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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Dec 10. 2021

영국인, 캐시

그녀가 나를 따라 나섰다.

“캐시, 한국에서 살 때 행복했어?”


영국인 캐시는 여행을 떠나기 전, 서울 강남에서 영어 강사로 일했었다고 했다. 이름을 들으니 나도 아는 유명한 학원이었고, 내가 일했던 회사 사무실에서 꽤 가까운 곳이었다. 캐시가 나보다 2년 일찍 한국을 떠나긴 했지만 일한 시기도 조금 겹쳤다. 이런 캐시와 내가 티베트에서 만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난 일이다.

나는 캐시의 입에서 영어 네이티브들이 흔히 쓰는 은어나 비속어를 들어본 적이 다. 말을 또박또박 그리고 천천히 하는 그녀의 영어는 유독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만약 캐시가 한국에서의 이력을 먼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캐시에게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뻔했다.

지금은 염색을 해서 빨갛지만 머리의 뿌리 색을 보니 옅은 금발, 게다가 파란 눈을 가진 그녀는 한국인들이 막연하게 상상하는 전형적인 영국 여자의 모습에 가까웠고, 차분하고 남을 말을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 학생들이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정말 많이 했어”


생각보다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캐시는 바로 대답했다.

나도 한국에서 짧게나마 사회생활을 해봤기에 바로 무슨 말인지 척하고 알아들었지만, 회사 근처에서 영어 강사로 보이는 외국인들을 볼 때면 운 좋게 영어 네이티브로 태어나서 돈 참 쉽게 버는구나 하고 생각했기에 캐시의 대답은 좀 의외였다.  



“결국 너무 힘들어서 상사에게 말했더니 근무시간을 조금 줄여 주긴 했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악덕 상사를 만나서 한국에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떠났다는 결말이라면 내가 괜히 미안했을 텐데.



“점심시간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


한국 음식이 입 맛에 아주 딱 맞았다는 말을 기대했다.



“동료 강사들이랑 학원 근처에 있는 베이글이나 샌드위치를 먹으러 다녔어”


하긴 낯 선 음식이 맛있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힘든 하루 중 그 잠깐 행복한 순간이라니, 평소 먹던 음식이 작은 위안이었을 런 지도.



“학원이 끝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집으로 바로 갔어. 주말에도 일을 안 하는 날에는 집에만 있었어”


함께 다니는 내내 나보다 앞장서는 발걸음이 씩씩하고, 호기심이 많아 곁눈질로 뭔가를 쉼 없이 탐색하는 캐시가 집에만 있었다니. 다른 사람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한국에 살 적 나도 그랬다. 일을 마치고 나면, 사람을 만나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내야 하는 것 자체가 고단하게 느껴졌다. 지금처럼 높은 산을 보면 올라가고 싶은 마음도, 문이 열린 사원에 고개를 쓱 들이밀며 훑어보는 호기심도,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볼까 하는 설레는 고민 따위도 없었다. 빨리 집으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고, 커피 한 잔으로 함께 숨을 돌리던 직장 동료와 상사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 일상을 억누른 건 캐시의 경우처럼 내 능력의 한도를 초과하는 듯한 일의 양과 강도였다. 내 능력에 맞지 않는 과분한 자리를 꽤 차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무거운 책임감은 일을 제 때 해내지 못할 때마다 서서히 죄책감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밥 먹듯 야근을 했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줄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피로와 무기력이 늘 어깻죽지에 껌 딱지처럼 붙어 다녔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일하는 친구들도 한 입처럼 다들 힘들다고 하니, 재미가 있건 없건 일은 원래 즐기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살았다.


다행히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우리 둘은 잠시 말없이, 바위 언덕에 앉아 미니어처처럼 자그마하게 보이는 팅그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일과를 마치는 시간인지 말이 끄는 수레는 사람들을 잔뜩 싣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팅그리가 아주 작은 마을인 줄 알았는데 높이 올라와서 보니 수레가 향하는 쪽으로 더 작은 마을들이 보였다. 그곳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는가 보다.


이날 아침, 내가 떠나려고 짐을 챙기는데, 자신도 팅그리에 가고 싶었다며 캐시가 나를 따라나섰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외국인에게는 버스표를 팔 수 없다는 티켓 창구 직원과 한참을 실랑이를 하는데, 티베트 대학생 두 명이 나타나 택시를 쉐어하자고 해서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캐시를 목적지에 내려주고 티베트 학생들이 탄 택시가 떠났을 때, 그 뒤를 이어 도착한 택시에서 프랑스 커플이 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넷이 되어 동네 구석구석을 함께 뒤지다가 싱글베드가 2개 있는 깔끔한 여관을 찾아내  한 방을 쉐어하기로 했다. 한 침대에는 프랑스 커플이, 또 다른 침대에는 나와 캐시가 함께 자기로 했다.

시가체에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나 혼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시작한 하루였는데, 캐시가 함께 간다고 한 순간부터 모든 일들이 잘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술술 풀렸다.

여관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마을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산에 올라간다는 캐시를 이번에는 내가 따라나섰다. 산 꼭대기에 오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며, 캐시의 한국 생활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캐시가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캐시, 팅그리에는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사실 나는 티베트에 오기 전까지 ‘팅그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1년은 심사숙고해서 짠 여행 계획대로 라면 티베트에서는 라싸와 시가체만 가면 임무 완성이었다. 그런데 여행  전에 기대가 컸던 탓인지, 특히 라싸는 내가 상상했던 티베트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실망 그 자체였다. 그나마 시가체가 그 아쉬움을 달래 주기는 했지만, 이런 마음으로 티베트를 떠나기는 싫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팅그리’라는 동네가 떠올랐다. 아마도 라싸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느라 여행사들을 전전하다가, 그 이름이 잠시 내 눈이나 귀를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그곳에 가면 에베레스트가 멋지게 보인 다는 말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았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티베트에 대한 그럴싸한 기억 하나는 만들어갈 수 있으려나 하는 희망으로 네팔로 향하기 전 팅그리를 거쳐 가기로 한 거였다.


“팅그리에 오면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다고 들었어”


캐시도 그랬다. 딱히 다음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던 찰나에 내 입에서 ‘팅그리’라는 단어가 나오자 ‘빙고’ 한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왔지만 에베레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한 참을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도 내가 침묵을 깼다.


"볶음밥이 먹고 싶다."


그러자, 캐시는,

"나는 모모(티베트식 만두)."


우리는 그제야 굳어진 줄 알았던 몸을 움직였다. 이 두 가지를 찾는 것을 이 날의 새로운 미션으로 정했다.




마을로 내려오니, 아직 마을을 빠져나가지 않은 두서너 대의 수레 위로 현지인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이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말들과, 감아놓은 태옆이 이제 막 풀린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그런 모습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니, 이제 막 출발할 줄 알았던 수레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내려오더니 우리 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 그 사진을 보겠다는 사람들, 그리고 카메라를 달라며 우리를 찍어 주겠다 하는 사람들. 정갈했던 퇴근길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서두르자는 신호를 보냈는지 그들은 재빠르게 다시 수레 위에 올랐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며 마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해졌다.


어두운 마을을 헤매다 가느다랗게 열린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식당 하나를 간신히 찾아냈다. 볶음밥도, 모모도 없었다. 유일하게 문 연 식당의 유일한 메뉴는 국수였다. 미션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산 꼭대기에서 360도 파노라마 뷰를 봤지만 기대했던 에베레스트는 코빼기도 안보였고, 내일 마을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네팔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딱히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티베트를 떠나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어깨를 짓누르고 목을 죄이는 듯한 자괴감이나 자책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은 일의 반대말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팅그리 마을 입구에서 '혹시나' 지나갈지 모르는 차를 두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지프차 한 대를 발견했다. 먼발치에 있는 주유소에 잠시 선 것을 내가 죽는 힘을 다해 달려가 잡았고, 운 좋게도 네팔 국경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승객은 캐나다 여성 혼자였다. 나와 캐시가 돈을 조금 보태겠다 하니 그녀는 그럴 테면 그러라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오케이' 했다.


네팔 국경을 향해 달리던 지프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멈춰 섰다. 운전기사는 ‘팅그리’하고 외치며 이곳에서 점심 휴식을 취하겠다고 했다.


나와 캐시는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마을이 팅그리인데.


기사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뉴 팅그리, 여기는 올드 팅그리라 했다.


돈을 아끼고 싶은 마음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표현하며 나와 캐시는 점심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운전기사는 우리에게 차 밖에서 기다리라며 차 문을 잠근 후, 캐나다 여성과 식당으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그 둘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던 시선은 식당 문이 닫히자 잠시 갈 곳을 잃었고, 자연스레 차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에베레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새하얀 설 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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