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은 지금 당장 문이 열리면 누군가는 밖으로 튕겨 나갈 것처럼 꽉 차 있었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가장 앞 좌석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버스 운전기사가 시동을 켜자, 차 밖의 작은 식당에서 급하게 요기를 채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와 점점 뒤로 밀리다가 차렷 자세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부대껴 있으니 그나마 다리는 덜 아픈 것 같았다. 그 자세로 세 시간을 넘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심적인 부담이 오히려 고통이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는 버스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달렸지만, 그에 반해 속도는 형편없이 느렸다.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면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은 것 같은 불편함이 온몸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그 와중에 졸음이 쏟아져 잠에 들지 않으려고 홀로 사투까지 벌여야 했다. 그러다가 잠에 못 이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갈 때면 그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주변 사람들이 팔꿈치나 어깨로 나를 툭툭 치며 다시 사투로 몰아냈다. 반쯤 열린 눈앞으로 그 매정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그중에는 방금 콜롬보 공항에서 본 앳된 청년도 있었다.
공항 밖을 나와 가장 먼저 보였던 그 청년에게 부탁해 스리랑카에 도착한 기념사진을 찍었었다. 그런데 같은 버스에 탄 줄은 몰랐다. 나보다 앞 쪽에 서있는 것을 보니, 간이식당에 있다가 뛰어들어 나를 쥐포처럼 끼어 있게 만든 이들 중 한 명인가보다. 다시 눈이 감겼다. 눈을 뜰 때마다 버스 안의 빛이 조금씩 사라졌다. 어두워질수록 엔진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세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 버스가 처음으로 멈췄다.
캔디(Kandy)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황급히 주변에 있는 다른 버스들로 옮겨 탔다. 그리고 곧 누런 흙먼지를 날리며 하나둘씩 출발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 듯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흘러갔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버스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이른 아침 인도의 트리반드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마치 옆 동네 오듯 순식간에 왔지만, 스리랑카의 첫인상은 인도와 확연히 달랐다. 호기심으로 채워진 큰 눈을 끔뻑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었고, 버스터미널에 마중 나온 게스트하우스 직원도 없었다. 배낭을 메고 있는 외국인도 그때까지 나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시선도, 도움도 없이 오로지 내 갈 길을 가면 되는 곳인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세계를 떠도는 여행 고수들에게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고 진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왜 스리랑카가 단골처럼 등장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도 그런 나라가 될지는 의문이었다.
떠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잠시 주춤하다가 마지못해 발을 떼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걷다 보면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허허벌판인 터미널을 등지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말끔한 도시를 보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 내 짐작이 틀렸음을. 이곳은 릭샤가 발 역할을 대신해주고, 영어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여행자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줄 서 있는 인도가 아님을. 미리 호텔 이름이라도 하나 알아왔어야 했다.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다리는 계속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낮에 공항에서 한 번 보고, 버스에서 눈앞에 희미하게 다시 등장했던 그 앳된 청년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가 길을 잃은 듯한 나를 보고 다시 내렸다고 했다. 자신이 함께 가 줄 테니 호텔 주소를 달라는 그에게 나는 혹시 아는 호텔이 있냐고 되물었다.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없다고 했다.
호텔을 함께 찾아 주겠다며 따라오던 그는 밤이 점점 깊어지자 자신의 집에서 자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내가 오해할걸 알았는지, 집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손바닥을 뒤집어 가슴 높이에 갖다 대며 그만한 어린 남동생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가 거절하자, 그는 황급히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곧 수화기를 내 귀에 갖다 대었다. 그 너머로는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Come, come"
그의 엄마였다.
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Come, come"
어린 남동생이었다.
그래도 쉽게 맘이 정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두운 거리를 좀 더 걷다가 결국 그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자신의 이름은 수메다라고 했다. 콜롬보 공항 면세점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공항이 집에서 멀기 때문에 24시간 일을 하고, 이틀을 쉬는 근무 구조란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버스 운전기사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는 천천히, 차근차근,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잠시나마 그에게 냉소적이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버스는 점점 어두운 곳을 향해 달렸다. 버스를 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다 계획된 음모는 아닐까. 전화 속의 가족도 가짜가 아닐까. 그렇다고 하기엔 오전에 공항에서 처음 말을 건 사람은 그가 아닌 나였다. 수메다는 시계를 보더니,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까 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때문에 집에 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 그의 엄마를 생각하니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메다와 가족이 사는 곳은 캔디에서 20km 떨어진 보카왈라 Bokkawala라는 마을이었다. 도로 사정도, 버스 상태도 낙후된 탓에 20km는 200km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나마도 캔디에서 저녁 5시 30분에 끊기는 막차를 타지 못해 다른 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탄 후, 한참을 기다려 또 오토릭샤로 갈아타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마을이 아닌 산기슭. 더 이상 수메다에 대한 의심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산을 올라야 한다는 말에, 이런 모든 스토리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를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도와준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무거운 배낭을 멘 채로 산을 올랐다. 곳곳에 붉은 전구 불 빛이 보였지만, 수메다의 집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몰려오는 졸음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거의 다 왔다는 그의 말만 믿으며 산에 오른 지 15분쯤 되었을 때 침침한 불빛과 함께 집 앞에 나와 있는 수메다의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수메다를 꼭 껴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낯선 여자를 보더니 어색해하는 기색도 없이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집 밖에 달린 전구와 같은 밝기의 전구가 집 안을 어둡게 밝히고 있었다. 음침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패턴의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변을 눈이 동그란 열 살 남짓의 남자아이가 신이 난 강아지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수메다의 엄마를 따라 거실을 지나 주방에 들어가니, 테이블 위로 접시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수메다와 나를 위한 저녁식사였다. 스리랑카에서 처음 맛 본 식사, 스리랑카식 카레밥이었다. 여행을 떠나 온 이후 처음 맛보는 집 밥이었다.
시계가 없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밤 아홉 시쯤이었던 것 같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수메다의 사촌 동생이라는 여자 아이가 집에 찾아왔다. 열다섯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 예쁜 아이는 수메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수메다는 나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조금 지나자,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왔다. 이 모녀는 건너편 산에 산다고 했다. 원래 밤에 이렇게 종종 모이는지, 외국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굳이 이 밤중에 온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왠지 짐을 풀고 일찍 자기는 틀린 것 같아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고 나자, 아까 산을 올라올 때 지나쳤던 집 들 중 한 곳에 산다는 수메다의 작은 엄마가 오셨다. 그제야 수메다에게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파티가 열릴 거야."
좀 전, 이 집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는데, 내가 혹시 졸다가 수메다의 말 중 놓친 것이 있나 하고 되짚어 보았다. 다시 한번, 이 모든 사정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수메다를 따라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파티인지 수메다에게 다시 물었지만, 수메다는 가족들의 말을 내게 통역해 주는 데에 더 집중했고, 피곤이 온몸으로 번진 나는 그의 말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파티가 언제 시작하는지 아니면 이미 시작한 것인지 감을 도무지 못 잡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며 방금 온 작은 엄마의 남편인 작은 아빠와 다섯 살이 안되어 보이는 남자, 여자, 두 아이가 나타났다. 거실의 크기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되었던 소파는 더 이상 앉을자리가 없이 꽉 찼다. 그러나 수메다의 엄마는 오는 사람마다 차를 권할 뿐, 다른 음식이나 음료를 준비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그 차도 거절하고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즐거운 것을 보니 경사임은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 껴서 나는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랴, 나 때문에 잔칫집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신경 쓰랴 정신이 없었다. 그때, 키가 크고 깡 마른 수메다의 아버지가 등장했다.
수메다의 엄마는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차를 내왔다. 그는 뭐가 급한지 선 채로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가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사람들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수메다가 내게 물었다.
“너도 같이 갈래?”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어디를 가자는 것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곤하다는 말이 마지막 한 숨처럼 뱉어져 나왔다. 그러자, 영어를 못 알아듣는 가족들의 시선이 모두 수메다에게 향했다. 내 말을 가족들에게 통역하지 않고, 수메다는 내게 다시 물었다
“좀 있다 작은 엄마가 두바이로 떠날 거야, 다 같이 공항에 갈 건데, 너도 함께 가면 가족들이 더 행복할 것 같아”
이 말이 농담이길 바랬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하루 종일이 걸려 그것도 산을 올라 이제야 도착했는데, 다시 돌아간다니. 이럴 거면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인지,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어느새 가족들의 시선은 수메다에게서 내게로 옮겨왔다. 잔뜩 신이 난 수메다 동생의 눈동자와, 처음 봤을 때처럼 인자한 수메다 엄마의 눈동자가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텅 비어 버린 머릿속에서는 내가 함께 간다면 가족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댔다.
산을 내려가니, 좀 전에는 없었던 봉고차 한 대가 서있었다. 방금 마을버스 운전을 마치고 온 수메다의 아버지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머지 좌석은 거실의 소파를 가득 메웠던 가족들과 나까지 열 명이 앉았다. 그날 아침의 기억이 선명한 콜롬보 공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디오 잡음이 섞인 음악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자 수메다의 사촌 여동생이 팔 동작을 크게 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음악만큼이나 신이 나 있었고,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흥을 돋웠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니 엉덩이까지 들썩들썩거려 나 역시 별 노력 없이 가락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피곤함이 달아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 편으로는 기쁨에 가득 찬 가족들을 보는 것이 흐뭇해졌다.
쉬지 않고 달리던 봉고차가 섰다. 늦게까지 문을 연 식당을 간신히 찾았다며 모두가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우르르 들어갔고 수메다가 호퍼를 주문했다. 쌀가루와 코코넛 밀가루를 섞은 반죽이 둥그런 종이 그릇 모양을 한 호퍼는 스리랑카 길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다. 한 접시에 겹겹이 쌓인 호퍼가 나오자 가족들은 내게 먼저 먹으라며 권했다. 한 사람당 두세 개의 호퍼를 먹고 다시 봉고차에 올랐다.
배가 부르니 참고 있던 졸음이 쏟아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잠결에 차가 다시 멈추는 것이 느껴졌고 차에서 몇 명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마주 보이는 뒷 자석에서 작은 아빠와 그의 양팔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쌍둥이 남매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화장실에 갔으려니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차에서 내렸던 사람들이 다시 올라타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잠에서 깼다.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없어진 줄도 몰랐던 수메다가 올라탔다. 차는 시동을 끈 채로 그대로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잠을 확 밀쳐내고 눈을 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두의 얼굴을 한 명씩 쳐다봤다. 그런데 작은 엄마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쌍둥이가 엄마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 아빠는 말없이 두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창 밖을 보니 칠 흑 같은 어둠 속으로 그제야 희미하게 공항이 보였다. 비행기 티켓이 없으면 들어갈 수 조차 없는 공항에 공항 직원인 수메다가 혼자 작은 엄마를 배웅하고 온 것이었다. 두 아이가 아빠품에 안겨 잠든 사이 엄마는 나머지 가족들과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멀리 떠났다. 몇 년 전부터 병을 얻어 집에만 있게 된 작은 아빠를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짊어진 작은 엄마는 두바이에서 2년 동안 다른 스리랑카 가족의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동이 꺼진 차 안, 어른들은 어둠 속에 숨어 흐느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그 어둠을 몰아낼 것인 양 거셌다. 한참 후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후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은 창 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비행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 위에서 창 밖으로 가족들을 찾고 있을 작은 엄마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억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함께 호퍼를 먹었던 순간으로, 음악에 맞춰 덩실대던 순간으로, 수메다의 집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되짚어가며 서로에게 슬픔을 감추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주워 담았다.
걸걸한 쉰 소리를 내며 시동이 켜지고 차가 움직였다. 비행기가 사라진 하늘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음악 또한 사라져 버린 차 안에서 엉덩이가 눈치 없이 계속 들썩거렸다
2년 뒤 스리랑카를 다시 찾았을 때 나는 꼭 돌아오리라 다짐했던 ‘시마 말라카 사원 (Seema Malaka)’으로 제일 먼저 향했다. 호수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사원에 들어서니 스리랑카에서의 추억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노란 천을 두른 불상과는 대조적으로 붉은 천으로 몸을 휘감은 젊은 중이 보였다. 그가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스리랑카는 여전히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스리랑카에 온 이유를 물어와, 승무원이라 비행을 온 것이라고 했다. 이를 듣고 있던 한 현지인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이프러스에도 가봤어요?”
안 가봤다고 하니, 그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 듯 보였다. 그래서 재빨리, 사이프러스로 휴가를 다녀온 친구가 있는데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라 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별로 나아지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운 좋게 친구의 소개로 그곳의 슈퍼마켓에서 2년 간 일을 하러 가게 되었어요. 급여도 여기보다 높아서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일을 앞두고 낯 선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 ‘스리랑카와 날씨가 비슷할 거예요’ ‘, 관광지라 손님들도 대부분 친절할 거고요’와 같은 막연한 추측에서 나온 말들을 순서 없이 늘어놓으며 그녀의 표정이 좋아지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변한 건 그녀의 표정이 아닌 내 표정이었다.
“알아요. 친구도 그렇게 말해줬어요. 정말 잘 된 일이에요. 그런데 열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너무 무거워요. 그래서 오늘 사원을 찾은 거예요. 2년 동안 아들을 못 본 다고 생각하니 어른인 내 마음도 이렇게 아픈데, 어린 제 아들은 얼마나 슬플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2년 전, 다섯 살도 안된 쌍둥이 남매를 두고 떠나야 했던 수메다의 작은 엄마. 그녀가 느꼈을 두려움을 뒤늦게서야 헤아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