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루
창작의 역사는 언제나 리메이크와 함께했다. 구전설화를 글로 엮던 시절부터 과거의 희곡이나 소설 작품을 스크린에 올리기 시작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리메이크는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인기 있는 창작기법이었다. 특히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다른 버전으로 다시 영화화한 리메이크 작품들은 최근 할리우드 시장의 동향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주름잡고 있다. 여기서 디즈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크고 작은 영화사들을 계속 흡수하며 크기를 키워오던 월트 디즈니 사는 지난 3월, 21세기 폭스 사까지 인수하면서 북미 박스오피스 지분을 무려 40%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할리우드 전체의 80%가 훌쩍 넘는 지분을 차지하는 다섯 개의 메이저 영화 제작사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수치다. 한편,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역대 흥행작 상위 20개 중 원작 코믹스 기반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시리즈와 오리지널 트릴로지에서 계속 파생되는 스타워즈 시리즈,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이전 흥행작 속편이나 리메이크 작품을 빼면, 남는 오리지널 작품은 거의 없다. 애니메이션 계열을 전담하는 월트 디즈니 픽처스로만 대상을 좁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월트 디즈니 픽처스의 흥행작 상위 10개 중 4개가 리메이크고, 여기서 속편까지 제외하면 오리지널 작품은 단 세 개로 줄어든다. 2010년대 이후의 디즈니는 여러 영화사를 인수하며 얻은 대형 프랜차이즈 시리즈를 거머쥔 채 기존 작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걸 주요 수입원으로써 완전히 정착시킨 듯하다. 해당 글에서는 이러한 디즈니 스튜디오의 프랜차이즈 사업 중 가장 오랫동안 회사의 기둥이 되어온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리메이크, 즉 디즈니 픽처스(이하 디즈니)의 최근 작품 동향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디즈니의 리메이크는 다른 영화사의 리메이크와는 조금 다르다. 창립 100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어마어마한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하며 자연히 만들어진 ‘디즈니만의 감성’은 다른 프랜차이즈와 차별화되는 특유의 감성으로 가득 찬,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가 계속 생산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디즈니만의 감성'을 보고 느끼며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고… 디즈니는 사실상 모든 세대의 강력한 추억 자극 중추를 쥐고 있는 셈이다. 디즈니는 연속적이지 않은 세계관의 작품을 연결하여 그 자체로 거대한 의식적 프랜차이즈를 형성하고, 변동이 크지 않은 선에서 매우 안정적인 퀄리티를 제공하여 대다수 관객들의 영화 선택에 있어 실패하지 않을 일정 확률을 보장한다. 즉, 오랜 역사와 자신들의 감성이라는 큰 무기를 가졌기에, 디즈니는 리메이크에 최적화된 기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영화 마니아들은 디즈니가 가져오는 영화 시장의 획일화를 매우 경계하고 있지만 말이다.)
디즈니는 20세기 중반의 기나긴 침체기를 뒤로하고 〈인어공주〉를 선두로 1980년대 말부터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다. 2010년대는 이러한 일명 '디즈니 르네상스' 시절의 영화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세대가 슬슬 경제권을 갖고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 시기다. 또한 근 십수 년 간 디지털 기술은 상상을 넘어서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영화 연출이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어마어마해졌다. 기술의 발전은 대중 미디어도 더욱 보편화시켰고, 현재의 어린 세대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과거의 문화적 코드를 이전 세대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쉽게 익히고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디즈니의 타깃 설정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21세기가 페미니즘을 위시하여 소수자 담론의 중요성이 커져가는 시기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이 좁은 의미의 정치적 공간을 벗어나 일종의 문화적 코드나 트렌드로 자리잡으면서, 철저하게 유행에 따라 자본이 움직이는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기획사 전반에서도 이를 의식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디즈니도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진보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겨울왕국〉(2013)에서는 투톱 여자주인공을 등장시켜 이성애적 연애 로맨스보다 자매애를 우위에 두었으며, 〈모아나〉(2016)와 〈코코〉(2016)에서는 대형자본 영화 제작사에서 아예 주체가 되지 못했거나 신중하게 다뤄지지 않던 문화권들을 배경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전세계 관객들에게 어필하기도 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빅히어로〉(2014)에서는 여전히 동아시아인 캐릭터에게 보라색 브릿지를 넣거나 기존의 사이버-오리엔탈리즘적 미래도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배경을 그려내기도 했고, 〈주토피아〉(2016)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억압자-피억압자의 은유를 차용하여 주제 의식 논란이 일기도 했다.
디즈니를 비롯한 영화사들이 '정치적 올바름(PC)'에 발 맞추어 움직이는 모습은 앞서 언급한 리메이크 열풍과 교차되며 흥미로운 지점을 유발한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도 과거에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 새로운 정치적 재해석을 더해 재생산하는 경우 시대에 따른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최근 디즈니 리메이크 영화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리메이크 작품은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는가?
* 이하 월트 디즈니 픽처스의 알라딘(1992년, 2019년 작)과 정글북(1967년, 2016년 작)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2 → 2019 (27년)
과장을 좀 보태서, 이번 초여름은 가히 〈알라딘〉의 계절이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작중의 신나는 거리 행차 노래인 'Prince Ali'의 후렴구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27년 만에 실사 리메이크 영화로 돌아온 〈알라딘〉은 올해 세 번째로 국내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외화 흥행 3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다. 〈알라딘〉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흥행했을까? 물론 영화 흥행에는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치지만, 무엇보다 알라딘이 초반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에는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진취적이고 야망 있는 여성 캐릭터를 높이 사는 작금의 창작물 트렌드를 적극 반영했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알라딘〉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스토리는 아니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별 볼 일 없지만 영리한 남자주인공이 마법의 조력자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다가 출세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주인공을 위기에서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결혼하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디즈니는 이런 원작에 트렌디한 변주를 시도했다.
오리지널 버전과 리메이크 버전의 남녀주인공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면,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 인식의 차원에서나 개인적 기호의 차원에서나 '잘 팔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많이 바뀌었음을 쉽게 캐치할 수 있다. 〈알라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서 리메이크작으로의 가장 큰 변화는 여자주인공인 자스민이다. 인물의 분량이 원작에 비해 상당히 늘어났고 서사적으로도 좀 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었다. 단순히 왕국의 답답한 규율과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만 하는 운명을 싫어하던 원작 자스민의 모습에서 더 나아가, 리메이크 버전의 자스민은 여성의 신분으로서 남성만의 전유물이던 술탄의 자리를 욕망하는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그것을 실제로 이뤄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자스민은 수천 년 간 여성이 술탄이 된 선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왕위 계승을 거부당하고, "Seen but not heard"(아이와 여성은 얌전하고 예쁘게 보이도록 행동하되, 목소리는 함부로 내지 말라는 영국 격언)하길 수시로 요구받는다. 하지만 그는 'Speechless'라는 새로운 삽입곡을 통해 여성으로서 겪는 불합리한 현실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고자 하는 결심을 노래한다. 그러나, 전작에 비해 자스민의 분량이 많이 늘어난 리메이크 버전에서조차 제1주인공이 알라딘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알라딘은 시대적 트렌드를 따라 세심하고 연애 상대의 눈치를 살필 줄 아는 남성 캐릭터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자스민처럼 성별의 문제로 억압받는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알라딘이 분명하게 제1주인공의 위치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원작을 지나치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스민이 여성으로서의 부당함을 외치는 장면이 서사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성관이 전반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이성애 연애관도 자연히 변화했다. 〈알라딘〉의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로맨스의 주체가 성공의 보상으로 여성을 획득하던 남성 주인공에서 남성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여성 주인공으로 이동한 점을 서사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리메이크작에서는 자스민이 술탄이 되고 싶은 욕망에 대해 고민하며 알라딘에게 의견을 구할 때, 알라딘이 "내 의견이 중요한가요?"라고 되묻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알라딘〉을 관람한 많은 여성 팬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남성의 말에 순종해야 했던 여성이 독립적인 지위를 확인받는 그 장면에 열광했다. 로맨틱한 장면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오리지널 버전 〈알라딘〉의 유명한 'Whole New World' 장면 직후 키스 장면은, 공주와 키스하라고 왕자를 재촉하는 〈인어공주〉(1989)의 'Kiss the Girl'과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며 양측의 직접적 의사표명 여부와 별개로 마법의 양탄자가 알라딘을 떠밀어 두 사람이 입을 맞추게 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리메이크 버전의 동일한 장면에서 마법의 양탄자는 알라딘을 앞으로 조금 밀어 키스를 살짝 부추기는 정도로만 개입하며, 대신 두 사람이 입을 맞추기 직전 서로의 눈빛을 살피는 묘사가 전작보다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현대의 연애수행에서 어떤 점들이 새로이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다.
리메이크된 〈알라딘〉이 전작에 비해 진보된 여성관이나 달라진 (이성애)연애관을 반영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서술 또한 완전하지는 않다. 여전히 디즈니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이성애 독점연애 방식에서 벗어난 형태로는 확장되지 못한 점, 원작에서 러브라인이 아예 없던 지니에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의 유성애 서사를 붙여 '더욱 완전한' 해피엔딩을 완성하려 한 점, 진보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기엔 충분하지만 전체 이야기 구조에 사실상 큰 영향은 미치지 않을 정도로 깊이가 부족한 자스민의 서사 등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인종 문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스민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장인물에 백인 성우들을 기용한 전작과 달리, 리메이크 작품은 배역 대부분을 중동이나 아프리카 계통의 배우로만 캐스팅했다. 비서구 문화권을 다루는 작품을 실사로 리메이크했을 때의 가장 값진 부분은 여기에 있다. 기존에 흥행하던 비서구 비백인 주인공의 애니메이션 작품 명성을 그대로 끌어와 할리우드에서 눈에 띄게 조명받지 못하던 비백인 배우들이 큰 무대에 당당히 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계가 드러난다. 아무리 알라딘의 배경인 아그라바 왕국이 가상의 나라라 할지라도, 인접하지만 결코 단일한 문화를 가지진 않은 여러 국가 출신의 배우를 한 자리에 기용해버린 점은, 할리우드에 비백인 배우가 부족한 현실과 리메이크를 거듭하여도 오리엔탈리즘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영화의 문제점을 정확히 드러낸다. 심지어 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자스민 역의 나오미 스콧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배우지만) 아라비아 문화권과는 상관없는 인도계 배우임에도 〈알라딘〉 속 캐릭터들과 유사한 '갈색' 피부색을 가졌고 '갈색' 피부색 문화권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아라비아 배경인 해당 작품에 캐스팅되기도 했다.
1967 → 2016 (49년)
〈정글북〉은 리메이크되기까지의 시간 간격이 유난히 길기 때문인지, 모든 디즈니 리메이크 작품을 통틀어 원작으로부터의 변화 폭이 가장 크다. 캐릭터들의 기본적인 설정만 그대로 둔 채 이야기를 통째로 갈아엎었고, 서사 전개의 완급이나 과정,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등도 전부 다르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모글리와 주변 동물들을 묘사한 방식이다. 창작자들은 종종 인간이 아닌 캐릭터를 통해 인간사회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1967년도의 〈정글북〉은 의인화한 동식물이나 사물에 평면적인 인물상을 대입시켜 풍자하는 고전 우화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2016년도의 〈정글북〉은 모든 등장인물이 전형적이고 단순한 성질이 아닌 훨씬 입체적이고 섬세한 감정을 가졌으며,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감정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훨씬 다양한 형태의 연속적 감정선이 표현되어 작품 전반의 높은 완성도를 확보했다. 주인공인 모글리를 그려내는 방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서 그가 전형적으로 '철없는' 아이처럼 그려지는 반면, 리메이크 작품에서의 모글리는 굉장히 성숙하게 묘사된다. 리메이크 버전 〈정글북〉은 모글리를 어린이 인물로서 서술하기보다는 비인간동물세계와 대비되는 인간세계의 대표자로서 세워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글북〉이 모글리를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인물상은 정글 속에 사는 타잔 같은 인간도, 인간사회의 군상을 그대로 지닌 채 정글을 배경으로 우화화되기만 한 인간도 아니다. 모글리는 '인간다움'을 지녔지만 자연과 공존하며 살고자 하는 인간을 대변하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모글리가 표상하는 인간상이 변화함에 따라 작품의 결말과 메시지도 완전히 달라졌다. 끝까지 정글에 남겠다고 떼를 쓰듯 버티다가 예쁘장한 외모의 인간 여자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 평생 같이 살던 동물들을 갑자기 모두 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결말을 맞는 원작에 반해 리메이크작의 모글리는 자신의 '인간다운 특징'을 타지, 혹은 이주지로 표상되는 정글 환경에 완전히 동화시켜 없애버리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특징을 보완하고 공생하며 정글에 남아 동물들과 계속 함께 살아가는 결말을 이끈다.
리메이크작은 분명 전작보다 비중 있게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했다. 일례로, 당시 젠더 의식의 나이브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어리석은 인간상을 풍자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오리지널 〈정글북〉의 코끼리 부대를 리메이크작에서는 자연의 위엄과 경이를 담고 있으며 신이나 대자연을 형상하는 상징적 집단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렇듯 사건이 진행되는 단편적 배경으로만 제시되던 자연을 리메이크작에서는 입체적이고 거대한 실체로서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음이 꾸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리메이크 〈정글북〉도 자연과 그 속의 개체를 인간과 동등하게 존중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깊이 닿지 못했다. 모글리는 정글에서 자라나 인간세계의 악한 부분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의 타고난 긍정적 본능이라고 작중에서 묘사되는 도구와 불의 자유로운 사용 등만이 캐릭터 설정에 반영된 인물이다. 모글리처럼 성찰과 반성 없이 막연하게 선한 의지와 애정만 가지고 자연과 공존하기에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게다가 인간인 모글리가 악한 비인간동물로 설정된 쉬어칸으로부터 극적으로 정글을 구원하는 서사는 얼핏 자연과 비인간동물의 터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인간중심적 서술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모글리는 정글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적인 속성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게 당연한데도, 옷 입기, 직립보행 하기,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불 다루기 등을 마치 인간으로서의 본능인 마냥 자연스럽게 수행해낸다. 이러한 서술은 제국주의 시대에 문명인과 야만인이 타고나는 것이라 여겼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정말 제국주의 사상처럼 모글리가 비인간동물들을 교화하려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동물을 구분하는 속성이 타고난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는 관점은 두 집단 간의 불평등한 지배-억압 구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곧 인간 대 비인간동물이라는 관계성을 타자이자 이주민 대 내부자이자 원주민의 관계성과 연결해 설명하려고도 한 작중의 시도까지도 실패한 알레고리로 만든다.
요즘 디즈니의 주된 경향 중 하나는 성장 과정에서 가족의 역할을 강조하고 동시에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코코〉(2017)의 확대가족, 〈겨울왕국〉(2013)의 자매애, 〈말레피센트〉(2014)의 비혈연 모녀 관계 등은 디즈니가 결혼한 이성 커플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로만 구성된 ‘정상가족’의 모습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시도로 보인다. 〈정글북〉도 맥을 같이 한다. 주인공 모글리를 데려다 키우는 늑대가족의 서술 비중이 원작보다 훨씬 늘어나고 캐릭터성도 입체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늑대 아이들이 모글리와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부모의 사랑을 놓고 심술을 부리는 장면 등은 모글리가 단순히 '늑대에게 길러진 인간 아이'일 뿐만 아니라 '친양육자가 아닌 다른 양육자에게 길러진 아이'이기도 함을 설명하고 있다. 늑대 양육자들은 친자식이 아닌 모글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한다. 이는 인간의 성장에 있어 가족이나 양육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었음을 비추는 동시에, 소위 '배다른 자식'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기존 동화 속 양부모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다정하고 사려 깊은 양부모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규범적이지 않은 가족 구성을 긍정적으로 상상하고 수용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리메이크 버전 〈정글북〉에서 모글리는 쉬어칸에 의해 친아버지와 양아버지를 모두 잃는다. 악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인물은 왜 아버지들이었어야 했을까? 수많은 이야기에서 주로 살해당하는 역할이 ‘여성’인 반면, 가족 서사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살해당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주로 약자의 표상이나 남성 인물의 각성을 위한 도구로써 살해당하는 여성과 달리, 살해당하는 아버지는 죽음을 통해 동정심을 일으키고 자기희생적 보호자로서의 긍정적 성질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남성 인물이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마친 후 그 자리를 계승하는 가부장적 서사를 더욱 공고히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공석이 된 지도자 자리를 어머니 늑대인 락샤가 이어받으며 가부장 서사를 탈피하는 결말을 맺는다. 밀림의 지도자이자 주인공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가 죽고 나서도 어머니인 사라비나 친한 친구인 여성 캐릭터 날라는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던 〈라이언킹〉(1994)과는 명확히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정글북〉은 왜 이렇게까지 주제의식과 전개를 대폭 수정하였을까? 〈라이언킹〉은 동일하게 동물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지만, 2019년의 리메이크작에서도 변주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디즈니가 철저히 자본적 계산에 의해 작품 각색을 하는 결과이다. 〈라이언킹〉은 1994년에 제작되었음에도 월트 디즈니 픽처스의 대표 흥행작 반열에서 유일하게 21세기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성공한 작품이다. 이렇듯 원작의 팬이 많은 경우, 재해석을 크게 반영하여 새로운 팬층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작품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와 옛날 팬층을 불러오는 편이 상업적 성공을 훨씬 보장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글북〉은 그 반대인 셈이다.) 이는 디즈니가 리메이크와 ‘정치적 올바름’을 교차시키는 것을, 사회적 영향력보다는 상업적 성공을 위한 도구로써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디즈니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한 결과물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디즈니만큼이나 거대한 기업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리담론들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여전히 디즈니가 여러 가지 권리담론을 녹여내는 방식에는 부족함이 많고 비판점과 개선할 점도 늘 존재한다. 이제 조금씩 녹여내기 시작하는 여성과 인종 문제에는 섣불리 안주하지 않으면서 계속 심층적으로 발전하고 더 다양한 모습을 그릴 수 있길 바라며, 아직까지 고민이 닿지 못한 듯한 장애나 정신질환 등 신체적 타자성에 대한 고찰이 반영된 캐릭터도 앞으로는 디즈니 영화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왕정과 혈통주의, 계급제에 대한 로망을 아직까지도 재생산하고 있다는 데에도 최소한의 경각을 가져 구시대의 정치체계에서 벗어나 확장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도 언젠간 나올 수 있었으면 한다.
리메이크를 통해 디즈니가 과거의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고 고치려는 태도는 긍정적이지만, 이미 세계 영화산업을 쥐고 흔들 만큼 거대한 자본을 가진 독과점 기업이 안정성을 위해 기존의 작품을 잘라내어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전에 없던 '신선한' 조각을 이어 붙인 작품만 계속해서 만드는 양태는 사실 굉장히 게으르게 비춰질 뿐이다. 디즈니가 과거의 작품을 현대의 입맛에 맞게 애써 고쳐 재생산하는 데 지나치게 총력을 기울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분야는 무궁무진하고 창작의 한계는 끝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디즈니의 모든 영화가 빠짐 없이 완벽할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으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체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최선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한 비판은 언제나 필요하다. 날카로운 시선을 계속 견지하면서 사회의 어떤 부당함이 있으며 그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바꿔나가면 좋을지, 문학과 비평에는 어떻게 차용되면 좋을지 지속해서 고민하는 것이 능동적 소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