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유연
5월 30일, 첫 기획회의에 가져간 제 기획안의 가제는 ‘연대의 불/가능성’이었고, 구성 부분에는 잘 정리된 개요 대신 답 없는 질문만이 가득했습니다. 제가 그중 하나를 읽었을 때, 다른 편집위원과 조금 웃긴 문답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유연 연대라는 건 정말 뭘까요? 집회 가면 연대인가?
A 네!
유연 후원하면 연대인가?
A 네 그쵸?
유연 아니 그게 아니잖아, 맞긴 한데,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아시죠?
사실은 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 대화를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반복재생할 수밖엔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연대가 뭘까요?’라는 질문의 앞엔 ‘진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연대가 뭘까요?’ 그리고 그 질문의 앞에는 또다른 말이, 이를테면 ‘나는 진짜 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겠지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문우방의 오래된 책상 한켠에는 “글로V도 투쟁하는 우리가 되길. -2007.11.14”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글로와 투쟁 사이 ‘도’가 추가된 모습이에요. 이 문장이 쓰인 시점과 수정된 시점 사이의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선배 편집위원들은 ‘글로 투쟁’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문우에서 보낸 시간도 이제 제법 되어갑니다. 투쟁을, 연대를, 그리고 글 쓰는 것을 배우는 시간은 동시에 석연찮음 혹은 찝찝함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1학기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몇 시간 정도 폭력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다고, 내가 참사 피해자에 대해 ‘써버려도’ 되는 건가? 나의 글은 정말로 연대나 투쟁, 그런 게 될 수 있나? 그건 ‘당사자’들이 원하는 일인가? 참사나 비극을 뉴스로 접하고, 가끔 집회를 나가고, 또 가끔 후원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쓰고. (마치 후원이나 집회로 제가 행하는 재현의 값을 치른 것마냥).
도대체 뭐가 진짜 연대지? 애초에, 연대가 뭐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쓰자고 생각했을 때부터 글의 결론은 ‘그래도 괜찮다’라고 맺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A의 말처럼, “네, 그쵸? 그게 연대죠”라고 맺게 될 것을요. 그러나 저는 아주 많은 다른 친구들이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믿어요. ‘작은 말과 행동이라도 분명 의미가 있다’는 정론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지향 삼으면서도 때로는 ‘이런 얄팍한 것–글–도 연대라고 해도 되나?’ 부터 ‘그럼 뭐가 연대인데?’와 같은 의문을 주머니 속 뾰족한 돌처럼 계속 만지작거리는 친구들이 아주 많을 거라는 걸 믿어요. 그 친구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나마 제공할 수 있다면 – 약간의 연대나마 보탤 수 있다면 – 좋겠습니다. 결국은 ‘아주 작은 연대라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는 뻔한 답에 다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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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가 무엇인지를 답하기 위해서, 우선 연대라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연대’라는 단어가 피해자에게 연대한다, 혹은 시민단체에게 연대한다는 식으로 쓰일 때, 그것은 별다른 의심 없이 올바른 일이라고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연대(solidarity)라는 ‘하나의’ 단어가 ‘결속’[1]으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결속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존재들’—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위치를 점한—이 요구된다는 것을요.
성폭력 사건을 예시로 생각해봅니다.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선 피해자의 가족 또는 가까운 지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피해자 지원 센터의 실무자와 상담사, 한국여성의전화 또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같은 여성단체 활동가는 피해자에게 수사⋅법률⋅의료 지원 등을 제공합니다.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또는 시사프로그램 PD가 사건을 보도하는 식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SNS나 기사 등으로 사건을 접한 시민들은 여성단체가 모금하는 프로젝트에 기부를 하거나, 서명운동에 참여합니다. 이처럼 피해자에게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결속한 사람들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연대를 실천합니다.
이때 연대는 자주 피해자를 중심으로 수렴됩니다.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것, 피해자의 말을 들을 것, 이를 왜곡하지 않을 것⋯ 연대의 이러한 모습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의 등장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권김현영은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사건의 해결(특히, 성폭력 사건의 해결)의 핵심 원리이자 원칙으로 채택된 배경과 현상을 논합니다.
“그러게 왜 야한 옷을 입었냐”, “그 남자를 왜 믿었냐”와 같이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리는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피해자는 ‘완벽하게 무결한’ 피해자 되기와 아예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둘 중 하나를 강요당합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발명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전까지는 산발적이고 일상적이었던, 앞서 예시로 든 비난을 대표적인 ‘2차 가해’라고 명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언어들을 도구 삼아 활동가와 연대자들은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와 같이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사회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끔 애썼습니다. 피해자들 또한 SNS를 비롯한 여러 자리에서 피해를 고발하고 연대를 요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말이 묵살되고, 진정성을 의심받는 현재의 불균등한 구조 속에서 ‘2차 가해’라는 단어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유효하고 소중한 수단이며,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가 입을 열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때때로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적극적⋅포괄적으로 사용되며 피해자를 중심으로 결속한 연대의 장에서 “지지자와 피해자 대리인”에게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지원하지 않으면 2차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권김현영 2018: 40)를 느끼게 했습니다.
모든 피해는 상황 맥락에 의존하여 판단되어야 합니다. ‘쉽게’ 2차 가해가 되는 말과 행동은 있어도, ‘항상’ 2차 가해가 되는 특정 말이나 행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본교 사회과학대학 자치규약이 “이는 한정적 열거가 아닌 예시적 열거임을 인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적어둔 것은 이러한 피해 판단에 있어서의 맥락 의존성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2차 가해 여부를 가릴 때에 맥락 의존성을 언급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모험입니다.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자 할 때에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의 말을 듣기’로 일률적으로 적용되며, “피해자의 말에 유일한 해석의 권위를 부여”(51)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전권 위임은 외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회에서 이해받을 만한 서사로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자원으로 삼”(10)게 만듭니다.
데어가 쓴 “서사와 왜곡”에서도 읽어볼 수 있듯, (그것이 여전히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피해자의 느낌과 요구에 대한 존중은 중요하지만, 이것이 피해자의 말만이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연대자에게 두려움을 무릅써야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해석’이 피해자에게 또다른 피해로, 고통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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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을 넘어 다양한 구조적 폭력의 피해 사건에서 적용되는원리가 되었습니다. 부당노동행위 피해자, 참사 피해자… 사회 권력이, 혹은 지배적 문화가 피해자가 “뭘 모른다”던가 “이제 충분히 보상/경청했다”라는 식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을 때, ‘피해자의 말을 들읍시다’라는 선언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힘을 통해 가해에 대항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피해자의 말’은 누군가에 의해 대리 발화됩니다. 사회적 참사의 경우 그 피해자가 사망하였거나, 스스로 발화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다수입니다. 이때에는 유가족 혹은 지인이 대리 발화자의 역할을 맡아 문제와 요구, 해결책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대자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기록하고 알립니다.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발화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도, 피해자의 말을 ‘번역’하기 위해 대리 발화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피해의 언어는 뒤죽박죽인 정동과 감정, 혼란스러운 기억의 언어입니다. 사건에 대한 법적 공방이 진행될 경우 피해의 언어를 법률 언어로 번역해야 하고, 취재요청서 혹은 보도자료를 작성할 경우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공적 용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연대자들은 사건을 둘러싼 해석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리하여 사건을 알리고 기억시키기 위해 피해의 언어를 번역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해결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와 입장에 따라 사건을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지난 7월 24일, 서초경찰서는 ‘넥슨 집게손 사태’ 피해자의 고소를 모두 각하했습니다. 남초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집게손’이 ‘메갈’[2]의 상징이고, 여성 애니메이터가 비밀리에 넥슨의 홍보 영상에 집게손을 삽입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해당 애니메이터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온라인 상에 피해자의 신상을 유포하고, 피해자에게 성희롱적 비난 메시지를 보내며, 무분별한 모욕과 욕설을 공공연하게 게시하는 등 여성혐오적 사이버불링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모욕⋅비난성 게시글을 모아 명예훼손⋅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를 진행했으나 서초경찰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3]
서초경찰서의 각하 사유를 들여다보면, 경찰서 측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고소인 또한 이전에 페미니스트를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트위터 글을 게시한 사실이 있는 바 피의자들이 고소인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논리적 귀결이 인정된다”라는 이유에서, “극렬한 페미니스트들의 부적절한 행위(자기 작업물 등에 몰래 집게손가락 표현을 넣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례하고 조롱 섞인 표현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모욕에 대한 ‘판단’에서 서초경찰서 측이 가해자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건, 그리고 피해의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집니다. 피해자의 법적 대리인인 변호사는 피해 증언을 “도를 넘는 심각한 모욕적인 표현과 고소인이 하지도 않은 작업을 했다는 내용의 허위사실 유포,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수준의 성적 비하”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아마 이 번역어는 피해에 관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재현된 ‘현실’ 외부에 누락된 ‘사건’의 잉여가 있”다면, 이 번역어는 분명 사건의 잉여–감정, 느낌, 감각, 순간의 생각과 휩싸임–을 한가득 남겼을 것입니다.
연대자는 투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의 언어를 차용합니다. 그러나 이 전략의 언어가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완전한’ 재현이라는 걱정이 듭니다. 이 해석의 목적이 더욱 사회적인 것이 될수록 걱정 또한 커집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8월 8일, 서초경찰서의 불송치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조직국장 김유리 씨는 ‘서초경찰서 불송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발언을 진행했습니다. 경찰의 페미니즘 사상검증 사건에 대한 이해 부족, 성인지감수성 결핍, 잘못된 성폭력 통념을 지적하며 서초서가 “더 많은 여성의 희생을 만들어낼 것”, “(위축된 피해자들이) 경찰과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기에 사적 보복이나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할까 우려된다”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이는 서초서를 넘은 한국 경찰 전체의 고질적인 페미니즘과 성폭력 인식 부족 문제에 대한 규탄이고, 이 사회에 대한 규탄이었습니다.[4]
넥슨 집게손 사태와, 사상검증 피해자의 고소 불송치 사건은 하나의 예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와 유사한 예시를 몇 개나 더 들 수 있을 것입니다다. (비극적이게도) 사건은 유사한 상황, 유사한 이유로 끊임없이 발생하니까요. 이때 사람들은, 앞서 성폭력 사건의 예시로 설명했듯, 다양한 깊이와 방식의 연대를 하게 됩니다.
데어가 썼듯, 사건의 해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이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서사입니다. 그러나 연대의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해석, 이에 기반한 재현/서사는 항상,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언어로는 다 표현되지 못한 사건의 잉여가 피해자를 괴롭게 만들기 때문일 수도, 그 서사가 피해자가 원하는 방향성의 재현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이 사건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회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낼 때, 많은 연대자들은 이 재구성-재현의 폭력성을 염려하게 됩니다. 권김현영은 자신이 알아온 연대자들이, “자신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목적에서 한 인간의 불행을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계속 묻는다”(26)라고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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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취재, 신문 기사, 다큐멘터리, 소설, 영화와 연극… 사건의 재현⋅기술⋅서사가 넘쳐흐르는 시대입니다. 그 ‘리얼함’의 정도는 각기 달라도, 모두 매개자에 의한 가공 공정을 거쳤다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회에 여전히 타자에 의한 재현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째서일까요?
사건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계속하여 잉여를 남기고 마는 언어의 문제는 비당사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데어가 서술하였듯이, 당사자 본인조차 “사건을 정확하게 언어화”하는 데에 실패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 이야기하지 말자고 사건의 서사화를 단순하게 결론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면 “인력이 필요”하기에, 사건을 타자에게 공유하지 못한다면 사건의 해결 또한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타자에게 공유되지 못하는 사건은 피해자에게 또다른, 아주 명백한 형태의 폭력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사건의 ‘해결’이 무엇인지 잠시 짚어보았습니다. 가해자가 감옥에 가는 것? 피해자가 받은 2차 가해들에 대해 또다른 형사 과정을 밟는 것? 혹은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으로의 복귀? 그러면 사건은 ‘해결’된 걸까요? 피해가 단순하지 않듯 가해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가해는 구조에 기대어 발생합니다. 페미니즘이 ‘일베’와 같이 무조건적 ‘사회악’으로 호명되는 시대,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 노동이라는 단어는 너무 정치적이면서도, 가난한 이가 마땅히 해야 할 노동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탓하는 사회, 장애인이 지하철을 탈 수 없는 도시가 용인하는 폭력은 계속되고 반복되기에 무수한 피해자가 발생합니다.
재현은 사건을 나누어 갖는 일이고, 사건의 의미를 재구성해내는 일이며, 제도 및 문화의 변혁을 꾀하는 일입니다. 재현은 무엇보다 공동체적인 일입니다. 사건이 공적인 장에서 이루어졌는지 사적인 장에서 이루어졌는지와 상관 없이 재현은 사건을 공적인 장에 공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수한 재현이 수행됨으로써, 피해자의 동료 공동체 구성원이 (불완전하게 표상된) 사건을 알고, 대화를 나누고, 문제의식을 세웁니다. 그렇기에 타자에 의한 재현 없이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에 해석을 전부 위임하게 된다면”(권김현영 2018: 43) 사건의 ‘해결’ 또한 가능성을 잃습니다.
사건의 ‘해결’은 즉, 해결된 사건 이후에 또 발생할 수 있었던 어떤 사건의 ‘예방’입니다. 가해는 구조에 기대어 발생하고, 사건은 법⋅문화⋅역사 등이 뒤얽혀 복잡다단하게 구성된 사회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일은 결국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에 대응하는 일, 차별금지법 법제화를 위해 애쓰고, 빈자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비판하고, 꼭두새벽부터 지하철 선전전에 나서는 일이 됩니다. 사건을 해결하는–예방하는–일은 공론의 장을 여는 일, 즉 재현(공론‘장’ 만들기)과 재현을 통한 재현(공론장에서의 ‘공론’ 나누기)을 행하는 일을 요청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며, 다시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가봅시다. 재현은 정말로 연대가 될 수 있나? 이에 대해선 제 나름대로 답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이 남은 것 같습니다. 어떤 재현이 그러한가? 피해와, 피해자를 수단으로 ‘동원’하는 데에 그치는 재현이 아니려면, 충분히 윤리적으로 재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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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의 저자 레슬리 제이미슨은 타인의 삶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예술을 하는 에세이스트입니다. 그의 팔에는 ‘나는 인간이다. 인간에 관한 그 무엇도 내게 낯설지 않다(Homo sum: humani nil a me alienum puto)’라는 타투가 있습니다. 이는 사실이라기보단 선언에 가까운 것입니다. 레슬리가 ‘타인’을 포착하고, 함께하고, 그 순간을 조각내어 재배치한 후 기록하는 내내 그는 이 선언이 순진하고, 윤리적으로 무책임하기까지 한 일이 아니었을지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 선언은 결코 성취될 수 없기에 레슬리는 그것을 몸에 새겨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요? 정말 중요한 건 그 도달 불가능성 자체가 아닐까요? 저에게는 인간에 관한 그 무엇도 낯섭니다. 그 어떤 연대자와 목격자, 기록자도 피해자라는 사람과 피해의 경험, 그 이후에 연달아 이어지는 또다른 사건들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피해자 또한 연대자 각각을 이해하지 못할 거고요.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료해서 가끔은 말할 필요조차 없기에, 우리가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우리는 막막한 몰이해를 경험하곤 합니다. 서로에게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아주 가득한 친밀성에 이르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로 돌아갑니다. 심지어는 때로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개닫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나는 뭘 원하지? 나는 왜 그것을 원하지?
제가 아무리 기사를 찾아 읽거나 책을 읽어도, 어쩌면 인터뷰를 하거나 피해자 혹은 연대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고, 당연히 ‘온전하게’ 재현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이를 타자에게 잘 공유하기에 언어는 한참 부족하고요.
‘나’는 인간에 대한 무엇도 낯설다는 것, ‘나’는 타자에 대해 무엇도 완전히 알 수 없으리란 지점부터 다시 시작해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재현을 시도해볼 수 있을까요?
레슬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만큼 재현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20세기 중반의 기자인 제임스 에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21세기 초의 사진작가 애니 아펠입니다. 에이지는 미국 서부의 빈곤한 소작농 가정과 함께 살며, 묘사적 문체의 르포르타주를 썼습니다. 애니는 25년간 멕시코를 방문하며 한 멕시코 가정의 삶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재현이 시도된 시기도, 주제도, 재현의 매체도 달랐던 두 사람은 놀랍게도 유사한 돌파구를 사용했습니다.
에이지의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는 농촌 현장에 대한 긴 묘사와, ‘나’의 정서 또는 생각을 뒤섞으며 몹시 혼란스러운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중 특기할 만한 지점은 르포르타주의 전면에 등장하는 ‘나’, 그리고 그것이 ‘당신’으로 변화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가족 구성원 중 하나에게 연정을 품기도 하고, 불편한 침대에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나’는 때로 자신의 자리에 ‘당신’을 위치시킵니다. “잠에서 깨어, 당신 얼굴에 미끈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부드러운 목화 보푸라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작물이 잘 되는 흔치 않은 해다”와 같이, ‘나’–독자–가 느닷없이 ‘나’–에이지–의 순간으로 불려나옵니다.
이러한 방식의 재현은 기자인 에이지가 객관적 저널리즘에 던지는 근본적 의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는 그가 『포춘』지에 싣기 위해 썼던 기사를 포기한 후 새로이 시도한 작업입니다.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현장을 보도하려 애쓴 에이지가 실패에 직면했을 때, 그는 ‘리얼함’과 ‘객관’이 등치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합니다. ‘내’가 목격한 것을 ‘당신’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사실 전혀 리얼하지 않은 일이 아닌가?
애니는 마리아라는 멕시코 여성이 꾸린 가정과 꾸준히 만나며 사진을 찍습니다. 25년 동안 작업을 진행하며 마리아의 어린 자식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순간까지 함께한 애니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나?
애니의 작업에서는, 스스로 카메라를 드는 사진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애니 본인이 등장합니다. 카메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애니와 마리아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를 찍은 사진, 애니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운 사진…. 레슬리는 애니의 재현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그의 작업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한 가족을 총체적으로 설명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알고자 하는 애니 자신의 갈망을 보여준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타인을 목격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증언이다”(221)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삶을, 사건을, 피해를 이해할 수 없다면. 간신히 이해한 어떤 것들은 분명 ‘내’가 이해한 상황일 거예요. 내가 느낀 감정, 내가 알게 된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만 한다는 의지, 나의, 연대하고 싶다는 마음…
애니의 멕시코 프로젝트는 미국인과 멕시코인의 사회에서의 현격한 격차, 어두운 인종차별의 순간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마리아 가족의 현실, 그들이 마주한 부당함에 애니가 함께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에이지는 미국 농촌의 빈곤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는 절박하게 ‘나’의 자리에 ‘당신’을 불러옵니다.
여러 개념과 사례와 고민을 지나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나긴 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책을 읽고, 기사를 확인하고 발언문을 발췌해서 쓰인 글. 재현에 재현을 거듭한 이 글은, 정말로 연대의 한 모습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여전히 당당하게 “네, 연대예요.”라고 답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연대가 아니라고 답할 수 없음은 압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고민과 걱정을 따라와주시길 바랐어요. ‘연대가 뭐지? 나는 진짜 연대를 하고 있나? 내 글은 연대가 될 수 있나?’ 이런 두서없는 질문들 속 모종의 찜찜함을 느끼길 바랐고, 그 찜찜함을 해소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심정을 나눠 가지길 바랐어요.
저는 앞으로도 가끔 후원을 하고, 또 가끔 집회에 가는 사람으로 살겠죠.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거예요. 내가 본 장면, 내가 읽은 책, 내가 나눈 대화와 내가 알게 된 것들. 그 모든 것에 대해 쓸 때에, 제가 이 글을 쓴 적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내 글은 연대인가?’ 라고 자조적으로 혹은 비자조적으로 묻는 대신, ‘내 글로 연대하고 싶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청합니다. 나와 함께해달라고. 나의 분함에, 막막함에, 억울함과 울음, 슬픔과 절박함에. 내가 소리치며 걸어가는 그 자리에 당신이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이제 저는 이 글을 닫습니다.
[1] ‘결속’은 solidarity라는 단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자주 선택된 번역어 중 하나입니다. 결속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상황은 하나의 의견, 하나의 목적으로 통합되는 모습으로 상상되기 쉬우나,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2] 2010년대에 많은 페미니스트가 활동한 메갈리아 사이트의 이용자, 즉 ‘메갈리안’의 줄임말입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하의 의미로 활발히 쓰이는 용어입니다. 이는 편집위원 비상의 69호 글 “여기, 그대로, 애매하게”의 정의를 참고했습니다.
[3] 김화빈. “[단독] 경찰, '집게손 피해자' 고소 각하...이유 황당.” 오마이뉴스, 2024.08.05.,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51654.
[4]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 “[긴급기자회견] 서초경찰서는 성차별적 풍토에서 벗어나 성평등한 수사를 진행하라! (8/8).” 한국여성민우회, 2024.08.08., https://www.womenlink.or.kr/statements/?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1434702&t=board.
참고문헌
권김현영 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김병균 역, 교양인. 2018.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오카 마리. 『기억·서사』. 교유서가, 2024.
레슬리 제이미슨,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송섬별 역, 반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