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쌓여 사람의 키높이까지 도달하는 북유럽의 혹독한 겨울. 그리고 추위보다 더 무섭다는 어둠. 핀란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헬싱키의 경우, 한겨울에는 오전 9시쯤 해가 떠서 오후 3시쯤 지기 시작하지만 더 북쪽으로 가면 해가 떠있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조차 안 되는 곳도 있다.이러한 겨울을 피해 북유럽인들이 향하는 곳은, 가까운 유럽에서는 스페인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태국이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힘들어졌다는 요즘, 유럽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유럽연합 국내에서의 이동이야 이전부터 워낙 자유로웠고, 백신의 등장 이후로 세계의 많은 곳들로 이동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닫혀있는 가운데, 북유럽인들의 태국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푸켓을 포함한 몇 개 도시가 그 문을 활짝 열였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새해 연휴, 아이들의 방학까지 겹친 12월-1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발해서 푸켓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만석이다.
연초의 스톡홀름 아를란다 공항 (Stockholm Arlanda airport) 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각 항공사의 체크인 데스크 앞으로는 '코로나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졌고, 예전과 달리 공항직원들이 확인해야 할 여행 서류들이 많아져 그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유니폼의 일부인 롱부츠를 신고 망토로 몸을 꽁꽁 감싼 동료들과 체크인을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진작에 감이 왔다.
'아 오늘 비행도 지연되겠구나'
스톡홀름 뿐 아니라, 평소보다 늘어난 일에 반해 인력이 준비되지 않은 공항들이 많아 비행기 지연이 잦아진 요즘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에 출근한 스톡홀름 공항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영하의 날씨를 견디며 공항에 왔을지 모르는 파란 눈의 승객들은 공항에서 여러 번 줄을 서고도 평온한 얼굴빛을 하고 비행기에 탑승한다.
'싸와디캅'
금발머리 승무원들 사이에서 아시아인인 나를 발견한 승객들이 인사한다. 오랫동안 태국에 못 갔을 사람들이 반가움과 설렘을 담아 건넨 인사말일 것임을 알기에 나는 태국인이 아니라는 해명을 굳이 하지 않는다. 싸와디캅(카), 컵쿤 캅(카), 그 이상의 것들도 다 받아줄 준비가되어있다.
핀란드 국적의 비행기 안, 대부분의 승객들은 스웨덴 인들이다. 어린이 승객이 40-50명, 갓난아기들도 서너 명, 아이가 셋인 가족도 여럿, 머리카락이 새하얀 노년 커플, 휠체어를 문 앞까지 타고 와 지팡이를 짚고 탑승하는 승객까지 참 다양하다. 키가 190이 넘는 경우가 많은 스웨덴인들로 꽉꽉 채워지니 어찌 만석보다 더 찬 느낌이다. 키다리 승객들은 알아서 가방을 짐칸에 척척 챙겨 넣고, 좁은 이코노미석에 다리를 구겨 넣고 앉는다. 그 모습이 영 안쓰러운데 하필이면 머리도 머리받이 위로 올라와 있다.
스톡홀름에서 푸켓까지 11시간 30분.
Take off,
출발.
스톡홀름에서 출발한 비행의 메뉴는 스웨덴 전통식 미트볼이다. 요즘 헬싱키가 아닌 스톡홀름 발 노선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나는 이케아에 갈 때나 별식으로 사 먹던 이 미트볼을 거의 매 비행마다 먹고 있다. 똠얌꿍까지는 아니더라도 팟타이 (태국식 볶음면)를 메뉴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스웨덴에서 만드는 팟타이가 얼마나 맛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핀란드에 있는 그 많은 태국 식당들도 막상 가보면 일하는 사람들은 태국 사람들이 맞는데, 맛은 복불복인 경우가 많다. 재료 탓인지, 이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스웨덴인 동료에게 정말로 스웨덴 사람들은 미트볼을 거의 매일 먹냐고 조금 빙구 같은 질문을 했다. 가끔 외국인들이 내게 '코리안 바베큐(해외의 한국식당에서 주로 내세우는 메뉴)'를 얼마나 자주 먹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짐작하면서. 스웨덴인 동료는 자신은 미트볼을 좋아하지 않아 거의 안 먹지만, 스웨덴은 추운 나라라 집에 저장해 놓고 언제든 쉽게 꺼내 먹을 수 있는 것이 미트볼이라 자주 먹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런데 이날, 특별 기내식으로 채식을 선주문한 승객들이 꽤 많았다. 미트볼을 안 먹는 스웨덴인들도 많다는 뜻이다.
이케아가 아닌 이코노미석의 미트볼.
핀란드인 다음으로 스웨덴인들이 많이 일하는 우리 회사에서, 스웨덴 동료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우리 스웨덴인들은 저러지 않아'.
주로 핀란드인들의 단점을 지적할 때, 핀란드인 동료들의 귀를 피해하던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 스웨덴 승객들이 대부분인 스톡홀름발 비행을 하다 보니, 같은 말을 핀란드인 동료들에게서 듣게 된다.
'우리 핀란드인들은 저러지 않아'.
북유럽, 정확히는 핀란드에 첫발을 디뎠던 초기만 해도핀란드인과 스웨덴인을잘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두 언어도 똑같게 들렸다. 그러나 지금은 외모는 물론 성격과 문화의 다른 점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결론만 말하면, 이 두 나라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서로 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 두 나라 사람들도 듣기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 섭취량만큼은 두 나라가 꼭 닮았다. 이 또한 혹독한 추위와 어둠에서도망가기 위함일까.
기내 서비스를 시작하니, 맥주와 레드와인이 핀란드 특유의 음료, 블루베리 주스를 제치고 불티나게 나가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다. 리허설은 이미 공항에서 치러졌음이분명하다.
헬싱키와 스톡홀름 공항의 특이한 점은, 술을 파는 바(bar)가 면세점보다 더 인기라는 거다. 헬싱키 공항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짐 검색대를 통과해야 갈 수 있는 바(bar)는비행기 여러 대의 출발이 겹치는 러시아워에 맞춰 붐빈다. 공항에서마시는 차가운 주 한 잔으로여행의시작을 실감하는듯하다. 테이블에 커다란 맥주잔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핀란드인 특유의 무표정한얼굴에는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행복함이 번져있다. 바 근처에서 파는 핫도그는 그 안의소시지 하나에 머스터드소스가 한 줄 뿌려진 게 다지만, 그 역시 인기다.
보통 사람들은 공항과 기내의 음식은 비싸다는 개념이 있어 소비를 자제하지만, 북유럽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어차피 일반 음식 값도 공항만큼 비싸다. 어차피 월급에 휴가비도 정산되어 나왔으니 마음껏 쓰자는 마음가짐이다.
기내에서도 유상으로 판매하는 음식들을 싹쓸이할작정이라도한 듯 전투적으로 사 먹는다. 특히 승객들의 대부분이 출장이 아닌 휴가객으로 가득 찬 푸켓비행의 경우, 맥주나 와인은 물론 컵라면이고 감자칩이고 할 것 없이 웬만큼 소문난 맛집수준으로 팔려나간다.
우선 먹고 마시고 보는 헬싱키 공항.
처음 이 회사에 왔을 때 다른 대형 항공사와 달리 기내에서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술을 유상으로 판매하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보통 저가 항공사들이저렴한 티켓값을 만회하기 위해 하는 방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그 의아함은 비행 몇 번 후 곧 사라졌다.(키가 크면 그만큼 술도 많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는 없는지 궁금하다). 분명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는 승객도 있는데, 그 값을 N분의 1로 쳐서 비행기 티켓 값에 포함시킨다면 그거야 말로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행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기내의 음식들은 점점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맥주도 라면도 더 이상 없다는 말에 뭐라고 불평은 하지 않아도, 커다란 몸집에 홍조를 띤 얼굴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상이 된다. 착한 어린이들은 기다란 다리를 통로 쪽으로 빼내어 잠에 들고, 안 착한 어린이들은 와인이든 초콜릿이든 있는 대로 다 달라고 해서 바닥까지 긁어낼 기세다. 덕분에 쉴 틈이 없다. 어두운 기내에서 승객들의 삐져나온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거나, 넘어질 뻔해서 와인을 승객의 얼굴에 엎어 버렸다는 동료의 일화는 아직 못 들어본 게 신기하다. (에피소드 감으로 은근히 기다리는 중).
1박 2일처럼 느껴졌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푸켓 공항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망고 라이스 (mango sticky rice)'가아니라 PCR 테스트. 어느 콧구멍이 더 편하냐며 선택권을 줬던 핀란드에서 테스트를 받은 지 72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푸켓에도착하자마자양쪽 콧구멍을 다 내놓아야 한다.그리고 호텔에도착하자마자,음성 테스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가격리에들어가야 한다.
테스트 결과가 나오기까지 길어봐야 여섯 시간.
널찍한 침대와 욕실,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발코니가 딸린 방에서의 자가격리는 나름 할만하다. 햇빛이눈부시게 내리쬐는발코니 소파에 온 체중을 가해 털썩앉으니,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열대기후가 온몸을 짜릿하게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