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도토리
죽음은 예기치 않게 삶을 침범한다.[1] 이는 냉혹한 현실이다. 타인의 부고 소식, 살려달라는 외침, 죽음은 우리의 일상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삶은 마치 파도 옆의 모래성과 같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나, 그 본질에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함이 내재되어 있다. 이 불안정성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와 죽음의 본질을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다.
문학 시간, 묘비명을 쓰며 처음으로 나의 죽음을 마주했다. 다른 친구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할 때, 나는 “나를 기억하지 말라”라고 적었다. 내 부재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모순적이게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그를 기억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다. 이 모순된 욕망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낸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의 흔적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찰나의 찬란함, 행복했던 삶의 편린을 애도의 언어로 기록하고 싶다. 흩어지는 모래알을 움켜쥐는 것처럼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흔적을 붙잡고 싶다. 마치 시간의 모래시계를 뒤집으려는 헛된 시도와 같을지라도.
이 성찰은 죽음에 대한 사유, 그리고 애도라는 행위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표면적인 답은 자명해 보인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 하고, 죽음은 애도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위적인 명제를 넘어 더 본질적인 질문에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왜 애도 되어야 하는가?”[2]하는 질문, 이 물음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저야 한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와 부재의 공허를 마주하기 위해서. 이는 단순한 철학적 사유를 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본 글은 직접적인 재난 경험이 없는 필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증인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목격한다. 이 글은 그러한 목격의 기록이자, 존재와 부재,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애도를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가 애도하고, 애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자 한다.
모래성과 파도의 비유를 다시 빌려와서, 삶의 순환과 존재의 변증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무너지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쌓아올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끊임없는 사라짐과 남겨짐의 순환 속에 우리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사라짐’과 ‘남겨짐’, 이 두 개념은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서로를 규정하고 완성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꽃잎이 떨어져 사라짐으로써 그 자리에 새로운 열매가 생기듯, 사라짐은 새로운 시작의 전제 조건이 된다. 삶에 존재와 부재가 끊임없이 공존한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면, 순환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일 것이다. 어떤 사라짐을 받아들일 것인지, 어떤 남겨짐을 경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일, 어디에 나를 소진하고 몰두할 것인지 그에 대한 선택과 책임이 애도의 핵심이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3]
애도는 타인의 생을 기억하는 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르트는 “나는 지금 밑바닥까지 절망에 빠져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울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4]고 고백한다. 이는 애도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깊은 슬픔에 잠겨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슬픔을 억누르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하지만 나는 자주 더는 그렇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허물어지고’ 만다.”[5]라고 말한다. 이 고백은 애도의 과정이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얼마나 소진적이고 압도적일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때로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러나 이러한 ‘허물어짐’은 애도의 일부이기에 자아 소진 역시 애도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우찬제는 『애도의 심연』에서 애도의 과정과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는 “참혹한 전쟁이나 홀로코스트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건 사고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존재의 형상들은 물론, 나날의 삶에서 늘 지연되기만 하다가 사라지는 가능성의 소진에서도, 우리는 심연 속으로의 사라짐을 절감한다”[6]고 언급한다. 결국 애도는 단순히 개인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 우리 삶과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복잡한 과정인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자들의 경험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집단적 트라우마와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생존자들은 자신의 상실뿐만 아니라, 그들이 알던 도시와 공동체 전체의 소멸을 애도해야 했다. 이는 우찬제가 말한 ‘세계 박탈’[7]의 극단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이러한 ‘사라짐’의 경험은 흔하다. 오랫동안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거나, 단골 가게가 폐업하는 상황은 개인의 직접적인 상실은 아니지만, 익숙한 세계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는 죽음이 아닌 ‘사라짐’에 대한 애도라고 볼 수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마콘도 마을의 몰락은 한 가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계 전체가 소멸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우찬제가 말한 ‘가능 세계의 소진’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 세계의 탄생 안에는 필연적으로 잔혹한 무엇인가가 있기 마련”[8]이라는 언급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는 거대한 우주적 차원에서부터 개인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와 경험이 탄생과 소멸의 순환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는 이러한 ‘잔혹함’의 거시적 표현이다. 수많은 종의 멸종은 단순히 개별 생명체의 죽음이 아니라,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가 영원히 소멸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애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지구 전체에 대한 애도로 확장된다. 동시에, 이는 새로운 환경 의식과 생태학적 이해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이러한 ‘잔혹함’과 ‘소진’의 경험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오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목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꿈과 연관된 모든 가능성의 세계를 잃게 된다. 이는 우찬제가 말한 “가능성의 소진”의 일상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기도 한다. 한 꿈의 소멸은 다른 꿈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애도의 개념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반응을 넘어선다. 이별과 퇴직, 고향을 떠나는 경험 등 일상적인 상실 경험들도 모두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확장된 애도의 개념에서, 애도의 감정 역시 단순한 상실감이나 슬픔의 표현을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것을 얻게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으로써 삶의 소중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거나,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애도는 상실과 소진의 과정인 동시에 내면의 확장이고,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인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이다.
애도는 단순한 슬픔의 표현을 넘어서는 복잡하고 긴 여정이다. 이 여정의 종착지는 결국 ‘평온’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온’은 단순히 죽음을 망각하고 상실 이전 무지(無知)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아픈 기억 위에 담담히 설 수 있는 과정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만의 언어로 이 경험을 기록하고, 그 속에서 삶을 이어 나가는 능력을 뜻한다. 이는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며, 『애도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난하고 긴 여정이다.
애도의 표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연결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다. 이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싶은 역설적 욕망이며, 동시에 떠난 이와 남은 우리가 모두 잘 살기를 바라는 양가적 소망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복을 빈다’는 표현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넌 거기서도 잘 살 거야, 그래서 나도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지향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묶인 회상이 아니라, 서로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도다. 떠난 이의 미래와 남은 이의 미래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도의 핵심이다.
이러한 애도의 과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문학은 특별한 역할을 한다. 문학은 인간의 심연을 언어로 포착하고, 서술하는 예술 형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의 힘을 빌려 ‘현실’이라는 가능 세계에서 ‘죽음’과 맞닿은 그 불가능성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9]
-「친애하는 언니」 부분
김희준의 「친애하는 언니」는 애도의 복잡한 감정과 그 시간성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라는 구절은 봄이 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작은 상실의 그림자와 함께 온다.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라는 표현에서 ‘청록’은 생명력을 나타내는 동시에 애도의 색채를 띤다.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라는 구절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기억이 덧없음을 보여준다. ‘계절의 뼈’라는 표현은 시간의 구조, 혹은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이라는 구절은 애도의 핵심을 담고 있다. ‘언니의 나라’는 죽음 이후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화자가 상상하는 이상향이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하고 아름답다.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것’은 현실에서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그 상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나태주의 시는 애도의 역설, 즉 부재 속의 현존을 경험하는 역설적 순간을 포착한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된다 [10]
-「멀리서 빈다」 부분
‘보이지 않는 꽃’은 애도의 핵심을 상징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향기로 존재를 드러내는 꽃처럼, 애도는 부재를 현존으로 바꾼다. 이는 단순한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애도의 본질, 즉 상실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는 역설을 정확히 짚어낸다. 나태주의 시는 애도의 시간성을 교묘하게 뒤튼다.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된다.”는 구절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로 소환하고, 동시에 미래로 투사한다. 여기서 그가 보는 '너'는 단순히 떠나보낸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을 아침으로 밝히는 현재진행형의 존재다. 시의 후반부는 이러한 시간과 관계의 상호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11]
-「멀리서 빈다」 부분
이 구절은 그리움이 단순히 산 자가 죽은 자를 향해 느끼는 일방적 감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비록 서로가 있는 곳을 알 수 없고, 심지어 그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지라도, 서로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양측 모두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사라짐을 기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계(저녁)를 창조해 내는 힘이 됨을 시사한다.
시의 마지막 구절,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는 애도의 궁극적 목적을 상기시킨다. 이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애도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평온한 상태에 대한 열망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관계의 역동성, 그리고 죽음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더욱 과감하게 확장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상실 이후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작은 희망과 가능성을 그려낸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애도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그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말해준다. 죽음이라는 사건 그 자체는 비가역적이지만 그 후의 우리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상실이 애도를 통해 그 어떤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 죽음은 사건이지만, 애도는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세계를 직조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애도해야 한다.
김연수는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12]라는 소설적 선언을 통해 애도의 시간성을 완전히 뒤집는다. 우리는 흔히 애도를 과거를 향한 행위로 여기지만, 그의 소설에서 애도의 진정한 힘은 미래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비장해진다. 상처와 고통을 안고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 삶의 태도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죽음이라는 사건 그 자체는 비가역적이지만 그 후의 우리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상실이 애도를 통해 그 어떤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 죽음은 사건이지만, 애도는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세계를 직조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애도해야 한다.
참사(慘事)의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종종 개인의 고유성을 잃어버린다. 이름이 지워지고, 죽음이 통계로 환원될 때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숫자가 아닌 ‘생명의 상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거대한 비극은 그 자체로 애도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개인의 죽음이 중첩된 수많은 부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버틀러가 지적했듯이, 참사가 세계의 상실인 동시에 각 개인의 고유한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3]
나에게는 과거 이를 인지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처음에 단순한 ‘사건’에 불과했다. 당시 나에게 그 사건은 TV의 뉴스, 실시간 검색어의 한 키워드일 뿐이었다. 차가운 바다로 침몰하는 배를 보며, 그 안의 생명들의 운명을 단순한 뉴스로 받아들였다. 세월호 탑승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나는 그 목소리를 거대한 ‘죽음’으로만 인식했을 뿐, 개개인의 상실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내가 목격한 것은 ‘세월호의 죽음’ 그 자체였다. 무책임한 시선으로, 나는 무수한 생명의 사라짐과 그 가족들의 상실이 아닌 세월호라는 배의 침몰을 바라봤다. 이후 중학교에 올라와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나는 그 사건을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실제 사람들의 발화를 통해서 죽음을 마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명들의 거대한 상실을 인식했다.
한 학생의 인터뷰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학생은 “함께 나가자고 약속했는데,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고 증언했고, 나는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다큐를 보며 울고 있었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타자의 죽음을 보며 처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전까지도 분명 나는 그들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너무나 거대한 사건으로 치환해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의 상실을 통감하지 못했다. 어떤 죽음은, 너무 거대해서 오히려 그 애도가 작아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사건의 진실은, 배가 가라앉음과 동시에 수백 개의 온전한 세계가 사라진 것이었다. 세월호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세계의 동시다발적 종말이었다. 그렇게 침몰하는 죽음들을 다시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전히 그 사건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 죽음의 당사자도 직접적인 목격자도 아니기에, 나의 애도가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고민과 애도에 대한 방황 속에서 나는 『눈먼 자들의 국가』에 실린 김애란의 글을 읽었다.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14]는 문장을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애도에 대해 이해했다. 우리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모두 ‘바깥’에 서게 된다. 우리의 애도는 완전한 타자의 애도일 수밖에 없지만, 그 공간을 둘러싼 액자처럼 죽음을 둘러쌀 수 있다. 우리는 그 죽음의 바깥에 존재한 자이기에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연대할 수 있다.
중학생 때 가방에 달았던 노란 리본의 의미를 이제는 마음에 간직한다. 바다를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듣지 못한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 우리가 닿지 못한 그들의 손길을.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그 ‘바깥’에 서서, 침묵 속에서 그들을 기억한다.
어떤 애도는 아픔 그 자체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그게 나를 소진하는 일일지라도 그런 애도는 가까운 자들의 것일 것이다. 그럼, 그 바깥에 선 나의 몫은 아픔에 천착 되지 않고 담담히 이를 애도하고, 기억으로서 연대하여 아픈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침몰한 생명들을 기억하며,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세월호는 단순한 ‘사건’이 아닌, 우리 사회의 상처이자 수많은 개인의 세계가 무너진 비극임을. 우리의 애도는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고, 각 생명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세월호가 남긴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원히 외부에 머무를지라도, 이것이 타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의 애도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애도가 필요함에 대해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종종 애도가 두려워졌다. 그리고 애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나의 세계에서 언어로 직조된 ‘죽음’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영역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은 산 자가 경험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애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해 논할 수밖에 없다.
죽음 자체가 심오하고, 이를 수용하는 감정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욱 심오한 주제이기에 애도를 다루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애도에 대해 생각했지만, ‘애도는 무엇이다’라고 함부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만일 그러한 정의를 시도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 책임에 대한 무게가 애도가 아닌 것들에 비해 클 것이다. 또한 필자는 여기서 살아있으면서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그 모순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러한 불가항력 때문에 마음이 자꾸 힘들어졌다.
또한 나는 재난 경험도 부재하고, 가족이나 연인, 가까운 친구를 죽음으로 잃어본 적이 없는 큰 상실이 없는 상황에서, 이 글을 써도 되는지 그 자격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그래서 앞서 애도의 범위가 죽음뿐 아니라 사라짐에 관한 것, 또 어떤 향수에 관한 것으로 이미 그 의미를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라짐을 경험하고 이를 애도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쓰기도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했다. 나는 애도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것은 진정한 애도인가? 내 정의가 소신 있게 진심으로 행해졌나? 그럼에도 나는 이런 질문들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애도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 애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글의 전제라고 할지라도, 모든 애도를 인정하는 일 또한 불가하니, 나는 계속 질문하고, 그것이 틀릴지라도 정의하고, 자기 모순적일지라도 애도를 행하고, 애도하는 일이 자기 소진을 넘어서는 일임을 이야기하려 한다.
애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애도에 대해 먼저 논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이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고, 애도의 경우 산 자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추모이기에 애도를 정의하고, 행하고, 이것을 애도하라고 말하기가 분명히 어려울 것 같다. 진심으로 애도했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애도가 필수적으로 사회에 필요하다면, 혼자 슬픔을 간직해도, 함께하는 연대의 방식으로든 말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때로는 공개적으로 리본을 달거나 추모식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말이다.
애도와 연대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연결되고 성장할 수 있다. 우리의 모순된 감정과 행동들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아파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애도의 시작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애도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학기 동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애도에 대해 고민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면서 나는 애도에 대해 더 알게 되었나라고 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애도를 생각하는 그 행위가 수월해졌는가를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 이 시간들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애도에 대해 고민했던 그 지난한 시간들은 내 안에 남을 것이다. 내 삶에서 내가 진정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애도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이 고민이 유효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나는 애도 그 자체의 의미보다도 어쩌면 내가 마주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시간이 더 많았다. 애도는 그 행위 자체보다는 상실을 받아들이고 낙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향해 나아갈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애도를 통해서 자기 구원의 서사를 써내려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실과 슬픔을 넘어서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자. 더욱 애도하고 사랑할 수 있는 내일을 꿈꾸며, 이 글을 마친다.
[1]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 zum Tode)’ 개념을 참고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실존적 삶의 조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애도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mourning)’ 개념을 참고했습니다. 데리다는 진정한 애도는 불가능하며, 우리는 항상 애도의 불완전성과 씨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3]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걷는나무, 2012, 17.
[4] 위의 책, 19.
[5] 위의 책, 22.
[6] 우찬제. 『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 6.
[7] ‘세계 박탈’이란 개인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세계가 급격히 사라지거나 변화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8]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33.
[9]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 나태주. 「멀리서 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11] 위의 작품.
[12]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13] 하예린. 「릴리언 헬먼의 『아이들의 시간』에서 레즈비언 우울증과 애도의 가능성」. 석사, 부산대학교, 2020. 본 논문에서 사용된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 가능성 이론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4] 김애란.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21.
참고문헌
1, 단행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민음사, 2000.
김애란.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21.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나태주. 「멀리서 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김진영 옮김, 걷는나무, 2012.
우찬제. 『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
전승민. 『퀴어 포 에티카』. 문학동네, 2024.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 논문
문성윤. 「국가적 참사로 발생한 타자의 죽음과 사회적 애도에 관한 고찰: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을 중심으로」, 『생명연구』. 72, 65-84, 2024.
신예빈. 「불완전한 애도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애도 이론을 바탕으로」. 『도예연구』, 2021.
왕철.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 -“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어영문학』, 제58권 4호, 2012.
하예린. 「릴리언 헬먼의 『아이들의 시간』에서 레즈비언 우울증과 애도의 가능성」. 부산대학교,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