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함함
※ 이 글은 <모던 패밀리>, <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수박>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세기 동안 인류는 성장을 향해 질주해 왔다. 더 많이 만들어내고, 더 많이 팔고, 더 많이 쓰고!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자본주의의 주문은 꽤나 성공적으로 통했다. 부유하고 힘 있는 나라가 생기고, 그 안에서 여유로운 사람들이 생기고... 그 주문을 좇아 세상은 더 많은 것을 만들고, 팔고, 쓰려고 애썼다. 최대한 돈을 덜 쓰고, 최대한 돈을 더 많이 벌고…… 그리고 그렇게 애쓴 결과가 지금 세계가 마주한 기후위기이다. 최소비용으로 최대이익을 창출한다는 간단한 시장경제의 논리는 자연과 인간을 맨 밑바닥부터 모두 끌어모아서 쓰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기후위기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약 자연과 인간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는 지금의 시스템이 계속 이어진다면, 인류에게 남는 건 되살릴 겨를 없이 악화되는 지구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뿐이다. 이미 몇 해 전, 세계는 현 시스템이 만들어낸 위기를 코로나 19를 통해 경험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인간에게 전염된 바이러스, 세계화로 인해 빠르게 퍼진 전염병, 그리고 유행 동안 심화한 불평등… 기후 재난이 작은 일상에서부터 전 세계까지 전부 뒤흔들 수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던 몇 해였다. 그리고 코로나 19는 시작일 뿐, 이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재난은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결국 기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와 그에 함께 하는 성장, 효율이라는 가치에서 새로운 가치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더 이상 이윤 창출이 우선이 아닌, 지구와 인간이 가진 생명을 더 우선으로 하는 가치 말이다.
자연과 인류의 생명을 우선으로 두는 가치, 바로 돌봄이다. 갑자기 돌봄이라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돌봄이라 하면, 대개 세계를 지탱할 가치보다 약한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나 침대에 누워 병간호를 받는 환자의 모습처럼, 아주 약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에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해 온 세계에서 돌봄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에게나 필요한 것, 따라서 부수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의 기후위기 시대에서, 돌봄은 재평가받아야 한다.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1]이다. 즉,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프거나 어린 존재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주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에게도, 주체적이고 뭐든지 잘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게 돌봄이다. 눈에 띄게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게 돌봄이다. 내가 배달시킨 점심에도,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에도,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의 말에도 돌봄은 항상 존재한다. 이런 돌봄을 친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부터 공적인 영역까지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하는 개념을 ‘보편적 돌봄’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스템에서 보편적 돌봄 시스템 실현으로 전환이 바로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전환이다.
보편적인 돌봄 실현하기. 말로는 쉽지만 현실에서 이걸 어떻게 실현할지는 꽤 막막하다. 사회가, 나라가 돌봄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해서 돌보는 분위기를 잘 조성하고 돌봄에 관한 모든 것을 해결해줄 만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준다면 편하겠지만… 이렇게 빠르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사실상 국가가 모든 돌봄을 해결해주기는 어렵다. 돌봄은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닦는 단순 가사노동을 넘어, 개인 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행위와 정서 교류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기본소득과 같은 형태로 가계를 돕거나, 돌봄노동을 돕는 서비스를 지원해주는 것까진 정부의 힘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에까지 정부가 관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건 물론, 실제로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돌봄을 전부 스스로 해결하는 것도 좋은 대안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돌봄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각자 딱 1인분의 돌봄만이 주어지는 세상이 보편적인 돌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고민에서, 공동체의 필요성이 나온다. 국가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스스로의 손이 뻗어지지 않는 곳에 돌봄의 빈틈이 생길 때, 그것을 메워줄 수 있는 건 타인이다. 그리고 안전망 역할 이상으로, 보편적 돌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개인 혹은 국가 차원이 아닌 ‘너와 나’ 차원에서 관계 맺는 공동체는 필요하다. 나 혼자 스스로를 돌보는 걸 보편적 돌봄이라고 할 수 있을리는 당연히 없다. 국가가 공공 영역을 돌보는 건 가능하겠지만, 사적인 영역까지 관여할 수는 없다. 모든 영역에서 돌봄을 우선시하는 게 보편적인 돌봄인데, 개인과 국가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편적인 돌봄에 필요한 것은 정확한 이분법적 기준으로 나뉜 특정 영역에서 돌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모두가 돌봄의 책임을 지고, 돌봄에 대한 역량이 증진하는 것이다. 그래야 모든 영역 빠짐없이 돌봄이 이루어지고, 중심이 될 수 있다. 잘 돌보는 세계를 위해서, 그에 맞게 잘 돌보는 공동체가 함께 해야한다.
보편적인 돌봄을 실현하기 위해 돌보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명쾌한 해답이지만 이걸 바로 현실로 옮기는 건 막막한 일이다. 모두가 돌봄을 받도록 맺어지는 공동체라는 이상과 돌봄이라는 가치가 여전히 주변에서 다양한 가치에 비해 밀려나 있다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걸 체감하게 만들 뿐이다. 어떤 공동체가 잘 돌보는 공동체고, 그런 공동체를 위해 어떤 관계 맺기가 필요한지 구체적 상상을 하는 건 지금의 현실에서 제법 막막하다. 그렇다고 현실에 돌보는 공동체가 전혀 없을까? 아니다,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그런 공동체를 열망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더 많은 돌보는 공동체를 현실에서 만들기 위해, 좋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이상은 모호하게 느껴지고 현실은 부족한 때에, 다양한 공동체를 다루는 미디어는 그 간극을 메우며 상상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상상을 다루는 동시에 현실을 반영한 네 편의 드라마를 보며, 잘 돌보는 공동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조건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돌보는 공동체’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가족이다. 돌봄이라는 역할이 법으로 규정된 것도, 실제로 그 역할이 주로 맡겨지는 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과 사회를 통해 규정되고 재/생산되는 현재의 가족 인식은 사람들을 돌보지 못한다. 이 가족은 이성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로만 구성된 ‘정상가족’을 의미한다. 여전히 정상가족만이 가족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그 외의 형태는 비정상, 혹은 제대로 된 가족 아님으로 규정되어 소외받고 있다. 제대로 된 돌봄은 오직 정상적인 가족만 가능하고, 나머지는 사회나 그 구성원을 해치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혼가정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말을, 동성부부 가정은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말을, 아이를 입양한다면 엄마 혹은 아빠가 없기에 아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정상가족 안에서만 ‘좋은’ 돌봄이 이루어진다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그 밖에 있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는 무시된다.
<모던 패밀리>는 정상가족이 가진 그런 신화를 부순다. 제목 그대로 현대적인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시리즈에는 세 가족이 등장한다. 클레어와 필 가족은 세 아이를 가진 전형적인 미국인 가정인데, 이들은 모범적인 정상가족이다. 그런데 클레어의 아빠인 제이는 아들을 둔 콜롬비아 출신의 30살 연하인 아내 글로리아와 재혼하여 가족이 된다. 그리고 클레어의 동생이자 제이의 아들인 미첼은, 동성 파트너인 캠과 함께 베트남계 아이를 입양하여 가정을 꾸렸다. 사회가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비정상가족’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상가족 신화가 이야기하는 대로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서로를 불행해졌을까?
시트콤 장르인 만큼 매 화마다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건 ‘비정상‘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냥 가족 사이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갈등이다. 오히려 ‘비정상’으로 규정된 그들이 오해를 받고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문제가 일어난다. 글로리아를 ‘꽃뱀’으로 생각하고 험담한 클레어로 인해, 캠을 아들의 남자친구라고 제대로 소개하지 않고 친구라 얼버무린 제이로 인해 다툼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다툼은 그들이 서로를 한 가족이라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사라진다. 클레어와 글로리아가 풀장에 함께 뛰어들었을 때, 제이가 미첼과 캠 모두를 ‘내 아들들’이라고 받아들였을 때 다툼은 멈추고 서로 마주 보며 웃게 된다. 시즌1 에피소드 4에서 헤일리(클레어와 필의 딸)의 남자친구 딜런은 세 가족을 보고 열정과 포용력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모던 패밀리>를 관통하는 말이다. ‘정상’으로 규정된 형태에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서로를 잘 돌보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게 아니다. 하나로 끈끈하게 묶이는 세 가족이 보여주듯, 돌보는 공동체는 정상가족이라는 한 가지 모습을 따르는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양함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생길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공동체의 돌봄이 시작될 수 있다.
<모던 패밀리>의 미첼과 캠은 보수적이고 가정적인 아버지 제이에게 가족이라고 받아들여졌고, 글로리아는 클레어에게 제이를 사랑하는 아내라고 인정받았다. ‘정상’에서 벗어난 낯선 이가 원가족으로부터 환영받아 행복한 한 가족을 이룬 따뜻한 엔딩이다. 모든 이가 이런 가족을 처음부터 가진다면 정말 좋겠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18년부터 방영된 미국의 시리즈 <포즈>는 그 따뜻한 엔딩의 대척점에 있는 퀴어들의 삶을 조명한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할렘가의 유색인종 퀴어들의 삶을 볼룸과 하우스 문화를 중심으로 다룬 이 시리즈는, 가족을 더 넓은 범위에서 다룬다. 결혼과 혈연으로 이어진 것만이 가족이 아니다. 어떤 연고도 없지만 내가 선택한 가족, 그것이 <포즈>가 보여주는 가족이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 대부분은 보수적인 원가정에서 따뜻한 포용을 받기는커녕, 그로부터 버림받거나 벗어나야 했다. 유색인 퀴어이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폭력과 범죄에 취약한 상태로 소외된 그들이 선택한 건 ‘볼룸’[2]과 ‘하우스’라는 안전한 공간, 공동체다. 억압당하는 이들이 모여 멋진 복장과 춤을 뽐내는 볼룸은 성소수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던 당시, 퀴어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 공간이다. 볼룸 문화의 뼈대가 되는 하우스는 억압받는 퀴어들이 모여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블랑카는 ‘하우스 오브 에반젤리스타’의 ‘마더’로, HIV 양성 판정을 받은 후, 원래 속해 있던 ‘하우스 오브 어번던스’에서 나와 새로운 하우스인 ‘하우스 오브 에반젤리스타’를 만든다. 데이먼, 엔젤 등이 블랑카의 ‘칠드런’으로 하우스에 들어서게 되고, 이렇게 모인 그들은 여러 차례 볼에서 우승하며 명성을 쌓는다.
그들이 속한 하우스는 단순히 볼에서 우승하기 위해,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커뮤니티가 아니다. 사회에서 취약한 이들이 함께 공유하는 경험과 유대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 선택한 가족이다. 유색인 퀴어처럼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소수자들은 다른 이로부터 돌봄은커녕 자기 자신을 돌볼 충분한 자원조차 얻기 어렵다. 하우스의 칠드런인 엔젤, 릴 파피는 생계를 위해 성노동과 마약 거래에 뛰어들어야 했으며 게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데이먼은 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이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모델 일을 시작하고, 자신이 바라던 댄서가 될 수 있었던 건 원가정이 주는 도움도, 사회 정책의 지원도, 자기 자신만의 의지도 아니다. 취약한 서로가 모여서 이룬 하우스의 돌봄과 포용이 그들을 돕고 나아갈 수 있게 한 힘이었다.
물론 하우스와 볼룸이라고 해서 범죄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마냥 이상적인 공동체인 것은 아니었다. 유색인과 퀴어를 향한 범죄는 항상 그들을 위협했고, 하우스끼리의 경쟁과 다툼, 하우스 내 위계도 존재했다. 그러나 가족에서도, 사회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들을 환영한 게 볼룸이고, 가족이 되어준 게 하우스다. <포즈>의 배경인 20세기보다 퀴어 인권이 더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퀴어가 차별받는 존재로 남아있는 지금도, 볼룸과 하우스는 다른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가려진 퀴어들을 위한 공간과 공동체가 되어주고 있다.
<모던 패밀리>에는 게이 부부가, <포즈>에는 트랜스 여성과 게이들이 모여서 만든 가족인 하우스가 등장한다. 2022년 방영된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도 퀴어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퀴어 가족이라는 거지? 남녀가 나란히 서 있는 드라마의 포스터를 보면 그런 의문이 든다. 하나도 퀴어해보이지 않는데 퀴어가족이라고? 단란하게 서서 함께 딸을 안고 있는 미첼과 캠, 화려한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하우스 오브 에반젤리스타와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소위 ‘정상’ 범주에 속하는 이성 연인이나 부부에 가까워 보인다. 무엇이 그들을 퀴어가족으로 만드는 걸까?
연애와 결혼에 대한 감정, 섹스에 대한 욕구를 느껴본 적 없는 사쿠코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신을 에이섹슈얼 · 에이로맨틱[3]으로 정체화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이 정체화하는 데 도움을 준 블로그의 주인 사토루를 우연히 현실에서 만나게 된다. 연애 감정 없이 가족이 되자는 사쿠코의 제안으로 시작해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는 과정을 그린 게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성인 남녀가 가족이 된다고 하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결혼을 하거나 사귀는 상태에서 동거를 하는 걸 떠올린다. 두 주인공의 주변인들도 두 사람의 동거에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둘이 사귀냐고, 그래서 결혼하려는 것이냐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불안감(?)이 생긴다.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우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라는, 수많은 영화,
드라마와 똑같이 결말내는 게 아니냐는. 놀랍게도,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이스펙트럼[4]을 조명하며 동시에 연애도 결혼도 없는 퀴어한 가족을 이루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오는 고민을 깊게 다룬다. 사쿠코와 사토루는 생활공간과 가사를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부터 같이 생활하면서 불쾌한 것은 없는지,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가족으로 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찾아나간다.
겉으로는 정상성에 부합한 것으로 보이는 이 가족은 <모던 패밀리>와 <포즈>가 보여주는 퀴어 가족보다 어쩌면 더 퀴어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던 패밀리>의 마지막, 미첼은 검사가 되고 캠은 대학의 풋볼팀 코치가 된다. 아이도 데려오고 다른 곳으로 이사도 간다. <포즈>에서 하우스 에반젤리스타의 마더인 블랑카와 칠드런들 모두 이런저런 일을 겪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성공을 쟁취한다. 데이먼은 유명한 댄서가 되고, 엔젤은 모델로 성공해서 에이전시를 차린 릴 파피와 결혼한다. 칠드런들을 성공시킨 블랑카 본인도 안정적인 직업과 좋은 애인을 얻고, HIV 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다. 차별받던 소수자가 성공해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은 물론 기분 좋지만… LGBT를 비롯한 소수자들,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사회가 내세운 가치에 부합한 성공을 이루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이성애 중심 가족 모델을 따라 짝을 찾고 사랑하는 이와 결합해야 가족으로 해피엔딩을 누릴 수 있는 걸까? 기존 사회 속 가치와 제도에서, ‘이성애자’ 부분을 ‘동성애자’, ‘퀴어’로 바꾸는 게 퀴어 권리가 향할 수 있는 최대일까?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 <모던 패밀리>와 <포즈>보다 훨씬 더 ‘퀴어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사쿠코와 사토루는 기존 제도 속으로 흘러들어가길 거부한다. 둘은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나 연인도 부부 관계도 아닌 ‘가족’이라고 분명하게 알린다. 질서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가족에 관한 기존의 통념에도 정면으로 도전한다. 피가 통해야만 가족인가? 연애와 결혼, 사랑이 있어야만 가족인가? 두 사람은 그들이 맺는 관계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도 질문을 던진다.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족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해야 가족인가? 가족이 되어달라는 사쿠코의 제안에서부터 사토루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위해 떠나는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기존의 가족 모델을 거부한다. 멀리 떨어져서 같이 지내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은 고민 끝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 이어져 있는 가족이라고 답을 내린다.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내내, 두 사람은 가족은 이런 것이라고 확실히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인 서로를 아군이라고 표현할 뿐. 퀴어한 가족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한 가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모습의 공동체, 누군가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할 필요가 없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모던 패밀리>, <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모두 가족을 다루는 작품이다. 세 드라마를 통해 혈연이든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든, 비퀴어든 퀴어든 다양한 형태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이 바라는 가족을 만들고 자신에게 필요한 돌봄을 전부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어떤 이는 그런 가족을 만들지 못할 수 있다. 또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이길 거부할 수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새도 제 보금자리를 사랑한다.'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가족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여야 한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자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가족에 대한 이런 사회적인 압력, 기대가 어떤 이에겐 부담으로 느껴진다. 이렇듯, 가족이 누구에게나 유효한 선택지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가족을 기다리거나, 자기 힘만으로 스스로를 돌봐야 할까? 아니면 돈 주고 돌봄 서비스를 받거나, 나라에서 지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셋 중 한 가지가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이 글에서 찾는 보편적인 돌봄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방법은 간단하다. 가족보다 느슨하지만, 서로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가족이 있든 없든,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필요할 때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 2003년에 방영된 일본의 드라마 <수박>이 그런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한 회사원인 하야카와 모토코는 회사에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해피니스 산챠’라는 하숙집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가족들과 떨어져서 한 집에서 사는 네 명의 여자들. 전부 혈연 관계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드라마는 특별하게 큰 사건 없이(모토코의 직장동료가 횡령한 사건이 크게 다뤄지긴 한다) 그 넷의 일상 이야기 위주로 흘러간다. 다함께 아침과 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빼면 서로에게 요구되는 건 크게 없다. 앞서 살펴본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항상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정서적인 유대가 깊은 것도 아니고, 서로를 생각해서 일을 딱딱 나눠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족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일까? 글쎄… 함께 밥을 해서 나눠 먹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고, 고민이 있다면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서로에 대한 돌봄이 오간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보다 훨씬 느슨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마지막 화에서는 느슨한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해피니스 산챠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교수’. 교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며 해피니스 산챠를 떠난다. 해피니스 산챠의 사람들은 아쉬움은 있지만 그를 담담하게 보내준다. 교수를 포함해서 해피니스 산챠를 떠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해피니스 산챠는 인생의 어떤 기간에 잠깐 머물렀던 곳,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곳 정도에 지날 수 있다. 하지만 해피니스 산챠가 가지는 느슨한 공동체로 가지는 그 의미가 중요하다. 사람은 어떤 순간이든 취약해지고, 다른 이의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길든 짧든, 항상 안전하고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거라 장담하기 어렵다. 우리가 약해지는 그 순간에 항상 가족의 돌봄을 받거나, 돌봄을 위한 가족을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나 다른 끈끈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언제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가 중요하다. <수박>에서는 해피니스 산챠라는 하숙집이 그 공동체였지만, 이것이 좁아진다면 친구 사이, 넓어진다면 옆집, 아파트, 마을이나 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짜인 느슨한 공동체는, 보편적 돌봄을 실현하는 바탕이 된다. 필요하다면 친구가 나에게, 내가 옆집 사람에게, 다른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바탕이 만들어진다.
<모던 패밀리>, <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수박> 이렇게 네 가지 픽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지 살펴보았다. 포용적인 혈연 가족을 만들 수도 있고, 나의 선택으로 퀴어적인 관계 맺기를 할 수도 있고, 느슨하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본 작품은 전부 허구의 이야기지만, 미디어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법. 우리가 아직 직접 보고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작품에서 확인한 모습의 공동체, 그보다 더 다양한 공동체가 현실에 존재한다. tvN의 예능인 <조립식 가족>, 웨이브의 예능 <모든 패밀리> 등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가족과 공동체를 조명한다. 그들이 픽션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우리 근처에 존재하고 있고 실제로 이런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미디어에서 다양한 공동체를 확인하는 걸 넘어, 이제는 상상해오던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을만한 제도를 요구할 차례가 왔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돌보는 공동체를 ‘정상 가족’ 범주에만 한정해놓았다. 일부 복지 제도에서 취약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동체의 다양성을 일부 열어놓았지만, 결국 ‘이성부부와 그 자녀’로 정상 가족에 모든 기반을 둔다. 혈연과 이성애 부부로 정의되는 정상가족 모델은 그에 속하지 못하는 공동체들, 더 나아가 정상가족 영역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들, 그에 들어가려하지 않는 존재들을 차별하고 사회로부터 배제한다. 이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가족을 재생산하는 게 아닌, 어떤 존재들을 취약한 상태에 놓아 고립하게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돌봄을 장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돌볼 수 있을 기반을 파괴해버린다.
돌봄은 차별과 배제의 반댓말이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잘 돌보는 사회, 보편적인 돌봄은 생겨날 수 없다. 우리가 상상해 온 공동체들, 돌보는 공동체, 디양하게 관계 맺는 공동체들이 현실에 실현되려면 어떤 존재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틀을 부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포용하는 법과 제도와 함께 해야한다.
작년 10월에 시작된 혼인평등소송으로 다시 가시화된 동성혼 법제화, 동성 파트너는 물론 비혈연 가족이 법적인 보호와 인정을 받을 수 있게끔 하는 생활동반자법, 그리고 앞의 두 제도의 당사자들이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까지. 점점 더 많은 존재가 외치고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더 이상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가능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현실로 나올 수 있게 하라고.
[1]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eBook]. 니케북스, 2021, 37.
[2] ‘볼’(Ball)은 유색인종 퀴어들(아프리카계와 라틴계 미국인)이 사회의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치장(‘드랙’)을 한 뒤, 이를 뽐내고 누가 더 뛰어난지 겨루던 행사에서 출발한 문화이다. 드랙 이외에 춤(대표적으로 ‘보깅’), 립싱크, 런웨이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으로 발전했다.
[3] 에이섹슈얼(무성애자): 어떠한 젠더에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 에이로맨틱(무로맨틱): 어떠한 젠더에도 연정적(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
[4] 에이섹슈얼과 에이로맨틱을 포함해, 완전히 그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스펙트럼 상의 여러 정체성들을 아우르는 말
이미지 출처(삽입 순서대로)
“모던 패밀리 시즌2”, 시네21, http://www.cine21.com/db/tv/info/?tv_id=2031
Bob D'Amico, “'Modern Family' through the years”, USA Today, 2019.02.05, https://www.usatoday.com/picture-gallery/life/tv/2019/02/05/modern-family-through-years/2776411002/
Malcolm Venable, “‘Pose’ Is Ending, But Its Impact Will Live on Forever”, Shondaland, 2021.04.29, https://www.shondaland.com/inspire/a36280361/pose-is-ending-but-its-impact-will-live-on-forever/
Danielle Turchiano, “How ‘Pose’ Paved the Way for Better TV Representation — In Front of and Behind the Camera”, Variety, 2021.04.23, https://variety.com/2021/tv/features/pose-final-season-steven-canals-impact-legacy-representation-1234946630/
Mikelle Street, “Here's What Happened to 'Pose's Damon In the Final Season”, Out, 2021.05.03, https://www.out.com/television/2021/5/03/what-happened-poses-damon-ryan-jamaal-swain-finale-season#toggle-gdpr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왓챠피디아,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tlAn0NW
박주연, “연애, 섹스, 결혼 없는 무성애자의 ‘가족-되기’”, 일다, 2022.11.08, https://www.ildaro.com/9480
“수박”, 왓챠피디아,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tl9bJpE
“드라마 ‘수박’에서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려”, PAP-Magazine, https://www.pap-magazine.com/ko/category/Culture/2732/news/
“사랑이 이길 때까지: 10월 10일 혼인평등소송 시작”,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2024.10.30, https://hopeandlaw.org/%ED%98%BC%EC%9D%B8%ED%8F%89%EB%93%B1%EC%86%8C%EC%86%A1%EC%8B%9C%EC%9E%91/
참고 문헌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 오월의 봄, 2022.
김정희원. 『공정 이후의 세계』 . 창비, 2022.
조한진희 외. 『돌봄이 돌보는 세계』 . 동아시아, 2022.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박주연. “꿈꾸던 나, 꿈꾸던 가족이 현실이 되는 공간, ‘볼’” 일다, 2019.11.11, https://ildaro.com/8589.
[1]
더 케어 컬렉티브.
『
돌봄 선언
』 [eBook]
.
니케북스, 2021, 37.
[2]
‘
볼
’(Ball)
은 유색인종 퀴어들
(
아프리카계와 라틴계 미국인
)
이 사회의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치장
(‘
드랙
’)
을 한 뒤
,
이를 뽐내고 누가 더 뛰어난지 겨루던 행사에서 출발한 문화이다
.
드랙 이외에 춤
(
대표적으로
‘
보깅
’),
립싱크
,
런웨이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으로 발전했다
.
[3]
에이섹슈얼(무성애자): 어떠한 젠더에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
에이로맨틱(무로맨틱): 어떠한 젠더에도 연정적(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
[4]
에이섹슈얼과 에이로맨틱을 포함해, 완전히 그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스펙트럼 상의 여러 정체성들을 아우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