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유연
이 연속기획 페이지를 펼친 여러분은 이제 아주 많은 연대, 재현, 그리고 사건이라는 단어를 마주하시게 될 거예요. 다소 추상적인 개념과 학술적인 인용이 이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편집위원 데어와 유연이 한 학기가 넘도록 연대 그리고 재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공부해서 내린 나름의 결론들을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에게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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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더위가 찾아들던 5월 말, 데어와 유연은 사회적 참사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5차시 ‘사회적 애도와 연대’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선정한 자료에는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와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유연은 ‘그럼에도 서사가 필요하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쓴 발제문의 마지막 문단을 “<문우>라는 공동 서사화의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맺었습니다. 유연은 세미나를 다 끝마치고도 고민을 버겁게 쥐고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렸습니다. 세미나를 함께 준비한 데어가 기꺼이 그 고민을 나누어 들었습니다. 둘은 세미나 자료로 선정한 책들을 다시 함께 읽었고, 추가적인 자료를 찾을 때면 서로에게 공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두 명분의 고민은 자꾸 커져만 갔습니다. 연대를 위해, 어떤 서사가 필요하고 또 어떤 서사가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서 시작한 고민은 새로운 질문들을 낳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연대일까요? 또, 무엇이 서사일까요? ‘윤리적’ 서사와 ‘비윤리적’ 서사를 구분짓는 선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서사가 곧 타자에 의한 사건의 재현이라면, 어떤 재현이 사건에 대한 연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아니 애초에, 타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혹은 완전히 가능하긴 한 건가요?
마구 쌓이는 의문들에 완전히 막막해진 둘은 결국 각자가 가장 궁금하고, 알지 못해 가장 답답한 지점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데어는 ‘서사’를, 유연은 ‘연대’를 가져갔습니다. 데어는 사건과 서사를 구분짓고, 사건의 재현인 서사의 여러 왜곡 가능성, 즉 불완전성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서사가 이토록 불완전한데에도 ‘왜’ 재현이 필요한지에 대해 답을 찾아갑니다. 유연은 그간 문우에서 글을 쓰며, 이 재현의 글이 과연 연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합니다. 유연이 그 고민에 매달리며 여러 개념을 공부하고 책을 읽은 흐름을 따라가는 글은 끝내 ‘어떻게’ 윤리적인 재현을 시도해볼 수 있을지 나름의 결론을 내립니다.
조그마한 자긍심과 함께 내보이는 이 기획이 유연과 데어 둘의 최선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재현과 연대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세상에는 또 다른 최선이 태어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고민을 이어나갈 시간에 미리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