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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Jan 20. 2022

죽기 전에 꼭 '가지 않아도 되는' 명소

보지 말았어야 했다.

힌두교인들의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 (Varanasi)는 여행자들에게도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한눈에 읽히는 영어 간판들이 눈앞에 쏟아지듯 펼쳐져 잠시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였다. 크리쉬나, 가네쉬, 시바 등 대표적인 힌두신들은 레스토랑이나 게스트하우스 이름 앞에 붙어 여행자들을 맞이했다. 예를 들면, <해피 가네쉬 레스토랑>, <크리쉬나 다이닝 홀> 이런 식이었다. 내가 묵은 숙소의 이름 또한 <시바 강가 롯지>였다. 힌두교 최고 신 중 하나인 '시바'는 남편, 갠지스강을 뜻하는 '강가'는 아내, 즉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만든 것이라며 주인 부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룻밤에 인당 2천 원도 하지 않는 이 숙소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이곳에 도착한 첫날 정신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잘 붙들고 있었던 내게 준 힌두신의 <웰컴 선물>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넘는 긴 이동 시간 끝에 바라나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땀에 젖고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였다. 미리 알아본 숙소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무조건 영어 간판과 외국인들이 ''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그래야  곳에서 젤 싼 숙소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글 이름과 함께 한식 메뉴가 적혀 있는 게스트하우스들도  지나쳤다. 이곳의 여느 외국인들처럼 인도산의 원단이 얇고 통이 넓은 옷을 입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노랫말처럼 들려왔다.

여전히 어색한 사이였던 크리스는 기차에서 내리면 무슨 핑계라도 대며 자신의 길을 찾아갈 줄 알았는데, 거리의 소음과 각종 호객꾼들에게 질려 투덜대면서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함께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걷고만 있으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여행자들의 거리에서 너무 멀어져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라는 간판 자체가 보이지 않을 때쯤, 페인트 칠이 거의 다 벗겨져 그 이름이 마치 신기루처럼 희미해 보이는 <시바 강가 롯지>가 나타났다.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인 2인실이 딱 하나 남아 있는데 방 값이 한국 돈으로 치면 4천 원쯤 한다는 말에 나와 크리스는 서로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곳에 배낭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마당을 향해 일렬로 배열된 네다섯 개의 방에는 커튼처럼 쳐진 얇은 천이 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나시에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곳' 빼고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인도의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하고 싶은 대로 안되었다. 밤이면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 잠을 설쳤다. 왜 문 대신 커튼을 쳤는지 하는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사실 커튼도 사치였다. 아예 벽도 뻥 뚫어 놓았으면 더 나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손을 쭉 뻗으면 닿을 정도의 천장에는 보호막이 없는 선풍기가 내 얼굴 위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래도 더위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첫날 밤, 젖혀진 커튼 밖으로 마당에 대청마루가 보여 그곳에 의지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엔 이미 자랑스러운 표정이 내 머릿속에 도장처럼 찍혀 있는 주인아주머니가 이번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발 밑에 그나마 새우잠을 잘 수 있을 만큼의 자리가 있어 등을 밀어 넣어 간신히 잠에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밝아질 때쯤 빛을 피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점만 빼면, 시바 강가 롯지는 내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숙소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평생 숙제 같은 나는 이곳에 묵는 일주일 내내 동이 트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빛이 곧 알람이었다. 평생 달콤한 줄만 알았던 아침잠이 뱉고 싶을 만큼 씁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첫날 밤을 치른 날 아침, 책을 꺼내 들고 문 밖, 아니 커튼 밖으로 나왔을 때 재미난 광경이 펼쳐졌다. 전 날에는 보지 못했던 이곳의 전체 투숙객들이 일렬로 나열된 각자의 방 앞에 나보다 먼저 나와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데칼코마니처럼. 그들의 표정은 밤새도록 벌인 더위와의 사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듯 평화로웠다. 마치 이곳의 오래된 일원인 양 책을 들고 합류하는 나 자신을 보니, 어쩌면 이 같은 행동은 이런 특정 상황에 맞닥뜨리면 발사되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땀을 한 방울이라도 덜 흘리면서 억지로 더위를 잊기에는 책이 제격이었다. 어떠한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타오르는 햇살에 순응하며 독서로 하루를 시작하는 명상 같은 시간은 매일 아침 이어졌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크리스와 나를 빼고 모든 투숙객들은 이 숙소에서 몇 주 째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모두 몇 달에서 몇 년을 여행중인 사람들이었다. 국적도 모두 다른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말이 별로 없다는 것. 더위에 지치고, 아침의 명상의 여운이 꽤 길게 남아 나 역시 말을 덜 하게 되었다. 한 방을 쓰는 크리스에게 낮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바라나시에는 얼마나 더 묵을 건지 묻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이곳 사람들과 의기투합을 한 적이 있다. 바라나시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갠지스강 보트 투어를 권유하는 호객꾼들과 마주쳤는데, 그렇게 백 번 정도 마주치고 나니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역사시간에나 들어봤던 갠지스강에서 보트를 탄다니 굉장한 경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마한 나무배와 뱃사공이 포함된 가격은 여러 사람이 모일수록 그 금액을 나눠 낼 수 있어 인당 부담이 적어지는 식이었다. 혹시나 하며 크리스에게 관심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니 시큰둥한 표정에 반해, 대답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일수록 비용이 줄어든다고 귀띔 해주니 나만큼 열심히 사람을 모으기 시작해 우리 숙소에서만 총 여섯 명이 모였다. 그래서 다음날 동이 트기 전, 일출을 보는 한 시간짜리 보트 투어를 함께 하게 되었다. 선뜻 가겠다고 한 것 치고 되게 신이 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늘 평화로운 표정이 한결같은 그들이었다.

 보트 투어를 한 후에도 서로 간의 거리감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지만, 함께 지내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편안해졌다. 보통의 여행자 숙소에 가면 자신의 여행담을 영웅담처럼 펼쳐 놓는다든가 초면에 신상정보를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이  명쯤은 있기 마련인데, 이 중엔 그런 류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오랫동안 여행을 했다고 해서 다른 여행자들을 아마추어 대하듯 하며 프로 여행가 행세를 하는 이도 없었다. 그렇게 별로 친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알 수 없는 안락함 때문인지 시바 강가 롯지는 마치 꽤 훌륭했던 여행지 중 하나였던 것처럼 지금도 이따금씩 생각이 난다.



에바가 시바 강가 롯지에 합류한 건 아마 보트 투어를 하기 전 날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이스라엘인이었다. 이곳에 묵는 다른 여행객들과 달리 그을림 없이 새하얀 그녀의 피부는 그녀가 이제 막 이스라엘에서 인도에 도착했음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에바를 통해 나는 '샤밧'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샤밧은 ‘휴식’을 뜻하는 히브루어로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날 하루 종일 방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녀에게 오늘은 어디 안 가냐고 물어보니 일주일에 한 번 보내는 안식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했다.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인 이 날에는 어떠한 노동에 가까운 일도 하지 않고, 시계 또한 보지 않으며 성경말씀을 되뇐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읽는 책이 성경은 아니라며 마치 그릇된 행동을 몰래 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그 이후로 어디에서 샤밧 소리만 들리면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샤밧을 보내고 있는 중이니?’ 하고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그다음 날, 에바가 바라나시 대학교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함께 가도 되겠냐며 따라나섰는데, 밖에서 본 그녀는 생각보다 재미있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했다.


“인도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정말 많아. 그래서 인도인들은 이스라엘이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인 줄 알지. 그래서 내가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면 깜짝 놀래”


이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나는 앞으로 인도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도에 이스라엘인들이 왜 많은 줄 알아?

이스라엘에서는 남, 녀 모두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거든. 군 복무를 마치고 나면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고 싶은데, 주변 이슬람 국가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갈 수가 없으니, 이스라엘과 그나마 가까우면서 여행비가 저렴한 인도에 오는 거야.”


그녀 역시 이제 막 군 복무를 마치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 이후에 만난 이스라엘인들에게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었을 정도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바라나시의 날씨와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싶을 때쯤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큰 결정이라도 내린 듯 ‘그곳’엘 가기로 했다. 바라나시에 온 딱 한 가지 이유였다.

그곳은 바로, 갠지스 강변을 따라 만들어 놓은 ‘가트’라고 불리는 '계단'이었다. 힌두교 순례자들은 이 가트에서 종교적 의식을 치르거나, 죄를 씻어 내리듯 목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객들에게는 그들이 가트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흥미로운 ‘볼거리’가 된다. 바라나시에만 약 88개의 가트가 있는데, 그중 두 군데에서는 시신을 화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만 들어도 끔찍한 이 현장이 바라나시를 찾는 이들에게 ‘신기한 광경’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힌두 의식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훗날 마치 힌두교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듯 구원의 강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행복한, 그래서 곡소리조차 둘리지 않는 장례식이라며 신성함을 강조하여 나 같은 또 다른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나 역시 그런 여행담에 홀려 바라나시에 왔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도착하니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인간의 죽음을 ‘구경’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인간이 할 짓인가.’ 그렇게 내 양심에게 묻다가, 가트에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며 여러 날들을 보냈다. 죽음 대신, 삶을 구경하며.

숙소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집 앞에는 웃통을 벗은 일곱 살쯤 되는 꼬마 아이가 갓난 자기 동생을 품에 안고 돌보는 모습은 매일 아침의 풍경이었다. 소년은 하얀 이를 들어내며 '나마스떼' 하고 늘 먼저 인사해 왔다. 그 앞으로는 늘 소 대여섯 머리가 자유롭게 지나다녔다. 소들에게 가까이 가면 불쾌해하는 것 같아 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다녔다. 사실, 바라나시에서 피해야 할 건 소보다는 병든 개였다. 골목길의 식당 주인들도 덩치 큰 소보다는 자신의 가게에 얼쩡대는 뼈가 앙상한 개들을 쫓는데 더 열을 올렸다.

매일 밤 숙소에 가기 전 들리던 짜이 가게 하나가 있었다. 나 말고도 단골손님이 많아, 주인은 짜이를 만들랴 손님들과 대화를 이어가랴 늘 분주했다. 이곳에서 나는 짜이를 마시며 사람들의 대화를 대놓고 엿들었다. 때론 같이 웃기도 했다.



결국, 바라나시를 떠나기로 한 전 날 밤 가트에 갔다.

나는 여행자고, 여행책과 여행 블로그에 나온 장소에 가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혹자는 '인도에 가면 꼭 봐야 할 명소'라고까지 했다.


어둠이 깔린 시각, 어느 골목에서부터 하얀 천으로 감싼 시신을 들고 사람들이 등장했다. 


곡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애통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신과의 만남을 의미하기에 행복해한다고?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가족들로 보이는 이들의 슬픔이 내 가슴속 깊숙이 까지 전해졌다. 어떤 시신은 장작불에 활활 타고 있었고, 어떤 시신은 이미 가루가 되어 갠지스강에 흘러내려갔다.


힌두교인들의 신앙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했다고?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다른 여행자들의 글들이 다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힌두교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도 이제 막 인도에 도착한 나 같은 여행자가 갑자기 힌두교인들의 시각을 갖는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힌두교인이건 아니건,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할 곳으로 보내는 비탄한 그 순간은 여느 장례식과 다르지 않았다. 후회가 몰려왔다. 

구경하지 말았어야 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었을 장면이었다.


늦은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 날도 짜이 가게에 들렀다. 새벽 여섯 시에 가게문을 연다는 주인은 피곤할 법도 한데, 내게도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었다.


“바라나시에 오는 외국인 여행자들은 우리를 마치 정글에 사는 야만인 정도로 여기는데, 그들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든 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해. 인간이 소, 개, 원숭이와 섞여 산다고 해서 왜 업신여겨져야 하지? 이게 자연의 순리 아닌가?”




내가 찾은 ‘그곳’은 시신 화장이 이루어지는 두 개의 가트 중 덜 유명한 곳이었다. 마치 굳어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내게 한 인도인이 다가와 말했다.


 “ 돈이 많은 사람들은 저 큰 가트에서 화장을 할 수 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이곳으로 와. 200 루피면 돼. 그럼 세 시간 만에 다 타버리지.”


가트에서 빨래를 하는 인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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