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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Mar 04. 2022

여자 혼자 인도

남자였다면 더 안전했을까?

엉터리 같은 문법과 발음, 그리고 몇 안 되는 어휘들로 인도인들은 영어를 막힘없이 구사했다.


“You only one girl come?” (혼자 왔어요?)


“No your family?”  (가족들은 안 오고요?)


“You studying or working?” (학생이에요, 아니면 직장인이에요?)


“You from?”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Your good name? (이름이 뭐예요?)


언제 어디에서 건 그들은 불쑥불쑥 나타났다. 기차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니면 저 멀리서 오랜 친구를 발견한 듯 인파를 헤치며 다가오기도 했다. 대부분이 남자였고 그들의 표정이나 뉘앙스에 따라 설마 내게 치근대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Enjoy my country” (우리나라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혹은,

 

“Welcome to India!” (인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며 경계심을 품던 나를 멋쩍게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비슷한 질문들은 남자 여행자들에게도 던져졌다. 인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원체 호기심이 많았고, 낯 선 이들과의 벽을 쉽게 허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가끔 대답하기 귀찮아 짜증을 내거나 버럭 화를 내는 여행자들도 있었다. 같은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으니, 물론 나도 늘 친절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여행자들의 이런 사정을 알 수 없는 인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반응들이 황당했을 만도 한데, 화를 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되려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다가온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야 했다. 쉬운 질문에 엉터리로 응답하는 여행자들 때문에.


아주 가끔 그들의 호의는 식사 초대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다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얼마나 고마울 일이고 여행자로서는 또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


푸쉬가르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러한 나의 아쉬움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친하게 지냈던 이스라엘인 아미르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쉬워할 것 하나도 없어, 내가 운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푸쉬가르는 유독 이스라엘 여행객들이 많은 곳이었다. 마을 입구에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시나고그가 세워져 있을 정도였다. 아미르는 그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할 만큼 신앙심은 부족했지만 지금까지 만난 이스라엘인 중 현지인들을 가장 친절하게 응대하는 남자 애였다.

아이스크림을 연신 핥아가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식당에서 우연히 대학생이라는 인도 남자애들 둘을 만났는데 말이야, 같이 식사하면서 얘기하다가 그중 한 명이 다음날 저녁에 자기네 집에서 파티가 있다며 놀러 오라고 했어. 그래서 갔더니 남자애들이 여럿 모여서 있더라고. 처음엔 정말 재미있었어, 식사도 하고 게임도 하고.

그러다가 술을 마셨는데, 나를 초대한 애가 방으로 오라고 하더니 갑자기 나를 덮치는 거야. 그래서 화를 내고 방을 나왔더니 이번엔 다른 친구들이 나를 집에서 못 나가게 막더라고. 그래서 몇 명을 팼더니 그제야 순순히 보내줬어”


아미르는 특별히 근육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쩍 마른 인도인들이 감히 덤빌 만한 체구도 아니었다. 인도에 온 여느 젊은 이스라엘인들처럼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새카만 수염이 덥수룩한 이 남자가 이런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하튼 내가 남자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사라졌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당했던 불쾌한 일도 분명 있었다.


 


뉴델리에서 이른 아침, 짜이를 마시다가 알게 된 태국 여자 여행자인 옴과 함께 올드 델리에 갔을 때였다.

생각보다 볼거리는 없고, 사람들만 북적북적 대서 허탕 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인파에 떠밀리며 걸어가던 중 누군가의 손이 내 엉덩이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끼리 서로 부딪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곳이 꼭 엉덩이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뒤를 몇 번을 돌아보다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에게 주의를 주니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잠시 후, 옴 역시 그 남자가 자기 엉덩이를 만진 것 같다고 했다. 이미 주의를 줬으니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질러볼까, 무작정 멱살을 잡아볼까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괜히 덤볐다가 이 남자가 공격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보장은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상 인도인들은 어디서나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지만, 정작 곤경에 처하면 나 몰라라 가버리는 사람들이었다. 화가 났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갑자기 흑기사가 나타났다.


커다란 호통 소리가 들리더니, 깡 마른 인도인들 중에서 유독 몸이 헐크처럼 큰 한 인도인이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를 주먹으로 쳐서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팔뚝이 두꺼운 헐크와 패대기치는 장면이 겹쳐진다. 흑기사는 나와 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주먹질을 했고,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몰려드는 구경꾼들에게 점점 밀려 현장에서 멀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기사 덕분에 화는 조금 풀렸지만 그렇다고 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없던 일처럼 되지는 않았다.



14억 인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인도는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았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으슥하거나 인적이 드문 곳은 찾기 힘들었다. 특히 유명한 도시는 게스트하우스 전체가 서양인들로 꽉 차는 일도 흔했고, 메뉴 간판에 비뚤비뚤하게 ‘김치찌개’라고 쓰여 있는 식당 안으로는 한국인들이 무리를 이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성폭행이나 인신매매와 같은 일을 당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대신 위험은 엉뚱한 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고아(Goa)에서였다.

외국인뿐 아니라, 인도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바닷가 휴양지라 고급 리조트들도 대거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해변 파티가 매일 열리는 성수기 때에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숙소 잡기도 어렵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갔던 10월 말은 반대였다. 성수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남인도 특유의 찜통더위가 떠나지 않고 기성을 부리고 있었다. 해변에는 사람보다 누워있는 소가 더 많았다. 빈자리가 넘쳐나는 게스트하우스들은 찾아오는 손님은 웬만하면 놓치지 않고 받으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가격에 비해 나름 괜찮은 숙소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숙소 하나 잘 잡으면 한 도시에서의 일정의 반 이상은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라 기분이 좋았다. 주인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하며 나갔다.


대낮의 더위를 식히느라 방에서 선풍기를 켜고 한참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다시 주인이 문을 똑똑 두들겼다. 혹시 필요한 것이 없냐며 묻길래,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하고 물어 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참 친절한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는 또 같은 질문을 했고, 이번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겠다고 하고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그는 또 한 번 문을 두들겼다.


"혹시 하시시가 필요하면 내가 싸게 구해줄 테니, 언제든 말해요"


그제야 싼 값에 방을 내 준 이유와, 그가 ‘필요한 것’을 재차 물어보던 이유를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하시시 (Hashishi)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인도에 와서야 여행자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단어가 인도 '대마'라는 것을 알았고, 여행자들 중에는 인도에 오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하시시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인도의 북서부의 고산지대인 마날리는 마치 약초를 캐러 가듯 직접 대마를 캐러 가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파티 마니아들의 성지인 '고아' 역시 하시시가 유명세를 떨치는 곳 중 하나였다. 인도에서 가끔 지나가는 현지인들이 귀에 대고 ‘하시시’하고 속삭인 적 은 있었지만, 이렇게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문까지 두드린 일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고아를 자주 찾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암호처럼 ‘필요한 것’으로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전혀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답하던 주인이 ‘하시시’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입에 올려야 했던 것이다.


두 달 넘게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배운 것 중 하나는, 거절을 표현할 때 눈빛과 표정, 그리고 억양까지도 강하게 NO를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의를 차리고 ‘좋게 말하는' NO는 그들에게 YES에 더 가까웠다. 나는 표정을 차갑게 바꾸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 이전에 세심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말했다.


"필요 없으니, 다시는 이런 일로 내 문을 두드리지 마세요"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내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고아에서 가장 한적하기로 유명한 베나울림 해변에서 지내는 동안 식사를 하러 마르가오에 가는 일이 많았다. 고아 주에서 두 번 로 큰 도시인 마르가오에는 혼잡한 기차역 주변으로는 현지인들이 북적이는 맛있는 식당이 많았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힌디어와 잉글리시가 섞인 ‘힝글리쉬’를 하는 현지인들의 대화를 듣는 재미가 솔솔했다.


 하루는 힝글리쉬라기보다는 영국 영어에 가까운 두 인도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영국식으로 발음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 내용은 꽤나 흥미로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고아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이야기였다.


고아에 여행을 온 일본인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마약을 하러 고아에 자주 찾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경찰이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이들에게 마약을 팔았고, 이들은 그 마약을 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이 그 뒤를 몰래 따라가 마약을 하고 있는 이 둘을 현장에서 검거하는 ‘척’을 한 것이다.

이 둘은 겁을 먹었고, 경찰은 3천 달러를 당장 내놓으면 봐주겠다고 했다. (인도 경찰이 생각하는, 일본인들에게 3천 달러란 당장 배낭에는 없지만 현금 인출기에서 바로 꺼내 줄 수 있는 금액과도 같은 것이라 함).

 결국 일본인 커플이 이 경찰들에게 3천 달러를 인출해 주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경찰들의 범행이 알려져 재판에 넘겨지면서 일본인 커플들의 사건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아주 복잡한 케이스였다.


내가 턱을 괴고 그 이야기를 엿듣는 걸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던 인도 남자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종종 내게도 눈 빛을 보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내게 섬뜩한 조언을 남기고 일행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당신도 조심해요. 인도에 구경 왔다가 감방 구경까지 하고 싶지 않으면.”






남인도의 해변 도시들을 여행하며 인도양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북인도와 비교해서 남인도의 남자들은 피부가 더 새카맣고 근육질이었다. 해변가의 식당에서는 젊은 근육질의 인도 남자와 중년을 넘긴 서양 여성들이 어울려 식사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꼬발람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이제 막 새로 지은 게스트 하우스와 자신의 세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보였다.


“내 첫째 아들은 스물다섯인데, 영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여자 친구가 1년마다 두 달씩 휴가를 내고 이곳에 와요. 이 게스트하우스도 그녀가 도움을 많이 줘서 만든 거예요.

둘째 아들의 여자 친구는 독일인인데 그녀 역시 많은 도움을 주죠. 서로 사랑도 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고, 난 이게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1층에, 그리고 2층에는 바로 그 영국인 간호사 여자 친구와 첫째 아들이 묵고 있었다. 여자 친구의 나이는 쉰 살이 조금 넘어 보였다.


“셋째 아들은 열아홉 살인데, 아직 여자 친구가 없어 찾는 중이랍니다”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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