 건설한 것은 주민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고전적 시장의 기본 원리인 ‘교환’을 ‘경쟁’으로 대체한다는 데 있다. 국가는 개인 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존재로 한정되며, 개인은 경쟁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 경쟁 하에서, 개인은 더 훌륭한 상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규율하며, 인간의 모든 행위(이주, 교육…)는 더 우수한 상품이 되기 위한 목적적 행위로 기능한다.[14] 바야흐로 인적 자본 —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등장인 것이다. 자본화된 인간은 상품화된 개인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기업가의 지위를 얻는다. 자유로운 선택, 판단과 소비의 권리를 지니지만, 그 결과 또한 스스로의 책임이다. 마치 마을 주민들의 불행이 그들 자신에게 맡겨졌듯이 말이다. 인간 기업의 등장으로서, 자유주의적 통치성은 ‘통치하지 않는 통치’를 가능케 한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인간, 더 세분화하자면 교원과 학생, 그리고 대학이라는 기관 자체는 자본으로 전이되며 기업화한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자. 대학의 기업화는 왜 문제인가? 분명, 대학의 기업화는 그것에 딸려오는 실제적 문제들(이는 위에서 언급한 세 실례에서 구체화된다)로 인해 그 심각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대학 사회를 넘어서 현대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적 삶의 방식, 사유의 방식을 예증한다는 데 있다. 잠시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허구상품에 대한 폴라니의 논변을 살펴보자. “노동·토지·화폐에 관해서는 이런 원리(시장 메커니즘)를 적용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다.”[15] 폴라니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그가 언급한 세 상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이 기업으로 변모해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학문이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인문학을 비롯한 수많은 기초학문에서 두드러진다.
현대 사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키워드로서 정의된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매몰된 대학에서 ‘비생산적인’ 학문인 인문학이 설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된 바 있는 프라임 사업 등의 정부 정책 및 통계자료들이 이를 반증한다. 인문학이 죽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파다한 이 학문의 형태가 바람직한가에 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서론에서 인용한 『모모』의 서사는 이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 회색 신사들의 마수에 휘둘리지 않는 모모의 힘은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바로 이 지점이 인문학, 그리고 그를 포함한 모든 기초학문이 추구하는 것이다. 시대의 통치성이 재배열한 세상, 그것이 가리키는 세계의 해석 방식이 아닌, 통치 이전에 존재한, 사물에 내재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보편성을 통찰하는 것. 대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교육과 학문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대학은 본디 자유롭고 학문공동체여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가장 당연히 여겨지는, ‘경건한’ 가치관과 권력행사를 꿰뚫고, 이를 창의적으로 비판하며 사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대학이다. 내부로부터 인간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매몰된 대학은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의 의문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신자유주의적 삶의 방식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학이 기업 논리, 이윤 추구의 동기를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기관과 그 안에 속해 있는 개인은 전혀 별개의 존재이다. 이 대학이라는 공간 속에서, 우리는 더 치열하게 읽고, 쓰고, 말해야 한다. 우리를 통치하는 주체, 통치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고, 다른 방식의 삶을 계속해서 상상하여야 한다. 이 상상에 학문의 진정한 기능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필자의 가슴을 울렸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2003년,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은 수전 손택이 행한 수상 연설의 일부이다.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16] 비단 문학뿐만이 아니다. 학문이 경견함을 반박하지 못할 때, 사회는 권력과 지배 담론에 회의를 품을 능력을 잃게 된다. 그리고 대학은 이 학문이 이루어지는 주된 장소이다.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에 경도되어 대학이 품은, 상상을 가능케 하는 힘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폴라니(홍기빈 역), 『거대한 전환』, 2009, 243.
[2] 정확히는 ‘상품인 동시에 기업’이다. 이 점은 이후,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교원과 학생은 권력을 지닌 존재에 의해 규제되고 선택받는 객체(상품)인 동시에, 스스로의 행위를 규제하는 주체(기업)이다.
[3] “대학·법인·국가 책임 묻지 않고 ‘강사법’ 탓만”, 미디어오늘, 2020.01.11.
[4] “강사법 시행 첫 학기 강좌 수 5800개 줄었다”, 뉴시스, 2019.10.31.
[5] 더불어 민주당 박경미 의원실의 ‘서울지역 대규모 사립대학 진단’을 보면, 서울지역 대규모 대학의 등록금 수입은 2013년 대비 2018년에 735억 증가하였다. 재정수입총액은 같은 기간 1조 3천억 가량 증가하였다. (“대학·법인·국가 책임 묻지 않고 ‘강사법’ 탓만”, 미디어오늘, 2020.01.11.) 물론, 모든 대학이 여유로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은 아니다.
[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78597&cid=42107&categoryId=42107
[7] “추락하는 인문학... 10년간 인문사회계열 학과 15% 감소”, 파이낸셜뉴스, 2019.04.16.
[8] 고부응, 「한국 대학의 기업화」,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0, 27.
[9] 배성인, 「교육부의 관료주의 행태와 신자유주의 대학정책: 쌍방향의 동일성과 극복과제」, 대학: 담론과 쟁점, 한국대학학회, 2018, 96.
[10] http://lincplus.nrf.re.kr
[11] 위 글, 28-31
[12] 파놉티콘은 벤담이 고안한, 중앙의 간수들이 일방적으로 죄인을 감시할 수 있도록 기획된 원통형 감옥이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국가의 권력행사방식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서 이 파놉티콘의 개념을 차용하였다.
[13] 주형일,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대학 교원의 주체화」, 한국언론정보학보, 한국언론정보학회, 2019, 38.
[14] 자유주의적 통치가 종/인구를 대상으로 한다는 푸코의 주장은 이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행위에는 출산과 같은 인구 생산의 행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15] 폴라니, 앞의 책, 244.
[16]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