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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Mar 18. 2022

낭기

니말은 나를 낭기라 불렀다.

여행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늘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종이카드에 적어 바닥에 늘어놓고 그 수를 세어보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카드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면 이 전의 안 좋은 일들을 단방에 만회할 만한 황금 카드 같은 것들이 틈틈이 존재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니, 지나간 모든 일들은 그 형태가 뭉개어진 채로 아주 가끔 생각이 나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는 다시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계획이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혼자라는 사실이 안도의 숨을 내쉬게 했다.


-기댈 사람은 없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는 것.

-말동무는 없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화가 나게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

-함께 의논할 사람은 없지만,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


독립적이내향적인 성격인 내게 굳이 뽑은 단점들은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오히려 여행 중 반복되는 다툼과 누적된 감정소비로 오랜 우정을 깨고 등 돌리는 절친이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연인들을 보며, 삶이 아닌 여행에서 이런 극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깨닫는 순간들이 많았다.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콜롬보에서 두 시간 반 동안 기차로 해안길을 따라 달리며 도착한 히까두와는 너무 조용해서 지루해 보이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다른 마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여, 굳이 두 시간 반이나 걸려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게다가 인도에서 잠깐 마주친 이탈리아 출신의 두 남자가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흥분이 고조된 목소리 톤으로 히까두와를 안 가면 후회할 것이라고 했기에 실망감은 더 컸다.

생각해 보면 바닷가 마을이 조용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흥분된 목소리만으로 아마도 스페인의 이비자처럼 파티라도 열릴 줄 알았던 나의 잘못된 기대감이 순간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을의 대부분은 야자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해변도 그랬다. 바닷가로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을 만도 한데, 작은 호텔 몇 개 외에는 야자수가 우거져 있어 정글 분위기를 자아냈다. 파도가 강하게 몰아치는 곳에는 스리랑카 소년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온 두 청년들은 서핑 마니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서핑을 할 줄 알았다면,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생선뼈를 발라 먹는 관광객들이 가득한 휴양지가 아닌, 정글이 우거진 이곳에서 인도양의 파도를 타며 그동안 못 느껴봤던 인생의 첫 짜릿함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숨은 보석을 발견한듯한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서핑을 할 줄 조차 몰랐다.


계획에도 없던 스리랑카에 왔고, 예상은 빗나갔지만, 조용한 마을에 조금씩 애착이 갔다.

아침에 쓸어 놓은 빗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게들은 저마다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보는 이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눈부신 햇살 탓에 가게 안은 마치 동굴처럼 어두워 보였다. 그 안이 궁금해지던 차, <밀크티>라는 팻말을 달아놓은 작은 슈퍼가 보였다.

(스리랑카에서는 슈퍼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며 식당을 겸하기도 했고, 식당에서 담배나 사탕 등을 팔며 슈퍼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게 안의 여인은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열심히 책을 포장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곱게 포장된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낡은 잔에 밀크티를 내 온 그녀는 하던 일을 이어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새 책이에요"


내가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나도 어릴 적 새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아빠가 예쁜 포장지로 교과서를 포장해주곤 했다고 응답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부모의 역할이 이런 식으로도 같을 수 있음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열심히 책을 싸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히까두와를 통째로 휩쓸고 지나간 쓰나미 이후에 간신히 슈퍼를 재건했는데, 남편이 가게를 보는 사이 무장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죽이고 도망갔어요."


내가 괜히 아빠 얘기를 한 것 같아 미안해 지려는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우리 둘이 잘 살면 되는 것 아니겠냐며.




점심에는 주로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서 호퍼를 먹었다. 슈퍼 일 보랴 요리하랴 정신이 없는 곳이었지만, 한참 걸려 나오는 호퍼는 나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맛있었다. 여기에 계란을 얹은 에그 호퍼를 시키면,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계란을 풀어 반만 익혀줬는데 그러면 호퍼가 촉촉해져서 식감도 더 좋고 배를 더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다.


스리랑카에서만 본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음식을 시키면 최대한 많이 갖다 주고 먹은 만큼만 계산을 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진열대에 있는 튀김을 손가락을 가리키면 튀김 쟁반을 통째로 줬다. 한 개만 먹을 것이라며 그걸 집어 들어도 내가 식당을 떠날 때까지 그 쟁반을 치우지 않았다. 그리고 계산을 할 때 먹은 만큼의 개수를 말하면 그만큼의 값만 받았다. 호퍼는 맛있기도 했지만, 값도 싸서 아무리 먹어도 한국 돈으로 천 원을 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몇 개를 먹었는지 헷갈릴 때는 그 숫자에 한 두 개를 더 해서 말하곤 했다. 그러면 주인은 다른 말없이 그 값을 계산해줬다.


저녁은 내가 묵고 있는 카반에서 해결했다. 정글에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은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카반'(cabane)이라는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을 때, 마흔 살이 좀 안되어 보이는 주인 남자는 열심히 번 돈으로 이제 막 완공했다며 이런저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 2층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방을 보고는 그가 충분히 자랑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첫 손님이라 잃기 싫다며 방 값을 깎아 주겠다고 하는 그에게 마지못해 묵는 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곳이 점점 더 좋아졌다. 그렇게 열흘을 지냈다.


방안에는 모기장이 쳐진 침대 말고도 나무 책상이 있어, 하루 종일 그곳에 앉아 전 날 사온 비스킷과 바나나만 먹으며 노트북으로 밀린 일기를 쓰는 날들도 있었다. 내가 방에서 안 나오고 인기척도 내지 않으니 처음에는 주인 남자가 문을 두들겨, 혹시 몸이 안 좋으냐며 안부를 확인했다. 

아래층 마당에는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지만, 그곳에 묵는 동안 손님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장담하 건데, 그의 아내의 요리 솜씨는 칭찬할 만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싸구려 식당이나 전전하면서 스리랑카 음식은 카레라이스와 튀김, 호퍼가 전부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음식이 맛있다고 할 때마다 주인 남자는 아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가 하는 자랑에서는 늘 행복과 자부심이 느껴져 듣기 좋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열 살인 첫째 아들은 마당에서 저녁때 티브이를 함께 볼 때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바디 랭귀지를 섞어가며 내게 연속극 내용을 설명해주려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언어를 알아듣는다 해도 별로 재미없었을 것 같은 스토리였지만, 그 아이 때문에 늘 끝까지 보곤 했다. 티브이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은 늘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왜 그렇게 담배가 번하게 등장하는지는 모르겠다. 다섯 살인 둘째 아들은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아 떼도 쓰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둘째 자랑도 하고 싶은 주인은 몇 번이나 노래를 시켰고, 아이가 노래를 할 때 가족들이 다 같이 웃으며 박수를 치는 그 순간엔 나까지 행복해졌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골(Galle)이라는 마을에 갔다가 우연히 영국과 스리랑카의 크리켓 경기를 볼 기회가 생겼다. 스리랑카 깃발을 든 현지인들을 따라 성곽 위로 올라가니 길 건너편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비싼 관람 티켓을 사지 않아도 이런 경기를 볼 수 있다니, 내가 크리켓 팬이었다면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샘이었다. 인도에서부터 크리켓에 열광하는 현지인들을 여러 번 보아왔던지라, 이번 기회에 눈치로라도 크리켓에 대해 좀 배워볼 수 있을까 싶어 그다음 날, 다음다음날에도 그곳에 찾아갔지만 결국 헛고생이었다. 앞으로 여행을 이어가며, 서핑과 크리켓처럼 몰라서 즐기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히까두와를 떠나기 전 날, 골에서 크리켓 경기를 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주인 남자 옆에는 처음으로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있었다.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고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한 20대 남자였다. 주인은 자신의 오랜 친구라며 그를 소개했다. 이름은 쁘리안따. 의사였던 스리랑카 아빠와 독일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히까두와에 엄마가 집을 구입해서 1년에 한 번 이상은 이곳에 온다며, 이번에는 엄마와 함께 할머니를 보러 왔단다. 


쁘리안따는 친구들보다 어두운 피부색과 곱슬머리 때문에 독일에서 어릴 적부터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했다. 혼혈은 아니지만 나 또한 어릴 적부터 까만 피부와 곱슬머리로 자주 놀림을 받아봐서 큰 공감을 하며 대홧거리가 많아졌다. 잠시 후, 엄마가 저녁을 해 놓고 기다린다며 떠나려는 그는, 밤에 해변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함께 가자며 제안해 왔다. 나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잘됐다고 생각하며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히까두와에 온 지 처음으로 밤에 바다로 향했다. 그동안 봐왔던 고요한 해변은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화려한 파티장으로 변해 있었다. 디제이가 만들어내는 음악, 술, 바다, 번쩍 거리는 차를 몰고 온 현지인들. 밤이 늦어질수록 음악소리가 높아졌다. 말로만 듣던 해변 파티구나, 이번엔 나도 즐길 수 있었다. 첫 해변 파티의 경험이 스리랑카에서 라는 사실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여행이 즐거운 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며 쁘리안따에게 여행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놓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음악과 불 빛이 한 번에 꺼지며 파티가 순식간에 멈췄다.

정전이라고 했다.


카반으로 돌아가 주인 남자에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파티 이야기를 하니, 그는 마치 비밀작전이라도 지시하듯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내 몰래 숨겨둔 술이 있는데, 날 따라와요"


앞 장 선 그의 발걸음은 어찌 잔뜩 신이 나 보였다.

숙소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가니 그가 창고로 쓰는 듯한 작은 또 다른 오두막이 하나 나왔다. 자물쇠로 잠가진 문을 열고 그가 안에서 가져온 것은 코코넛으로 만든 스리랑카의 술, 아락이었다.

 

술을 잘 못 마신다는 내게 그는 콜라를 잔뜩 섞어 주며 물었다.


“낭기라고 불러도 되지요?”


스리랑카에서 남자가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었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인 니말이라고 그를 불렀다. 그날 밤 니말은 ‘낭기’를 오십 번은 더 넘게 불렀던 것 같다. 평소에 나를 좀 어려워하는 듯 보였던 그였는데, 나를 낭기라고 부를 때 마다 그의 말투는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바뀌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며 한 잔, 두 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더 넓게 번져갔다.


니말은 젊을 때 주로 이 동네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여행자들의 구미에 맞춰 마약을 구해다 팔기도 했단다. 그렇게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해서 한 푼 두 푼 모았단다. 바다에서 200-300 미터 거리의 마을까지 쓰나미가 몰아쳤을 때, 그 보다 더 멀리 살아 다행히 피해가 없었기에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서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고 했다. 지금은 요리 잘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두 아들이 있어 더 행복하다던 그에게는, 딱 하나, <자유>가 없다고 했다.


‘나도 당신처럼 여행을 하고 싶죠. 다른 여행자들처럼 방콕에도 가보고 싶어요. 그러다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져보는 상상을 왜 안 해봤겠어요. 그런데 어떡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데.’


쁘리안따는 독립이 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대학생이라 경제적 능력이 없어 우선은 친구 집에서 함께 살며 밴드 싱어로 활동해서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했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유와 독립. 이 둘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내게 없는 것, 내가 갈망하는 것은 무얼까.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여행이라는 오랜 꿈을 실현 중이던 그때의 내가, 내 삶이, 더 할 나위 없이 좋기만 했다.





스리랑카를 떠나고 며칠 뒤 나는 호주 다윈에 도착했다. 운이 좋으면 은하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밤에 바닷가에 나가 새카만 수평선 쪽을 바라보곤 했다.


다윈에 온 지 사흘 째 되는 날 쁘리안따로부터 뜻밖의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과 함께 나를 놀라게 한 건, 니말의 자살소식이었다.


쁘리안따가 니말의 아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니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약을 하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아내, 두 아들, 이제 막 문을 연 게스트하우스가 있었고, 그의 아내는 셋 째를 임신 중이었다.


며칠 동안은 바다를 볼 때마다 니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내 기억 속에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지만,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가족을 두고 여행도 갈 수 없다던 그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것이, 며칠 전 나를 낭기라 부르던 그가 나와 같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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