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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4일 김금희 작가에 이어 최은영, 이기호 작가가 문학사상사에서 시상하는 44회 이상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1] 같은 달 31일, 윤이형 작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수상한 이상문학상을 반납하고자 한다며, 여태껏 이어져 온 불공정한 관행에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작가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이라 판단하고 절필 의사를 밝혔다. 이후에도 윤이형 작가는 문학계의 저작권 인식 미비에 대한 문제 제기뿐 아니라, 다양한 문제 상황에 개인들이 항의하고 자기검열하고 반성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꾸준히 언급해왔다. 결국 문학사상은 대상 수상작의 ‘저작권 3년 양도’에 관한 사항을 ‘출판권 1년 설정’으로 정정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입장문을 공식 페이스북에 게시했으며, 올해 이상문학상은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 불공정 조항 한두 가지에 대한 항의가 문제 해결로 곧바로 이어지더라도 눈앞에 닥친 사태의 불을 끄는 데에 급급할 뿐, 근본적으로 업계에서 이어져 오던 관습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학계 내외의 미투 운동에서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본인은 이것이 “선언”씩이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3])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꾸준히 집필 활동을 이어 오던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도 주목할 계기가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가. 많은 언론은 ‘절필’이라는 단어를 경쟁적으로 사용해 보도했다. 이상문학상, 문학사상, 불공정, 이런 단어들보다도 개인의 이름이 먼저 호명되었다. 물론 이를 계기로 출판계의 낡은 관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먼저 요청하지 않는 이상 출판사가 저작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던 것, 그조차 명백한 매뉴얼 없이 상황이나 직원에 따라 변동되어온 상황 등은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윤이형 작가가 트위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상문학상이라는 권위가 아니었다면[4], 개인의 생계를 내던진 투서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떤 사안에 연대하기 위해 공감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본인의 피해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할수록 뭉뚱그려진 존재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개인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타인이 아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 본인이 공감하기 쉬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부터 관심이 생기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고통이,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그것이 해결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연 그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름은 많은 사람을 모으게 한다. 1970년 전태일 노동운동가의 분신으로 노동권에 대한 관심이 이끌어내졌고, 6월 항쟁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사망에 이른 것에 분노한 이들이 모이며 도화선이 되었으며 서지현 검사가 ‘그 법조계’에서 안태근 검사의 성추행을 밝힌 이후로 다양한 분야에서도 미투 폭로가 이어졌다. 이들이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불이익과 수많은 시선을 감수하는 이들, 본인을 희생한 이들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 피해, 고통이 사회적 담론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의사는 반영되기 어렵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운동의 원동력이 되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피해자가 피해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럽게 공동체에서 합의되어야 한다[5]. 서지현 검사는 “제가 미투의 상징이 되고 많은 여성이 절 보고 용기를 내고 저를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고 해서 (사표를 내지 않았다). 제 폭로 이후 많은 피해자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제가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한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면 버텨보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6]. 하지만 (어떤 경험들을 비슷하다고 부를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만으로, 혹은 그런 경험이 안타깝게 여겨진다는 이유만으로 지속적으로 연대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권김현영은 피해자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미투’를 해야 하는 정체성 정치의 현주소를 지적하며 “문제는 폭력이 발생한 것 자체가 아니라 폭력 자체가 제도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7]. 기존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8] 기능하는 상황이었다면 고발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근본적인 딜레마 상황을 보여 준다. 개인적인 해소와 일상의 회복을 위해 말하는 경험 자체가 중요한 상황이기만 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의 끝에 내몰린 피해자는 늘 본인의 고통을 드러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의 ‘사연’이 안타까울수록, 고통이 커 보일수록 주목을 받기 쉽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혹은 기존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적절한 사과를 받기 위해,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본인을 노출시키고 ‘호소’해야만 한다. 그 과정을 견뎌 낼 자신이 없는 사람은 말하기 자체를 포기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는 길에 선다.
일반적으로 피해자의 말하기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경험이 개인 밖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언어를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데, 언어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고발이나 폭로가 있을 때 사람들(혹은 가해자)은 쉬이 ‘법대로 하자’, ‘시비는 법정에서 가리자’는 말을 한다. 그러나 경험을 사적 언어가 아닌 법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도 않고 난이도가 모두에게 동일하지도 않다. 성원으로 인정받은 이들의 합의를 통해 축적되어 온 법 역시 절대적인 선이나 윤리의 기준이 아닌 사회적 구성물이다. 최저선으로 기능하고 있는 법의 언어로조차 가공되지 않은 말들은 그저 소리나 음성, 울부짖음에 가깝게 해석된다.[9] 경험 자체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가해자들이 위와 같이 발화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의 말하기는 늘 한정되어 있다. 정해진 도식 안에서 개인이 고통을 이야기하다 보면 각자의 맥락과 특수성은 소거되고 본질적인 구조에 대한 이야기만이 남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하면 이들의 목소리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져 하루빨리 해소되어야 할 문제로 다루어지지만, 이와 동시에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이 아닌 경험은 삭제되거나 편입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렇게 다듬어진 이야기는 쉽게 문화 상품이 된다. 감동적인 사연을 넘어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 하에 고통이 장삿거리가 된다[10]. 시장에게는 훌륭한 핑계가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했다, 지금까지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등의 포장이 그것이다. 불행한 일을 겪은 이를 마이크 앞에 잠깐 세워 두고 적당한 관심을 받았을 때쯤 또 다른 사람을 호출한다. 같은 공식으로 말하는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과거로 내버려 둔 채 더 자극적이고 관심을 끌 만한 ‘사연’을 찾아오는 것이다. 다양한 매체로 고통을 전시하는 양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꾸준히 있어 왔지만, 더 큰 고통과 몸부림이 매일같이 새로 나타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고통을 겪은 개인은 끊임없는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어째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찾아왔는지, 어디서부터 누구의 잘못인지, 지금을 버텨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중 마지막 질문에 가장 간단하게 주어질 수 있는 답변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이 가치 없이 흘러갈 고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라고 의미화하는 것이다. 고통의 경험을 나누고 이것이 역사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괴로움의 시간도 어느 정도는 버틸 만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끊임없는 투쟁과 합의 뒤에만 가능하다. 소수의 목소리일수록, 약자의 목소리일수록 이들의 고통은 무의미한 절규로만 남는다. 오래전부터 폭력과 불평등이라고 합의되어 온 일들은 법의 처벌을 기대해볼 수 있고, 그게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비판받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작은, 작다고 여겨지는 음성들은 ‘들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흔으로만 남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올라와 있다.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 달라. 확실한 수사를 원한다.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위해 마련된 국민청원에 사안이 아닌 사건 단위가 등장하는 경우가 잦은 것도 하나의 예로 볼 수 있겠다.
고통을 통한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고통을 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대화가 아닌 외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은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 피해자는 피해자로서 피해에 대해 말하고 문제를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만을 말하고 여기에 주목하는 것은 이를 망각하게 만든다[11]. 피해자로서의 말하기와 고통을 전시하는 일 사이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물론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당장의 주목은 유혹적인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만으로 즉각적인 연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경험을 나누어 듣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필수적으로 들여야 하는 시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건이 정확하게 밝혀질 때까지 판단을 하지 말자고 하는, 기계적 중립에 대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대면하기까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기억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믿고 싶은 것만을 남기고 사라지기에 불확실하고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가 구어 생활에서 문장의 처음과 끝이 온전하게 호응하는 일이 드문 것처럼 경험과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과 끝이 같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따라갈 때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불가능한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가 어디서 왜 출발했을지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대입하여 피해자의 경험을 내 것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실제의 피해는 사라지고 만다.[12]
최근에 끝없이 이어진 말하기들은 늘 질문을 던진다.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넘어 무엇이 폭력인지, 책임관계는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 사건의 종결이 곧바로 모든 구조의 변화가 일단락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에 대한 처벌만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은 명확하나, 모든 개인이 구조를 이루는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느껴 자책하고 스스로가 연대할 자격이 있는지를 회의하는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들여쓰기란 문단의 시작에 자리를 남겨 두어 다른 문장과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첫 줄에만 글자가 모자라게 적히지만 우리는 들여쓰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들여쓰기 없이 나뉘어 있는 글을 답답하게 생각한다. 고통과 피해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았으면 한다. 윤이형 작가는 문단 안에서 다른 수상 작가들이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문단 밖에 있는 언론과 대중이 문학계의 관행에 대해, 또 이번 사건뿐만이 아니라 비슷하게 이어져 온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당장은 주춤하더라도 글 전체가 완성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문단 밖의 여백.
[1] “소설가 윤이형, 이상문학상 파문에 절필 선언”, 연합뉴스 이승우, 2020. 02. 02, https://www.yna.co.kr/view/AKR20200202013000005
[2] 문학사상 페이스북, 2020. 02. 24, https://www.facebook.com/munhaksasang/posts/2747409881963666
[3] 윤이형 트위터, 2020. 02. 14, https://twitter.com/theirfirstcat/status/1228279561718128640
[4] “작가회의 선생님들도 문학사상만 패지 마시고요, 휴.. 아닙니다.. 정치인 구하기 위해 서명 받으실 때는 단 하루 만에 1000명이나 모이셨는데 피해자, 작가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도와주시죠. 이상문학상은 ‘권위가 있어서’ 성명서 내 주신 거고요.”
윤이형 작가 트위터 https://twitter.com/theirfirstcat/status/1226854919367319553
[5]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70쪽.
[6] “미투: '미투' 그 후...서지현 검사, '2차 가해로 고통스럽지만 그만두지 않을 것'”, BBC 코리아 김형은, 최정민. 2018. 10. 26, https://www.bbc.com/korean/news-45936486
[7] 정희진, 『미투의 정치학』, 교양인, 2019, 15쪽.
[8] 개인마다 ‘정상적인’ 공동체를 상상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할 것이기에 이에 대한 합의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9]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65쪽.
[10] 위의 글, 95-97쪽.
[11] 위의 글, 138쪽.
[12] 권김현영, 앞의 글, 66쪽.
참고문헌
장은정, 「질문은 계속돼야 한다」, 한겨레21 1300호, 2020. 0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