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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Dec 17. 2021

5불 생활자

나 홀로 짠내 여행

타멜(Thamel)은 카트만두에서 가장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거리다.

아니, 그냥 여행객이라기보다는 배낭족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히피 머리스타일과 원색으로 염색된 헐렁한 옷을 걸친 외국인들이 활보하는 타멜거리의 풍경은, 그동안 네팔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려는 산악인들이나 오는 오지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단 한 번에 증명해주었다.


늦은 저녁 현지인들과 뒤 섞여 탄 버스 창 밖으로 서서히 불 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음을 확신했다. 버스 안에는 나와 영국인 캐시 말고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몇몇 더 있었다. 그중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대충 묶고, 수염도 대충 깎고, 옷도 상하의 안 어울리게 대충 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모습에서 여행 고수의 기가 풍겨 나오는 일본인 여행객이 가장 눈에 띄었다. 비겁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후 그의 뒤를 따라가면 저렴한 숙소에 도달할 것만 같아 걱정 한시름은 덜어 두던 차였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렸다. 그러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승객이 탈 때마다 버스비를 거뒀던 사내는 잽싸게 지붕으로 올라가 짐을 묶었던 밧줄을 풀었다. 버스 지붕 위에서 사내가 던진 짐들은 버스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의 손을 스치다시피 거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래도 아무도 볼멘소리를 않는 것 보니 울퉁불퉁한 길을 수 없이 지나는 동안 단 하나의 짐도 낙오되지 않고 무사히 주인을 만난 듯하다. 어느새 나와 캐시를 포함한 외국인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허름하지만 빵빵한 배낭을 어깨에 둘러 매고 있었다. 오랜 여정 동안 버스에서 통성명도 없던 우리들이 말없이 향한 곳이 바로 타멜이었다.


나와 캐시는 뒤 따라가기로 작정한 일본인 여행객을 따라 한 게스트 하우스까지 갔고,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외관은 이곳까지 걸으며 지나친 다른 숙소에 비하면 제일 깔끔해 보이는데 반해, 가격은 놀라울 만큼 저렴했다.

모습을 드러낸 주인장은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고, 우리가 따라간 일본인 여행객은 졸지에 우리의 통역을 맡았다.


"예약은 했나요? 방은 이미 꽉 찼는데"


주인은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고, 우리는 예약을 안 했다며 내일 다시 와도 되겠느냐고 간절하게 되물었다.


"우리 게스트 하우스는 일본인 투숙객만 받아요"


처음부터 일본인 투숙객만 받는다고 했으면 되었을 텐데, 뒤늦게 이렇게 선을 그으니 방이 꽉 찼다는 말도 거짓말 같았지만, 어쨌든 나와 캐시는 그곳에 묵을 수 없었다. 친절했던 일본인 여행객은 더 이상은 도와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늦은 밤 나와 캐시는 타멜 거리에서 가지처럼 뻗은 여러 거리들을 헤매야 했고, 또 다른 일본인 게스트하우스에서 또 한 번 퇴짜를 맞고서야 간신히 호텔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인 게스트 하우스보다는 조금 덜 깔끔하면서 더 비쌌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 둘이 함께 쓰기로 한 방의 가격은 하룻밤에 한국돈으로 약 2500원. 카트만두의 물가는 조금 바가지를 씌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여행자들에게 까지도 관대했다.



카트만두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어느 구석 하나 낡음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없는 거리는 아침이면 말쑥하게 단장하고 행인들을 맞았다. 이발소 주인이건, 원단 상점의 점원이건, 길거리 튀김 좌판의 여인네들이건 직업에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분주하게 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고 나면, 거리는 사람들로 꽉 찼지만 불쾌한 접촉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음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볶거나 튀기는 냄새가 기분 좋게 코 주위를 맴돌았다.


네팔의 전통복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단과 장신구를 파는 상점들이 거리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데 반해, 현지인들은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간혹 사리를 입은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색깔은 아주 새빨갛거나, 샛노랗거나 아니면 환한 자줏빛이어서 원단이 살랑거리며 스쳐갈 때면 여행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꼭 해야 하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이 떠지는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고, 첫 날 봤던 히피들처럼 타멜과 그 주변을 흐느적흐느적 다니다가 눈이 감길 때 하루를 마쳤다. 여행지에서 처음 느껴보는 여유였던 것 같다. 먼 나라 땅까지 ‘여행’ 이랍시고 큰맘 먹고 와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이렇게 꿀맛일 줄 누가 알았을까.




나보다 부지런한 캐시는 내가 침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나는 좀 더 뭉기적 거리다 호텔 바로 밑에 위치한 영어로 ‘Bakery’라고 간판에 적혀 있는 카페에서 도넛과 밀크 티를 영어 메뉴에서 고르고, 책을 읽으며 아침을 통째로 보냈다. 주인아저씨와 담소를 나눌 때도 있었고, 주변의 여행사 직원이 은근슬쩍 다가와 내 옆 자리에 앉아 투어 상품을 소개하는 바람에 책을 못 읽는 날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마저도 평화로운 아침시간을 보내고 난 후,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건 고작 350원. 겉은 눅눅하고 속은 퍽퍽한 도넛과, 차보다는 우유 전분의 단 맛이 더 강한 밀크 티는 맛없어도 맛있었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밀집한 타멜 거리와 그 주변의 식당들은 그나마도 비싼 편에 속했다. 어느 날 오후, 여느 때와 같이 목적 없이 타멜 주변을 거닐다 우연히 캐시를 만나 좀 더 멀리 걸었던 적이 있다. 현지인들로 붐비는 시장 거리였는데, 우연히 캐시가 좋아하는 티베트 만두인 모모를 발견했다. 열 개에 약 250원을 주고 사서 다섯 개씩 나눠 먹으며, 시장 구경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활짝 열려 있는 식당 안으로 누군가가 시킨 야채 볶음 면을 발견하곤, 그 값이 약 450원이라는 말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하나 씩 시켜 두둑하게 배를 채웠다. 티베트에서 보다 캐시가 주머니 걱정을 덜 하는 같아 내 마음 또한 조금 더 편해졌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5불 생활자’라는 인터넷 여행 카페를 통해 나름대로 상상 여행을 하곤 했다. 이 카페의 이름처럼 나도 언젠가 하루에 5불로 생활하며 짠내 나는 여행을 해보리라는 다소 엉뚱한 꿈도 꿨었다. 그러나 여행이 현실이 되고 숙박비와 교통비를 감당해야 하는 여행자에게 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려 할 때쯤, 이 얼토당토않은 꿈이 실현된 곳이 바로 카트만두였다. 퇴사 후, 장래희망과도 같았던 '5불 생활자'가 되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2년을 넘게 여행한 캐시의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의 씀씀이에 내가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직한 네팔인들이 몫이 컸다.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는 가격을 조금 더 높여 부를 만 도 한데, 내가 만난 네팔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시장 한편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튀기고 있길래,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으면 먹어 보라며 몇 개를 접시에 담아 건네줬다. 심지어는 호객행위를 할 때에도, 착한 마음씨가 묻어났다. 그들 만의 수법이었는지는 몰라도, ‘투어 신청을 하지 않아도 되니, 우선 내 말 좀 들어봐요’, ‘안 사도 되니 부담 갖지 말고 구경만 해요’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강요하거나 싫은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대신 그 아쉬움을 어색한 미소로 감추는 그들이었다.




카트만두에서는 결국 일주일을 지냈다. 원래는 다음 목적지로 가는 경유지라 딱 하룻밤만 묵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낡고 분주한 도시에서 느껴지는 묘한 평화로움과 여유, 현지인들의 정직함과 관대함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고, 쉬고 가라고.

장황하게 세운 여행 계획만 아니었더라면, 이곳에서 몇 달, 몇 년을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트만두의 한 고급 주택가에 있는 애견미용실에서 미용 보조 일자리를 구한 캐시처럼.

떠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머무를 이유 또한 찾지 못했기에,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기로 했다.


안녕, 캐시.




하루는 카트만두에서 첫날 만났던 일본인 여행객과 캐시 그리고 나, 셋이서 이웃마을 박타푸르에 갔다가 운 좋게도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카우 페스티벌을 즐기고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가 꽉 차자, 우리 셋은 다른 현지인들을 따라서 버스 지붕 위에 타게 되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버스비는 누구에게 내야 하나 두리번거리던 찰나,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지붕으로 올라와 버스 비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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