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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Nov 23. 2021

드궈런, 잉궈런, 한궈런

세 여자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서 시가체나 간체 등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여행 허가증>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더 웃긴건, 돈 만 주면 살 수 있는 종이 조각에 불과했고 이 허가증이 있다고 해도 현지 교통수단을 이용한 개별 여행은 불가, 여행사를 통한 '단체'이동 만이 가능했다. '단체여행'이라니, 배낭여행자의 체면이 조금 구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티베트는 비포장 산악도로가 많은 탓에 주 교통수단은 버스보다는 사륜구동 지프차였다. 말인즉슨, 단체라도 소수인원이라 가격이 비싸기도 한 데다, 이동을 원하는 날짜에 같은 목적지로 가는 여행자가 없을 경우 지프차 한대 값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라싸에 있는 여행자 숙소 게시판에는 동행을 구한다는 쪽지가 가득 붙어 있었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여행자였던 나는, 여행사에 찾아가 지프차 값을 흥정하고 삔관과 호스텔마다 열심히 쪽지를 부쳐가며 동행자를 구했다. 8월이라 동행을 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여행사들의 횡포였다.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몇 시간만 지나도 다시 찾아가면 금세 가격이 두 배 이상 올라가 있었다. 화를 내고 따져도 소용없었다. 라싸를 떠나려는 여행자들의 수에 비해 지프차의 수는 턱 없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 번 휘둘리고 나니, 라싸에 있는 어느 여행사이든 엮이는 것 자체가 불쾌해졌다.


이른 아침, 배낭을 챙겨 무조건 인력거를 잡아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외국인들은 현지 교통수단을 탈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긴 한 걸까.

인력거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중국인으로 착각한 버스표 호객인들이 목적지 명을 외치며 내게 몰려들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당장에라도 라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매표창구에 가서 어눌한 중국어로 시가체행 표를 달라고 하니 직원은 내가 외국인임을 단 번에 알아채고 안 판다고 잡아 땐다. 아이러니한 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객인들은 여전히 내 주위를 둘러싸고 티켓을 팔려고 아우성이었다. 그중 한 명이 시가체는 이쪽이라며 내 옷 깃을 잡아당겨 터미널 안으로 데려갔다.

덩그러니 서있는 봉고차 여러 대 중, 이미 안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찬듯 보이는 한 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타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여니, 적막이 흐르는 안으로 서양인 세 명도 보였다. 현지인 아기와 엄마, 노인들도 있었다. 정식 버스였는지, 왜 여행 허가증도 없는 외국인인 나를 받아줬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확신이 들었다.

드디어 간다. 시가체.


시가체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렸다. 창 밖으로는 거대한 산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강이 산줄기를 가로지르며, 생명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바구니를 등에 배낭처럼 맨 아낙네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감동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오랜 이동에 지친 현지인들이 창문도 열리지 않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실내에서, 그것도 아기가 타고 있는 차 안에서 흡연이라니. 너무 황당해서 내가 나서 담배를 끄라는 시늉을 하니, 잔말 없이 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자 또 다른 사람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 황당한 건, 나 말고는 이를 두고 모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아이 엄마도 말이다. 생각해보니, 아이가 있건 없건 집 안이나 식당, 비행기에서 흡연이 허용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세상의 여러 곳들은 각각의 템포에 맞춰 서서히 변했지만,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조금 더 느린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 티베트에서 내 세상의 원칙을 강요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매고 있던 스카프로 코를 막았다.


시가체에 도착하자마자 인력거를 타고 ‘삔관 (여관)’에 가달라고 했다. 여러 번의 손짓과 발짓, 우여곡절 끝에 주 손님이 외국인인듯한 호스텔에 무사히 찾아왔다. 짐을 대충 놓고 나와 그제야 제대로 본 시가체는, 관광객들이 바글거리고 소음과 매연이 가득한 라싸와는 완전히 달랐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예닐곱 살 아이들은 조근조근 속삭이고, 야크 수십 마리를 무심히 몰고 가는 사내, 바닥에 천을 깔고 조약돌로 게임을 하는 노인들이 마을의 풍경이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가는 내 뒤에서 '뽀토, 뽀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싸에서처럼 티베트인인 자신의 사진을 찍으라고 후한 인심이라도 쓰는 척 한 다음에 돈을 요구하려나 했는데 , 아이들은 찍어준 사진을 보고는 키득키득 웃더니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곳들을 모두 보고, 숙소로 돌아와 가장 먼저 샤워를 했다. 공용 욕실에 있는 강약 조절이 안 되는 드라이어로 곱슬머리를 말렸더니 수사자처럼 머리가 부풀어 올랐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크게 부풀리며 드라이를 했다. 티베트에 온 이후 가장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묵는 다인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는데, 어두컴컴한 방 안에 내 침대 옆으로 샤워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서양 여성 여행객 두 명이 보였다. 이 둘은 각자의 침대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 내 머리 좀 봐. 욕실 드라이기로 만든 거야.’

인사는 해야겠고, 초면에 내 꼴은 우습고, 나의 횡설수설에 둘은 깔깔대며 웃어줬고, 그렇게 우리는 첫인사를 나눴다.


한 명은 독일인, 한 명은 영국인이었다. 이 둘은 방금 이 방에서 처음 만나 말도 안 되는 <여행 허가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랬다. 우리 셋은 티베트의 서로 다른 곳에서 여행허가증과 여행사의 도움 없이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가체까지 왔고 공교롭게 이 호스텔에서 만난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더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우리는 늦게까지 깔깔대며 웃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간체에 가자고 한 건 독일인 아이윈이었다. 아니, 그녀가 간체에 간다고 했는데 나와 영국인 캐시가 함께 가겠다고 했다. 호스텔을 나서자마자 아침식사를 하러 찾은 찻집에서 아이윈은 능숙하게 티앤차 (야크 버터로 만든 차)와 비스킷을 주문했다. 티베트인들이 즐겨 마시는 티앤차는 밍밍하면서 버터의 느끼함이 강해 거북했지만 왠지 마음이 맞는 것 같은 이 둘과 함께여서 그랬는지 그날 아침이 그냥 좋았다. 비록 억지로 마시긴 했지만 차 한 잔이 배를 두둑하게 해 주고, 몸에 온기를 넣어줘 차가운 아침 기운을 쫓아내는 듯한 기분이 강하게 들었더.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차를 마시는 지금의 습관은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간체로 가는 방법은 이상하리만큼 수월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간체로 간다는 봉고차에 올라타니, 여행 허가증을 묻지도 외국인이라고 승차거부를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새로 생긴 '여행 허가증'에 대해 운전기사가 아직 모르는걸 지도 몰랐다.) 간체까지 두 시간 정도 되는 길에는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시가체보다 더 작은 간체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인력거 대신 말이 끄는 수레가 눈에 띄었다. 사람도 타고 짐도 타고, 이 동네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듯했다.

다 쓰러져가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이윈과 캐시가 있으니 이번에도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팔팔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를 가리키며 우리가 시킨 건 툭파였다. 그 집의 유일한 메뉴인 듯했는데, 기름기 가득한 붉은빛 국물에 고기보다는 야채가 푸짐하게 들어 있는 국수였다. 보기와 달리 얼큰하고 맛있어서, 툭파는 지금까지도 내가 티베트 식당을 찾을 때면 꼭 시키는 메뉴가 되었다.

식당의 부부는 우리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금발머리 아이윈과 빨간 머리 캐시, 그리고 검은 머리 내가 함께 다니는 것이 신기했는지 사실 아침부터 이 질문을 수 도 없이 받았었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이전과 같은 순서로 대답했다.


아이윈: 워 시을 드궈런 (저는 독일인이에요)

캐시: 잉궈런 (영국인)

나: 한궈런 (한국인)


아이윈은 14년째 여행 중이었다. 중간에 독일에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여행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버느라 잠깐 멈춘 것 빼고는 계속 여행을 했다고 했다. 영어를 잘하니 영어강사부터 해서 안 해 본 일이 없단다. 캐시는 4년째 여행 중이었다. 영국인이고 강사 자격증이 있어 주로 영어강사를 해서 돈을 버는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6개월간 영어 강사를 했다고 한다.


한 사원에 다다랐다. 아이윈이 가이드북을 꺼내더니, 이번에도 능수능란하게 사원에 대해 우리 둘에게 설명해주었다. 분명 어디선가 가이드 일도 해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시와 아이윈은 안에 있는 불상에 꽤나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둘은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주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탄이 대부분이 있다. '전통 옷 입은 티베트 아주머니들 너무 귀엽지 않아?', '어, 인형 같아. 아이가 깡통을 갖고 정말 재밌게 논다.' 이런 것들.


길을 지나가는 티베트 아주머니 두 분과 함께 걷게 되었다. 우리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전통 의상 차림에 똑같은 모자를 쓰고 오른손으로는 마니차(원통형 불교 도구로 한 번을 돌릴 때마다 경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여겨짐)를 연신 돌리고 계셨다.

이 둘과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그러나 이번엔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합류했다. 우리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총 여덟 명이 되어 함께 걸었다.

아주머니들은 아이윈의 선글라스를 마음에 들어 했고, 캐시와 내가 입은 바지와 자신들의 치마를 바꾸자며 치마를 벗는 시늉을 했다. 나와 캐시가 싫다는 말을 중국어로 어떻게 하더라 어버버 하는 사이, 아이윈은 아주 자연스럽게 영어로 받아쳤다.


No, no, no, no, you keep it, we don’t need that.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그냥 입고 있어요, 우린 그 치마 필요 없어요. )


분명 못 알아들었을 터인데 아주머니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바탕 웃어 댔다. 그리고 또 아이윈에게 그들의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고 아이윈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아이윈은 프로 여행러 같았다.




아주머니들이 향한 곳은 동네 여자들이 가득한 찻집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티앤차를 마셨다. 거의 다 마셔 바닥이 보일라치면 그들의 방식대로 더 따라주고, 또 마시면 더 따라주고 아인윈의 말대로 다 마셔 버리고 빈 컵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엎고서야 그들의 인심을 그들의 방식대로 사양할 수 있었다.

캐시가 카메라를 꺼내자 아주머니들이 캐시가 찍은 사진들을 보기 위해 캐시의 양 옆과 등 뒤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사실 오늘 아침 찻집에서도 캐시가 현지인들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바람에 그 안의 사진들을 다 보여줄 때까지 나와 아이윈이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도 한참을 기다려야겠구나 하며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제 그만 하고 가자는 눈 빛을 보내려고 캐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눈앞에 보인 장면 마치 할머니와 할머니의 전래동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아이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여인네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고, 한 사람이 키득키득하면 나머지는 더 크게 웃었다. 만일 여기서 캐시가 ‘이제, 그만’ 하고 카메라를 끈다면 모두가 상심이 클 것 같았다. 게다가 그 할머니가 떠나고 내일은 이 자리에 없을 거라면 말이다.


그동안의 '비정했던' 나의 행실이 떠올랐다.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면, 그 사진만 보여주고 바로 카메라를 끄고 가던 길을 갔던 것 같다. 더 보여 달라고 하면 더 보여주다 가도 내가 내킬 때 꺼버렸다. 물론 상대방은 더 보기를 원했고, 아쉬운 표정을 내비쳤지만 난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단조로운 시가체의 풍경을 만들어낸 것도, 사원 몇 개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작은 마을 간체가 아름다웠던 것도,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맛없는 티앤차가 아이윈과 캐시 덕분에 맛있게 느껴졌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걷고, 찻 집까지 안내해준 아주머니들이 없었다면 힘들게 이곳까지 온 것에 대해 보람은커녕 어떠한 의미 조차 찾지 못했을 수 도 있다.

캐시의 전래동화가 이어지는 사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생각과 반성, 다짐, 내 안의 이야기도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조금은 느리게 가더라도 나 또한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추억을 남겨주는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한국돈으로 700원 정도 하는 툭파를 다 먹자마자, 식당 부부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 한 번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고 웃으며 즐거워하는가 싶더니 다시 천막 식당 안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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