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눙
마스크 너머의 공기부터 누군가의 생명까지, 코로나 19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갔다. ‘평범’했던 일상이 뒤흔들렸고 그 피해는 다양하고 막대하다. 이미 발생한 피해를 수습하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노력하고 있다. 이 힘든 시간을 지나 언제쯤 모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한편에서는 대체 무엇이 코로나를 확산시키고 우리의 일상을 뒤바꿨는지에 대한 책임론이 피해를 수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같이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책임 주체 중 하나는 중국이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중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과 초기 방역 실패의 이유로 비난받아왔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왔던 미국 플로리다, 텍사스, 미주리, 네바다주에서 코로나 19로 피해를 입은 개인과 기업이 중국 정부에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등 국제사회에 지속해서 제기된 중국 책임론은 미·중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1] 한국에서도 공식적인 명칭이 결정된 이후 지금까지도 코로나 19가 아니라 ‘우한 폐렴’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보수 언론과 정당은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을 거부하는 것에는 대중들의 반중 정서와 중국의 책임을 줄여주려는 의도가 있다며 혐오적 명명을 사용하는 것에 지속적으로 가담하였다.[2] 이후 대구의 대규모 지역 사회 감염으로 국내에서도 6,000명이 넘는 확진자가 생기면서 신천지라는 책임 소재가 등장했다. 약 3달 후 확진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K-방역에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또다시 발생한 이태원 클럽 집단 감염으로 성소수자가 코로나 19의 새로운 책임자가 되었다. 그사이에도 매일 새롭게 공개되는 이동 경로로 확진자 개인에게까지 그 책임이 돌아갔고, 사람들은 그렇게 매일매일 또다른 책임 대상을 불러내 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은 책임이 비난과 혐오를 정당화해주는 그럴싸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지금의 책임론은 재발 방지와 피해 보상을 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기를 관리하고 피해를 수습하려는 것보다 ‘책임’을 구실로 ‘남 탓’을 하는 것, 화풀이하는 것이 그 이면에 목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개인의 방역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만 오천 명에 달하는 확진자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 것도 아니다. 직장에만 오고 가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은 오히려 대중의 연민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방역 의무를 저버린 개인은 전염병예방법을 기준으로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익명의 다수가 자의적으로 비난을 가하거나, 또는 비난의 면죄부를 내리는 것이 코로나 19 종식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태원 클럽 집단 감염의 사례에서, 확진자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낙인으로 인해 클럽 방문자들이 검사를 기피하고 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중에게는 확진자들을 심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
실제로 있을 법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여기 유동 인구가 많은 강남역 11번 출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있다. 이 대학생은 확진자 손님이 다녀간 자리를 정리하다 코로나 19에 감염된다. 그렇다면 이 전파상황에서 누가 가장 잘못한 것일까? (당시 손님도 증상이 없어 감염 여부를 모르던 상황이다.)
1. 감염된 지 모르고 카페를 방문한 손님
2. 이 시국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대학생 점원
3. 방역 환경을 확실하게 구축하지 않은 카페(회사의 지침)
4. 국민이 안전한 곳에서 살아가게 할 책임이 있는 대한민국 정부
5. 확진자가 가장 처음 보고된 중국.
위 보기가 모두 아니라면 신천지나 성소수자 집단, 또 다른 제3의 확진자일까? 쉽게 답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자로 잰 듯이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개선을 위해 관리자 역할을 강조할 수는 있겠으나, 그 논의가 점점 특정 집단과 개인을 향한 혐오와 갈등이 되는 것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반응이다.
이렇듯 특정 대상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실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팬데믹 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감염의 피해자는 확진자 본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확진자를 위한 사회적인 도움 이전에 무고성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일까? 모두가 감염될 수 있고 전파자도 될 수 있는 전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 왜 우리는 탓할 대상을 찾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한국 사회가 위기와 공포에 여태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를 IMF 이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명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시작된 신자유주의에 발맞추기 위해, 당시 한국은 충분한 준비 없이 정책과 경제 구조를 변화시켜야 했다. 그 결과로 당시 한 달 동안 실업자가 약 27만 명 늘어나고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 전환과 같은 노동 유연화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후 사회는 고용불안에 집단적으로 시달렸다. 그에 따른 사회의 대처는 경쟁과 개인주의였다. 금융위기로 인해 비정규직이 늘어났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는 줄어들어 경쟁이 심화되었다. 사람들은 경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펙 쌓기와 같은 성공적인 자기 경영도 이루어 내야만 했다. 모두가 1인 기업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경영해야 하고, 그것에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응원과 위로가 아닌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경영의 성패는 사회가 아닌 경영자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은 사회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사적 영역으로 이전시켰다.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자기 돌봄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3]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하고, 자기 몫이 아닌 책임을 지게 되면 호구가 된다. ‘남을 돌보기에는 내 코가 석 자’라는 분위기는 특히 민폐와 무임승차에 민감하다. 타인과의 연대 의식은 사라지고, 내가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되겠지만 피해를 당하는 것은 더욱 안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태도는 다른 사건·사고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 19와 유사한 감염병의 예로 메르스 사태가 있었다. 186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국내 치사율이 20%이었던 메르스는 한국 사회가 코로나 19 이전에 감염의 불안과 공포를 느꼈던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감염병 대처 시스템이 잘 마련되지 않았던 한국 사회에서 메르스는 초반에 우후죽순 확산되었다.[4] 많은 사람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책임자를 찾아내려 했다. 그렇게 대중이 찾아낸 최초 감염자는 여성이었고, 그 여성에게 ‘해외여행이나 다니고 바이러스까지 옮겨왔다.’라는 혐오의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사실 초기 확진자는 남성이었고, 대중들이 쏟아내던 혐오 발언은 ‘가장의 무게’를 이해한다는 반응로 바뀌었다.[5] 공정한 척하는, 선택적인 단죄 뒤에 혐오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세월호 참사이다. 한국인이라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한다는 말처럼, 이 사건은 사회에 집단적인 트라우마와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공적 기관들의 무능과 책임 회피는 실망스러웠고,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에 반하는 무수한 혐오 반응이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특히 ‘세월호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단식 투쟁을 하는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한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의 노골적인 혐오의 사례가 있었다. 그 외에도 유가족의 슬픔을 보며 진정성을 판단하려 하는 여론과 ‘세월호 이야기가 이제는 지겹다.’라는 반응도 많았다. 그들은 유가족이 국가에게 요구하는 피해 수습과 진상 규명을 단순히 ‘무임승차자’의 ‘보상 챙기기’로 매도했다. 이러한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위기를 느끼는 이들이 자신들보다 위태로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봄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왜곡된 행동이다.[6]
이러한 지난 경험으로 한국 사회가 위험에 대처할 때 드러나는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지금 대중들이 코로나 감염 공포를 대처할 때도 여전히 책임 전가와 혐오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논리에서 코로나 19에 감염된 사람은 자기경영에 실패한 사람이다. 건강 관리는 생산성을 위한 자기 경영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중요한 가치인 사회에서 우리는 환자여서는 안된다. ‘아프면 쉬기’라는 수칙이 당장 실현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다른 사람까지 전염되어 생산력이 몇 배로 저하될 수 있다는, 더 큰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동원하고 나서야 이 수칙이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경영의 실패자이자 전염의 위험까지 가져 ‘민폐’로 치부되는 확진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검진하고 치료하는 데 최고 7,000만 원이 든다는 코로나 19의 치료비를 모두 국가가 지원한다는 비용의 문제도 있다. 게다가 코로나 확산 초반 정부가 해외로부터의 입국을 허용하고 외국인에게도 치료비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혈세’를 낭비한다며 반대하기도 하였다.[7]
코로나 19로 인해 시스템의 역할이 대두되어 큰 정부가 호명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새로운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 코로나 19사태가 신자유주의를 해체하는 중요한 발판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도 존재한다.[8] 그러나 현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각자 서로에게 책임을 묻기 급급할 뿐 300명이 넘는 사망자에 대한 추모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는 여전하다. 우리가 책임을 계속해서 외부에서만 찾는다면 아마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에서 현대 사회는 미래의 위험을 전제로 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겪을지 불확실하다.[9] 지금 우리가 겪는 위험도 과거에 여러 번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코로나가 가지고 온 공포와 피해의 책임 소재를 굳이 찾자면 위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1] 윤동, 「[미중 코로나19 분쟁] 발원지 책임론으로 갈등 표면화···무역전쟁 2라운드?」, 『아주경제』, 2020.05.12
[2] 정민경, 「여전히 ‘우한폐렴 왜 안돼’냐는 일부 언론」, 『미디어오늘』, 2020.01.31
[3] 박소진. "‘자기관리’와 ‘가족경영’시대의 불안한 삶: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주체." 경제와사회 (2009): 12-39.
[4] 2015년 5월 18일 국내 첫 메르스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후 메르스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었고, 한국은 전 세계에서 메르스 감염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국가가 되었다. 최초 확진자의 병원 내 접촉자들을 격리하지 않았던 초기 대응 실패, 감염 방역을 위한 시설과 의료체제 미비, 중앙 정부의 대응 미숙 등의 원인이 존재한다.
서민. (2015). 메르스 사태를 돌아보며. 창작과비평, 43(3), 530-541.
[5] 홍찬숙. "한국형 위험사회와 물질적 전회: 세월호 및 메르스 재난의 정치 행위성." 담론 201 22.2 (2019): 7-30.
[6] 박소진. "세월호 참사를 통한 폭력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사유." 문화와 사회 26.3 (2018): 147-185.
[7] 오진영, 「유럽발 입국자 코로나 검사비, 외국인까지 무료 지원…"혈세 낭비」, 『머니투데이』, 2020.03.24.
[8] 정부는 5월 11일부터 경기부양책으로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재난지원금 제도는 코로나로 침체되었던 소비심리를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국민들이 재난지원금 제도를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일부 여론에서는 모든 개인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도 도입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존재했다.
이승준, 「코로나 이후 ‘큰 국가’가 돌아왔다」, 『한겨레21』, 2020.05.29.
[9] 김병섭, 김정인. "위험사회와 관료책임: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26.4 (2016): 379-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