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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Feb 11. 2022

북유럽 승무원이라서 좋은 점


"앞으로 비행을 하게 되면 오로라를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지금 일하고 있는 항공사에 입사를 앞두고 5주간의 트레이닝(비행 훈련)을 받던 중, 한 트레이너가 한 말이다.


'오로라' 라니, 평생 오로라를 한 번 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나는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트레이너가 진실을 말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한국의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아이슬란드에 오로라를 보러 가는 모습이 방영된 당시는 전 항공사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아이슬란드로 가는 한국인 승객들이 부쩍 많아졌던 기억이 난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오로라 여행 경험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항공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아이슬란드든 노르웨이든 언제나 원한다면 싸고 쉽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항공사에서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유럽에 살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짧게 주말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오로라를 보지 못한 이유는 열정과 호기심 부족, 이 뿐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비행을 시작하고 헬싱키에서 출발하여, 로바니에미(Rovaniemi), 이발로(Ivalo), 끼띨라(Kittila) 등 북극에 근접한 핀란드 도시로 가는 국내선을 타는 일이 빈번했다. 로바니에미는 산타할아버지를 만나고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산타마을>이 있어 특히 일본인과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이발로는 우리 회사가 운행하는 핀란드 최북단의 도시이고, 끼띨라는 현지인뿐 아니라 유럽인들 사이에서 스키리조트로 유명하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눈이 겹겹이 쌓이고, 정오가 지나가면 어둠이 깔리는 겨울이 바로 이 북쪽 도시들의 성수기다.


이곳들로 가는 비행기는 통로가 하나 뿐 인 소형비행기다.  하지만 짐과 승객으로 꽉꽉 차고, 비행시간이 1시간 30분밖에 되지 않아 이 안에 음료 서비스를 마치려면 승무원으로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게다가 기내에서 유료로 판매하는 초콜릿, 블루베리 머핀 같은 스낵을 사 먹는 것이 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인 핀란드 승객들을 상대하려면 빠른 손놀림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바로 국내선 비행을 할 때다. 창 밖을 바라보며 오로라를 헌팅할 시간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트레이너의 말대로 오로라가 여러 번 등장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고 난  후 1년이 넘게 비행을 쉬었다.


다시 비행에 복귀하고, 바로 옆 나라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베이스로 일을 하게 되었다.

뉴욕 비행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기 전 파일럿과 승무원들이 다 함께 브리핑을 할 때 였다.


"혹시 오로라가 보이면 알려주세요"


브리핑이 끝나갈 때쯤 한 승무원이 파일럿에게 부탁했고, 파일럿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우리 회사 승무원들은 대부분이 핀란드인들이고 비행경력이 십수 년에서 수십 년인 경우가 많다 보니 오로라에 연연해하는 동료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나와 같은 외국인 승무원이었다.

파일럿들은 비행 내내 창 밖을 마주하고 있을 테니, 이렇게 하면 나타나는 오로라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뛰고 날아야 하는 짧은 국내선 비행이 아니라 비행시간이 7-8 시간은 족히 되는 뉴욕 비행이었다.


우리 항공사의 비행기는 북유럽의 위치상 북극을 근접하게 오가는 국내 비행이 아니어도 한국이나 일본을 갈 때에도 북극에 가까운 러시아 상공을 날아가고, 미국을 갈 때에도 북대서양 상공위로 가게 된다. 따라서 겨울이 되면 동료들의 인스타그램에 비행기에서 포착된 오로라 사진들이 빈번하게 올라왔다. 비행이 아니어도 겨울에 북쪽 지방으로 국내여행을 다녀와 오로라 사진을 보여주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출발했다.

그리고 약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조종실에서 전화가 왔다.


"오로라를 보고 싶으면 어서 조종실로 오세요"


아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말하자마자 바로 그날 오로라가 나타났다고? 이 정도면 트레이너의 말대로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내가 놓친 것이 분명했다.


기내 안전상의 문제로 모든 승무원들이 한 번에 조종실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한 명씩 조종실로 가기로 했다. 비즈니스 석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조종실에 들어간 동안 비상문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보았다. 희미한 연둣빛 선이 보이긴 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오로라와는 많이 달랐다. 조금 더 큰 창문을 찾아 비즈니스 객실에 가서 승객이 없는 자리의 스크린을 끄고 최대한 어둡게 해서 보니 조금 더 잘 보였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아, 이게 도심의 밤하늘이 아무리 어두워도 건물과 가로등 불빛이 많으면 별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구나, 김이 샜다.


드디어 동료가 조종실에서 나오고 이번엔 내 차례.

그런데, 조종실에서 보이는 오로라는 객실의 창문에서 보이는 것과 많이 달랐다. 시간이 몇 분 더 흘러서일까. 한 파일럿이 조금 전 보다 더 선명해졌다고 했다.

그 전 항공사에서 일할 때에도 버킷리스트에 있지도 않았던 신기한 경험들을 한 적이 있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보석처럼 수놓아진 몰디브의 섬들을 상공에서 내려다볼 기회도 많았고, 자주 가던 남아공 비행에서는 킬리만자로 산 봉우리와 눈높이를 같이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북유럽 항공사에서 일하니 이렇게 하늘에서 오로라를 보는 날이 왔다.


너무 신기해서 회사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로라 사진은 처음이라 보이는 것만큼 잘 담아지지 않아 쩔쩔매는데, 캡틴이 내 카메라를 건네받아 몇 초간 설정을 바꾸더니 기가 막히게 사진 한 장을 찍어주었다. 확실히 많이 찍어본 사람이 잘 찍는다더니.

오로라가 선명하게 보일 때에는 연둣빛과 붉은빛이 함께 뒤 엉겨 춤을 추기도 한다며 파일럿들은 아쉬워했지만 내 눈엔 이 정도도 훌륭했다. 명색이 핀란드에 사는 사람인데, 이 사진 한 장으로 어디 가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도 봤다, 오로라."


        

북대서양의 어딘가 쯤에서 포착된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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