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停滯)되는 정체(正體)성 정치?

편집위원 루

by 문우편집위원회

들어가며


정체성이라는 개념과 정체성 정치라는 전략은 페미니즘/퀴어 이론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는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개인 특질로 보편성과 정상성이라는 사회 구조에 귀납적 균열을 내고자 하는 시도로써 여러 다른 문화적 요소에도 적용되고자 시도되어왔다. 이러한 지금의 담론장에서 정체성 정치는 과연 어디까지 새롭게 상상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더 폭넓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한계를 외면하고 지금에 안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 소수자 권리 담론에 대한 논의는 인간 역사의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현재 세계적인 소수자 권리 담론은 학계의 주류를 잡고 있는 서구 지역, 특히 영어권 국가의 담론 지형을 따라가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및 퀴어 운동 등을 위시한 소수자 권리 담론은 현재 정체성 정치가 잡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에 따라 한국의 인권 담론장 역시 정체성 정치가 가장 중요하고 흔한 열쇠로 여겨진다.[1] 물론 사회에는 여전히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며 억압적인 기존 개념을 해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계속 필요하다. 이때 정체성 정치는 더 포용적이고 다원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기초적이고 분명히 유효한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현 담론장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완벽한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과, ‘정체성’과 ‘당사자성’, ‘피해자성’ 등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지만 정체성 정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

해당 글에서는 정체성 개념이 차용되는 부분을 ‘젠더 정체성’에 한정하지 않고 여러 인권 담론을 예로 들어 한국에서 행해지는 정체성 정치의 현주소를 돌아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 정체성 정치의 효용을 전면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 개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소수자성과 사회적 위치성을 다각적으로 고민하거나 그러한 사고 지평 확장을 시작하는 데에 해당 글이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아래의 세 가지 논점은 예시로 든 상황에서만 단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며 하나의 예시가 담론장의 모든 양상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서로 맞닿는 지점이 있음을 미리 밝히며 글을 연다.



유리한 조건을 가진 부분집단의 과대표


같은 정체성 이름으로 묶이는 소수자 집단이라 해도 결코 내적으로도 세세히 동질하지는 않다. 모든 여성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 단일한 결의 삶을 살지 않듯 말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주요하게 내세우는 소수자 집단에서는 그 안에서도 특히 목소리를 내기 용이한 조건의 소집단이 해당 소수자 집단 전체의 삶을 대표하는 것처럼 비치는 경향이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같은 경험 하에 모인 소수자의 군집에서도 마이크를 쥐기에 유리한 조건이 있다. 집단 내의 특정 개인들이 고학력 혹은 고학벌이거나, 충분한 재력이 있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 경우 집단을 대변하게 된 소집단이 정체성 이름 전체를 지키기 위해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잦은데, 이때 집단 전체의 성격으로 제시되는 특성에 동화되기에 실패한 나머지 소집단의 구성원은 다시금 지워지거나 아예 담론장을 이탈하고 만다. 이는 동질성에 기반한 포괄적 결집이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인 정체성 정치의 효과에 근본적으로 반(反)하는 방향이다. 혹은 이러한 파편화가 정립되지 않은 채 무수히 세분된 정체화 시도로 연결되는 경우, 담론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을 어렵게 만든다는 우려점으로도 이어진다.


사례 1.

장애학은 젠더학의 범주 바깥에서 정체성 정치를 적극 차용한 주요 분야다. 물론 현 사회에서는 어떤 장애에 대한 이야기든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애 이야기는 여러 장애인 중에서도 신체장애를 가졌음에도 사고기능에는 문제가 없고 자신의 양육 및 교육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집안의 재력과 따뜻한 가족 커뮤니티를 가진 경우가 절대다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달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직접 전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식의 언어 소통이 용이하지 않다. 그들의 이야기는 비당사자(주로 돌봄인)의 담화에 치중되어 있거나 ‘그나마 보편적 사회생활 수준에 도달 가능할 수 있기도 한[2]’ 개인의 발화로 한정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연상하게 되는 이미지와 기호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다. 가장 가시적으로 보이는 장애이기 때문일 것이나, 휠체어는 타지 않지만 다른 신체 작용에 어려움이 있는 신체장애인이나 규범적 언어 소통이 쉽지 않은 지체장애인, 일상 유지가 불안정한 정신장애인 등은 여전히 사회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않고 지워지는 상황도 돌아보아야 한다.


사례 2.

정신질환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고 정신과 방문의 장벽을 낮추기 위한 움직임 중 하나로, 정신질환을 정신병의 줄임말인 ‘정병’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정병’이라는 말은 기존에 정신병을 바라보던 낙인과 멸시의 무게를 덜기 위해 정신질환 당사자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병러(-er[3])’, ‘정병이 터지다’ 등의 표현으로 정신질환을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적극 차용하며 해당 표현 아래에서 정신질환 당사자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정신질환자 전체에서 알코올 혹은 니코틴 의존을 제외하면 가장 수가 많고[4] 사회 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비율이 높은 편인 정동장애(우울증, 조울증 등) 및 일부 불안장애 환자의 것으로 점유되었다. 조현장애나 성격장애 등 다른 정신질환자의 경험은 그 ‘내부’에서조차 다시 지워지고, 오히려 정신질환자라고 통칭되는 전체 집단만 놓고 보면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정동장애에게 ‘정(신)병’이라는 이름이자 정체성을 뺏긴 셈이다. 또한 ‘정병’이라는 표현은 주로 공황적인 정신질환 증상을 의미하는데, 이는 폭발적인 발작 증세가 두드러지지 않는 만성 비-정동장애 정신질환자의 경험을 정신질환 공동체나 담론장에서 분리하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했다. 한편 ‘정병러’라는 이름 아래 모인 정동장애, 불안장애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에 대항해 더욱더 폐쇄적이고 방어적으로 모여들었고, 결국 커뮤니티의 순환을 저해하는 역설을 야기하기도 했다.



계급과 자본 문제의 개인화


정체성으로서 다뤄지는 특성은 대체로 선험적이다. 이때 개인의 인식을 경험화하고 선언하는 과정은 종종 계급 문제를 개인에게 교차되는 여러 특성 중 하나로 파편화하고, 그만한 자본과 기회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소수자성(이라 규정된 것)을 세상의 가장 큰 부당함으로 인식하기 쉽게 만든다. 선험적 소수자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공존 전략은 문화 정치나 소비자 정치로 빠지기에 매우 취약하다. 그러나 자본에 따른 계급성은 배제와 동일시에 기반한 수차례의 집단 재정의를 통해 내집단을 구성해내는 젠더나 퀴어니스 등의 요인에 비해 훨씬 덜 가변적이며 오히려 개념의 재정의와 확장을 통한 사회의 다원화가 아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이때의 정체성 정치는 포퓰리즘에 기반하여 사람들을 결집하고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 수는 있으나 소비자나 문화 향유자로서의 정체성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결국 구조적 불평등을 가리는 결과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사례 1.

어떤 운동에 있어서든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는 문구는 강력한 당위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 ‘사람다운 삶’은 각자에게 너무 다르게 다가선다. 특히 개인이 꿈꾸는 사람다움의 기준은 계급성의 차이를 두고 매우 크게 벌어진다. 여기서 ‘사람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현재의 인권 담론은 기본적 의식주의 권리를 넘어 ‘존엄할 권리’를 반드시 수반한다. 그러나 존엄성이란 굉장히 현대적 개념이다. 인권 개념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는 프랑스 인권선언에 따르면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하고, 미국 독립선언 또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에게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하에서 인권의 기본 전제이자 정당성으로 여겨지는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완전히 평등한가? 이것을 과연 ‘사람다운 삶’이라는 기준으로 통칭할 수 있는가? 빈자와 부자가 현실적으로 상상하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다운 삶’은 과연 얼마나 같고 다른가?


사례 2.

정체성 정치는 2000년대에 들어 강력하게 떠오른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체성 정치를 뜻하는 사회적 ‘인정’을 향한 투쟁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문화 정치’로 귀결되었고, 정체성의 상품화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공정한 ‘분배’를 향한 투쟁을 약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5] PC함이 거대자본과 손을 잡고서 없어서는 안 될 흥행 요소로 작용하고 일종의 문화적 트렌드가 되어가는 동안 실제 소수자의 삶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문화 매체는 대중에게 사회적 소수자로 규정되는 인간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삶을 전달하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전달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적절한 수준으로만’ 움직이는 비겁한 수단이기도 하다. 특정 정체성 집단 혹은 개인의 삶을 다루는 매체가 유행을 타고 인기를 얻는 작금의 흐름은 종종 사회적 약자의 삶을 조명한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삶을 보기 좋게 다듬어 전시하는 데에서 그치고 만다. 또한 여전히 대중문화 매체에 손이 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창작에 무게를 두는 전략이 그저 일부 문화적 중산층이나 상류층만을 타깃으로 하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계급 이슈에 대한 투쟁 의식을 흐리게 하고, 개인을 지나치게 파편화시키는 양상은 정체성 정치에서 경계해야 할 주요한 문제다.



고통을 전시하고 견주어 최고의 ‘피해자 되기’[6]


정체성 정치의 무대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전제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자칫 경험의 ‘당사자성’을 중요시하는 장에서 가장 큰 고통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은 발언권을 가지도록 장려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슬프게도, 여전히 담론장 중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사람들은 ‘피해자’를 맹렬히 비난하고 ‘가해자’에게는 쉽게 귀를 기울여 공감해주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과 폭력의 경험이 이야기되는 장에서 어떤 방향의 논의가 필요하며 무엇을 살펴봐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무결한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발화가 가능해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회에서 이해받을 만한 서사로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자원으로 삼게 된다.[7] 그 과정에서 고통의 경험들은 전달되기 쉽게 강렬한 한 문장, 한 단어로 일축된다. 대표적으로 ‘빻았다’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나 작품을 지칭하는 데서 출발한 단어는 이제 고민 없이 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는 데에 쓰인다.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잘못되었고,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다. ‘잘못된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전달하는 양상은 피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자신이나 공동체의 부당한 경험에 입을 열 수 있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험의 말하기를 납작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부른다.


사례 1.

‘ㅇㅇ혐오는 없다’(예컨대, ‘남성혐오는 없다’라는 말은 페미니즘에서 쉽게 통용되던 명제다.[8])라는 말은 종종 본질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착취당하는 정체성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는 소수자가 억압에 대한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프로파간다가 될 수는 있겠으나, 논의 전체의 논리적 당위를 흐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종종 가장 보편적인 여성의 경험을 상정하고 그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한다. 그리고 해당 경험을 겪지 못했다고 해서 여성억압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논지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를 다르게 잡는 집단에 있어 이는 굉장히 귀납적 논리로, 반례 하나만 나와도 위태롭다. 모든 여성이 공통으로 겪는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반드시 누군가는 ‘어, 나는 아닌데?’를 되뇌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누군가의 ‘나는 아닌데?’는 용인되고, 누군가의 것은 그렇지 않다. 이 기준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자신의 경험에 보편적이고 정당하다는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성들은 각자가 경험하는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견주고 줄을 세우게 된다.


사례 2.

정체성 정치의 말하기에서 피억압자는 약자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기서 약자성은 피억압자가 기울어진 구조의 ‘피해자’라는 전제를 담보로 하기에 자신의 불행과 피해 사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온 힘 다해 증명해야만 가장 널리 수용 가능한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정체성 모델은 소수자로서 겪은 불합리를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도구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달콤함을 가진다. 내가 가장 불행하고 가장 약하기에, 나의 고통은 부당하며 지금 이렇게 아프고 억울해해도 됨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을 주저앉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이라서 성소수자라서 이렇게 불행하고 부당한 대우를 겪는다. 나의 삶의 부당함을 야기하는 이 요인은 많은 사회문제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보아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계속 자라나다 보면 자신의 고통에 잠식되어 다른 환경의 사람들의 삶은 돌아보기 어렵게 가로막힌다. 결과적으로 정체성 정치의 효용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나 맥락을 전부 나열해서 줄 세우고, 억압의 요인이 서로 ‘교차하는’ 모델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여러 축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도식이 과연 어디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지속적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


위와 같은 비판점이 정체성 정치 모델의 필연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정치적 접근에 있어 어떤 하나의 툴을 절대화하지 않고, 여러 상황에 맞춰 서로 다른 도구를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재 결여되어 있음에 주목하자. 정체성을 절대적인 도구로 보고 수호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로 여기며 이를 통해 모든 걸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정체성 정치 전략을 더욱 고착화하고 정체시킨다.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거나 동일한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들에게 집단적 범주를 설정하는 과정의 유효성과 한계를 계속 고찰하고 섬세한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고민은 ‘정체성’ 개념 경계의 가능성과 ‘당사자’라는 개념 아래의 유사 경험이 어디까지 묶일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버틀러는 정체성이 환상의 구조 위에서만 생산되는 유령적 효과이며, 자신이 아닌 것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자기동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행위라 말했다.[9] 다시 말해, 잉여 영역이 역설적이게도 존재를 구성하고, 그 구성행위가 매 순간 변화하면서 존재의 정체성을 가변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10] 이렇듯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본질적 가변성과 임의성을 딛고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실천의 구심을 찾을 수 있을까? 정체성 정치의 방향성이나 향후를 논하면서 '정체성' 개념을 어디까지 포괄하거나 확장하거나 할 수 있을지, 정체성은 어디까지 분화될 수 있고, 어디까지의 세분화가 유효하게 작용할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유동성, 확장성, 포괄성을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기회의 종류가 제한되고 가능성이 통제되는 사회는 하나의 정상성을 향한 경로에 더욱 집착하기 마련이다. 조지프 피시킨은 이를 ‘병목 사회’라 칭했다. 단일하고 공고한 정상 경로를 가진 병목이 공정해지기 위해서는 병목의 우회로가 많이 제공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기회와 선택지의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정체성 정치 모델의 확장 가능성 또한 세상을 보는 다원적 시각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개인의 다양성이 모두 확보되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지금을 붙잡고 계속 끌어가는 것보다는 더 나은 방향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정체성 정치는 부숴야 할 낡은 방안도, 넘어가야 할 높은 산도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다양한 방식의 존중과 성찰이 가능한 사회로 걸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며, 현재 어떤 부분에서 불가피한 혹은 시정 가능한 한계를 드러내는지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과제이다.


[1] 그러나 한국에서의 정체성 정치는 서구와 논의의 결이나 발전되어 온 방향이 많이 다르다. 흔히 서구는 높은 수준의 인권의식을 발전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적인 인권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시작되었음은 물론이고, 여전히 비서구권에 비해 언어적이고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서구 학계의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옳은 것으로 여져질 뿐 이러한 방향이 절대적으로 옳다 여길 부분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전략을 모색함에 있어 이를 분명히 분리해서 사고하는 중요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시민 의식이나 운동 전략 등이 당연히 따라야 하는 과정이 있고, 한국이 미국의 경로를 아직 따라잡지 못했다는 시각은 자칫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역설적으로 식민주의적 사고에 말려들어가는 것일 수 있다.

[2] 지체장애인 중에서도 평생 밀접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일정한 생활 패턴이 잡히고 나면 일상 이행이 가능한 사람도 있다

[3] 어떤 물건이나 특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나 사물 (옥스포드 영한사전)

[4] 「정신질환 실태조사」(*2001년이 최초조사이며, 5년주기 조사를 실시).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441.

[5] 이지완. 「미국에서 정체성 정치가 비판받는 이유」. 『사회주의자』. 2018.07,02. http://socialist.kr/why-identity-politics-is-criticized-in-the-us/.

[6] 피해자/가해자의 이분 구도가 경험 당사자에게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에는 확실히 경계를 그어야 한다는 평면적 상황 해석을 촉구하며 사건의 구조를 파악하여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의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저해한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다. 현실에서 폭력(특히 성폭력) 상황이 공론화되었을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당한 사람을 감싸고 폭력을 행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논조가 절대 아님을 덧붙인다.

[7] 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들어가는 글 - 우리는 피해자라는 역할을 거부한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10쪽.

[8] ‘남성혐오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통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혐오는 구조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지만, 상황은 변할 수 있고 맥락상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권김현영. 「들어가는 말 – 진화하는 영혼, 진화하는 페미니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휴머니스트. 2019. 4~5쪽.)

[9] 조현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 : 퀴어 정치학과 A. 카터의 <서커스의 밤>」. 내일을 여는 지식. 2007. 17쪽.

[10] 위의 글.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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