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찌부찌
※ 주의 ※ 본 글에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이하 ‘여보셔’)》의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무 방향제 냄새가 났다. 오랜만이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극장 로비에 다다랐을 때에는 순전히 반가운 마음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마지막으로 이 공연을 본 건 대학 합격 통지를 받은 직후였다. 그 낯설었던 겨울날의 기분 좋은 긴장감을 떠올리며 극장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알고 있던 그대로의 모습을 기대했다. 지난 시즌과 변한 것이 없기를 바랐다. 좋지 못한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끝까지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2년 만에 돌아온 ‘여신님’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섯 군인이 살아나가는 무인도 또한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실이 너무도 불편했다.
올해로 여섯 번째 막을 올리는 이 뮤지컬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군 대위 ‘한영범’과 부하 ‘신석구’,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감독 아래 배를 타고 포로로 이송되던 인민군 ‘이창섭’과 ‘류순호’, ‘조동현’과 ‘변주화’는 갑자기 덮친 풍랑으로 인해 무인도에 좌초되고 만다. 초반 분위기는 살벌하다. 고장난 배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순호는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로 정신이 망가진 상태였다. 평소에도 꾀를 잘 내고 입담이 좋았던 영범은 어느 밤, 그를 불러 이 섬에 사는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 말한다.
여신은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군인들 사이에 피어난다. 순호는 여신의 존재에 흠뻑 빠져 예의와 존중을 중시하는 여신님의 부탁을 다 들어줄 것을 다짐한다. 영범은 여신의 부탁이라며 순호가 배를 고치도록 유도하고, 이어 인민군 대장인 창섭에게 ‘배를 고치고 싶다면 모두가 여신님의 존재를 믿는 척 해야 한다’고 구슬려 섬을 감돌던 불신을 일시적으로 잠재운다. 어린 순호가 밝은 소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준 여신이라는 존재는 이렇듯 수단으로서 섬 위에 첫 발을 딛는다. “현명하고 자애롭고 용맹한” 섬의 여신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여섯 군인은 싸움을 멈추고, 서로간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등 점차 전쟁으로 가려졌던 ‘인간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신은 군인들 각각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각자가 가장 그리워하는 이의 모양새를 하고 나타나는 여신은 그들의 가장 여린 면, 또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부드러이 상기시킨다. 막연하게 있다고만 애써 믿었던 여신에게서 가장 그리운 모습을 읽을 때, 군인들은 진심으로 여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가상의 여신이 어느새 그들의 삶에 ‘스며드는’ 것이다. 공연은 그렇게 순서대로 인물들이 그리는 여신의 모습과 숨겨진 과거를 회상의 형식으로 보여주면서 이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군인으로서 전쟁에 휘말려 억압되던 인간적인 모습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공연은 이 ‘스며듦’의 형상을, 각자의 회상이 이루어지는 방식에서 조화롭고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걸 순호에게 증명해보이기 위해 떠밀려서 여신의 외모를 묘사해야 했던 ‘석구’가 여신을 통해 자신이 짝사랑하던 동네 과부 누나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여신은 누나로, 다른 군인들은 석구의 마음을 드러내는 코러스로 분하며 동시에 석구가 느꼈을 설렘과 슬픔을 함께 공유한다. 북한으로 돌아가 돈을 벌어서, 기생 일로 생계를 도맡던 동생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주화’의 회상에서도 군인들은 그가 불러낸 동생의 환상과 함께 춤을 추며 주화의 과거에 스며든다.
각자의 회상 장면에서 등장하는 나머지 군인들은 단순히 노래와 장면을 풍성하게 해줄 앙상블의 역할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여신이란 이름의 ‘정(情)’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음을 암시한다. 회상이 거듭될수록 군인들 사이의 진실된 연대는 선명해진다. 각자의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 상대편에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도 그들은 서로의 안위를 걱정한다. 이렇게 서로를 친하게 여겼던 탓일까, 후반부에 이들이 또 한 번 생사의 기로에 놓이며 서슬 퍼런 눈을 보여줄 때는 가장 처음의 포로 이송선 장면과 다르게 슬픈 마음이 일곤 한다. ‘이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강제로 인격이 훼손된 것이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따위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목표라면 목표일 것이기에.
여신은 순호의 바람이었다. 극의 후반부에서 순호는 정신이 망가진 연기를 할 뿐이지, 실제로 정신이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비밀이 밝혀진다. 순호에게야말로 여신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생존과 관련되어있었다. 전쟁 중에 형을 잃고, 의미없는 살상에 환멸을 느낀 순호는 차라리 아무 것도 못하는 척을 하며 편을 가리지 않고 어느 쪽에라도 전쟁에 도움이 될 모든 행동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인도가 폭격으로 혼란한 중에 순호도 여신을 만난다. 여신은 다른 인물의 회상이 아닌 정말 ‘여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신의 것이라 믿었던 가치들이 결국은 군인들 자신의 것이며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냉정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또 한 명의 여신을 만들었던 순호는 그때에서야 여신이 “또 다른 나였음을” 깨닫는다.
《여보셔》는 전쟁과 같은 억압에 짓눌려 미처 돌아보지 못한 일상과 인간성의 회복, 즉 탱크 앞의 꽃처럼 물리적으로는 나약하지만 상징적으로 거대한 무언가를 우리 앞에 내어놓는다. 연출진과 매스컴은 이를 “휴머니즘”이라 소개했다. 합리성과 효율만을 우선적인 가치로 둔 채 흘러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쩌면 살아남기만을 바라며 그 이면의 따뜻한 가치들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은 일상의 모습을 한 전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엔 언제나 일상도 존재한다. 《여보셔》의 군인들 모두가 여신이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무너진 신뢰와 메마른 정을 회복하는 일.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를 위한 기다림. 그 꽃이 피어날 토양을 만들어나가자는 메시지를 뮤지컬은 전한다. 이것이 공연이 노리는 휴머니즘이며, 이 휴머니즘을 직시하는 건 관객인 우리들의 몫이리라.
형체 없는 권력이, 또 그로부터 파생된 ‘맹목적인 경쟁’이 사람들을 갈라놓고 괴롭힌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만큼 삭막한 사회에서 야기된 문제들은 오래도록 해결해야 할 일들로서 자리매김했다. 《웰컴 투 동막골(2005)》 이나 《공동경비구역 JSA(2000)》처럼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인정이 메마른 세상 속 휴머니즘의 회복’과 같은 주제를 다룬 다양한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현상도 자연스럽다. 《여보셔》 또한 그 중에 하나고, 넘버와 조명 연출, 드라마적 요소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웰메이드 창작뮤지컬로 불리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공연이 휴머니즘, 즉 사람다움을 말하는 방식이 ‘여전히 괜찮은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여보셔》에 등장하는 주된 등장인물들은 남성 군인이다. 물론 남자 군인이라 해서 모두가 원래부터 마초적인 ‘남성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작품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군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유로 그러한 ‘남성성’을 강요받는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한편 이들은 ‘여신님’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여성을 전제로 하는 존재를 통해 잊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데, 하필이면 이 여신은 또 사회적으로 여성성이라 명명되는 특징을 가득 담고 있다. 자애롭고 현명하고, 부드럽고 용감하다. 평화를 사랑하며 춤과 꾸미기, 꽃과 자장가 등의 모티프로 군인들 사이를 넘나든다. 이 여성적 특징은 비단 성격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여신의 외형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섬의 신이 어떤 성을 가지고 있는지 특정하지 않았던 영범이 신을 더러 ‘아주 아름다운 분’이라 설명하자 곧장 ‘여자야?’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이번 시즌에서 없어지기는 했지만, 한때는 여신의 외모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대놓고 가슴의 크기를 묻는 대사도 있었다. ‘현명하고 부드러운 여성이 단순무식하고 싸움밖에 모르는 남성들을 성장시킨다’는, 얼핏 보면 긍정적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선입견들과 부족한 젠더 의식으로 가득 찬 테마가 공연 전체를 관통한다. 사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신’은 ‘신’이기 이전에 ‘여자’였던 것이다.
‘여신’이 다른 군인들의 회상에서 재현되는 방식 또한 그렇다. 영범을 기다리는 어린 딸, 석구를 사랑하지만 스스로의 처지와 그로 인해 석구가 받을 부정적 시선을 생각하며 속으로 참기만 하는 과부 누나, 오빠를 위해 기생이 되었음에도 오빠와 함께 사는 것만을 바라는 밝은 여동생, 전쟁통에 사람을 여럿 죽인 아들의 벌을 자신이 다 받겠다는 늙은 어머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남성 중심적 예술 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던 여성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전부가, 군인 개개인이 여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작품에는 순호의 형, 동현의 아버지와 같은 ‘남성’ 인물도 등장하는데, 정작 이들은 여신이 아닌 다른 군인들에 의해 재현된다.). 본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신적 권한을 주는 것이 여성이 가진 힘을 드러내는 장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국 여성성에 대한 신화와 가상의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장치일 뿐이다. 심지어 여신이 보편 관념인 ‘신’으로서 등장할 때조차도 꽃을 엮어 만든 관을 쓰고 하얗고 나풀거리는 민소매 드레스를 입는다는 사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보조적인 역할로서 남성 등장인물들을 감싸기만 한다는 점은 이 공연이 얼마나 여성을 ‘여성’으로밖에 보고 있지 못하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젊고 신체 건강한 남성’이 디폴트가 되는 사회다. 이 하나의 틀로 모든 인간의 적정 업무량, 적정 약 복용량 등이 계산된다. 젊은 남성이 곧 ‘사람’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읽혀온 역사는 유구하다. 굳이 젊지 않아도, 남성이 사람을 대표해온 역사 또한 길다. 제도상으로는 바뀌었을지 몰라도 사회·문화적 요소 내의 남성 중심적 인식은 여전히 건재하다. 직업, 특히 전문직종을 나타내는 용어 앞에 ‘남’이 아닌 ‘여’가 자주 붙는 일이 그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학습된 사람들은 대상의 성별과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키워드에 남성을 떠올리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성별 정보가 전혀 제공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남성을 기대하다가 인물이 비-남성임이 밝혀지는 지표에서 멈칫하는 경우도 많다.
《여보셔》를 보며 눈물이 고이는 장면이 몇 군데 있었다. 과부 누나의 장면에서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월남한 가족들과 가족이 아니지만 여전히 자신을 아껴 주는 인민군 상위 사이에서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동현’의 모습은 여전히 가슴아팠다. 누구보다도 여신님 만들기에 비협조적이었던 인물이 마지막 순간에 가장 여신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깨달은 이후 분란으로 무너진 “여신님 자리”를 황급히 수습하고, 그 과정에서 바닥에 흩어진 여신님의 꽃들을 다시 끼워 장식하는 연출에 그의 절실함은 배가 된다. 결말부에서 이들이 헤어지는 장면 또한 슬펐다. 서로를 너무 아끼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차라리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전쟁이 낳은 비극적인 면모가 보였다. 공연장을 나오며 고민했다. 이 두 장면이 다른 장면에 비해 감정을 이입하기 쉬웠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알아차렸다. 전술한 장면들은 ‘여신’ 캐릭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관객이 남성들을 ‘사람’으로 인식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한다.
이 뮤지컬을 만든 극작가와 작곡가는 《여보셔》 제작 이후, 전작이 사회적 성역할을 너무 공고히 하고 불충분한 젠더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인지하여 오랜 시간의 공부 끝에 《레드북》이라는 새 뮤지컬을 만든 바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철저히 가로막던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며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낸다. 그 과정에서 많은 조력자 여성들을 만나 연대하고, 성별을 이유로 자신을 ‘다르게’ 대우하려 하던 ‘브라운’의 가치관을 뒤바꿔 놓는 등 여러 유의미한 행보를 남긴다. 부족했던 지점을 인식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다른 누구보다도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좋은 자세이기도 하다. 이상한 점은, 제작진 스스로 이전 작품의 부족한 지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극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드북》이 아닌 《여보셔》가 사람들 앞에 더 자주, 먼저 나와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해마다 다양한 공연이 오르내리는 대학로이기에, 대학로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논할 때 ‘재공연’은 꽤 중요한 주제다. 그게 무엇이든, 한 번 떠난 것이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대개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관객의 수가 곧 수입을 결정하는 상업극은 무엇보다 경제적 이익 창출이라는 명백한 목적이 첫째가 되겠지만, 그 외에도 대학로에서 ‘재공연’되는 극들이 돌아오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가 있거나, 극이 상연되는 시기에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보셔》는 초연부터 줄곧 대학로 대표 “휴머니즘” 뮤지컬을 자처하며, 이를 홍보에 적극 활용해왔다. 그리고 이 홍보 방식은 늘 효과가 좋았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단 하나의 공연. 누구에게나 있는 따뜻한 인간성의 회복을 기원한다는 공연의 주된 메시지는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공연 소식이 대학로에 돌기 시작하면 이전 시즌 공연을 본 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많은 관심이 쏠릴 정도로, 대학로 상업 공연 분야에서 《여보셔》가 가지는 위치는 꽤나 독보적이기에.
《여보셔》와 같이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고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극이 다시금 관객을 만날 때에는 여러 모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전 시즌과 지금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고려했을 때 관객들이 그 메시지 자체와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을 여전히 동일하게 수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여보셔》에서 말하는 휴머니즘의 경우 사전적 의미는 고정되었을지 몰라도,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휴머니즘은 나날이 다양하고 세밀하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6년 전 사람들을 울리고,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고 해서 과연 지금도 같은 스토리와 대사, 가사로 똑같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보편 인간’이라 여겼던 인간상이 사실은 매우 한정된 집단만을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를 위한 휴머니즘을, 기존에도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남성 군인들만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착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빛날 수 있기를”. 《여보셔》 6번째 개막을 맞아 연출가가 프로그램북에 남긴 말이다. 착한 이야기가 맞다. 따뜻한 메시지, 이를 풍성하게 해주는 노래며 장면 연출은 정말 치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정말로 오래도록 빛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날카로운 비평가의 눈빛이 아닌, 반짝이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공연이 ‘변함없이 빛나려면’ 정말 우리의 마음 속에만 담아두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년 만에 돌아온 ‘여신님’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섯 군인이 살아나가는 무인도 또한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보아도 알고 있던 그대로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불편했던 것은 어째서일까. 너무도 좋은, 그러나 그만큼 오래되어 지금의 변화를 끌어안기에 힘이 모자라 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착한 공연이 오래도록 빛나기 위해 공연은 어떤 힘을 어디에 써야 할까. 그 전에, 오래도록 빛날 수 있을까. 여전히 메마른 사회에 촉촉한 빗물을 전하기 위해, ‘여신님’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 계셔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